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 22 아침까지
自從今身至佛身 堅持禁戒不毁犯 唯願諸佛作證明 寧捨身命終不退-자장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가 되기까지 금계를 굳게 지켜 범하지 않으리라. 오직 원하노니 여러 부처님께서는 증명하소서. 차라리 신명을 버리더라도 마침내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해설 ; 우리나라에는 일찍이 신라 때 자장스님이라는 출중한 율사가 있어서 여러 사찰에 계단이 세워지고 그 계단을 통해서 사미계와 비구계, 그리고 보살계도 받을 수 있다. 자장스님의 원력과 공덕이 크다. 자장 스님은 신라 진평왕 12년(590)에 진골 출신으로 소판 벼슬을 지낸 김무림의 아들로 태어났다. 늙도록 자식이 없던 김무림은 부인과 함께 관세음보살 앞에 나아가 자식 낳기를 지성으로 발원하여 자장을 얻었다한다. 부모를 여윈 뒤로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원녕사(元寧寺)라는 절을 짓고 수도의 길로 들어섰다. 구도를 위하여 혼신의 정열을 쏟고 있을 때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이에 선덕여왕이 "나라에 나와서 벼슬을 하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하여도 자장은 끝내 굽히지 않고 "내 차라리 하루라도 계를 지니고 죽을지언정, 백 년을 파계하고 살기를 원치 않는다[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고 하며 강한 출가 의지를 나타내니 선덕여왕도 어쩔 수 없이 출가를 허락하였다.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 원력의 뜻과 아울러 위의 게송은 자장스님의 정신이자 곧 계율의 정신이다. 계율을 높이 숭상하는 정신은 차라리 신명을 바치더라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계율을 지키는 정신으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을 정진해 나간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리라.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暗 卽無所見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금강경
마음이 법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어두운데 들어가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마음이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눈도 있고 햇빛도 밝게 비쳐서 가지가지 사물들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해설 ; 사람은 누구나 일상생활을 하면서 자주 느끼는 일 중에 하나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므로 당연히 바른 판단이 서지를 않는다. 아무리 제삼자의 입장이 되어 객관적으로 보려고 해도 안된다.
금강경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경우에는 마음이 그 일이나 사물에 매달려 있고 집착해 있어서라고 한다. 보시를 하는 일이나 그 외에 다른 일들도 그 나름의 기준이나 틀이나 판단의 근거가 있게 되면 벌써 판단이 흐려진다. 마치 그림을 눈앞에 바짝 부쳐두고 보는 것과 같다. 다른 말로하면 공덕을 바라고 베푸는 일을 하면 그 베푸는 일의 결과가 온전치 못하다.
만약 반대로 우리들의 마음이 어떤 기준이나 법도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앞뒤 전후의 상황이 눈에 환하게 들어온다. 그와 같이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선입견이나 자기 기준을 두지 말고 진정으로 객관적인 눈을 가지고 보면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일도, 어떤 사물도 마음에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되는 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예컨대 다이아몬드가 많이 쌓여 있는 동굴에 들어가서 힘껏 가지고 나온 것이 돌덩이뿐이었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매사에 집착하는 상이 있으면 마음의 눈이 어두워 세상과 인생을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만약 동굴 속에 불빛도 있고 눈도 밝아서 다이아몬드만 한 짐을 가지고 나왔다면 그 이익이 얼마나 크겠는가. 세상을 살고 인생을 사는 일도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산다면 그 이익이 그와 같으리라.
山層層 水潺潺 山花笑 野鳥歌 太平歌 太平歌
산음 층층하고 물은 잔잔한데 산에는 꽃이 피고 들에는 새가 노래하네. 태평가를 불러보세, 태평가를 불러보세.
해설 ; 열린 눈이 없으면 세상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아름다움이 보이지를 않는다. 불교는 안목이다. 선심은 열린 눈이다. 세존은 처음 도를 이루고 나니 세상이 온통 금은보화로 보이더라고 화엄경에서 말하고 있다. 바위 위에 풀을 뜯어서 깔고 선정에 들었는데 그 풀이 어마 어마한 크기와 높이를 가진 황금으로 만든 사자좌였다고 말하고 있다. 보리수도 다이아몬드로 되었고 황금과 온갖 칠보로 만들어 졌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금은보화가 따로 없다. 열린 눈으로 보니 세상이 모두가 소중하고 값진 금은보화라는 것이다.
산은 층층하고 물은 잔잔히 흐르는 것도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으면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산에 핀 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태평가가 있을 까닭이 없다. 선심은 어디에 있던 앉은 그 자리에서 진정한 자유며, 평화며, 행복이다. 선천선지(禪天禪地)에서 노니는 선인(禪人)들의 노래다.
假使百千劫 所作業不亡 因緣會遇時 果報還自受
가령 백겁 천겁이 지나더라도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아니하여 인연이 만나는 날 과보를 다시 받는다.
