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능의 남종선은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 도교(道敎)가 드센 하북(河北) 땅에서 조주와 임제라는 두 거장의 활동으로 번왕과 민중들을 사로잡는다. ‘차나 한잔 마시라(喫茶去)’고 교화하는 조주와 ‘차별 없는 참사람(無位眞人)’을 외치는 임제의 선풍은 마침내 하북 땅을 휩쓸게 된 것이다.
한국 조계선맥의 연원지 임제 선사의 성지를 가다
조주가 주석한 백림선사와 임제의 사리와 의발이 봉안된 임제사(臨濟寺)는 버스로 1시간 거리에 있으니 지척인 셈이다. 조주석교를 떠나 정정시(定正市) 톨게이트를 진입한 순례일행은 마음이 급하다. 서녘하늘에는 노을이 타고 있다. 호타하(滹沱河) 강변의 임제촌(臨濟村)을 방문하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임제촌을 가보아도 임제선사가 주석했던 임제원(臨濟院)은 사라지고 없을 터이다. 지금 우리 순례일행이 가고 있는 곳은 임제선사의 사리탑이 자리한 임제사다.
예전에는 정정시 시가지 외각으로 호타하 지류가 흘렀지만 지금은 물길이 사라지고 없다. 토성과 성문만 예전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정정시는 고도답게 여기저기 우뚝 솟은 탑들이 허공을 찌르고 있다. 임제선사의 기상이 느껴진다. <임제록>은 선사의 행장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선사의 휘는 의현(義玄). 속성은 형(刑) 씨로 조주(曹州) 남화(南華, 산동성 연주부 단현 이호성 부근)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개상과 자질이 특이했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이후 교종의 전통에 따라 경과 율을 배웠다. 그러나 선사는 ‘이것은 세상의 일시적인 고통을 구제하는 약방문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의 위대한 정신을 전한 종지(宗旨)는 아니다.’라고 말하며 선문에 들어 선지식을 찾아 나섰다. 처음에는 황벽선사를 만나 참선하고 다음에는 대우선사(大愚禪師)를 친견했다. 황벽선사에게 인가를 받고는 바로 하북 진주성 동남쪽 호타하 부근에 있는 작은 절에 머물렀다. 작은 절의 이름은 강가에 임한 절이라 해서 임제원이라고 불렀다.
그곳에는 보화(普化)스님이 먼저 와 자재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으나 선사의 교화가 왕성해지자 전신(全身) 해탈하여 가버렸다. 이것은 소석가(小釋迦) 앙산선사(仰山禪師)의 예언과 똑같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임제선사가 천화(遷化)하는 장면은 이렇다.
<선사가 천화할 때 자리에 바르게 앉아 말했다.
“내가 떠난 후에 나의 정법안장을 멸각(滅却)해버리면 안 된다.”
삼성(三聖)이 나서서 말했다.
“어찌 감히 스님의 정법안장을 멸각하겠습니까.”
“뒷날 사람들이 그대에게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그러자 삼성이 선사의 가풍대로 ‘할’을 했고, 선사는 그를 꾸짖었다.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먼 당나귀에게 멸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말씀을 마친 선사는 곧 단정히 앉은 채 열반했다. 당나라 함통(咸通) 7년(867) 4월10일이었다. 선사의 시호는 혜조(惠照), 탑호는 징령(澄靈)이라고 했다.
중국 선종의 5가 7종 가운데 우리나라에 전해져 법맥을 이어온 것은 임제종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대표종단인 조계종에 있어서 임제종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조계종 종조인 도의국사가 서당 지장에게 법을 가져와 전법의 불을 켰고, 태고 보우(太古 普愚)가 중국으로 건너가 임제선사의 18대 법손인 석옥 청공(石屋 淸珙)으로부터 법을 받아 왔던 것이다.
임제는 마조, 백장, 황벽으로 이어지는 홍주종(洪州宗) 법계(法系)의 선사이기도 하다. 마조선사가 홍주(洪州 현 남창)에서 크게 교화를 폈기 때문에 그 문하를 훗날 홍주종이라 불렀던 것이다.
황벽-대우선사의 파주방행한 지도 임제의 개안 이끌다
임제의 스승인 황벽은 백장의 법을 이었고 휘는 희운(希運), 어린 시절에 황벽산으로 출가하였고, 키는 일곱 자에다 이마 한복판에 둥근 점이 있었으며, 성격은 아주 활달하였다고 한다. 행각을 하면서 의문을 하나씩 풀곤 하였는데, 그가 거친 곳은 천태산(天台山), 상도(上都), 강서(江西) 지방 등이었다고 전해진다.
