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겨 이불을 덮고 겨울을 견딘 마늘이 어느새 불쑥 키가 자라 있다. 어제는 감자도 심고 호박도 심었다. 미니 비닐하우스 안에선 상치와 봄동이 제법 푸르다. 바야흐로 농사철이 시작되었다.
작년 봄, 도로변의 보도블럭을 새것으로 교체하길래 ‘멀쩡한 헌것’들을 얻어와 옥상에다 텃밭을 만들었다. 블록과 흙을 져다 올리는 고통은 썼지만 그 '열매’는 달았다. 여름 내내 싱싱한 풋고추와 가지와 토마토를 먹었고 가을엔 배추와 무를 수확해서 김장에도 보탰다. 도시에서, 그것도 손바닥만한 옥상 텃밭에서의 일을 ‘농사’라고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그래도 매일 흙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 어딘가. 무언가를 내 손으로 키울 수 있다는 것이 어딘가.
지금쯤이면 양지바른 산비탈이나 논두렁 밭두렁에서 쑥 냉이 원추리 달래 돌나물 씀바귀 등 봄나물이 고개를 내밀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캐서 된장과 깨소금으로 조물조물 무쳐 식탁 위에 ‘향긋한 봄내음’을 올려놓을 것이다. 농촌에선 일손도 바빠질 것이다. 논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파종하고 모판 준비도 해야 하고 과실나무도 손봐야 하고...
3월 15일부터 한미 FTA가 발효된다 한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이 땅의 모든 잎과 줄기와 뿌리들, 그리고 이 땅에서 채소와 곡식과 열매를 키워서 우리를 먹이던 수많은 사람들이 기어이 능욕을 당했다. 정부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아 몇 십조 원이라는, 수치로만 거창한, 보이지 않은 돈다발(그것이 진정 농촌과 농민을 위해 쓰여질지는 두고 봐야겠지만)을 흔들면서 농민과 농촌을 위해 쓰겠다고 ‘위로’하는 시늉까지 한다. 하지만 상처받은 자존심과 무너진 자존감은 쉽게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번에도 이 거래가 ‘국익’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땅의 농민들은 결코 그 ‘국익’에 전제되는 나라의 국민이 아니다. 그들에게 농민은 국민도 아니다. ‘국민 모두의 이익’이라고? 설마 아직도 ‘국익’이라는 말을 그렇게 알아듣는 사람이 있을까? ‘국익’이라는 말은 다수 대중의 의혹과 반감을 잠재우기 위한 ‘수면제 언어’일 뿐이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 어떤 중요한 사안이라도 위정자들이 ‘국익’을 위해서라고 말하면 이내 잠잠해지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 말에 속지 않을 것이다.
한미 FTA는 정치권력이 결국 시장권력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비록 겉으론 정부와 정부 간의 협정 같지만 그 내용은 거대한 시장권력끼리의 거래였다. 그것은 다시 말해 몇몇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서 이 땅의 민초들의 삶을 괴물 같은 거대 시장자본의 아가리 앞에 먹이로 던져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이 땅의 민초들은 그렇게 쉽게 버려져도 좋은가? 누가, 무슨 자격으로, 그들을 그렇게 하는가? 앞으로 한중 FTA까지 체결된다면 우리 농촌은 그야말로 초토화되고 말 것이다.
봄이 오고 있는데, 햇살은 점점 도타워지는데, 사람 사는 세상은 왜 이리도 스산한지 모르겠다. 고리원전 1호기에서 대정전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것은 사고 후 한 달 만에, 그것도 그 지역 시의원이 우연한 기회에 들은 한 마디가 단서가 되어 밝혀졌다. 사고 사실을 은폐한 한 관리책임자는 다시 본사 ‘위기관리실장’에 임명되었단다. 정말이지 우리 앞에 벌어지는 이 모든 것들이 마치 한편의 코미디 같다. 음모, 폐쇄, 은폐, 거짓말, 사기 등등이 그 코미디의 주요 소재이리라.
만약 고리원전에서 심각한 사고가 일어난다면 2시간이면 부산시민들이 모두 방사능에 피폭될 수 있다고 한다. 핵발전소를 끼고 사는 지역민들의 삶이 참으로 아슬아슬하다.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저 무소불위의 자본권력으로부터 그리고 무자비한 핵으로부터 이 땅의 안전과 우리네 삶을 지켜줄 수 있는 ‘전사’가 필요하다. 마침 황사바람 같은 혼미한 선거바람이 일고 있다. 혹시 위기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아직도 희망이 남아 있다고 그나마 믿고 싶은 거다.
살아오면서 숱하게 선거를 해봤지만, 생각해보니, 우리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봉사한 정치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싶다. 이 땅을 일구어 우리를 먹여주고 그리하여 우리의 몸을 보존케 해 준 고마운 사람들을 위해 애써 준 정치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싶다. 많은 정치인 이름을 떠올려 봐도 ‘개발’과 ‘성장’만을 앵무새처럼 외치던 이들 뿐이었다. 더구나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는 핵발전소가 그토록 위험하고 무서운 것이라고 국민들에게 한번이라도 알려준 정치인이 있었던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후쿠시만 사고 덕분/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핵발전소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이번 총선에서 ‘핵 없는 세상’을 외치며 두 명의 국회의원 후보가 '녹색당'에서 나왔다. 고리원전 지역인 ‘해운대/기장을’과 울진원전 지역인 ‘영양/영덕/봉화/울진’에서 나왔으니 그 의미가 더 깊다 할 것이다. 말로만 지역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권력의 주변에서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는 기존 정치인과 그들은 확연히 달라 보인다. 더구나 '영양/영덕/봉화/울진' 지역의 박혜령 후보는 우리네 농촌의 현실과 농민들의 힘듦을 지금도 직접 보고 겪는 유일한 농민후보라 한다.
몇번의 변덕스런 꽃샘바람이 불어왔지만 어김없이 봄은 오고 있다. 산하에 연둣빛이 스며들고 있다. 잎과 줄기와 뿌리마다 물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 땅에서 난 모든 것들. 그것을 먹고 우리는 우리의 몸과 정신을 만들었다. 그것을 먹고 우리의 감정, 우리의 생각, 우리의 희망과 웃음, 우리의 일상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저 녹색 생명인 잎과 줄기와 뿌리, 그것을 키워내는 '이 땅'에 빚지고 있다. 채소와 곡식과 열매, 그것을 키워내는 '이 땅의 농민들'에게 빚지고 있다. 그 빚이 너무나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