해설 ; 인과의 법칙은 세상의 어떤 법칙보다도 엄격하고 오차가 없다. 한 번 지어진 업은 당장에 그 과보를 받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받게 되어 있다. 돌고 돌다가 지은 인연의 업이 맞아 떨어질 때가 온다. 과보를 받는 시기도 업에 따라서 각각 다르다. 빨리 받는 것도 있고 늦게 받는 것도 있다. 현세에 받는 것을 순현보(順現報)라하고 다음 생에 받는 것을 순생보(順生報)라 하고 몇 생을 건너서 받는 것을 순후보(順後報)라 한다. 체소도 심은 지 한두 달이면 먹을 수 있는 것이 있고 몇 달이 지나야 먹을 수 있는 것도 있다. 또 몇 년이 지나야 먹을 수 있는 과일도 있다. 식물도 그 종류에 따라서 거두는 시기가 각각 다르듯이 사람이 지은 업도 종류와 인연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동일한 것은 지은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받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이 인과의 법칙만 잘 이해해서 실천하더라도 세상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假使頂戴經塵劫 身爲床座徧三千 若不傳法度衆生 畢竟無能報恩者.
가령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미진수 겁을 지나더라도, 또한 몸이 삼천대천세계만한 평상이 되어 부처님을 받들더라도, 만약 법을 전하여 중생들을 제도하지 못하면 필경에는 그 은혜를 갚을 수 없으리라.
해설 ; 불교에는 불공이라는 의식을 많이 한다. 감사한 마음에서 올리기도 하고 무엇을 빌기 위해서 올리기도 하고 어떤 기념일에 올리기도 하고 부처님에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해서 올리기도 한다. 어떤 경우라도 불공은 모든 정성을 다해서 올린다. 그런데 여기에 진정한 불공이 있다. 가장 효과가 높은 불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법도생(傳法度生)이다. 법을 전파하여 사람들을 제도하는 것이다.
부처님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 이 몸을 다 받쳐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수많은 세월을 보내더라도 그것은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또 이 몸을 삼천대천세계만한 평상이나 침상을 만들어서 부처님을 그 위에서 생활하고 편히 쉬시게 하더라도 그것 역시 올바른 불공은 아니다.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공부해서 그것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잘 전파하여 그들이 깨달음을 얻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공이다. 가장 큰 공덕이 있을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은혜도 잘 갚은 길이 될 것이다.
淨極光通達 寂照含虛空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능엄경-.
청정함이 지극하면 빛이 통하여 고요히 비추는 것이 허공을 다 감싼다. 다시 와서 세상을 보니 마치 꿈속의 일과 같더라.
해설 ; 마음 마음 하지만 마음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마음을 좀 다스려야 한다. 평소에 마음을 청정하게 텅 비우고 고요히 가라앉혀야 한다. 그래서 그 청정함이 극에 달하면 광명이 발하게 된다. 광명이 발하면 고요히 비추는 능력이 있고, 그 고요히 비추는 능력은 온 우주를 감싸고도 남는다. 우주를 감싸고도 남는 그 빛이란 모든 존재를 텅 비어 없는 것으로 볼 줄 아는 눈이다. 세상도 인생도, 또 세상 위에서 펼쳐지는 갖가지 인간사들이 텅 비어 없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다시 보면 마치 꿈만 같을 것이다. 환영을 보는 것과 같고 홀로그램을 보는 것과 같다. 사람이 큰일을 한 번 겪고 나서 세상을 보아도 세상은 달리 보인다. 큰 병고로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다가 돌아오면 그러한 경험으로도 분명히 세상과 인생은 달리 보인다. 자신을 의심할 정도로 달리 생각이 든다. 자신의 삶을 모두 던져서 큰 깨달음을 이루었다면 그 견해가 어떠하겠는가.
一切無礙人 一道出生死 -원효-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
해설 ; 이 노래는 무애가라고도 한다. 원효스님이 부르며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벗어나면 최상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 그는 분명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불교 수행의 목표는 생사해탈에 있다. 생사를 해탈하여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는 경지에 오르면 얼마나 즐거울까? 생사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 명예에 걸릴까? 재산에 걸릴까? 인간관계에 걸릴까? 칭찬과 비방에 걸릴까? 병고와 건강에 걸릴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걸릴 곳이 없다. 이러한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부르면서 서라벌의 거리를 돌아다닌 원효스님의 삶을 상상해 본다.
欲得安身處 寒山可長保 微風吹幽松 近聽聲逾好 下有班白人 喃喃讀黃老 十年歸不得 忘却來時道 -한산시-
이 몸 편히 쉴 곳을 찾았었는데 한산이 오래살기 제일 좋구나. 미풍이 노송에 불어올 때는 가까이서 듣는 소리 더욱 좋아라. 나무아래 흰머리 노인이 있어 남남남남 노자를 흥얼거리네. 십년동안 돌아가길 아니했으니 올 때의 그 길을 잊어 버렸네.
해설 ; 당나라 초기에 한산은 습득과 풍간과 세 사람이 함께 천태산 국청사에서 기행을 하면서 드나들었다. 한산은 국청사의 공양주로, 습득은 뒷산에서 가끔 밥을 빌러 내려와서 한산과 도담을 주고받으면서 즐겁게 놀다가 가는 사람이다. 간혹 풍간도 어울렸다. 세 사람은 남들이 모르는 도가 있어서 다른 이들은 끼어들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국청사 뒷산 바위굴에 긁적여 놓은 시들을 모아 뒤 사람이 엮어서 삼은시집(三隱詩集)이라 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지금은 한산시라 한다. 하나같이 모두가 세상의 때를 멀리 벗어난 시들이다.
