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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양박씨의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박영호
判書公 神道碑銘 幷序
대저 유은(幽隱)을 천양(闡楊)하는 것은 사림(士林)의 할 일이요, 효행(孝行)을 포계(褒啓)하는 것은 유사(有司)의 책임(責任)이다.
고로 백성이 공소(控訴)의 실적(實績)이 있으면 임금은 채청(採聽)의 길이 있다. 그러면서 근세이래(近世以來)로 효행(孝行)을 말하는 자는 부모생전(父母生前)에 성례(誠禮)로 섬기는 것은 거론(擧論)하지 아니하고서 혹(或)이나 단지(斷指)와 거여(居廬)같은 사실(事實)로 직효(直孝)가 된다하니 이런 것은 효(孝)의 말(末)이다.
슬프다 단지(斷指)하는 것이 진실로 난사(難事)이다 하면서 사람이 강맹(剛猛)한 자라야 능히 할것이고, 거여(居廬) 또한 난사(難事)이다 하면서 사람이 외식(外飾)을 좋아하는 자라야 행할 것이다.
고로 옛날의 효(孝)를 말하는 자는 일찍이 이같은 일을 언급(言及)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생전(生前)에 성례(誠禮)로 섬긴 것이 가위(可謂) 효(孝)라 하였다.
고로 검루(黔婁)의 상분(嘗糞)과 황향(黃香)의 선침(扇枕)과 육적(陸績)의 회귤(懷橘)은 비록 일사(一事)의 이행(易行)할 것 같으면서 실(實)은 애친(愛親)의 지성(至誠)에 이르는 고로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수교(垂敎)하여서 후세(後世)사람들의 권계(勸戒)가 되면서 그 풍성(風聲)심는 것과 세교(世敎)에 힘쓰게 하는데에 어찌 적은 도움이 된 다 할 것인가?
성주(星州)고을 오도종(五道宗)에 높다랗게 서있는 오두적각(烏頭赤脚)은 구한국(舊韓國) 예종(睿宗) 성종(成宗) 이전(以前) 성세(聖世)에 동천 박선생((東川 朴先生)님의 효행(孝行)을 포장(襃獎)한 정려각(旌閭閣)이다.(旌閭閣 建立은 仲宗 三十年/1535年)
경산(京山/星州舊號) 읍지(邑誌)를 살펴본적, 일찍 귀암(歸巖) 이선생(李先生)님이 편찬(編纂)한 바로서 특히 선생(先生)님의 효행사적(孝行事蹟)을 나타냈고, 그 후에 응와 이상서 원조(譍窩 李尙書 源祚)와 이어은 민수(李漁隱 敏樹) 그리고 송남촌 이석(宋南村 履錫)같은 선현(先賢)들이 정려각(旌閭閣)의 상량문(上樑文)과 기문(記文), 그리고 발문(跋文)을 찬술(撰述)하여서 사적(事蹟)을 천양(闡揚)하였고 근고(近故)에 이삼주 기원공(李三洲 基元公)이 또한 선생(先生)님의 묘갈명(墓碣銘)을 찬술(撰述)하였다. 이 모두 표표(表表)한 사적(史蹟)이다.
그 묘갈명(墓碣銘)을 고찰(考察)한적 선생(先生)님이 성주 오도종(星州 吾道宗)에서 출생(出生)하시니 그 선대(先代)는 함양(咸陽)에서 내거(來去)하면서 세대(世代)가 멀어지고 그 후 자손대(子孫代)에 와서 권력가(權力家)의 피화(被禍)로 인하여 예천(醴泉)과 인동(仁洞) 등지(等地)에 산거(散居)하면서 선생(先生)님의 문집(文集)과 참고문헌(參考文獻)이 모두 구실(俱失)함으로 생졸년월일(生卒年月日)이 부전(不傳)하나, 사적(仕籍)은 이조 예종 성종세대(李朝 睿宗 成宗世代) 이전(以前)으로서 관직(官職)은 예조참의(禮曹叅議)와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都摠制使 : 三軍都摠制府의 武官으로서 최고 관직, 侍中이상의 사람으로 임명함)에 겸직(兼職)되었고, 계급(階級)은 가정대부(嘉靖大夫)이다. 후에 정려각(旌閭閣)과 아울러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贈職)이 되었다.
