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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52강-2 (2014. 6. 2.)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十七
初發心功德品(초발심공덕품) 第十七.
七. 法慧菩薩의 重頌
32. 說法智慧
33. 功德無量
34. 譬喩
所有法藏을 悉耽味이라. 모두 탐미한다. ‘맛본다.’ 이것이지요.
거기 아주 탐닉해서, 빠져서 맛을 본다. 다른 법장을 일일이 다 할 것은 없더라도 화엄경에 빠져도 됩니다.
見佛聞法勤修行(견불문법근수행)을,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을 들으며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을, 그 수행ㆍ수행하는데. 여기에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나와 있잖아요. 수행이 구체적으로 뭡니까? 화엄경공부하고 있는 이 사실이 수행입니다. 見佛聞法勤修行. 했잖아요. 이 화엄경 안에서 부처님을 발견하고, 화엄경 안에서 진리를 깨닫고, 화엄경 안에서 부처님법문 듣고, 이것이 최상의 수행입니다.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은, 如飮甘露心歡喜(여음감로심환희)로다.
마치 가뭄에 목이 타는데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이 마음이 아주 환희에 넘친다. “마음이 환희에 넘친다.” 이랬습니다. 아! 좋은 구절이지요.
여기 初發心功德品 게송 부분의 내용들이 아주 참 좋습니다.
已獲如來勝三昧(이획여래승삼매)하야,
그러다 보면 여래의 수승한 삼매를 이미 얻어요. 여래의 수승한 삼매를 얻어서 善入諸法智增長(선입제법지증장)하며,
널리 諸法에 들어서, 諸法이 뭡니까? 모든 존재의 이치입니다.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이치. 거기에 들어간다고 하는 말은 하나ㆍ하나 거기서 눈을 뜨는 것이지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야~ 바로 이거구나!’ 풀 한포기 성장하는데 서도 우리가 눈을 뜰 수가 있고,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하나에서 거기에서 또 어떤 눈을 뜰 수가 있고요.
諸法에 잘 들어가서 지혜가 增長하며,
信心不動如須彌(신심부동여수미)하야,
저~ 앞에서 현수 품에서 우리가 봤지요? 信爲道元功德母 이것 한 구절 못 외우면 그 사람 화엄경 봤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信爲道元功德母 長養一切諸善法. 하~~ 유명한 구절 아닙니까?
그 신심이 不動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수미산과 같아요. 누가 수미산을 움직일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善作群生功德藏(선작군생공덕장)이로다.
群生. 모든 중생들의 공덕의 창고를 잘 만들도다. = 善作. 신심이 출중하면 그 신심이 뛰어난 사람을 선두로 해서 거기에 따르는 많은 신도님들. 많은 추종자들의 공덕의 창고가 됩니다. 또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스님들은 모두가 사찰에서 크든 작든 간에 그 나름대로 사람을 상대하고, 신도님들을 상대하고, 또 신도님 덕택에 살아가고요. 그러니까 그 은혜를 뭘 로 갚아요? 부처님 법을 잘 전하는 것으로 갚는 겁니다.
그러면 정법으로 제대로 공부를 해서 진정 가치 있는 공덕의 창고가 돼야 됩니다. 중생들의 공덕의 창고가 돼야 돼요. 그만치 확고부동한 자기 소신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화엄경공부 잘 해서 화엄경에 눈을 뜨면, 그런 것은 염려할 필요가 없지요.
慈心廣大遍衆生(자심광대변중생)하야,
자비한 마음이 廣大해서 중생에게 가득해요. 중생에게 두루ㆍ두루 다 돌아가서 悉願疾成一切智(실원질성일체지)호대,
다 一切智, 모든 것을 아는 지혜. 공한 것도 알고, 이렇게 눈앞에 펼쳐져있는 현상도 알아요. 이렇게 펼쳐져있지만 이 모두가 다 텅 비어서 없다고 하는 것. 텅 비어서 없다고 하는 이 사실까지도 다 아는 그것이 一切智지요. “平等智ㆍ差別智” 이런 표현을 하는데요. 그런 것을 빨리 이루기를 원해요.
而恒無着無依處(이항무착무의처)하야,
항상 집착도 없고 의지하는 곳도 없어서, 집착이 없는 것은 짐작하는데,
의지함이 없다는 것은 내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어디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집착의 다른 표현이지요. 無依라고하는 것, 의지함이 없다하는 것도 표현이 좀 다르지, 着無하고 비슷한 뜻입니다.
