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란가사 수하고 하신 참회
修弗法盡|서울 안국선원 원장
범어사 내원암에 주석하시는 능가 큰스님은 나에게 옹사(노스님)가 되신다. 절에서는 일반적으로 스님(스승)을 ‘노스님’이라고 호칭한다. 그리고 나의 노스님과 불광의 광덕 큰스님은 사형제지간이신데 우리 노스님이 사형이 되신다. 불광의 노스님은 생전 불광의 법주이셨기 때문에 나도 그 칭호를 그대로 불러 생전의 모습을 좀 더 가까이서 그리고 싶다. 그래서 그냥 법주 큰스님이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아무튼 두 분 모두 우리 종단이나 범어사의 큰 어른이시고 또한 나의 뿌리이시다.
언젠가 안성에 있는 도피안사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송암스님과 차를 한 잔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 속에 노스님과 법주 큰스님과의 특별한 만남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시종 진지하게 듣고 있던 송암스님이 그것을 글로 좀 써줄 수 없겠느냐는 청을 하였다.
나는 글을 써본 일도 별로 없고 또 어른들의 이야기를 내가 곁에서 보았다고 그대로 표현한다는 자체가 별로 내키지 않아 처음에는 사양했다. 그런데 두 번째 도피안사를 방문했을 때도 송암스님이 다시 원고 청탁을 하기에 더 이상 사양하면 서로 아는 사이에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침묵으로 응답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미 오래 전의 일이지만 기억을 더듬어 잠시나마 큰스님들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입장과 그때의 심정만 간략히 표현해 볼까 한다.
어느 해인가 범어사 보살계 산림 때였다. 그동안 몇 번인가 몸이 편찮으셔서 보살계 산림에 참석을 못하셨던 전계대화상(光德)이신 법주 큰스님께서 모처럼 계단(戒壇)의 단주(壇主)로 참석하셨을 때의 일이다. 보살계 산림 기간 동안 범어사에 머무시면서 설법을 하셨는데, 그날 설법이 끝나자 바로 내원암에 올라오셨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금란가사를 수하신 채 올라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법주 큰스님께서는 재가불자(거사와 보살) 두 사람을 대동하고 쉬엄쉬엄 걸어서 내원암에 올라오셨던 것이다.
나는 얼른 뛰어나가 법주 큰스님을 우리 노스님 방으로 모셨다. 두 분은 모처럼의 만남을 무척 반가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물론 함께 온 거사와 보살도 방에 들어가서 노스님께 경배를 드렸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때 법주 큰스님께서는 보살계 산림 중에 전계사가 입는 황금색 금란가사를 그대로 수하고 계셨고, 노스님께서는 평상복 차림으로 방 아랫목에 일상의 태도 그대로 좌정하고 계셨다. 무척 대조적인 두 어른의 옷차림이었다.
법주 큰스님께서는 금란가사를 반짝이며 사형인 노스님께 삼배의 예를 정중히 했다. 우리 노스님께서는 앉은 그대로 금란가사를 차려 입은 전계화상의 절을 다 받으셨다. 법주 큰스님의 절이 끝나자 나는 두 단원을 데리고 잠시 방을 나왔다. 밖에 나와 내원암 마당을 거니는데 문득 거사가 지나가는 말로 ‘공손히 절 올리는 법주 큰스님께 새삼 공경심이 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마 법주 큰스님의 여러 신도 가운데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나 또한 불광의 법주 큰스님께서 공경스러운 자세로 사형이신 노스님께 절하는 하심(下心)과 겸양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우리 노스님께서는 지금 범어사 계단의 단주이시며 한 회상(불광)의 어른으로 계시는 분에게 맞절을 하든지, 한번만 하라고 사양의 말씀을 하실 줄 알았는데 온전히 다 받으시는 것이었다. 물론 법주 큰스님께서 정중히 삼배를 올리는 모습은 경건했고 정성스러웠다. 옆에서 지켜봐도 무심의 경지 그대로가 느껴졌다. 조금도 비굴한 모습이 아니었으며 참으로 ‘절은 저런 모습으로 해야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나게 하는 광경이었다. 그러기에 단월의 입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법주 큰스님을 변명하려는 말이 아니고 또 우리 노스님을 비방하려는 말도 아닌, 범어 문중을 대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어른이 문중 내의 다른 어른에게 삼배를 올린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인 것이다. 결코 흔하지도 쉽지도 않는 일임에 틀림없다. 두 분 모두 그만큼 내면이 충실하기 때문이며 또한 전생의 숙연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나는 두 분의 인간관계를 어렴풋이 들어서 알고 있는데 그날의 일은 참으로 보기 드문 수행의 절정을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그 광경을 직접 보지 않고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 좀처럼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일이었다. 참으로 크신 두 분께서 모처럼 만나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참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으셨다. 두 분만의 시간이 그렇게 한동안 지나갔다.
