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의 주인들
(에세이스트 36호, 2011년 3, 4월호) 신 종 찬
오늘은 우수(雨水)다. 봄비 대신 따스한 햇살이 쏟아진다. 아파트 벽에 부딪친 햇빛 알갱이들. 창 너머 텃밭을 바라본다. 유난히 춥던 올겨울. 켜켜이 쌓여 있었던 눈이 어느새 온데간데없다. 눈 녹은 땅은 처녀지이다. 발자국 하나 없어서이다. 새 땅을 밟으며 부지런히 거름을 깔던 농부는 허리를 펴고 짚으로 감싼 감나무 가지를 만져본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가지를 확인하고 다시 거름을 깐다. 죽은 가지는 휘어질 수 없고 부러질 것이다. 휘어질 수 있다는 것은 ‘살아 있음’의 증거이고 여유이다. 나는 오늘도 이 공터 덕분에 자연을 즐기며 삶의 여유 한 조각을 맛본다.
내 진료실 창 너머 있는 이곳을 사람들은 ‘상가 앞 공터’라고 부른다. 애초 아파트단지설계에 의하면 이 공터에 상가가 들어서야 했으나 소유주가 건설회사에 땅을 팔지 않아 소위 ‘알 박기’가 된 셈이다. 주변시세보다 월등한 가격을 건설회사가 제시했는데도 땅 주인이 지나친 욕심을 부리니 매수를 포기하여 20년 이상 공터로 남아있다. 내 진료실이 있는 병원상가, 유치원, 독서실이 제 위치에 서지 못하였고 도로도 다니기 불편하게 만들어지니 땅 임자에 대한 원성이 높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공터가 참으로 소중하다. 사방이 시멘트벽으로 둘러싸인 아파트단지 내에서 이 채마밭 300여 평이 있으니 자연의 변화를 늘 감상할 수 있어서이다. 때맞추어 씨 뿌리고 거름 주며 김매고 가꾸어 수확하는 알뜰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땀 흘려 일하는 가치 또한 느낄 수 있다. “세상에 온전히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계절이 시작하는 이른 봄이니 이 텃밭이 내게 주었던 사계절을 그려보자.
미나리 밭 새싹이 파들파들한 봄날이면 대파 꽃이 맨 먼저 핀다. 초록 막대 끝에 달린 작은 솜사탕 같은 꽃. 파밭에는 잉잉거리는 꿀벌들의 봄 잔치가 벌어진다. 파란 무꽃과 노란 배추꽃이 피면 나타나는 배추흰나비들이 봄꿈처럼 나타났다 사라지지며 날아다닌다.
초여름 호박꽃 필 때면 이 땅은 북적거리는 요란한 소리로 꿀 찾는 털북숭이 호박벌들 차지이다. 여름 울타리엔 절로 난 연분홍 메꽃이 울 밑에 심은 강낭콩과 어우러진다. 후텁지근한 장마 동안 참고 있던 도라지꽃들이 다섯 모로 고이 접고 있던 꽃잎을 펼치면 흰색과 보라색 손수건들이 만들어진다. 퇴근 무렵 저녁 울타리엔 흰 박꽃이 처연하게 핀다.
처서(處暑)를 지나면 우거진 고추나무엔 소복이 달린 풋고추 사이로 붉게 익은 고추가 보인다. 고추밭을 작은 울타리로 두른 들깨도 누른빛이 조금씩 들어가며 익는다. 창을 열면 들깻잎 향기가 상큼 뛰어 들어온다. 후각은 기억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했던가. 어릴 적 소 몰고 산골 밭 사이 길을 내려오며 맡았던 들깻잎 향기. 그 향기 따라 들어오는 그 때 저녁놀, 동무들의 노랫소리······· . 마른 옥수수 대궁 위를 정찰하던 된장잠자리 떼가 사라지면 서리는 이미 와 있고 가을은 간다.
눈 내린 겨울날이면 밭고랑은 순백의 천으로 지상의 허물을 덮는다. 눈 따라 내 마음도 한 해의 허물을 덮고 싶어진다. 눈 온 다음 날 창으로 비치는 은은한 반사광은 마음을 온화하고 평화롭게 한다. 이 서정적 선물은 창 너머에 넓은 공간을 갖는 사람만이 갖는 겨울철 특권이 아닐까.
이곳에 채소농사를 짓는 김 씨 아저씨의 솜씨는 일품이어서 깔끔하고 맛있는 수확물을 길가 작은 원두막에서 팔았다. 나는 종종 미나리, 애호박, 풋고추, 꽈리고추, 가지, 고구마줄기, 깻잎 등을 집에 사가지고 갔다. 아내는 그때마다 좋아 했다. 간혹 가까운 지인에게 선물하면시장에서 살 수 없는 신선한 맛이라 고맙다는 인사도 들었다.
20년 전 내가 처음 왔을 무렵 김 씨가 놀고 있는 이 땅을 밭으로 일구었다. 이 텃밭이 주는 사계의 생동감 넘치는 변화로 나는 자연을 즐기는 기쁨을 누려왔다. 앞으로도 아파트 주민이 이곳에 건물이 들어서는 것에 동의할 리 없을 것 같다.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있을 테니 김 씨에게는 정말 다행한 일이리라. 이제 그도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다. 그에게 이 땅은 육체적 건강도 지켜주고 용돈도 쏠쏠히 벌 수 있는 좋은 직장이다. 이 땅을 알뜰히 가꾸는 농부야말로 경작하는 면에서는 이 공터의 주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공터는 고층 아파트들의 밀림 속에서 숨통을 틔워주는 소종한 공간이다. 인간의 삶에서도 이런 빈 공간이 꼭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흔히 “마음을 비운다.”고 한다. 그 목적은 비움 자체가 목표일 수도 있겠지만, 살면서 놓치기 아까운 것들을 채우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이 공터는 자연으로 채워진 ‘내 마음의 여유 공간’이다.
세상만사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모순이나 역설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이라도 누리는 이가 주인인 것은 아닐까. 이 공터의 법적 소유주가 누구든 간에 나도 정서적 주인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고 싶다.
첫댓글 아마 그 공터는 땅주인이 자연의 <알박기>를 했는가 보다.. 신원장의 글은 참 감성적이다..주변공터에서 자연을 자주 접하니 부럽기만 하다..
누리는 자가 주인이라고 우겨본다!
나도 그 공터를 가 보았는데, 그 알박기는 구청에서 상을 주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공원사업을 하고 있으니가까....
그렇게도 볼 수 있지~! 공감에 감솨~!
300평이면 집짓고 텃밭 가꾸기에 딱 알맞는 넓이인데....20년 동안이나 버티는 노인이 된 그의 뜻은 무엇일까?
개발이나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우치기엔 너무 소박하긴한데...
무슨 뜻으로 그런 고집을 이어갈까?? 그게 사실은 궁금하다.
덕분에 자네는 멋진 전원을 누리지만...
과유불급이랄까! 지주는 넘 욕심내다가 손해봤지. 아파트주미의 동의가 없으면 일체 건축이 안 된다고 하는군. 시가로 50억 정도 한다니 죽고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을까? 지나치게 욕심내면 다 망하고 옆에서 보는 내나 농사짓는 김씨만 좋은 것이 아닐까?
자네말이 맞다. 우리의 삶속에서도 빈공간이 필요하다.
서양화의 매력은 색채에 있다면 동양화의 멋은 역시 여백이다.
여백을 바라볼수 있는 그대 역시 동양적이다.
자네의 멋진 웃음 속에 여유와 여백이 넘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