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한 물질들이 우연의 산물로 태어난 사례는 많다. 노벨과 플레밍과 퀴리부인은 어느 날 자신의 실험실에 들어서면서 이상한 물질을 발견한다. 처음엔 그것이 다이너마이트와 페니실린과 라듐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음식도 그렇다. 건망증이나 게으름의 결과로 우연히 생겨나거나 발견한 것들이 있다. 발효음식 대부분이 그럴 것이며 술이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며칠 전 산에서 따놓은 열매를 잊은 채 사냥을 나갔다 온 원시인은 향긋한 액체로 변한 기분 좋게 만드는 열매즙(?)을 신기해하면서 마셨을 것이다.
요즘의 음식 가운데 찾으라면 두루치기가 그런 사례에 해당될 것 같다. 모르긴 해도 두루치기는 김치찌개를 끓이려다가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혹은 예기치 않게 택배 아저씨가 왔거나 해서 국물이 자작자작 졸아붙어 의도치 않게 조리된 음식일 것이다.
어쨌든 의도했던 김치찌개는 아니었지만 국물이 졸아서 맛이 더 좋아진 이 음식은 머잖아 김치찌개로부터 독립적 지위를 누렸을 것이다. 두루치기는 밥반찬은 물론, 술안주로도 기가 막히게 좋다. 그래서 그런지 두루치기는 나이 지긋한 남성들에게 어울리는 음식이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나 여성들은 그다지 좋아라 하지 않는다.
며칠 전 업무차 충북 청주에 갔다가 색다른 두루치기 전문점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두루치기 집은 칙칙한 아저씨 색깔인데 이 집은 외관부터 산뜻한 흰색이다. 그리스 산토리니에서나 있을 법한 순도 100% 백색의 벽이다. 여기에 무려 궁서체로 식당 이름을 썼다. 함께 갔던 젊은 여직원이 환호하며 금방 반응을 보였다.
내부로 들어서자 역시 안쪽에도 높은 천장과 여유 있는 공간, 그리고 원목의 색감을 제대로 살린 여성 지향적 인테리어 콘셉트가 우리를 맞았다. 두루치기보다는 고급 원두커피 향이 배어나올 것 같은 실내였다.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두루치기를 잘 할 뿐이에요.’라는 외벽의 카피가 무심한 듯 하면서 여심을 툭 치고 지나간다. 감성이 살아있는 카피다.
식당 이름도 재미있다. 동업하는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의 주인장 이름을 한 자씩 따서 가게 이름을 지었다. 이들은 김치나 돼지고기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고 싶었다고 한다. 주인장의 어머니가 두루치기를 잘 만들었는데 그 맛을 조금 변형한 메뉴가 이 집 두루치기(8000원)다. 각각 한식과 중식 조리사 출신이기도 한 주인장 두 사람이 어머니의 두루치기를 여성이나 젊은이들도 좋아할 만한 맛으로 조정한 것이다.
젊고 여성스러워진 두루치기와 파불고기
두루치기의 주재료인 배추김치가 고급스러웠다. 국내산 배추와 천일염으로 김치를 담가 4℃에서 23주간 저온 숙성시킨 김치를 사용한다. 돼지고기 역시 국내산 한돈의 전지를 사용한다. 부추, 양파와 함께 고춧가루가 결정적으로 맛을 낸다. 충북 음성의 청결고추로 빻은 것이라고.
다시마, 멸치, 디포리, 새우, 황태대가리, 파뿌리로 미리 뽑아둔 국물을 육수로 사용한다. 바글바글 끓을 때 한 모금 떠먹어보니 구수하고 깔끔하다. 두루치기는 역시 자작자작 국물을 졸여서 먹어야 한다. 어느 정도 국물이 줄어들자 깻잎쌈에 마늘과 된장 바른 고추를 얹어 싸서 먹었다. 누가 먹어도 좋아할 만한 맛이다. 이런 두루치기는 점심식사에는 반찬으로 저녁에는 소주 안주로 제격이다.
식사를 하려면 공깃밥(1000원)은 별도로 주문해야 한다. 두루치기를 다 먹고 난 뒤 우리는 볶음밥(2000원)으로 주문했다. 이미 다른 식당에 들러 배를 채운 상태여서 볶음밥은 하나만 시켰다. 오늘의 운전대는 필자가 잡기로 해서 소주 한 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젊은 직원들에게 양보했다. 사실 두루치기에 마시는 소주(4000원)는 달다. 그 맛을 알기에 양보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파불고기(9000원)는 초벌로 익혀서 된장찌개와 함께 내왔다. 삼겹살에 채 썬 대파를 푸짐하게 얹고 초고추장, 들기름 양념으로 버무렸다. 역시 두루치기처럼 깻잎쌈에 싸먹었다. 간이 세지 않고 맛이 무겁지 않았다.
이 집 파불고기와 조금 다르지만 우리 회사 근처에도 파채-돼지고기의 조합으로 엄청 대박을 내는 식당이 있다. ‘돼지불백’이라는 메뉴 이름으로 팔고 있다. 비교적 맛이 괜찮고 가격(7000원)도 저렴한 편이지만 자리가 비좁고 지저분한 느낌이 들어 자주 가지는 않는다. 역시 파채-돼지고기의 조합은 맛이 좋다.
이 집 파불고기도 불에 익은 파의 향과 지글지글 익은 돼지의 고소한 지방 맛이 어우러져 침샘을 자극한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 다음 방문할 식당의 음식들 생각에 수저를 내려놓았다. 이러다가 내 몸 속에 사리가 생기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지출(3인 기준) 두루치기 2인분(1만6000원)+파불고기 2인분(1만8000원)+공깃밥(1000원)+볶음밥(2000원)+소주(4000원) = 4만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