우리는 밖에서 뜰을 서성이며 기다렸다. 마침내 노스님 방문이 열려 달려가니 법주 큰스님께서 방에서 나오셨다. 그렇지만 노스님께서는 방을 나와 배웅하지 않았고, 법주 큰스님께서는 방을 나서지 않는 노스님을 향해 다시 정중히 반배 절하시고 손수 문을 닫고는 마당으로 내려와 정겹게 주변을 둘러본 뒤 큰절로 내려가셨다.
뒷날 노스님께 법주 큰스님에 대한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내용인즉 노스님께서는 불광의 법주 큰스님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고백했다. 일찍이 범어사 안양암에서 두 분이 5년 동안 함께 수행하셨던 기간의 일들, 그리고 세계불교도대회 때 보여준 법주 큰스님의 자기 헌신적인 모습을 자세히 말씀해 주시고, 또 뭔가 할 듯 말 듯한 애매한 부분도 얼핏 비치신 것 같다. 내가 다 알 수 없는 뭔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면에서는 공감을 했고 어떤 면에서는 머리를 기웃거려 보기도 했지만 나의 좁은 소견으로 그때 두 어른들의 입장을 어찌 다 헤아려 볼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본 그날, 두 어른의 만남에 대한 증언인 셈이다.
불광 법주 큰스님의 깊고 크신 뜻을 잘 가꾸고 길이 보존하려고 노력하며 애쓰는 송암스님의 모습이 너무 장하고 심지어는 애절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아무쪼록 큰스님의 뜻이 당대로 끝날 것이 아니라 길이길이 이어져 많은 이의 마음속에 새겨졌으면 하는 바람을 송암스님께 전해 드리고 싶다.
지금 내가 보아하니 송암스님은 법주 큰스님께서 내려 주신 화두를 단단히 붙들고 정진하고 있는 것 같다. 부단한 정진으로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그 같은 모습에서 옛 껍데기를 벗고 다시 한 겹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또 다른 모습이 보이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느낌은 아닌 듯하다. 송암스님의 그 모습 속에서 나도 모르게 한번 더 법주 큰스님의 존영(하심과 겸손)을 겹쳐서 보게 된다. 더욱 건승하길 바라면서 두 손 모은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7권 『사부대중의 구세송』 중에서, 글 송암지원, 도피안사
첫댓글 보통 사형한테 큰절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큰스님은 사형께도 삼배를 올리셨어요. 그것도 지극정성, 금란가사룰 수하신 채로. 큰스님의 인품을 볼수있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렇듯 큰스님은 상대가 대접(?)받고 싶어하는 분이라면 체면 같은 것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윗어른이면 그저 지극정성 예를 다하고 모실 뿐이지요. 반면, 아랫 사람에겐 그다지 예를 강요하시지도 않았고요. 친구 같이 다들 지내셨죠.
나는 정성을 다하지만, 상대에게는 그런 걸 일체 바라지 않는 성품-그것이 우리 큰스님의 성품이십니다. 사람들이 큰스님을 잊지 못하는 이유를 아실는지..._()_
"참으로 절은 저런 모습으로 해야 되겠구나! " 정성이 가득한 공경의 절을 올리는 큰스님의 모습에서 정성을 또다시 공부합니다.
오늘 공양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어제 저녁에 워드작업은 다 해두고 오늘 아침에 올려야지 했었는데 깜박 해버렸어요. 나사가 풀렸나 봅니다. 다시 정성 모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보현 선생님 댓글에 정신이 듭니다. 댓글 말씀이 없었으면 막연히 어떤 신비주의 즉 깨달은 분들의 회상에서나 일어날법한, 중생들이 알지 못하는 그 무언가...정도로 지나쳤을 것인데요.... 두분 큰스님의 만남에는 이적이나 신비함같은 것은 없고 보통의 일상이 있을 뿐이었겠다...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극한 큰스님의 공경심...더도 덜도 아닌 가장 평범한 모습이지만 가장 크고 넓은 대방광불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정성다해 한배 한배 부처님께 더욱 정성 드리겠습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나는 하고 남에게는 바라지 않고...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