離諸煩惱得自在(이제번뇌득자재)로다.
모든 번뇌를 떠나서 자유자재 함을 얻도다. 그렇습니다. 무집착이 되면 자유자재하지요. 우리가 어디에 매달리고 의지하고 남의 눈치보고, 아~ 이것, 이것저것 관계생각하고 그러다 보니까 꼭~ 묶여버리지요. 부자유하지요.
자유자재 하지를 못합니다.
哀愍衆生廣大智(애민중생광대지)로,
중생을 哀愍히 여기는 廣大한 지혜로써
普攝一切同於己(보섭일체동어기)하야,
일체 중생을 널리 다 섭수하는데, 자기하고 똑 같이 생각해요. 자기하고 똑 같이 생각한다. 이 말입니다. 同於己 = 자기와 같게 여긴다. 본래 원리가
天地는 與我同根. 그랬습니다. 하늘과 땅은 나와 한 뿌리다.
萬物은 與我一體다. 그랬습니다.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다. 그것이 불교적 안목에서 본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중생을 생각하기를 나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처럼 생각하는 것이지요.
知空無相無眞實(지공무상무진실)호대,
空과 無相과 無眞實. 이것이 불교를 이해하는 세속적인 우리 상식에서, 보다 더 다른 차원으로 우리가 불교를 어떤 견해를 갖고, 소견을 갖는 것의 첫 단계가 空ㆍ無相ㆍ無我. 모든 것이 공하다. 형상이 없다. 또 무상하다. 무진실하다. 실체가 없다. 이 말입니다. 늘 변하니까요. 無眞實이라는 말은 無相. 무상하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而行其心不懈退(이행기심불해퇴)로다.
그 마음을 행해서 懈退하지 않는 도다.
33. 功德無量
菩薩發心功德量은 億劫稱揚不可盡이니
以出一切諸如來와 獨覺聲聞安樂故로다
功德無量. 발심이 참으로 “즐겁다.” 하는 뜻입니다
菩薩發心功德量(보살발심공덕량)은,
보살이 초발심한 그 공덕의 양은
億劫稱揚不可盡(억겁칭양불가진)이니,
우리가 억 겁 동안 이야기해도 다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진정으로 보살이 발심한 그런 사람의 공덕은 아무리 이야기하고 이야기해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以出一切諸如來(이출일체제여래)와,
그 발심은 어떤 공능이 있어서 그러냐? 일체 모든 여래를 거기서 출현해내요. 여래가 발심에서 나와요. 또 獨覺聲聞安樂故(독각성문안락)로다.
독각도 성문도 모두 발심에서 나와요.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안락도 발심으로부터 나와요. 出자는 끝에까지 다 먹힙니다. 일체 여래도 출현시키고,
독각도 연각도 그리고 나의 안락도 출현하는 까닭이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대로 발심하면 발심하는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니까요.
제가 비유를 자주 들지요? 예를 들어서 서울 간다고 부산서 KTX 딱 그냥 올라타기만 하면, 그 때는 자든, 책을 보든지 누구하고 대화를 하든지 그 속에 다 포함되어있습니다. 자도 서울에 도착하는 겁니다. 발심만 제대로 하면 그런 모든 공덕이 그 속에 다 포함됩니다. 그래서 功德무량이다. 제목이 그러네요.
우리가 부처님께 귀의하고 출가해서 이렇게 절 집안에 딱 들어오니까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듯이 전부 내 것이 된 겁니다. 예를 들어서 불교에 귀의하지 못하고 발심출가를 못했다면, 절에 와도 입장료 내야 되고, 와도 남의 집 같고, 법당에 들어가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그런데 예를 들어서, 제가 범어사에 살아도 통도사가도 내 집ㆍ불국사가도 내 집ㆍ해인사가도 내 집. 한 번도 가본적이 없는 사찰인데도 가도 역시 내 집같이 생각이 드는 겁니다. 시방세계에 있는 모든 불교적인 세계는 그냥 한꺼번에 다 딸려 들어옵니다.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듯이 다 딸려 들어옵니다.