선시(禪詩)가 무엇인지 짐작하게 한다. 선시는 모름지기 이래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탈속하다. 간결하고 소박하다. 깊고 유현한 맛이 있다. 저절로 그러한 향기가 난다. 너무 고고하고 적정하여 가슴이 서늘하다. 선시를 쓸려면 먼저 선인이 되어야 선시가 나온다. 선화(禪畵)나 선서(禪書)나 모두가 다 그 마음이 먼저 선심이라야 되는 일이다. 특히 이 시의 끝에 “십년동안 돌아가길 아니했으니 올 때의 그 길을 잊어 버렸네.”라는 말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 깊은 뜻이 있는 표현이다. 세상과의 이별이요, 모든 인간적인 것들과의 영원한 이별이다.
終日喫飯 未曾咬著一粒米 終日行 未曾踏著一片地 -전심법요-
종일동안 밥을 먹되 일찍이 쌀 한 톨도 씹지를 않고 종일토록 걸어가되 일찍이 한 조각의 땅도 밟지를 않는다.
해설 ; 보통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 하는 것마다 그 흔적이 남는다. 상이 남고, 기쁨이 남고, 화가 남고, 미련이 남는다. 선인(禪人)은 그와 같은 것들이 남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누구보다도 왕성한 삶을 산다. 왕성하게 작용하고 활동을 하되 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세존은 49년을 설법하시고 나서 한 말씀도 설법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속물에 젖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 매일의 일이지만 되돌아보아야 모두가 환영뿐이다. 손에 잡히는 것은 허무뿐이다. 본래로 공적한 것이 모든 존재의 실상이다. 큰 도를 깨닫지는 못했더라도 이런 이치를 알아서 인생이 세월의 무게처럼 무거워질 것이 아니라 갈수록 깃털처럼 가벼워야 한다. 삶은 그 자체가 수행이고 경험이고 깨달음이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도인이 되어가는 것이 바른 길이다.
佛說一切法 爲除一切心 我無一切心 何用一切法 -전심법요-
부처님이 설하신 일체 법은 일체의 마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나에게는 일체의 마음이 없는데 어찌 일체 법을 쓰리요.
해설 ; 부처님의 모든 설법을 한마디로 정의하였다. 일체의 망녕된 마음과 차별의 마음과 삼독의 마음과 상을 내는 마음과 일체 번뇌의 마음들을 제거하기 위한 설법이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와 같은 마음들을 잘 살펴보면 하나도 없다. 자신의 모든 인생을 다 채우고 세상을 모두 채워서 숨을 쉴 틈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던 일체의 마음들이 되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다. 본래 실체가 없는 것들이었다. 있다고 본 것은 환영들이었다. 물거품이었고 꿈속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제거해야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제거하는데 필요한 설법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일생동안 불교를 공부하고 도를 닦는다고 하면서 이런 말 한 마디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髮白心非白 古人曾漏洩 今聞一鷄聲 丈夫能事畢 -서산집-
머리털은 희지만 마음은 희지 않는다고 고인들이 일찍이 흘려버렸다. 지금 닭소리 한번 듣고 장부의 할 일을 다 마쳤다.
해설 ; 서산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이다. 조선시대의 불교를 대표하는 스님이다. 1552년(명종7)에 승과에 급제하여 대선·중덕을 거쳐 교종판사(敎宗判事)·선종판사(禪宗判事)를 겸임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선가귀감 등 훌륭한 저서가 많아서 뒷사람들에게 눈이 되고 있다.
흔히 말한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이런 이치를 고인들은 이미 일찍이 누설해 버린 사실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며 이치도 또한 간단하다. 그러나 그 늙지 않은 마음을 실증하기란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니다. 서산스님은 길을 가다가 마을에서 낮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한 생각이 돌아왔다. 여러 생을 지고 다니던 천근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이다. 그토록 초조하고 불안하고 밤잠을 못 이루던 일을 다 마쳤다. 그래서 대장부가 할 일을 능히 마쳤다고 한 것이다.
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 -서산집-
주인은 나그네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나그네는 주인에게 꿈 이야기를 한다. 지금 꿈 이야기하고 있는 두 사람 역시 꿈속의 사람들이네.
해설 ; 인생은 꿈이다. 꿈속의 꿈도 꿈이요, 꿈밖의 꿈도 꿈이다. 모두가 꿈이다. 나그네가 잠을 자고 일어나니 주인이 꿈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한다. 다시 나그네는 주인에게 꿈 이야기를 한다. 실은 두 사람 모두 꿈속의 사람이다. 가끔은 보통 사람들도 꿈속에서 꿈인 것을 알고 꿈을 꿀 때도 있다. 이것이 꿈인데 하면서 꾼다. 우리들 인생도 실은 모두가 꿈이다. 꿈이라고 여기면서 꿈에서 확실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萬國都城如蟻垤 千家豪傑若醯雞 一窓明月淸虛枕 無限松風韻不齊 -서산집-
일만 나라의 도성은 개미집이요, 일천가옥의 호걸들은 구더기일세. 창문의 밝은 달을 베개 삼아 누웠는데 끝없는 솔바람소리 가지 각각 다르구나.
