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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시헌』복싱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디마
두려움을 제어할 수 있어야 링 위에 설 수 있다 | ||||||||||||||||||||||||||||||||||||||||||||||||||||||||||||||||||||||||||||||||||||
포항 포세이돈스 박시헌 코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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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엘진 기자 eljin@inewspeople.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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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재발견-아마추어복싱 1988년‘서울88올림픽’. 12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그 해의 마지막 금메달을 안겨준 이는 바로 복싱의 박시헌 선수였다. 박시헌 선수는 그 경기를 끝으로 선수생활을 은퇴하였으며, 지금은 아마추어 복싱단‘포항 포세이돈스’의 코치다. 당시의 복싱팬이 아니라면 그저‘명예롭게 금메달리스트로 은퇴한 선수가 자부심을 가지고 아직 복싱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박시헌 코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불명예스러운 짐을 진 채 살아가고 있었다. 긴 세월 그를 무겁게 한 짐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짐을 업고도 복싱을 떠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WSB에 한국의 이름을 걸고 참가하는 아마추어 복싱단‘포항 포세이돈스’ ※참고로 포항 포세이돈스는 아마추어 복싱팀이다. 복싱을 떠나, 일반적인 의미의‘아마추어’와‘프로’의 경우 프로는 직업적으로, 아마추어는 겸업내지 취미처럼 느껴지는 말이다-복싱팬들께는 죄송하다-. 그러나 복싱에서는‘프로팀’이‘아마추어팀’보다 실력이 높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프로와 아마추어는 애초에 다른 종목에 가깝다. 프로팀에서는 헤드기어와 윗옷 없이 상업적인 경기를 하며, 아마추어 팀에서는 헤드기어를 착용하고, 윗옷(러닝셔츠)을 입으며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 등 대회에 출전한다. 포항 포세이돈스 박시헌 코치 1965년생으로 경남 출신이다. 현재 배우자와, 1남 2녀를 두고 있다. 박시헌 코치는 1984년 한ㆍ일 주니어 경기대회 W급 우승을 시작으로, 1985년 제4회 월드컵 복싱대회, 1987년 제13회 아시아복싱 선수권대회, 1988년 한ㆍ미 교환경기, 1988년 아시아 챌린저(도전자)대회, 1988년 제24회 88서울올림픽 복싱대회에서 모두 우승하였다. 그는 1988년 2월 경남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서 1급 정교사 자격증을 수료하여 1989년부터 체육교사로 근무하였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태릉선수촌에서 국가대표 복싱 코치로 근무하였으며, 이후에는 대한체육회 전임지도자, 단국대 복싱부 창단지도자로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2010년부터는 WSB(World Series of Boxing) KOREA의 코치가 되어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중학교 때 꿈은 은행원이었고, 상고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키는 170cm가 넘는데 54kg정도로 마른 몸매에 동아리 활동으로 타자반에 들어갈 정도로 내성적인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같이 타자반 활동을 하던 친구와 동네 체육관에 다니게 되었어요. 남자로서 너무 마른 몸에 싸움도 못하고, 왜 그 나이 또래에는 그런 것도 중요하잖아요. 어느 정도 힘도 길러야겠고 어디 가서 맞는 일이 생기면 안 되겠다 싶었죠. 그냥 그런 기분으로 체육관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나름 운동이 재미가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체육선생님의 추천으로 도민체육대회에도 나가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1, 2학년 동안 지방대회에만 7번을 나갔는데, 매 번 졌습니다. 그러면 포기할 법 한데 오히려 오기가 생겼습니다. 같이 운동했던 친구들은 우승을 하는데 저는 이 년간 한 번도 못 이겼으니까요. 자존심도 상하고 오기도 나고, 딱 한 번은 이겨봐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운동에 모든 것을 걸고 열심히 했습니다. 남들 몇 배로. 결국 3학년 때 도대회에서 일등을 시작으로 전국대회에서도 우승을 하게 되었죠. 그렇게 이기고 나니 또 성취감도 있고, 열심히 하면 되는구나 싶어졌습니다. 그때부터 한 번도 다른 길로는 눈도 돌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복싱이 바로 제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요.