외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에 가면 상업적인 분위기가 너무 농후해서 스님들에게도 표를 팔고, 입장료를 받거든요. 그런데 제가 옛날에 처음에 일본 갔을 때, 우리 방장스님한테, “내가 한국의 승려인데, 여기 참배하러 왔습니다.” 하는 걸 일본어로 적어 주십시오. 해서 그것을 겨우겨우 외웠어요. 외워서 표 파는데 가서 “내가 한국의 승려인데, 여기 참배하러 왔습니다.” 아~ 그럼, 무사통과입니다. 그런데 승복입고 가도 그 말을 할 줄 모르면 안 됩니다. 표를 사야 됩니다. 그러니까 일본을 가든ㆍ중국을 가든ㆍ어디를 가든...
중국에 가서 자는 방법이 또 있습니다. 아무리 승복입어도 소용없어요.
거기는 가서 딱 한 마디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여기 명패를 걸러왔습니다.” 그래야 됩니다. 대중들이 열 명 있으면, 열 명 명패가 걸려서 식사를 열 명에 맞춰서 하거든요. 그렇듯이 “괘를 건다.” 해요. 괘 걸러 와도 “내가 여기 명패를 걸러왔습니다.” 그러면 무조건 밥 주고 재워주고 다 그래요. 그런데 그 말을 할 줄 모르면 안 되는 겁니다. 그것도 중국스님들 한테 배워야 됩니다.
아무튼 우리가 부처님한테 귀의하면 전 세계 모든 불교는 전부 내 것이 돼 버리는 겁니다. 어느 나라 가서 부처님을 봐도 내 부처님 같고, 아무 거리낄 것이 없잖아요. 다 딸려온다니까요. 여기에서 초발심하면 모든 부처님도 거기에서 나오고, 독각도 성문도 나의 신심과 기쁨도 안락도 전부 거기서 나옵니다. 옷도 밥도 다 거기서 나옵니다. 의식주도 다 거기서 나온다고요.
불교에 한 번 딱 귀의하면 그냥 옷도 밥도 다 나오는데 야~ 이것 신기하잖아요. 의식주는 그냥 걱정 안 해도 되는 겁니다. 한 예로써 비근한 예를 들어서 말씀 드린 것입니다.
34. 譬喩
十方國土諸衆生에 皆悉施安無量劫하고
勸持五戒及十善과 四禪四等諸定處하며
復於多劫施安樂하고 令斷諸惑成羅漢하면
彼諸福聚雖無量이나 不與發心功德比로다
又敎億衆成緣覺하야 獲無諍行微妙道라도
以彼而校菩提心컨댄 算數譬喩無能及이로다
一念能過塵數刹하야 如是經於無量劫이라도
此諸刹數尙可量이어니와 發心功德不可知로다
過去未來及現在의 所有劫數無邊量이나
此諸劫數猶可知어니와 發心功德無能測이니
以菩提心遍十方하야 所有分別靡不知하며
一念三世悉明達하야 利益無量衆生故로다
十方世界諸衆生의 欲解方便意所行과
及以虛空際可測이어니와 發心功德難知量이니
菩薩志願等十方하며 慈心普洽諸群生하야
悉使修成佛功德일새 是故其力無邊際로다
衆生欲解心所樂과 諸根方便行各別을
於一念中悉了知하야 一切智智心同等이로다
一切衆生諸惑業으로 三有相續無暫斷하니
此諸邊際尙可知어니와 發心功德難思議로다
發心能離業煩惱하야 供養一切諸如來니
業惑旣離相續斷하야 普於三世得解脫이로다
一念供養無邊佛하며 亦供無數諸衆生호대
悉以香華及妙鬘과 寶幢旛蓋上衣服과
美食珍座經行處와 ←52강-2
↓52강-3
種種宮殿悉嚴好와
毘盧遮那妙寶珠와 如意摩尼發光耀로
念念如是持供養하야 經無量劫不可說하면
其人福聚雖復多나 不及發心功德大로다
十方國土諸衆生에, 시방국토 모든 중생들에게
皆悉施安無量劫(개실시안무량겁)하고,
다 편안함을 보시해서, 그 편안함을 보시하는데 無量劫을 한다.
저 앞에 산문에서도 얘기가 있었지요? 그 다음에
勸持五戒及十善(권지오계급십선)과, 5계ㆍ10선
四禪四等諸定處(사선사등제정처)하며, 四等은 사무량심이지요.