해설 ; 서산스님(1520-1604)의 이 시는 1556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는데 빌미가 된 시다. 높은 산 정상에 올라가면 마을의 가옥들이 마치 개미집처럼 작게 보인다. 그 속에 사는 호걸들이래야 별 수 있겠는가. 특히 서산스님과 같이 세상을 벗어던지고 인간 밖에서 노니는 사람의 눈에야 당연한 것이다. 당신의 큰마음을 노래한 것을 못난 중 무업이 서산스님의 뛰어난 인격에 시기와 질투를 느낀 나머지 나라를 무시한고 관료들을 구더기라고 욕을 했다고 무고하였다. 그리고는 정여립의 역모에 가담한 증거라고 덮어 쉬었다. 곧 푸려나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이 한편의 시가 세상에 많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虛隙日光 纖埃擾擾 淸潭水底 影像昭昭 -선사귀감-
빈틈으로 비춰오는 밝은 햇빛에는 가는 먼지가 요요히 일고, 해맑은 연못물엔 그림자가 소소히 밝다.
해설 ; 화두를 들거나 기도를 할 때나 공부를 하고 있을 때에는 망상과 잡념이 들어오는 것을 안다. 그만치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맑아졌다는 의미다. 평소에 일을 처리하고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할 때는 온통 망상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자체마저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들의 그와 같은 마음의 변화를 잘 나타낸 글이다. 망상을 의식하기까지는 누구나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일어난 망상을 깨끗이 쓸어버리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대개의 공부라는 것이 망상과의 싸움이며 혼침과의 싸움이다. 마음이 더욱 맑아지면 또 다른 차원의 미세망상이 일어남을 알게 된다. 세밀하면서 더욱 맑아지고 맑아지면서 더욱 세밀해 진다. 선은 하나의 거울이다. 사람의 마음상태와 세상을 환하게 비춘다. 선심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 맑고 밝다. 가까이 해석하면 언덕에 올라 굽이쳐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일이며, 병상에 누워 잦아드는 시간을 느끼는 일이기도 하다.
貧人來乞 隨分施與 同體大悲 是眞布施 -선사귀감-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을 하거든 능력 따라 베풀어라. 한 몸이라 생각하는 큰 자비가 참다운 보시일세.
해설 ; 사람이 사는 가장 바람직한 모습은 베푸는 일이다. 물질을 베풀고 마음을 베풀고 가르침을 베풀고 의지가 되어주고 하는 일들이 사람이 할 일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보시를 중심으로 설법하였다. 보시를 하되 상에 머물지 말고 하라고 하였다. 아름다운 보시행은 상에 머물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웃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보시다. 자리를 양보하는 것도 보시다. 부드럽고 친절한 말도 좋은 보시다. 특히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을 하면 형편을 따라서 베풀어라. 궁극에는 나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에게 하듯 남에게도 하는 것이 진정한 보시다.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니다. 불심은 자비요 자비보시다.
參禪須透祖師關 妙悟要窮心路絶 -선사귀감-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하고, 미묘한 깨달음은 요컨대 마음의 길이 끊어져야 한다.
해설 ; 전통적으로 볼 때 참선이라고 하는 공부의 최종 목표는 큰 깨달음이다. 그것을 조사관문이라고 한다. 그 조사관문을 뚫어야 하는 것이 참선에서 설정해 놓은 최종 경계선이다. 그것은 또한 마음의 길이 끊어진 일체무심과 오매일여의 경지를 지나야 한다. 그 상태를 지나서 비로소 깨달음이 있다고 본다. 이 게송의 원칙을 밟아 공부를 성취한 사람은 근세에는 보기 드물다. 온갖 정보가 넘쳐나고 정신이 산만해서 집중이 어려운 현대인들이게는 더욱 힘들다. 물론 그래서 더욱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목표달성은 생각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훈련을 쌓아야 하는 공부가 이것이다. 이 일밖에 없기 때문이다.
壁隙風動 心隙魔侵 -선사귀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군이가 침범한다.
해설 ; 늘 겪고 늘 보는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그럼에도 시간에 틈을 내고 마음에 틈을 내어 온갖 잡다한 일로 잡다한 신경을 쓰고 사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사람으로서 하루하루의 삶이 천금보다 소중하고 값지다는 것을 알고 사는 수행자나 불교인들은 삶에 틈을 낼 시간이 없다. 알뜰하게 살아야 한다. 인생이 백년이라 하더라도 잠간이다. 최대한 속이 꽉 차게 의미 있고 보람 있게 살 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며 현명한 삶이다.
兀然無事坐 春來草自靑 -선사귀감-
오뚝하게 일없이 앉아있으니 봄이 와서 풀이 저절로 푸르네.