임제가 황벽과 대우를 만나면서 깨닫는 장면은 <조당집>이나 <임제록>에 나와 있다. 여기서는 편찬 시기가 더 빠른 <조당집>을 참고해 본다. 어느 날 황벽이 문하의 수행자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었다.
“내가 대적(大寂, 馬祖) 문하에서 수행할 때 함께 공부하던 도반으로 대우라는 분이 계셨다. 이 분은 일찍부터 여러 곳을 행각하여 법안(法眼)이 매우 고명하셨다. 지금은 고안현(高安縣) 산중에 계신데, 대중과 더불어 지내기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초막에 혼자 있기를 즐겨하신다. 나와 헤어질 때 그분이 간곡하게 부탁했다.
“훗날 근기가 뛰어난 수행자를 만나거든 나를 찾도록 지시해 주시오.”
그때 임제는 황벽의 설법을 듣다가 대우를 뵙고 싶은 마음을 냈다. 임제는 곧 대우가 머물고 있는 초암(草庵)으로 갔다. 초암에서 밤을 새우는 동안 임제는 대우에게 많은 얘기를 했다. 자신이 공부한 유가론(瑜伽論)과 유식(唯識)을 얘기했다.
대우는 밤새 말없이 임제의 얘기를 들어주기만 했다. 날이 밝아진 아침이 돼서야 한마디 했다.
“노승이 홀로 살고 있는 초막까지 그대가 먼 길을 온 것을 생각하여 하룻밤 묵어가게 했네. 헌데 어찌하여 그대는 내 앞에서 부끄러움도 없이 냄새나는 방귀만 뀌어댄 것인가.”
대우는 방망이를 들어 임제를 몇 차례 후려치고는 방 밖으로 쫓아내버렸다. 임제는 황벽에게 돌아와 전후 사정을 다 얘기했다. 황벽이 머리를 조아리고 합장하며 말했다.
“대우스님은 그대 만난 것을 이글거리는 불덩이같이 기뻐했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헛되이 왔다갔다만 하는가.”
임제는 느낀 것이 있어 다시 대우에게 갔다. 대뜸 대우가 물었다.
“엊그제는 부끄러움도 모르더니 어찌하여 다시 왔는가.”
임제는 다시 방망이를 맞으며 쫓겨났다. 그러나 대우가 내리치는 방망이의 뜻을 알아차린 임제는 황벽에게 돌아와 말했다.
“이번에는 헛되이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런가.”
임제가 대답했다.
“한 방망이로 부처의 경계에 들었습니다(一棒下入佛境界). 설사 백 겁 동안 뼈를 갈고, 몸을 부수도록 수미산을 머리에 이고 끝없이 돈다 하여도 깊은 은혜는 보답하기가 어렵습니다.”
“허허! 그대는 우선 쉬었다가 다시 오너라.”
임제는 열흘 가량 지나서 다시 황벽과 하직하고 대우에게 갔다. 또 다시 대우가 방망이를 들려고 하자, 임제는 방망이를 빼앗은 채 대우를 껴안고 뒹굴었다. 그러고 난 뒤 임제가 대우의 등을 두어 번 주먹으로 때리니 대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초암에 홀로 살면서 일생을 헛되이 보낼 줄 알았는데 뜻밖에 오늘 한 아들을 얻었구나!”
이후 임제는 대우가 입적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시봉하였고, 대우는 세연을 마치면서 임제에게 유언을 하였다.
“그대는 스스로 평생사(平生事)를 저버리지 않았고, 또 나의 입적을 지켜주었구나! 뒷날 세상에 나가서 마음의 법을 전하거든 무엇보다 황벽을 잊지 말라!”
참사람(무위진인) 주창한 임제사의 규모 명성 비해 왜소
깨달음을 얻은 임제는 황벽 문하에서 머문다. 황벽을 시봉하면서 하루를 만 냥을 쓰는 삶(是眞出家 日消萬兩黃金)과 같이 자유를 누린다. 황벽을 떠난 임제는 마침내 호타하 강변의 임제원에 주석하면서 상당법문을 펼치게 된다.
임제선사가 상당하여 말했다.
“여기 붉은 몸둥아리(赤肉團, 육체) 안에 한 차별 없는 참사람(無位眞人)이 있어서 항상 여러분은 눈, 코, 귀, 입 등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은 똑똑히 보고 보아라.”
한 학인이 물었다.
“어떤 것이 차별 없는 참사람입니까.”
