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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코스
6시롯대백화점출발--9시30분 경복궁--고궁박물관및경복궁내(2시간30분소요)--12시점심(경희궁부페 1시간소요)--
1시30분 덕수궁(1시간소요)--3시창덕궁(1시간30분소요)--4시30분 광주로출발---오후8시30분광주착예정
서울의 5대궁궐
조선왕조 500년의 도읍지로서 서울의 역사와 위용을 자랑하는 유적은 무엇보다도 궁궐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등 5대 궁궐은 비록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 때의 파괴로 원 모습을 잃었지만 현재 남아있는 건물 만으로도
조선왕조의 기품과 궁중 문화의 장려함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5대 궁궐이 있기에
서울은 서울일 수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제1궁궐이며 법궁인 경복궁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의 정궁(正宮)이다. .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태조는 궁궐과 종묘, 사직이 들
어설 자리를 정하고 태조 3년(1394)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왕궁을 창건하기 시작하여. 태
조 3년 12월 4일 개토(開土)를 시작하여 태조 4년(1395) 9월 경복궁이 조성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왕조 최초의 궁궐인 경복궁이 창건되고 태조의 명을 받은 정도전이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이라 지어 올린다.“景福은 詩經 大雅의 旣醉 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
불렀으니 군자는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리”에서 따온 말로 큰 복을 누리며 번성하라는 뜻을 지니
라는 뜻으로 경복궁의 이름을 붙였다.
현재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을 지나 흥례문. 영제교를 지나면 기능에 따라 영역이 나뉜다.
흥례문 영역
흥례문과 근정전 사이에서 근위병 교대식을 하고 있네요 .시간에 맞춰가면 화려하고 근엄한 근위
병교대식을 볼 수있어요
.
흥례문은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첫 번 째 문이다.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졌던 건물로 문의 이름은
세종때 홍례문으로 했던 것을 고종 때 흥례문이라한것같다.
근정문
근정문은 근정전과 더불어 왕위 즉위식을 비롯한 왕실의 행사가 치러지던 곳으로 왕이 승하하면
왕세자는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하고 근정전의 옥좌에 오르곤 한다.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치룬 역
대왕으로는 단종, 성종, 명종이 있다.궐안에 있는 문으로는 유일한 중층 건물로 그 웅장한 품새가
법전의 문으로참으로 당당
근정전
임란때 불탄것을 고종 3년에 재건 조선조 최후의 대작으로 국보 제 223호이다.월대는 상월대와 하
월대로 이루어져있는데 월대마다 난간을 두르고 그 엄지기둥(문로주)에 화강석으로 돌짐승을 장
식해 놓았다.공간을 방위하는 사방신과 시간과 공간을 상징하는 십이지신상(열두 동물중 용,개 돼
지는 빠져있다) 그리고 상서로운 동물 서수(소맷돌 상하월대 난간 모퉁이와 기단모퉁이위의 돌짐
승가족-해태도 찾아보자
2층구조의 지붕에 정면5칸 측면5칸.외부에서보면 2층이지만 내부로보면 통층구조북쪽 중심에 용
상 용상위 정교한 조각을한 보개 용상뒤로 섬세하게 조각된 삼면의 목조병풍(왕권의 무궁한 번영
을 기원하고 칭송하는 일월오악병풍. 여전히 왕실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근정전 천정 칠조룡
높고 높은 천장 중앙에 제왕을 상징하는 용.제왕을 상징하는 용의 발톱은 보통 5게 오조룡인데여
기 근정전에는 발톱이 일곱 개 .왕조가 무너져가는 시기에 만든것이라 더욱가슴이 아프다.
강녕전
왕의 사적인 공간으로 강녕전 이 강녕전의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이랍니다.왜냐구요 왕이
용이기때문에 왕이 쉬시는 곳에는 용마루를 놓으면 안되겠지요왕의 사적인 공간 강녕전 좀 쉬고
싶을땐 이곳에서쉬고 잠도자요.이건물의 지붕엔이 없어요 .집안에 용이 계시기 때문이죠
아미산
강녕전뒤에는 왕의 부인인 왕비의 거처가 이겠지요 교태전이랍니다 이교태전 뒤뜰을 아미산이라
하는데 꽃으로 수놓은 굴뚝이 여성이 있는 공간으로 보이지요 .백두대간의 정기가 북악에 내려 그
기운이 중전마마계시는 교태전 뒷마당에 있는 연못에 스며들어 다음 대대로 보위에 오를 왕손에게
맑은 정기가 다 들어가도록 심혈을 기우려 만든 신령스러운 산입니다
자경전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아들 명복(고종)을 왕위에 앉혀줘서 얼마나 고마왔겠어요. 멋을 아는 대원군
께서 조대비를 위해 정성스레 만든 건물입니다.자경전의 꽃담과 굴뚝은 세계어디에도 없는 아름다
운 것이지요 .십장생의 그림들도 찾아보면 재미있어요. 대비마마가 계신 자경전 .이 자경전의 꽃
담과 십장생굴뚝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대비마마께서는 꽃밭속에서 살았어요
향원정
고종황제가 왕실 가족들 그리고 비빈들과 노닐던 사적인 정자입니다 .