해설 ; 고요하고 맑은 선심(禪心)이 묻어나는 시다. 세상사 인생사 다 잊고 오뚝하게 일없이 앉아있다. 그래도 세월은 간다. 겨울은 가고 봄은 온다. 여름은 가고 가을은 온다. 앙상한 가지에서 새싹이 돋고 그 싹은 어느새 푸르고 무성하여 단풍이 든다. 단풍이 들고는 떨어져서 다시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이렇게 흘러가고 있음을 명경지수처럼 환하게 보고 있다. 분별이 없는 가운데 분별이 있고 분별이 있는 가운데 또한 분별이 없는 삶이 선생활이다.
靈鷲拈花示上機 肯同浮木接盲龜 飮光不是微微笑 無限淸香付與誰 -선문염송-
영축산에서 꽃을 든 것은 상근기에게 보인 것이다. 물에 뜬 나무가 눈 먼 거북을 만난 것과 어찌 같겠는가. 음광존자가 가만히 미소하지 않았더라면 무한한 맑은 향기를 누구에게 주었으랴.
해설 ; 불교의 선법은 한 송이 꽃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한다. 대범천왕 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의 기록에 의하면 영축산에서 범천왕이 세존에게 설법을 청하며 연꽃을 바치자 세존은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으나 가섭존자만은 참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고 이에 세존은 가섭존자에게 “정법안장과 열반묘심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라고 한데서 유래하였다.
그 자리에서 가섭존자만 그 뜻을 알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도리는 상근기에게 보인 것이다. 우연히 소발에 쥐잡기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어찌 눈이 먼 거북이가 오랜만에 물위에 올라와서 나무토막을 만나는 일과 같겠는가. 본문에서 음광존자는 가섭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섭존자의 미소가 없었다면 세존의 그 깊고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누구에게 전할 수 있었겠는가. 선불교의 정신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소중하고 뛰어난 인생 지침이 되고 있다. 그 시원도 또한 아름답고 멋이 있다. 그래서 선은 인생 최고의 아름다움이며 멋이다.
最好江南二三月 百花開後鷓鴣啼 -선문염송-
강남땅의 이삼월은 가장 좋은 계절이라. 백화가 만발한 뒤 자고새 소리 아름답다.
해설 ; 선은 지극히 아름다움이다. 최고의 멋이다. 또한 최고의 정신으로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는 삶이다. 지혜롭고 현명한 삶의 모습이다. 그와 같은 선심을 한 폭의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와 같다. 강남땅 이삼월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백화가 만발하여 아름답고 향기롭기가 넘쳐나는데 자고새까지 지저귄다. 봄밤의 향기롭고 아름답고 그 상큼한 맛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래서 봄밤은 예부터 촛불을 밝혀가면서 밤이 이슥하도록 즐긴다는 말이 있다. 그 말에 필히 까닭이 있다.
啼得血流無用處 不如緘口過殘春 -선문염송-
피를 토하면서 울어보아야 쓸 곳이 없으니 차라리 입을 닫고 남은 봄을 보내는 것이 낳으리라.
해설 ; 이 글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높은 진리를 누가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49년간이나 설법을 하였다는 사실을 이렇게 착어한 것이다. 살다보면 일상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 하물며 공부에 관한 것이나 도의 문제에 있어서겠는가. 너무도 분명한 도리이건만 아무리 말을 하고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한다. 이야기가 되지를 않는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실은 말이 필요치 않다. 말은 하나마나다.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은 말 이전에 이미 안다. 모르는 일은 말을 해도 실은 모른다. 그러니 말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두견새가 피를 토하면서 아무리 울어야 누가 알아주겠으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촉나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귀촉도, 귀촉도 하지만 촉나라에선 그를 알아주지 않는다. 눈도 돌리지 않는다. 그래서 망국의 한을 품고 한 마리의 새가 되어 피를 토하며 이산 저산으로 다니면서 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차라리 말없이 남은 생을 보내는 것만 같지 못하다.
서정주의 시 귀촉도를 읽는다.
눈물 아롱아롱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임의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임아.
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障壁 可以入道 -달마-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으면 가히 도에 들어간다.
해설 ; 철석같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세상사를 계획해서 그 일을 성공하려면 이것저것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매진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하물며 도를 닦는 일이겠는가. 세상사 인간사 모든 반연을 끊어야 한다. 한번 산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않을 각오로 해야 한다. 이것저것 다 돌아보고 여기저기 다 불려 다니고 사람노릇까지 다 하면서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찾아오는 사람 다 만나고, 오라고 하는데 다 가고, 걸려오는 전화 다 받고 무슨 공부를 하겠으며 무슨 일을 하겠는가. 밖의 인연을 다 끊어도 헐떡거리는 마음이 쉰다는 보장은 없다. 첫째는 밖의 인연을 다 끊어야 하고, 둘째는 안으로 마음이 헐떡거리지 않아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한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으로서, 도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할 가르침이다. 그러나 아직은 방ㅍ편이지 실제의 경지는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空門不肯出 投窓也大痴 百年鑽古紙 何日出頭期 -선요-
텅 빈 문으로는 기꺼이 나가지 않고 창문에 가서 부딪치니 너무 어리석도다. 백년을 옛 종이만 뚫은들 어느 날에 벗어날 기약이 있으리오.
해설 ; 깨달음은 마음의 문제다. 마음은 공적한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공문(空門)이라한다. 마음의 문으로는 들어가려 하지 않고 옛 종이인 경전만 읽은들 언제 생사해탈을 하겠는가라는 다소는 조롱조의 시다. 그러나 아름답고도 귀감이 되는 이야기가 전하여 널리 아려져 있다.