또한 공헌대왕(恭憲大王/明宗의 諡號)의 치제문(致祭文)에 가로되, 「들으니 너는 부모(父母)가 몰세(歿世)하고 자도(子道)를 다 하였다. 조석(朝夕)으로 전례(奠禮)하면서 육년(六年)을 애호(哀號)하였다 하니 누구나 부모(父母)가 없으리요마는 너는 성효(誠孝)에 진력(盡力)하였도다. 거상(居喪)하는 사람을 감발(感發)시켜 중심(中心)을 괴로이 하였도다. 이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무덤 앞에 전물(奠物)을 올린다.」
恭憲大王(明宗大王) 致祭文曰
聞爾親歿 盡其子道
尊禮朝夕 六載哀號
誰無父母 爾盡孝誠
感發寧己 中心是勞
玆遣禮官 往尊宿草
하였으니 이것은 전후백세(前後百世)에 없어지지 아니할 말씀이다.
또 보첩(譜牒)을 고찰(考察)하니 시묘(侍墓)살이로 삼년간(三年間) 집에 한번도 오지 아니하였다(三年居廬一不度家)하니 이것은 어머님 거상시(居喪時)에 있은 사실(事實)이요, 치제문(致祭文)에 육재애호(六載哀號/六年間哀號)의 구절(句節)은 생각하건데 선생(先生)님께서 어려서 아버님을 여의고 모상(母喪)을 당하니 추복(追服)이 아니던가?
세전문헌(世傳文獻)에 의하면 선생(先生)님의 유시(幼詩)에 지성(至性)과 독행(篤行)이 있었고 천품(天稟)이 또한 그러하며 말배울때부터 언어동작(言語動作)이 부모(父母)님의 뜻을 거슬리지 아니하셨다.
차차 성장(成長)하면서 집이 빈곤(貧困)하여 식량(食糧)이 넉넉하지 못한지라 선생(先生)님께서 걱정하고 두려움을 알아 감히 자신(自身)의 안일(安逸)은 생각지 아니하고 낮에는 나무와 나물을 캐고 밤에는 신도 삼고 자리도 짜서 부모(父母)의 감지(甘旨)를 장만하면서 순(順)한 용모(容貌)와 화(和)한 안색(顔色)으로 부모(父母)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부모(父母)로 하여금 봉양(奉養)의 어려움을 알게하지 아니하였다.
밖에 나가서 자신이 받은 음식(飮食)에 맛있는 것은 반드시 가져와서 부모(父母)님께 올리니 그 사실(事實)을 아는 사람은 그 성효(誠孝)에 감동(感動)하여서 더욱 더 많이 주어 봉친(奉親)의 감지(甘旨)에 충당(充當)하게 하였다.
일찍 친환(親患)이 미음(米飮)으로 기력(氣力)을 부지(扶持)하게 하며 이같은 시탕(侍湯)이 수개월이라.
나물캐고 자리짜지 못하여 쌀을 구할길이 없는지라 밖갓문에 의지하여 발을 구르고 있을 무렵에 마침 지나가든 걸인(乞人)들이 선생(先生)님의 황황(遑遑)한 모습을 보고 그 실상을 물어보고는 구걸(求乞)한 쌀을 주는지라 당시 선생(先生)님의 연세가 십삼(十三)세라 이웃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그 성효(誠孝)가 인심(人心)을 감동(感動)되게 하는 것이 저같이 진지(眞摯)하도다. 저 걸인(乞人)이 무슨 인의(仁義)의 마음이 있어서 능히 이같이 할것인가 하였다.
또한 닭과 개를 길러서 봉친(奉親)의 숙육(宿肉)으로 사용(使用)하고 별도(別途)로 도량(滔梁)을 비치(備置)하여 특별(特別)히 쓰일 식량(食糧)으로 하였다.
일기(日氣)가 차가우면 당신의 몸으로 부모(父母)님의 이불을 따뜻하게 하고, 식사후(食事後)에 시간이 조금 지나면 반드시 구미(口味)에 맞을 음식(飮食)을 물어 올렸다.
어머니 연세(年歲)가 점점 높아지면서 병세(病勢)가 더욱 깊어져서 진기(眞氣)와 원력(元力)이 대탈(大脫)하여 위독(危篤)한 상태(狀態)이며 조석(朝夕)을 전적(全的)으로 육즙(肉汁)으로 부양(扶養)하나 산촌(山村)의 빈곤생활(貧困生活)에 계속(繼續)하기가 어려운 실정(實情)이었다.