이에 임제선사가 법상에서 내려와 학인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이르라! 이르라!”
학인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임제선사는 그를 밀쳐버린 채 말했다.
“차별 없는 참사람라니, 이 무슨 똥막대기인가.”
임제선사는 곧 방장실로 가버렸다.
임제사는 임제선사의 명성에 비해 뜻밖에 규모가 작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우리가 도착한 임제사는 원래 탑을 지키는 탑전(塔殿)이었다고 한다. 산문은 이미 닫혀 있어 옆문을 통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순례일행은 바로 임제선사의 사리 및 가사와 발우가 봉안된 탑으로 간다.
다행히 날은 아직 어둡지 않다. 탑의 본래 이름은 당임제혜조징령탑(唐臨濟惠照澄靈塔)이고, 줄여서 징령탑이라 한다. 당나라 예종 때 건립했다고 하는데, 탑은 9층이나 되고 동기와가 푸른 빛깔이므로 이 지방 사람들은 청탑(靑塔)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
순례일행은 다례를 올리기 위해 준비를 한다. 조사께 올리는 다례는 사전에 약속한 것도 아닌데 순례의 여정 가운데 가장 뜻 깊은 의식이 됐다. 맑고 향기로운 차를 올리는 동안 조사(祖師)를 부르고 조사의 법문을 듣는 의식이 된 것이다.
다례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임제록>에 보이는 차 공안(茶公案)을 떠올려본다. 다인(茶人)으로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임제선사도 차를 매개로 하여 선문답을 하였던 것이다.
임제가 양주(襄州)의 화엄선사(華嚴禪師)가 계신 곳에 도착했다. 그때 화엄선사는 주장자에 의지한 채 조는 시늉을 했다. 임제가 말했다.
“노장님, 졸아서 어떻게 합니까.”
화엄선사가 말했다.
“훌륭한 선객은 다르구나.”
이에 임제가 화엄선사의 시자에게 말했다.
“시자야, 차를 달여와 노장님께 드려라.”
화엄선사가 유나를 불러 말했다.
“제삼위(第三位)에 이 스님을 모시게.”
임제의 ‘차 한 잔 올려라’는 말에 화엄선사는 세 번째 윗자리인 후당(後堂)의 수좌 자리를 내주라고 한다. ‘차 한 잔’이라는 말이 떨어진 자리에서 서로의 마음이 통했기 때문이다. 임제록>은 차 공안을 하나 더 기록하고 있다.
임제가 삼봉(三峰) 평화상(平和尙)이 계신 곳에 도착했다. 평화상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황벽선사 회하(會下)에서 왔습니다.”
“황벽선사는 어떤 말씀으로 가르침을 내리시는가.”
“황금소(金牛, 황벽의 가풍)가 지난밤에 용광로 불 속으로 들어간 뒤, 지금까지 자취가 보이지 않습니다.”
“맑은 가을바람에 옥피리 울리는 소리를 누가 들을 수 있을까.”
임제가 또 말했다.
“바로 만 겹의 관문을 뚫고 지나가 버려 맑은 하늘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그대의 한 가닥 물음, 대단히 높구나.”
“용이 황금빛 봉황의 새끼를 낳으니 푸른 유리 빛 허공을 뚫고 날아갑니다.”
평화상이 말했다.
“자, 앉아서 차나 한 잔 드시오.”
누군가 선(禪)의 달인은 모두 시인이라고 했다. 평화상이나 임제 모두 자신의 경계를 시적으로 멋들어지게 드러내더니 마지막에는 평상의 마음으로 차 한 잔 마시자고 한다. 차 한 잔으로 선정에 들어 본래면목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 같다.
대웅전으로 들어가 참배하고 나오니 어느새 전각에는 불이 들어와 있다. 조사전 같은 법유당(法乳堂)을 지나칠 수 없어 임제사 스님에게 부탁하여 자물쇠를 열고 입실한다. 가운데가 명나라 때 나무로 조성한 임제상이고, 좌우로 달마상, 혜능상이 봉안돼 있다.
임제선사의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라는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사자후가 들리는 듯하다.
“그대들이 참다운 견해를 얻고자 한다면 오직 단 한 가지 세상의 속임수에 걸리는 미혹함을 갖지 말아야 한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마다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권속을 만나면 친척권속을 죽여만 비로소 해탈하여 어떠한 경계에서도 투탈자재(透脫自在)하여 얽매이지 않고 인혹(人惑)과 물혹(物惑)을 꿰뚫어서 자유자재하게 된다.”