중국 당 나래 때 복주의 고령사에 신찬(神贊)스님이 있었다. 처음 출가하여 고향의 대중사라는 절에서 은사인 계현(戒賢)법사를 모시고 살았다. 그러다가 백장스님 문하에 가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돌아와서의 일이다. 말도 없이 예전처럼 시봉을 하면서 지내는데 하루는 은사스님이 목욕하는데 때를 밀어들이게 되었다. 때를 밀다가 등을 두들기면서 문득 하는 말이, “법당은 참 좋구나. 그런데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好好法堂 佛無靈驗].”라고 하였더니 은사스님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신찬은 다시, “영험도 없는 부처가 또한 방광은 할 줄 아는구나[佛無靈驗 也能放光].”라고 하였다. 좋은 법당이란 육신을 두고 말한다. 영험이 없다는 것은 깨달음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방광하는 능력은 있다. 말을 하면 들을 줄 알고 꼬집으면 아픈 줄을 아는 일이다. 은사스님은 어리둥절하였으나 무슨 뜻이지를 모르고 며칠을 지났다.
그 후 어느 날 은사스님이 경전을 읽고 있는데 마침 그 순간 벌이 한 마리 방에 들어와서 열려있는 문으로는 나가지 않고 종이 창문에 가서 부딪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신찬스님이 시를 한수 읊었다. 그것이 위의 게송이다.
은사스님은 이 게송을 듣고 그 때에야 심상치 않은 상좌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행각을 하면서 백장스님 문하에서 눈을 뜨고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계현스님은 곧 바로 대종을 쳐서 대중들을 모으고 법석을 마련하였다. 상좌를 법상에 올려 앉히고 자신은 밑에서 제자가 되어 법문을 들었다. 신찬선사는 의연히 법상에 올라 자신이 백장스님에게서 듣고 깨달은 “신령스런 광명은 홀로 빛나서 운운...”이라는 법문을 설하였다. 그 법문을 들은 은사 계현스님은 그 자리에서 크게 깨달았다. 은사가 상좌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이룬 좋은 사례가 되었다.
靈光獨耀 逈脫根塵 體露眞常 不拘文字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則如如佛-백장
신령스런 광명이 홀로 빛나서 육근 육진을 멀리 벗어났도다. 본체가 참되고 항상함을 드러내니 문자에 구애되지 않네. 심성은 물들지 않아 본래 스스로 원만하나니 다만 망령된 인연만 떠나버리면 곧 여여한 부처라네.
해설 ; 당나라의 백장 회해(百丈懷海:749∼814)스님은 선종사에서 대단히 큰 봉우리 중에 나하다. 사상과 법어가 훌륭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제자들이 있어서 당시의 대중들을 크게 교화하였다. 여기에 소개한 법어는 내용 못지않게 계현스님과 신찬스님의 일화가 유명하여 함께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상좌인 신찬스님이 은상인 계현스님에게 이 설법을 하여 은사의 눈을 열어준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불법은 심법(心法)이다. 참선은 심법이다. 세상의 법도 심법이다. 이 마음의 법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법이 없다. 일체 삼라만상과 우주만유를 이 마음이 들어서 좌지우지한다. 평소에는 잊고 살지만 이 마음의 법은 참으로 위대하고 대단하고 신기하고 불가사의하다. 그래서 신령스런 광명이다. 일체만유를 만들어 내지만 또한 일체 만유와 육근육진에서 멀리 벗어나 있기도 하다. 이것만이 진실하고 영원하고 변함없는 우주의 대생명이다. 언어와 문자로서 설명할 길이 없다. 팔만대장경이 그것을 설명했다고 하지만 아직은 전혀 설명이 되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세존은 49년이나 설법을 하고도 한 글자도 설한 것이 없다고 하였던가. 다만 스스로 가만히 계합할 뿐이다. 체험하고 증득해서 알뿐이다.
사람 사람들이 다 갖추었고 개개인이 모두 완전무결하다. 더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다. 3 아승지 겁 동안 육도만행을 닦는 다고해서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5역죄를 저질러서 18지옥을 다 돌아다닌다고 해서 그것에 손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와 같은 일에 보탬이 되고 손해가 된다면 그것은 마음이 아니다. 진여불성이 아니다. 법성도 자성도 아니다. 보리열반이 아니다. 다만 내가 본래부터 완전무결하고 영원불멸하고 만행만덕을 갖춘 부처가 아니라는 그 잘못된 생각만 하지 않으면 끝이다. 그것을 여여한 부처라고 하든 조사라고 하든 무사한(無事漢)이라고 하든 본래인이라고 하든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상좌에게서 이 법문을 들은 계현스님은 그 자리에서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法華會上 八歲龍女 直往南方無垢世界 獻珠成佛 亦不出者一箇信字 -선요-
법화회상에서 팔세된 용녀가 남방의 무구세계에 가서 구슬을 받치고 성불한 것은 또한 하나의 믿을 신[信]자에 벗어나지 않는다.