4선정ㆍ사무량심. 이런 모든 定處 = 선정의 곳을 勸持 = 권해서 가지며,
비유지요. 비유를 드니까요.
復於多劫施安樂(부어다겁시안락)하고,
다시 多劫동안 施安樂. 안락을 보시해요. 아주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그렇게 예를 들어서 해주고, 그리고
令斷諸惑成羅漢(영단제혹성라한)하면,
모든 미혹을 다 끊게 하고 羅漢까지 되게, 아라한까지 되도록 한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에게 우리가 희사를 해서 그 사람이 편안하게 살도록 하고, 또 그 다음에 불교 수행도 잘하게 하고,
五戒ㆍ十善도 지키게 하고, 四禪ㆍ사무량심도 닦게 하고, 그렇게 해서 결국은 아라한과를 얻도록 까지 한다. 이 말입니다.
彼諸福聚雖無量(피제복취수무량)이나,
저 모든 복의 무더기가 비록 한량이 없지만, 안 그러겠습니까?
不與發心功德比(불여발심공덕비)로다.
발심한 공덕과 더불어 비교할 수 없도다. 그 말입니다.
발심한 공덕하고는 비교가 안 돼요. 아라한 천 번ㆍ만 번 돼도 아라한과
그것, 대승불교에서는 우습게 보는 겁니다. 이런 우리 차원 높은 불교를 놔두고 근래에 어디서 들어온 불교를 좋아한다고 아라한과를 해대고, 그리고 또 우리 익숙한 용어, 그 동안 1700년 동안 우리가 익혀온 용어, “아란 존자” 우리 얼마나 익숙합니까? 그런데 그것을 “아란다” 이러고 있습니다. “부처님” 하는 것, 얼마나 익숙합니까? “붓다” 이러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간다고요. 그것이 원어에 가깝다는 소리지요. 그것은 무슨 또 원어에 가까운데요? “붓다” 라고하면 석가모니부처님 알아듣는가요?
어차피 남의 나라 말이고, 어차피 그것이 어색한 말인 것은 똑 같습니다.
그럴 바에는 우리가 1700년 동안 익혀온 우리정서에 맞는 그런 우리가 이미 공부한 그런 용어를 써야 되는데, 자꾸 원어 찾아서 한다고 그렇게 생소한 곳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다시 서툴게, 친숙한 불교를 서툴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걸...
그런 것들도 우리가 눈여겨서 봐야할 그런 일입니다. 그것 따라갈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초발심 공덕하고 도저히 비교를 못한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비유,
又敎億衆成緣覺(우교억중성연각)하야,
또 가르친다. 억만 대중들을 가르쳐서 緣覺이 되게 한다.
성문ㆍ연각. 저 앞에서는 아라한이고, 여기는 그 보다 차원이 높은 것이지요. 연각을 이루어서 獲無諍行微妙道(획무쟁행미묘도)라도,
다툼이 없는 행. 금강경에 나오지요? 無諍三昧라고 하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無諍은 다툼이 없는 행의 미묘한 도를 얻게 한다. 하더라도
以彼而校菩提心(이피이교보리심)컨댄,
그것을 가지고 저 菩提心에다가 비교한다면ㆍ보리심에다 비교한다면
算數譬喩無能及(산수비유무능급)이로다.
산수 비유로도 능히 미칠 수 없더라. 그렇습니다.
이 화엄경 차원에서의 보리심. 대승불교에 있어서의 보리심은 다른 저급한 소승교에서의 어떤 경지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初發心功德品이 이렇게 장황하게 긴 것이지요.
一念能過塵數刹(일념능과진수찰)하야,
一念에 능히 塵數刹. 먼지 같이 많고 많은 숫자의 세계를 지나가서
如是經於無量劫(여시경어무량겁)이라도,
그런 세계 지나가는 것을 하루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無量劫동안 그렇게 지나간다. 하더라도 此諸刹數尙可量(차제찰수상가량)이어니와,
이 모든 세계의 숫자는 오히려 가히 헤아릴 수 있거니와,
發心功德不可知(발심공덕불가지)로다.
발심한 공덕은 가히 알 수가 없다. 말입니다.
발심공덕은 무궁무진해 도저히 뭘 로 비교해서 알 수가 없는 그런 어마어마한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도 자꾸 발심을 하려고해야 되고, 또 다른 불자들에게 우리가 가르칠 때도 발심을 강조해야 됩니다. 발심은 뭐냐?