1988년 서울88올림픽, 미국의 로이존스 주니어 선수와의 결승경기였습니다. 저는 올림픽 출전은 비록 처음이었지만 그 전까지의 국제 시합에서는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금메달을 따왔습니다. 당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후보 중에도 언제나 제 이름이 올라있었고, 정말로 자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합 전부터 있었어요. 결승 보름 전에 당시 라이벌로 여기던 한국선수와 스파링 연습을 하다가 연습이 좀 격해진 겁니다. 그래서 오른손을 다쳤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오른쪽 손등의 뼈 하나가 완전히 부서졌다고 하더라고요. 주먹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건 당연하고요. 그 사실이 알려지면 당연히 시합엔 나갈 수 없으니, 별 수 없었습니다. 울고불고 의사선생님께 빌고 매달려서 비밀로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보름간 고통을 숨기며 훈련에 임했습니다. 물론 왼쪽 손만 이용해서요. 제대로 된 훈련도 못했을 뿐더러,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지만 시합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로니존스와의 결승전에서 제대로 싸우지 못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시합을 하는 내내 지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종이 치고, 심판이 제 손을 잡고 들어 올리는 겁니다. 지금도 그 이유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동독에서 미국을 이기기 위해 심판을 매수한 거라는 말이 있었어요. 그래서 미국선수와 싸운 제가 이기게 된 거라고요. 그렇게 떳떳하지 못한 우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론에서는 더러운 금메달이라고 비난을 퍼부었고, 전 고개를 들고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습니다. 나름 낙천적인 성격이었는데, 그때를 계기로 성격도 변한 것 같아요. 사실 저도 떳떳하지 않지만, 심판의 잘못된 판정은 제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몇 년 전 화제가 되었던 안톤 오노 사건이나 아주 최근까지도 체육 분야에서 부당판정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제 이름이 나옵니다. 로니존스 역시 유명한 선수이므로 TV에 나올 때마다 제 이름이 나오고 있고요. 가족이며 친구들에게도 죄송스럽습니다. 지금도 제가 운영하는 인터넷 홈페이지가 있는데요, 바로 어제만 해도 신입회원이 가입을 해서 가입인사란에‘당신이 그 로니존스를 부정판결로 이긴 박시헌이냐’고 글을 올렸더라고요. 올림픽이 끝난 지 23년이 지났고, 저는 어떠한 힘도 없었는데, 아직까지도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88올림픽 이후 바로 교직생활을 시작해서 13년간 근무했습니다. 그러다가 주변의 권유로 태릉선수촌으로 돌아가게 되었지요. 물론 많이 망설였습니다. 교직원 생활의 안정성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뿐더러, 편하기도 했고 나름의 자부심도 있었거든요. 또한 이미 선수로 상처를 받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제가 선수이던 시절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받은 도움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배우자도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지금까지 도움을 받아 이 자리에 있는데, 후배들을 위해 지금은 제 재능을 환원해야 하는 시기라고요. 연봉은 물론 안정성도 없는 코치생활을 하게 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학교생활은 물론, 체육관만 잘 차려도 경제적으로는 코치생활보다 낫거든요. 그러나 편안한 생활을 유지하기보다는 꿈을 꾸고 싶었고, 은혜를 갚고 싶었습니다. 2005년 제가 지도한 이옥성선수가 한국 선수로서 16년 만에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게 되면서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지요.
정원은 15명입니다. 현재 11명의 선수가 확정되어있고요, 한국 선수 9명(이옥성, 김대성-상무, 성동현-한국체대, 김택-단국대, 김대환-용인대, 정창규-단국대, 강민구-용인대, 전병국-영주시청, 김도현-영주), 알제리 선수 2명(벤차블라, 초아입)입니다. 알제리에서 온 벤차블라 선수는 작년 시즌에서 6전 6승으로 개인 챔피언 1위를 했습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도 물론 출전하고요, 앞으로 세계적인 선수가 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알제리 선수들은 아랍어와 불어를 사용하는데 그 중 한 명이 영어를 사용해 양쪽에 통역을 해주고 있고요, 훈련 때에는 복싱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지금은 서로 많이 익숙해지고 잘 알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가 없지만, 초반에는 재미있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음식 때문이었는데요. 중동지역 사람들은 우리와 음식문화가 많이 다릅니다. 이슬람법에서는 돼지고기와 동물의 피, 부적절하게 도축된 동물, 알콜성 음료와 취하게 하는 모든 음식, 육식 동물과 맹금류, 그리고 앞에서 언급된 품목이 함유된 모든 가공 식품이 금지되어 있으며‘부적절하게 도축된 동물’도 금지입니다. 그러니까 허용된 동물이라도‘자비하’라는 이슬람 도축 방식에 의해 도축한 것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도축된 음식을‘할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처음에 알 리가 없었으니까요. 처음엔 고기반찬이 나오는 데 전혀 먹지 않는 그들을 보며 답답했습니다. 운동을 하려면 고기를 먹어줘야 할 텐데 말입니다. 결국 알제리 대사관에 전화를 해서 알아냈습니다. 그때부터는 할랄마크가 붙은 고기를 따로 공수해오게 되었지요. 당시에는 알제리 선수 뿐 아니라 서양에서 온 선수들도 있어 식단만 세 가지 이상이었어요. 그리고 이건 좀 가십거리기는 하지만,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여자평영 200m 금메달리스트 정다래 선수의 남자친구가 저희 팀에 있는 성동현 선수로 이번 시즌에 출전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릴게요. 성동현 선수의 친동생 역시 복싱을 하고 있는 성소미 선수인데, 얼마 전 탤런트 이시영 씨와 결승에서 시합을 했었죠. 이시영 씨가 이기기는 했지만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시영 씨는 정말로 연예인이 아니라면 복싱선수가 되어도 될 뻔 했어요(웃음).
복싱은 시작할 때 정말 어렵습니다. 기본체력을 기르고 첫 싸움을 할 때까지의 지난한 기초훈련과정을 이겨내는 게 힘든데, 저 같은 경우에는 그 고비를 넘기고 나니 그 다음 고비를 넘기고 싶고, 또 그 다음 고비를 넘기고 싶어지더라고요. 맨 손으로 어떤 장애물을 만나 정복하고, 더 큰 장애물을 만나면 정복하고 싶고. 맨몸 대 맨몸의 대결이기 때문에 더욱 정정당당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복싱의 매력은 그런 것 같습니다. 마약같이 한 번 맛보면, 끊을 수 없고 더 강한 맛을 원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복싱으로 힘이 세졌다고 해서 누군가를 괴롭히고 이기고 싶어지기보다는, 사실 처음엔 그렇습니다. 샌드백으로 연습을 하면서는 실전에서 붙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실제 사람과 스파링을 시작하면서는 주먹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먹의 두려움을 알게 되면 다른 사람을 이유 없이 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링 위에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것만이 방법입니다. 링 위에서 승부하기 위해서는 또 자신의 두려움을 컨트롤 할 수 있어야합니다. 두려움만 가지고 있어서는 결코 시합을 할 수가 없어요. 주먹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지만, 그 두려움을 컨트롤 할 수 있어야 비로소 복싱을 할 수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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