해설 ; 선요에서 고봉스님이 신심을 강조하시면서 여러 가지 경전의 예를 들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신심의 결과로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들이다. 법화회상이란 부처님이 노년에 이르러 그동안의 가르침을 총 정리하는 관점에서 설하신 내용이 법화경이다. 이 법화경을 설하시던 법회를 법화회상이라 한다. 법화경에 팔세 된 용녀가 성불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지적보살이 문수사리보살에게 물었다. "이 경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 여러 경전 중에서 보배이오며, 세상에 있기 어려운 것입니다. 중생들이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 경을 닦아 행하면 빨리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그러합니다. 사가라 용왕에게 딸이 있어 나이 여덟 살인데, 지혜 있고 총명하여 중생들의 신·구·의 3업을 잘 알고, 다라니를 얻었으며, 여러 부처님이 말씀하신 깊고 비밀한 법장 을 다 받아 지니었으며, 선정에 깊이 들어가 모든 법을 분명히 알고, 찰나 동안에 보리심을 일으켜 물러가지 않는 자리[不退轉]를 얻었습니다. 변재가 걸림이 없고, 중생들을 어여삐 생각하기를 갓 낳은 자식같이 하며, 공덕이 구족하여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연설함이 미묘하고 광대하며, 인자하고 겸양하며, 마음이 화평하여 능히 보리에 이르렀습니다." 지적보살이 말하였다. "내가 보니, 석가여래께서는 한량없는 겁 동안에 어려운 고행(苦行)을 행하시고 공덕을 쌓아 보리의 도를 구하심에 잠깐도 쉬지 아니하셨습니다. 3천 대천세계를 보아도, 겨자씨만한 곳에라도 보살의 몸과 생명을 버리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모두 중생을 위한 연고이옵니다. 그러한 후에야 보리의 도를 이루셨는데, 이 용녀가 잠깐 동안에 정각을 이루었다는 말은 믿을 수 없나이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용녀가 문득 앞에 나타나서 머리를 조아려 예경하고 한쪽에 물러가 앉아서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죄와 복을 깊이 통달하시어 시방 세계 두루 비추시며, 미묘하고 깨끗한 법신(法身) 32훌륭한 몸매와 80가지 잘생긴 모양으로 법신을 장엄하게 꾸미시도다. 천상과 인간 함께 앙모하여 용과 귀신이 모두 공경하여 모든 중생의 무리 받들어 모시지 않을 이 없네. 설법 듣고 보리를 이룬 일 부처님만이 아시나니, 나는 대승의 교법 열어서 괴로운 중생들 건지리라. 이 때, 사리불이 용녀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오래지 않아 위없는 도를 얻으리라 생각하나, 나는 그 일을 믿기 어렵노라. 그 까닭을 말하면, 여자의 몸은 때가 묻고 더러워서 법의 그릇이 아니거늘, 어떻게 위없는 보리를 얻겠는가. 부처가 되는 길은 멀고멀어서, 한량없는 겁을 지나면서 애써 수행을 쌓으며, 여러 가지 바라밀다를 구족하게 닦고서야 이루는 것이 아닌가...”
그 때, 용녀에게 한 보배 구슬이 있으니, 값이 3천 대천세계에 상당하였다. 그것을 부처님 에게 바치니, 부처님이 곧 받으셨다. 용녀가 지적보살과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배 구슬 바치는 것을 세존께서 받으시니, 그 일이 빠릅니까? 빠르지 않습니까?" "매우 빠르니라."라고 하였다. 용녀가 말하였다. "당신들의 신통한 힘으로 나의 성불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보다도 더 빠를 것입니다." 그 때, 여러 모인 이들이 보니, 용녀가 잠깐 동안에 남자로 변하여서 보살의 행을 갖추고, 곧 남방의 무구(無垢)세계에 가서 보배로운 연꽃에 앉아 등정각을 이루고, 32 훌륭한 몸매와 80가지 원만한 모양을 갖추고, 시방의 모든 중생을 위하여 미묘한 법을 연설하였다. 이와 같은 사례도 모두가 믿음이라는 그 한 가지 사실로 인하여 가능하다는 것이다.
絶心生死 伐心稠林 浣心垢濁 解心執着 -대혜서장-
마음의 생사를 끊어 버리고 마음의 비좁은 숲을 베어버리며 마음의 때를 씻어 버리고 마음의 집착을 풀어버린다.
해설 ; 일반적으로 불교의 수행이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매 순간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심을 끊어야 한다. 기도나 참선으로 존심일처(存心一處)하여 맑아지고 밝아지면 활연대오에 이른다. 그것을 통과해야 생사심이 끊어져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경지에 이르면 마음속에 있던 온갖 주의주장과 잡된 생각들이 있을 수 없다. 자신의 고집이니 사상이니 할 것이 없어진다. 자신의 주장을 비좁은 숲이라고 한 까닭은 숲이 비좁으면 사람이 드나들 수 없다. 개인의 옹고집이 다른 사람은 한 사람도 용납할 수 없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
자연히 좋지 않은 불선한 마음의 때는 씻어지고 청정하여 일상생활이 간명하고 소박하고 탈속하여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리고 마음의 집착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생사를 벗어나서 집착이 없는데 다른 인간적이거나 세상의 가치에 무슨 집착이 있겠는가. 이것이 수행자의 본 모습이다.