물론 보리심이라고 말 하지만, 보리심보다 더 친절한 표현이 있습니다.
“불심” 입니다. 佛心. 저는 보리심을 佛心이라고 표현을 잘하는데,
菩提心써놓고, 佛心써놓고 가만히 보니까 佛心이 훨씬 다가서는 겁니다.
부처님마음이다. 이 겁니다. 부처님마음속에 보리심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마음을 좀 더 부연설명하면 제가 자주 표현하는데, 지혜와 자비지요. 툭~~ 터진 지혜! 그리고 만 중생을 다 감싸 안는 그런 자비!
이 두 가지가 다 포함된 것이 불심입니다. 너그럽고 배려하는 마음ㆍ수용하는 마음ㆍ용서하는 마음ㆍ청정한 마음. 이 모든 것들이 다...
그 전에 어디서 불사 좀 한다고 제가 글씨를 써 주는데, 다른 것, 작은 글씨 오래 쓰려면 힘만 들고 해서 불심이라고 글자 두 자 크게 쓰니까 쓰기도 쉽고, 늘기도 잘 늘고, 획도 적고 그리고 근사하게 표구해서 걸어놓으면 보기도 좋고 해서 불심이라는 것을 여러 수 1000장 썼습니다. 수 1000장. 그것을 쓰면서 불심의 뜻에 포함된 의미를 다 모아 봤습니다. 모아보니까 A포 용지로 한 장이 되는 겁니다. 불심ㆍ자비심ㆍ지혜 심ㆍ배려 심ㆍ용서 심ㆍ이해심ㆍ하심ㆍ無着 心 = 집착 없는 마음, 이 모든 것이 다 그 불심 속에 포함됩니다. 좋다는 것은 전부 佛心속에 다 포함됩니다. 부처님마음이니까요.
불심이라고 하면 보리심보다 가슴에 와 아주 잘 닿습니다.
티벳 불교에서는 보리심이라고 하는 말 참 잘 씁니다. 보리라고 하는 말.
달라이라마스님 법문에는 으레 “입보리행론” 에서부터 보리심을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보리심” 하면 인도 말아닙니까? 보리라는 말은 깨달음의 마음이다. 뭐 여러 가지로 부연설명 하는데, 크게 썩 다가서지를 않아요.
그래서 제가 연구하고 연구해서 ‘아 불심이 제일 좋겠구나! 보리심은 곧 불심이다.’ “불심이 깊다.” 우리가 그런 표현을 하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도 우리가 일상에서 자꾸 천착을 해야 됩니다.
아까 서문에 천착이라는 낱말 나왔지요? 穿鑿.
파는 겁니다. 계속 후벼 파는 겁니다. 한 가지 중요한 낱말이 있으면 그 낱말의 뜻이 어떻게 어떤 용도로 쓰일까? 자꾸 후벼 파요. 사전 갖다가 나열해 놓기도 하고, 그래서 내가 충분히 소화 되도록 하는 것. 그것 아주 필요합니다. 불교를 이해하고 남에게 설명하는데도 필요합니다.
過去未來及現在의, 과거ㆍ미래 그리고 현재의
所有劫數無邊量(소유겁수무변량)이나,
있는바 겁의 숫자가 한량이 없다. 그렇지요. 과거도 무한한 과거. 미래도 앞으로 무한한미래. 현재는 깜빡 후 지나간다고 하지만, 그 현재까지도 한량없는 량이다. 그러나 此諸劫數는 猶可知(차제겁수유가지)어니와,
이 모든 과거ㆍ현재ㆍ미래의 겁의 숫자는 오히려 가히 알거니와
發心功德은 無能測이니, 발심의 공덕은 측량할 길이 없더라.
以菩提心遍十方(이보리심변시방)하야, 보리심이 시방에 두루 해서
所有分別靡不知(소유분별미불지)하며,
있는바 분별을 알지 못함이 없으며, 보리심이 시방에 두루 해서 모든 시방세계의 현상을 다 환하게 안다. 이런 말입니다.
一念三世悉明達(일념삼세실명달)하야, 一念三世를 다 능히 밝게 통달해서
利益無量衆生故(이익무량중생고)로다.