어느날 홀연(忽然)히 생리(生鯉)와 생도(生桃)를 찾으시거늘 때마침 엄동설한(嚴冬雪寒)이라 구하지 못할것 같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소원(所願)인지라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강(江)에 나가서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엎드려 빌었다. 그리고 견빙(堅氷)을 뚫으니 큰 잉어가 뛰어 올랐다.
이것을 가지고 와서 공진(供進)하였다.
또 후원(後園)에 복숭아 나무를 안고 불어짖으며 울면서 축천(祝天)하니 때아닌 한겨울에 생도(生桃)가 성숙(成熟)하였는지라 그 복숭아를 따서 올리니 친환(親患)이 차감(差減)되었다.
이 어찌 하늘이 내려다 보는 성력(誠力)으로써 천지신명이 가져다 주는 선물이 아니던가?
향도(鄕道)의 사람들이 다 감복(感服)하여서 대효(大孝)라 칭송(稱訟)하였다.
그 후 벼슬에 올라 당산관(堂上官)에 이르렀을 때 역시 친병시탕(親病侍湯)에 골몰하던 중 조정(朝廷)으로부터 입시(入侍)하라는 명(命)이 내렸다. 황급 초조하여 조복(朝服)도 입지 않고 시탕(侍湯)하던 의관(衣冠)으로 주야(晝夜) 도행(徒行)하여 상설(霜雪)이 의관(衣冠)에 거득한 모상(貌相)으로 입궐(入闕), 어전(御前)에 이르니 왕(王)이 선생(先生)님의 초췌(焦悴)한 용모(容貌)를 보시고 그 연고를 묻거늘 선생(先生)님이 미쳐 대답하지 못할 즈음에 곁에 있던 경상(卿相)이 대신(代身) 그 실정(實情)을 아뢰니 왕(王)이 크게 칭상(稱賞)하여 가로되
「효성(孝誠)은 백행(百行)의 근원(根源)이라 공(公)은 충효(忠孝)가 겸전(兼全)한 군자(君子)로다」하셨다.
친상(親喪)을 당(當)하여서는 침식(寢食)을 전폐(全廢)하여 능(能)히 기력(氣力)을 지탱하지 못할 지경이었고, 장례후(葬禮後)에 묘소(墓所)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조석귀전(朝夕食+貴奠)을 삼년간(三年間)에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하루같이 하면서 눈물이 떨어지는 곳에 풀이 마르기 까지 하였다.
부모생전(父母生前)에 좋아하시던 음식(飮食)은 차마 먹지 못하고, 혹시나 부모(父母)님의 평일사실(平日事實)이 언급(言及)되면 문득 눈물을 흘리시며 말소리를 이루지 못하셨다.
지금도 이곳 어머니 산소가 있는 성주선남대곡동(星州船南大谷洞)을 판서공(判書公)께서 시묘(侍墓)살이를 하셨다 하여 시묘동(侍墓洞)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후 제사(祭祀) 때에는 반듯이 몸소 우물을 깨끗이 세척(洗滌)을 하고 제물(祭物)은 미리 준비(準備)하여 살아모시듯 성력(誠力)을 이루셨다.
한편 부모님과 선대(先代) 묘역(墓域)의 제초(除草)는 손수하시고 가인(家人)으로 하여금 대행(代行)하지 아니하며 가로되 「부모님 섬기는 것과 제사봉행(祭祀奉行)을 어찌 남으로 하여금 할 것인가?」하셨다.
그리고 우애(友愛)가 남달리 돈독(敦篤)하셔서 백형(伯兄) 공조판서공(工曹判書公)과 함께 집에서는 침식(寢食)을 같이하고, 외출(外出)할적 같이 동행(同行)하다가, 다 자라서 동시(同時)에 등과(登科)하여 경상지위(卿相地位)까지 표저(表著)되니 당시관료(當時官僚)들이 하남(河南)의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형제(兄弟)와 같다고 칭상(稱賞)하였다.
이것이 부모님 섬기던 효행(孝行)과 형제우애(兄弟友愛)의 대략(大略)이다.
그 사적(事蹟)으로서 추상(推想)한적 가언선행(嘉言善行)이 반드시 이것으로 그칠것이 아니면서 그 제행(制行)이 더욱 고매(高邁)하고 돈독하며 겸손함이 또한 인력(人力)으로 미칠배가 아니라. 아아 참으로 위대(偉大)하셨도다.
선생(先生)님은 함양세가(咸陽世家)이라. 성은 박씨(朴氏)이요, 휘(諱)는 구(矩)요, 동천(東川)은 자호(自號)이다.