萬法歸一 一歸何處 -조주-
만 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해설 ; 조주종심(778~897)선사는 고불(古佛)이라는 말을 듣는 천하의 명종장이다. 이 공안은 조주스님의 말씀인데 선요에서 고봉스님이 여러 번 거론하여 우리나라에도 이것으로 공부하는 선객들이 많다. 조주록, 조당집, 전등록, 벽암록 등에 모두 살려있는 유명한 화두다. 벽암록 제45칙에 조주스님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라고 하였다.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했다. “나는 청주에 있을 때 베적삼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
물론 이 대화는 독자가 스스로 이해할 일이다. 만법이란 한마디로 모든 존재를 말한다. 일체의 사물이나 사건을 함께 일컫는다. 우주 삼라만상과 일체 만물과 삼라만상에서 벌어지는 일체 크고 작은 일들, 즉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서 모든 새싹이 돋는 일과, 날씨가 따뜻하여 만물이 생장하는 일과,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일 등등 일체사가 다 포함된다.
하나란 다름 아닌 마음을 일컫는다. 불교의 견해는 일체가 오직 마음이 만들었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마음의 법을 심법이라 하여 소승이나 대승이나 선법이나 한결같이 이 마음을 근본으로 한다. 그러므로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은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하나인 마음은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는 질문이다. 과거의 조사들이야 무어라고 했든지 처음부터 질문이 좀 그렇다. 틀렸다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인데 옳은 답이 나올까? 평지에 풍파를 일으킨 세존의 49년 설법이나 일체 조사들이 뒤를 이어 중언부언 하신 말씀이나 알고 보면 모두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공안이나 화두가 이와 같은 범주에 들지는 않을까 잘 살펴야 할 일이다.自足長樂-미상
스스로 만족하면 언제나 즐겁다.
해설 ; 컨디션이 좋은 날은 몸의 상태도 좋다. 좀 가볍기도 하고 통증도 덜하다. 이런 이야기를 회진 온 의사에게 말했더니 그러면 매일 컨디션이 좋도록 하라고 하였다. 어떻게 하면 매일 좋을 수 있느냐고 하였더니 이 말을 해준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아픈 몸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큰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 더 불행하고 더 아프고 더 불편한 사람들을 많이 생각하면 한결 가벼워질 수도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좋은 말이다. 당신은 심리치료사다. 지족(知足)이 제일부(第一富라는 말도 있다. 아무튼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언제나 그 상태에서 앞으로 전진은 하되 또한 한편으로는 그만하면 그런대로 괜찮은 인생이라고 생각할 줄 아는 지혜도 대단히 소중하다.
簡素, 脫俗, 自然, 幽玄, 枯高, 靜寂, 變化
行者禪 沙彌禪 比丘禪 居士禪 菩薩禪 儒生禪 幸福禪師 禪人 禪客 自由禪師 平和禪師 禪心 禪書 禪畵 禪花 禪香 禪味 禪食 禪意 禪樂 禪音樂 禪舞 禪境 禪語 禪黙 禪茶 禪武 禪天禪地 禪山禪水 禪東禪西 禪南禪北 禪春禪夏 禪秋禪冬--진정한 선객에게는 모든 삶이 다 선이다.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선이다. 선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만 선이 아니다. 숨 한 번 내쉬고 기침 한 번 하는 것이 일체가 선이 아닌 것이 없다. -- 聖解不在(留) 凡情脫落
선은 하나의 거울이다. 사람의 마음상태를 환하게 비춘다.
선은 하나의 등불이다. 사람의 마음의 길을 안내한다.
선은 일종의 생활태도다. 일종의 처세방법이다.
선은 일종의 생각하는 지혜다.
선은 일종의 인생 지남이다. 인생지침이다.
선은 인생 생명의 최고지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선은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한다. 사람들의 인격을 미화한다. 사람들의 지혜를 개척한다. 사람들의 역량을 강화한다.
선은 인생태도다.
선은 사람에게 잠재된 능력 가운데 본래로 갖추고 있는 일종의 숭고한 정신역량이다.
일상생활에서 선의 초월을 실현한다. 일상생활에서 선의 정신, 선의 경계, 선의 지혜, 선의 품격을 실현한다. 선의 風采를 體現한다.
선은 배우고 사유하고, 이치를 깨달아 마음을 밝히고 아름아리(識)를 전환하여 지혜를 이룬다. 지혜는 강물과 같이 끊어지지 않고 흘러 부처의 경계에 저절로 이른다. 선의 정신을 가지고 선의 지혜로서 생활 속에 녹아 들어간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선의 초월을 실현한다. 일상생활에서 선의 정신, 선의 경계, 선의 지혜, 선의 품격을 실현한다. 선의 風采를 體現한다.
道人 至人 眞人 仙人 神人 佛人 佛祖 聖人 禪聖 禪僧 禪神 禪仙 至仙 至禪 禪人 禪事 禪思 禪語
선비구 선행자 선사미 선보살 선처사 선거사 선사장 선회장 선아저씨 선아줌마 선할아버지 선할머니 선할배 선할매 선아버지 선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