무량 중생들을 이익하게 하는 연고다. 그렇습니다. 발심은 보리심을 발하는 것. 불심을 발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 되는 사람입니다. 보탬이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농담으로 그런 소리를, “저 사람 하나도 보탬도 안 돼.” 그러지요. 보탬이 되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보탬이 되는 사람. 무량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까닭이다.
十方世界諸衆生의, 시방세계 모든 중생들의
欲解方便意所行(욕해방편의소행)과,
欲解. 욕망과 이해와 그리고 거기에 따른 모든 방편과 또 뜻으로 행하는 바. 행할 것. 그리고
及以虛空際可測(급이허공제가측)이어니와,
허공의 세계까지도, (시방중생들입니다.) 그것 까지도 가히 측량하거니와,
發心功德難知量(발심공덕난지량)이니,
발심의 공덕은 헤아리기가 어렵다. 難知量이니, 발심 공덕은 알 길이 없다.
얼마인지 그 깊이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菩薩志願等十方(보살지원등시방)하며,
보살의 뜻과 원은 시방세계 그대로입니다. 온 시방이 그대로 보살의 원력입니다. 보살의 서원입니다. 아~ 참! 표현이 대단하지요. 시방세계만치 서원이 그렇게 크다. 慈心普洽諸群生(자심보흡제군생)하야,
자비한 마음으로써 모든 群生들에게 普洽 = 널리 흡족하게 한다.
悉使修成佛功德(실사수성불공덕)일새.
다 하여금 부처님의 공덕을 닦아 이루게 할 세.
是故其力無邊際(시고기력무변제)로다.
그러므로 그 힘. 발심공덕의 힘은 邊際가 없다. 끝이 없다. 가이없도다.
衆生欲解心所樂(중생욕해심소락)과,
중생의 욕망과 이해와 그리고 마음에 즐겨하는 바.
諸根方便行各別(제근방편행각별)을,
모든 根의, 6근의 방편이 행하는 것이 각각 다른 것을
於一念中悉了知(어일념중실요지)하야, 一念가운데 다 了知해서
一切智智心同等(일체지지심동등)이로다.
一切智智. 여기 智자가 두 번 나왔지요? 差別智와 平等智. 모든 것을 차별한 것을 낱낱이 아는 것. 그리고 근원적인 것. 본질적인 평등성. 그것 까지 아는 것을 또 智 그래요. 그래서 지혜 智자를 두 개를 쓰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마음에 동등함이로다.
一切衆生諸惑業으로, 모든 중생들이 모든 혹 업으로
三有相續無暫斷(삼유상속무잠단)하니,
三有 = 욕계ㆍ색계ㆍ무색계에 相續해서, 三有에 相續해서 잠깐도 끝날 날이 없으니, 此諸邊際尙可知(차제변제상가지)어니와,
그러나 이 모든, 此諸邊際. 이 모든 끝은 오히려 가히 안다 하더라도
發心功德難思議로다. 발심의 공덕은 사의하기 어렵다. 생각할 길이 없다.
끝없이ㆍ끝없이 발심 공덕에 대해서 이렇게 찬탄을 합니다. 발심의 의미를 우리가 제대로만 알다 보면 사실이 그렇고요.
한 가지 사실만 봐도 그렇잖아요.
제가 初發心功德品이야기하면서 늘 한국 불교가, 처음에 아도화상이 한국에다 불교를 전하려고 한 그 발심으로 1700년의 세월이 이렇게 흘러왔고, 우리가 그 속에서 또 이렇게 불교를 공부하게 됐으니, 한사람의 조그마한 발심이라고 할지언정 그 발심의 영향력이 그렇게 크다. 말입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이렇게 큰 겁니다. 또 거슬러 올라가면 석가모니의 발심으로 생각할 수가 있지요. 부처님의 발심을 통해서 전 세계에 불법이 이렇게 갈수록 빛을 발하게 되고, 이 모든 것이 첫 발심에 있으니, 그 발심의 공덕을 어떻게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것을 ‘여기서 아마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發心能離業煩惱하야, 발심은 능히 업의 번뇌를 떠나,
供養一切諸如來니, 일체 諸여래께 공양하나니
業惑旣離相續斷(업혹기리상속단)하야,
업과 미혹을 이미 떠나서 相續한 것이 끊어져 이젠 더 이상 업과 미혹이 없어져요. 발심 제대로 해버리면, 업과 미혹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한 번 제대로 이 화두를 들어서 ‘내가 기어이 뚫고 말겠다.’ 는 철저한 그런 마음이 딱 한 번 이렇게 생기면, 사실은 더 이상 망상이 일어날 턱이 없지요. 그것이 안 되는 것은 발심이 아직 안 됐다는 뜻입니다. 왔다ㆍ갔다, 왔다ㆍ갔다. 한 시간에도 계속 수 10번 발심이 왔다ㆍ갔다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화두가 왔다ㆍ갔다하는 것이지요.