시조(始祖) 휘(諱)는 선(善)이니 고려(高麗) 예부상서(禮部尙書)이며, 그 아래대로 휘 인정(煇 仁挺), 휘 신청(諱 信淸) 삼대(三代)가 역시 예부상서(禮部尙書)이시고, 휘 윤정(諱 允禎)은 판호부상서(判戶部上書)였다.
판이부상서(判吏部尙書)인 휘 신유(諱 臣蕤)에 이르러 호남적 이연년(湖南賊 李延年)을 토적(討賊)한 공(功)으로 응천군(凝川君)에 봉직(奉職)되어 시호(諡號)는 충질공(忠質公)이요, 아드님 휘 지빈(諱 之彬)은 위위윤(衛尉尹)으로 시호는 문원공(諡號 文元公)이요, 그 아드님 휘 장(諱 莊)은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이다.
그 아드님의 휘 충좌(諱 忠佐)는 호가 치암(號 恥菴)이니 도학(道學)과 덕행( 德行)이 사림(士林)에 추중(推重)이 되었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습봉(襲封)되었으며, 시호(諡號)로 문제공(文齊公)이라. 그 사적(事蹟)이 고려사(高麗史)에 현저(顯著)되었다.
예천 금곡서원(醴泉 金谷書院)에 봉향(奉享)되니 선생(先生)님의 고조(高祖)이시다. 증조(曾祖) 휘자 전((諱 琠)은 밀직사 지신사(密直司 知申事) 함양군(咸陽君)이시고, 조부(祖父) 휘자 문재(諱 文榟)는 지밀직부사(知密直府事)요, 선고(先考)이신 휘자 원택(諱 元擇)은 개성부윤(開城府尹)이셨다.
선생(先生)님의 묘소(墓所)는 성주 화경산(星州 華鏡山)에 안장(安葬)하니 지금 대곡동(大谷洞)이며, 정려각(旌閭閣)은 처음 묘소남방(墓所南方) 오리지점(五里地點) 백천(白川)가에 있었으나 대수(大水)로 인(因)하여 침몰(沈沒)된 것을 선생(先生)님의 십일대손(十一代孫) 성집(聖楫)이 정조십년 병오(正祖十年 丙午)에 선남 광령산(船南 廣寧山) 기슭에 이건(移建)하였다가, 또 풍우(風雨)로 퇴이(頹圯)된 것을 무인년(戊寅年)에 중건(重建)하니, 즉(卽) 지금 소재지(所在地)이다.
삼자(三子)를 출생(出生)하니 장남 충서(長男 忠恕)는 사직(司直)이요, 차남 충의(次男 忠義)는 현감(縣監)이요, 삼남 충신(三男 忠信)은 사직(司直)이다. 충서(忠恕)의 남 구수(男 九壽)는 현감(縣監)이요, 충의(忠義)의 남 영, 옥산은 문과
(男 榮, 玉山 文科)이며, 충신(忠信)의 남(男) 철산(鐵山)은 현감(縣監)이요, 종산은 사직(鍾山 司直)이다.
구수(九壽)의 아들 세걸(世杰)은 진사(進士)이며, 그 아들 곤(崑)은 문과도사(文科都事)이며, 그 아들 원서(元瑞)는 통덕랑(通德郞)이다.
영(榮)의 아들 윤수(潤壽)는 참봉(叅奉)이며, 그 아들인 흥가, 흥주. 흥주(興家 興宇, 興宙)는 진사(進士)요, 흥택(興宅)은 직장(直長)이다.
옥산(玉山)의 아들은 일현(日賢)이며, 그 아들 온종(溫宗)은 진사(進士)이다.
철산(鐵山)의 아들 경현(景賢)은 진사(進士)요. 그 아들 탕종 은종(湯宗 殷宗)은 현감(縣監)이다.
종산(鍾山)의 아들 경보(景輔)는 효행(孝行)으로 통정대부 증직(通政大夫 贈職)이며, 그 아들 순년은 별시위(舜年 別侍衛)이며, 순수는 교위(舜壽 校尉)이다.
탕종(湯宗)의 아들 홍정(鴻程)은 선무랑(宣務郞)이요, 그 아들 난방(蘭芳)은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며, 여헌 장선생((旅軒 張先生)에게 수학(受學)하여서 능히 선대(先代)의 유모(遺謨)를 계술(繼述)하였다. 여(餘)는 불록(不錄)한다.