“산승이 종일토록 그대들의 깨우침을 돕고자 설파해주지만 그대들은 진정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대들은 천 번 만 번 발바닥으로 보물을 밟고 다니지만 알지 못한다. 그것은 한 가닥 형체도 없이 분명히 자기 자신을 비추건만 학인은 믿음이 철저하지 못하여 여러 가지 언구와 형상에 집착하여 그릇된 알음알이를 내고 있다. 나이가 오십이 되도록 오직 옆길을 가면서 죽은 송장을 메고, 불법이니 망상이니 깨달음이니 조사선이니 하는 짐을 지고서 천하를 헤매고 다닌다. 염라대왕이 반드시 짚신 값을 청구할 날이 있을 것이다.”
부처를 죽이라는 말은 부처를 극복하라는 말일 것이다. 조사를 죽이라는 말도 조사를 극복하라는 말일 것이다. 부처와 조사의 빛나는 가르침도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일 뿐인데도 거기에 묶이어 인간성이 함몰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길이 아닐 터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의 길이고 자유의 길인가. 임제선사는 ‘자신 밖에서 구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삼계는 위기에 싸여 평안치 못함이 마치 불난 집과 같아서 오래 머물러 집착할 바가 못 된다. 무상한 죽음의 손길은 순간순간마다 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거두어 간다. 그대들이 부처나 조사와 다르지 않고자 하거든 오직 밖에서 구하지 말라. 그대 마음 한 생각 위에 빛나는 청정한 광명, 이것이 그대 자신의 법신불이요, 이것이 그대 자신의 보신불이며, 그대 마음 한 생각 위에 일찍이 그침이 없는 광명, 이것이 그대 자신 속의 화신불이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는 곳마다 진리의 땅이 되리라
법유당을 나와 예정에 없었지만 객당에서 본권(本權) 주지스님과 차 마시는 시간을 갖는다. 자유롭게 묻고 답하는데 나는 임제선사의 가풍을 물었다. 그러자 본권스님은 두 가지로 요약해서 말했다.
“임제선사의 가풍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법문이 쉽습니다. 법을 따로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일상에서 법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둘째 임제선사는 누구에게나 가차 없이 할을 하여 깨우침을 주었습니다. 덕산의 방과 비교가 되었습니다.”
“무위진인에서 진인이란 무엇입니까.”
“진인이란 도가(道家)에서 나온 말입니다. 무위자연으로 사는 사람이 진인입니다.”
양자강 이북의 하북이 도교가 풍미했던 땅이라 하니 임제 역시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임제의 발언은 혁명적이다. 충성과 위계를 중시하는 신분사회에서 차별 없는 무위(無位)를 주장했으니 그렇다. 도교의 무위(無爲, 함이 없음)를 무위(無位, 차별 없음)로 바꾼 것이다. 또한 둔세적인 도교의 진인(眞人, 무위자연인)을 현세적인 불교로 끌어와 ‘하는 일마다 걸림 없는 자유인’으로 깊이를 더한 것 같으니 말이다.
임제사를 떠나면서 서옹선사께서 생전에 임제선사의 법어라며 내게 써주신 글을 문득 떠올려본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는 곳마다 진리의 땅이 되리라(隨處作主 入處皆眞).’
임제선사는 단언한다. 부처와 같이 이상적인 인간의 경지에 이른다면 과거에 지어온 나쁜 습기(習氣)와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업이 있더라도 삶은 자연히 해탈의 큰 바다로 변한다고.
임제선사의 선풍을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기강을 세우기는 준엄하고도 빨랐고, 가르침은 그윽하고도 깊었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대요스님께서 게송 한수를 적어 내게 조용히 건넨다.
한 자 마른 뼈다귀 속에
사활의 천검을 감추고
육창의 영욕을 부셔 버린 채
지팡이 끌고 흰 구름 속으로 가네.
一尺枯骨裏 死活千劍藏
六窓榮辱碎 曳杖白雲行
육창(六根을 말함)으로 인한 번뇌 망상을 참선의 지팡이로 반조하여 임제선사가 외친 무위진인이 되겠다는 게송이 아닐 것인가. 발심하여 마음이 뜨거워진 순례일행 모두의 맹세 같기도 하다. 징령탑 너머로 일원상(一圓相)처럼 둥그런 달이 뜨고 있다.
나에게는 마음 달(心月)이자 마음부처(心佛)이다. 순례를 함께한 스님과 재가불자의 육창(六窓)마다 홀연히 마음부처의 달빛이 환해지리라.<끝>
茶提 정찬주(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