고종황제께서 중전마마 후궁그리고 왕실의 가까운 분들 과 노닐던 곳이랍니다 .이 향원정은 마치
하나의 공예품을 보는거 같애요.
향원정너머에 중국풍의 건물이 하나보이고 그너머에 북문인 신무문. 신무문 너머에는 청와대가 가
까이 보입니다
경복궁의 화려한연못 향원정
세계 문화 유산 창덕궁
창덕궁은 1405년(태종5년)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이다. “창덕이란 덕의 근본을 밝혀 길이 창성하란 뜻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버려 광해군 때에 다시 짓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 하기까지 정궁 역할을 했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공간이다.
얼핏 생각하면 궁궐의 역사는 법궁인 경복궁으로 집중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겠지만 따져보면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에 불타버리고 난 뒤 고종 5년 재건 될 때 까지 270여년간 폐허로 남아있었으므로 실제 사용기간은 조선전기와 말기를 합쳐 250여년에 불과하지만 창덕궁은 임진왜란때 소진되었던 당시를 제외하면 순종이 창덕궁에서 승하하는 1929년까지 한 왕조의 궁궐기능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던 의미있는 곳으로 법궁인 경복궁을 제치고 조선왕조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명멸한 실질적인 중심 무대라고 볼 수있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이 좌우 대칭의 일직선 상에 놓여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여 한국 궁궐 건축의 비 정형적 조형미를 대표 하고있다. 또한 비원으로 알려진 창덕궁 후원은 다양한 정자. 연못. 수목. 괴석이 어울어진 아름다운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으로 태종 13년(1412년)에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것을 선조40년(1607년)이 되어서야 중건을 시작하여 광해군 원년(1609년)에 완공이 되었다. 이때 세워진 문이 지금까지 남아있으니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으로 보물 383으로 지정되어있다.돈화문은 남쪽으로 넓은 월대를 만들고 그 위에 두벌의 기단을 쌓아 문을 세웠는데 한동안 이 월대가 사라진 적이 있었다 .순종과 총독부의 고관들이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출입의 편리를 위해서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그후 90여년동안 땅에 묻혀 있다가 1997년에 이르러 월대를 되살리는 공사를 시작하기는 했으나 완벽하게 제 모습을 찾아주지는 못하고 도로면 보다 낮게 노출된 채 어색하게 복원되었다.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이 반듯하고 아담하여 여성적 아름다움에 비유되고 있다면 정면 5칸의 큰 규모와 단순한 구조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돈화문은 중후한 남성적 품격이 느껴지는 문이다.
금천교
창덕궁이 중건된 6년 뒤인 1411년 태종 11년에 세워졌으니 창덕궁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600년이라는 긴 세월을 묵직하게 쌓여있는 다리이다. 다리위에는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장대석으로 삼도를 깔았는데 가운데의 어도가 상대적으로 넓다. 다리 좌우의 돌 난간에도 제각기 다른 시선의 시선과 표정을 지닌 동물을 앉혀 장식하였다. 역시 벽사 기능을 하는 이들 석수를 자세히 보면 표독스럽지 않고 도리어 성근 미소가 정겹고 귀엽다.
인정전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들의 즉위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는데 연산군,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등이 이 곳에서 즉위식을 올렸다.인정전 앞의 답도에는 구름속에 노니는 봉황이 새겨져있고 천장에도 꽃구름속에 노니는 봉황 두 마리를 황금 빛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왕실의 위엄을 한 껏 드 높이고 있 다. 봉황은 성군이 등장 하거나 다스릴 때 나타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며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낙선재
지금은 창덕궁에 속해 있지만 원래 창경궁이었다. 헌종 13년 국상을 당한 왕후와 후궁들의 거처로 지어졌는데 헌종이 사랑하던 후궁 김씨의 처소이기도 했으며 순종의 계비였던 순정효 황후 윤씨의 처소이기도 했고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의 처소이기도 했는 데 이방자 여사 별세 이후로는 주인없는 집이 되었다.