슬프다! 지금으로부터 선생(先生)님의 세대(世代)가 오백여년(五百餘年)이 되면서 정려각(旌閭閣)의 역사(役事)와 묘도(墓道)의 석물(石物)은 이미 구비(具備)되였으나 아직 소행세절(疏行細節)을 천양(闡揚)하지 못한 것은 다만 후손(後孫)들의 깊은 한(恨)일 뿐 아니라 또한 세도(世道)의 개한(慨恨)도 되는지라 난방(蘭芳)의 후손 상곤(相坤/선생님의 十八代孫)이가 이것을 심(甚)히 송구(悚懼)스럽게 생각(生覺)하다가 제족(諸族)에게 모의(謀議)하여 신도비(神道碑)를 가림 흥효재(嘉林興孝齋)곁에 세우기로 하였다.
또 그 문중(門中) 부노(父老)의 명(命)으로써 내가 적막하게 사는 곳을 찾아와서 비명(碑銘)짓기를 책임(責任)지우거늘, 돌아보건데 나같이 모양없는 사람이 어찌 감히 이 비명(碑銘)을 감당할 것인가.
그러나 내가 선생(先生)님께 높이 경앙(景仰)한지 오랜지라 감히 불문(不文)으로 끝내 사피(辭避)하지 못할지라, 삼가 보첩(譜牒)과 사행(事行)을 근거(根據)로 하여 대략(大略) 위와 같이 서술(敍述)하고 이어 명(銘)에 가로되,
이(理)의 근본(根本)은 순선(純善)하니 이것을 잘 계승(繼承)하면 곧 천리(天理)이다. 천리(天理)가 사람에 부여(賦與)하니 오성(五性)이 나는지라 천리(天理)를 이으면 선행(善行)이 되니 이것을 가로되, 본연성(本然性)이라 한다.
사람마다 비록 고유(固有)한 것이나 능히 득전(得全)하기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오직 공(公)의 떳떳한 행실(行實)은 효제(孝悌)의 근본(根本)을 세웠고, 효제(孝悌)의 도(道)를 나게 하셨다.
부모(父母)님 섬기는데 성훈(聖訓)의 예(禮)를 사용(使用)하고 성력(誠力)을 다함에 어김이 없었다.
어름 가운데 척리(尺鯉)가 약출(躍出)하고, 눈 가운데 복숭아가 성숙(成熟)한 것은 천신(天神)이 감응(感應)한지라, 이 사실(事實)을 오래도록 전(傳)하여서 후인(後人)의 모범(模範)이 되게 하라 .
임금이 가로되,「아름답다 그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구나. 시묘(侍墓)로서 상례(喪禮)를 마치오며 육년간(六年間)에 애호(哀號)하였다 하니 전세천고(前世千古)에 국승(國乘)이나 야사(野史)에도 없는바요, 후세만대(後世萬代)에 강상(綱常)을 가히 부지(扶持)할지라.」
산(山)은 가(可)히 평지(平地)가 될지라도 이 비석(碑石)은 없어지지 못할 것이요, 비석(碑石)은 가(可)히 같이 없어진다 할지라도 이 원리(元理)는 소멸(消滅)되지 아니 할지라, 무릇 사람된 자(者)는 어찌 내가 지은 비문(碑文)을 보지 아니할까
나의 말을 가(可)히 질정(質定)함은 윗 하늘이 심히 밝혀 주리라.
壬申仲秋節에 玉山長在泳 삼가지음
永錫崔鍾祿 삼가씀
註
烏頭赤脚 : 旌閭閣을 가리킴. 烏頭라 함은 검은 기와를
가리킴이요, 赤脚은 四方 기둥에 紅色丹靑한
것을 말한 것임
睿宗 : 李朝第八代王, 在位一年(一四六九)
成宗 : 李朝第九代王, 在位 二十五年
(自一四七○年∼至一四九四年)
歸巖 李先生 : 諱 元禎, 號 歸巖, 官職 行吏曹判書
贈 領議政, 諡號 文翼, 李朝孝宗詩人
凝窩 李尙書 : 諱 源祚, 號 凝窩, 官職 行工曹判書
諡號 定憲 李朝哲宗高宗詩人 星山人
李漁隱 : 諱 敏樹, 號 漁隱, 進士 星山人
宋南村 : 諱 履錫, 號 南村, 進士 李朝正宗詩人
李三洲 : 諱 基元, 號 三洲, 光復詩人
出典 : 咸陽朴氏寧海世居略史
옮겨쓴 이 : 寧海派 33世 永鎬
2017年 4月 10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