정말 제대로 발심이 되면 그 순간 일체 세속적인 생각 딱 끊어지는 것이지요. 날 리가 없는 겁니다. 한 번 KTX 타버리면 뒤로 안 가잖아요. 앞으로만 가잖아요. 계속 앞으로만 가잖아요. 진짜 발심은 그런 겁니다. 오늘도 여기 새로 오신 스님들이 꽤 여러분 계십니다. 매번 새로 오신 스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 숫자는 별로 더 불어나지도 않아요. 그것 참 신기하지요. 그 첫 발심이 모두 어디 갔는지... 전체 숫자는 별로 안 불어나요. 그런데 매번 새로 오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있고, 두 사람도 있고, 세 사람도 있고, 네 사람도 있고 그렇다고요.
네 권중에 지금 첫 권이...
아직도 80권 중에서 한 권이 더 남았는데, 이것 다 뗐다 해봐야 4분의 1밖에 안 됐어요. 그러니까 이제 시작입니다. 출발이라고요. 그리고 “화엄경 강설” 다 받으려면 81회를 와야 되니까 아직은 지금이 시작입니다. 첫출발입니다.
一切공양 諸如來 業惑旣離相續. 상속이 끊어졌다. 끊어져야 된다.
普於三世得解脫이로다. 널리 삼세에, 과거ㆍ현재ㆍ미래에 해탈을 얻도다.
一念供養無邊佛(일념공양무변불)하며,
한 순간에 無邊한 부처님께 공양 올려요.
亦供無數諸衆生(역공무수제중생)호대,
또한 供無數 모든 중생들께도 공양 올려요. 부처님께만 공양 올리면 되나요? 중생공양이 諸佛공양이고, 諸佛공양이 중생공양이라는데... 이것 보세요. 딱~ 이렇게 나와 있잖아요. 一念에 無邊부처님께 그리고 無數 모든 중생들께 다 같이 공양 올린다. 그리고
悉以香華及妙鬘(실이향화급묘만)과,
모두가 향과 꽃과 아름다운 꽃다발과 그리고
寶幢旛蓋上衣服(보당번개상의복)과,
보배 깃발과 당기ㆍ번기ㆍ일산ㆍ上衣服, 아주 고급명품 옷으로 공양 올린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美食珍座經行處(미식진좌경행처)와,
좋은 음식하고, 珍座. 이것은 앉을 법상이 됐든지ㆍ방석이 됐든지ㆍ 의자가 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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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초발심, 발보리심, 이미 공부가 끝나는 순간... _()()()_
離諸煩惱得自在~~
無執着이 되면 自由自在하다..
空과 無相과 無眞實...대원성 님!! 수고 하셨습니다.._()()()_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_()()()_
天地는 與我同根. 萬物은 與我一體...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發心功德難思議...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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勤修行.
而恒無着無依處(이항무착무의처)하야,
하늘과 땅은 나와 한 뿌리고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다....
불심을 발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이다.
發心功德難知量(발심공덕난지량)이니,
差別智와 平等智..
發心能離業煩惱하야, 발심은 능히 업의 번뇌를 떠나, 발심 제대로 해버리면, 업과 미혹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중생공양이 諸佛공양이고, 諸佛공양이 중생공양...대원성 님.^^ 수고하셨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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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심시변정각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초발심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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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이 모두가 다 텅 비어서 없다고 하는 것, 텅 비어서 없다고 하는 이 사실까지도 다 아는 것이 一切智다.
.平等智, 差別智.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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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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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地는 與我同根. 그랬습니다. 하늘과 땅은 나와 한 뿌리다.
萬物은 與我一體다. 그랬습니다.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다.
天地는 與我同根. 그랬습니다. 하늘과 땅은 나와 한 뿌리다.
萬物은 與我一體다. 그랬습니다.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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