후원
창덕궁은 궁궐로 보다는 비원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주로 후원이라 불렀고 때로는 내원 상림원,금원이라 불리운 곳인데 일제때 비원이라 유포되어 비원으로 더 알려졌으며 이 후원은 창경궁과 창덕궁에 딸린 정원인데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조하면서 일제가 두 궁궐의 후원에 담장을 쌓아 지금처럼 분리하였다.
이곳은 조선시대 후원가운데 가장 넓고 아름다워 왕실 사람들이 가장 사랑을 받아온 곳이다.그 때문에 여러 왕들에 의해 누정이 지어져서 한때 100여개 이상의 누각과 정자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누각18채와 정자 22채만 남아있을 뿐이다 . 창덕궁 후원은 왕실 사람들의 휴식처였을 뿐 아니라 국왕과 왕자들이 학문을 연구하거나 과거시험을 치루 던 곳이기도 하다
부용지
부용지는 애련지와 더불어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방지이다 .연못가운데 작고 동그란 섬 하나가 떠 있다. 이렇게 못이 네모지고 둥근 섬이 하나 있는 것은 천원지방의 동양적 세계관을 나타내는 것이다. 못이 제 구실을 하려면 물이 순환해야 한다, 새 물이 들어오고 헌 물이 나가야 하는 데 부용지에는 서쪽 호안 석축에 이무기가 입을 떡 벌린 모습의 입수구가 있고 반대편에 물빠짐 시설이 있다. 그러나 비가 올때가 아니면 이무기가 물을 토해 내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부용지에는 항상 신선한 물이 공급된다. 비밀은 지하에서 솟는 샘이 있는데 원래 이곳에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덕수궁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덕수궁< 德壽宮 >은 고종황제< 高宗皇帝 >가 대한광무< 大韓光武 > 11년(1907)에
순종황제< 純宗皇帝 >에게 양위< 讓位 >하고 왕궁이 창덕궁< 昌德宮 >으로
옮겨진 후에 이곳에서 계속 거처< 居處 >함에 따라 고종황제의
장수< 長壽 >를 비는 뜻에서 종래< 從來 > 경운궁< 慶運宮 >을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德壽宮 > 터< 址 >가 왕궁< 王宮 >으로 쓰이게 된 것은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 때 선조< 宣祖 >가 의주< 義州 >로
피난< 避難 >갔다가 한양< 漢陽 >에 돌아와 보니 왕궁이 모두 불에 타
이곳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선조 26년 (1593)부터 궁< 宮 >으로
사용< 使用 >하기 시작하여 부근의 계림군< 桂林君 >과 심의겸< 沈義謙 >의
집을 궁으로 편입< 編入 >하면서부터이다. 덕수궁 터에는 원래
조선 제9대 성종< 成宗 >의 형인 월산대군< 月山大君 >(1454-1488)의 집이 있었다.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 光海君 >은 이곳에서 즉위< 卽位 > 후
광해군 3년(1611) 이곳을 경운궁이라 고쳐 부르고 1615년 창덕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이곳에는 선조의 계비< 繼妃 >인 인목대비< 仁穆大妃 >가
유폐< 幽閉 >되었던 곳으로 광해군은 이 경운궁을 다시
서궁< 西宮 >이라 낮추어 불렀다. 1623년 인조반정< 仁祖反正 >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이곳 즉조당< 卽조堂 >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즉조당과 석어당< 昔御堂 >만 남기고
그 밖의 건물들은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후
고종황제가 아관파천< 俄館播遷 > 후 러시아 공관< 公館 >에서
환궁< 還宮 >하면서 다시 왕궁< 王宮 >으로 사용하기까지
270년 동안 별궁< 別宮 >으로 사용되었다. 1897년 고종황제는
러시아 공관에서 환궁 후 이곳을 경운궁이라 부르고 그 규모도
확장하였다. 그후 1904년 궁궐 내에 불이나 많은 건물이 타버렸으며
1906년 불에 탄 건물을 복구하고 대안문< 大安門 >을 대한문< 大漢門 >으로
개명< 改名 >하였다. 덕수궁 터에는 1909년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석조전< 石造殿 >이 세워졌으며 1938년에는 서관이 지어져 이왕직< 李王職 >
박물관< 博物館 >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덕수궁 터에는 미국과 영국대사관을 비롯 지난날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18,635평에 대한문< 大漢門 > 중화문< 中和門 > 광명문< 光明門 >
중화전< 中和殿> 석어당< 昔御堂 > 준명당< 俊明堂 > 즉조당< 卽조堂 >
함녕전< 咸寧殿 > 덕홍전< 德弘殿 > 석조전 < 石造殿 >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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