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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이 6 - 하타이에서 제1차 십자군 안티오키아성 공방전과 십자군왕국을 회상하다!
5월 20일 터키 동남부 시리아와 접경지대에 옛날 안티오키아 라고 불리었던 하타이 에서
고고학박물관 과 성베드로 동굴교회 를 보고는 엣날 다프네 로 불렸다는 하르비예 로
가는 돌무쉬를 타고 올드타운을 빠져나가는데.... 오래된 집이며 가게들을 보자니
문득 제 1차 십자군전쟁 의 최대 격전지인 이 도시 안티오키아성 공방전 이 떠오릅니다.
서기 7세기 이슬람인들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긴 비잔틴제국 은 1,071년 만지케르트전투 에서
셀주크 투르크 에게 패하자 알렉시우스 황제 는 서유럽의 병사를 빌려 잃어버린 영토
를 되찾을 욕심으로 동서교회 분열로 인해 견원지간 이던 로마 교황청에 도움 을 요청합니다.
당시 교회는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로 동서분열 된데다가 고위 성직자 임명권 을 두고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와 투쟁중이던 교황 은 교회세력을 키우고자 응하는데...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바누스 2세 는 클레르몽공의회 를 소집해 청중에게 예루살렘
회복을 위한 제1차 십자군 을 호소하니 전 유럽에서 영주와 기사들이 이에 호응 합니다.
주요인물은 아마데우스 주교 외 프랑스 남부 툴루즈 백작 레몽 4세 로 교황 우르바노
2세와 가까웠다는데, 십자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영지 일부를 팔았으며
두번째는 프랑스 국왕 필립 1세의 동생 으로 카페왕조 의 일원인 백작 위그 드
베르망두아 로 영지도 있었으나 형의 그늘 밑에 있는걸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세번째는 교황에 맞서 하인리히 황제에 충성한 하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부용 이니
왕이라는 명칭은 쓰지는 않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통치자 가 됩니다.
네번째는 정복왕 윌리엄의 장남 으로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이니 영국 왕위가
동생인 윌리엄 2세 에게 주어지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방향을 돌린 것입니다
다섯번째는 풀리아 공작 보에몽 이니 5명의 기사와 150명의 병력만으로 1047년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해 시칠리아 욍국 을 건국한 노르망디의 노르만족 로베르의 장남 입니다.
비잔틴제국을 정복하려는 전쟁 을 수행하는 중에 아버지가 죽으면서 왕위를 이복동생인
로게르 에게 물려주자 보에몽은 아드리아해 소영지만을 상속 한지라 십자군 원정에 나섭니다.
여섯번째는 볼로뉴의 백수 보두앵 이니 3남이라 영지도 없으니 십자군을 기회로 생각해
아내와 자식 까지 데리고 떠나 결국 에데사 백작을 거쳐 예루살렘 왕위 에 오릅니다.
일곱번째 정복왕 윌리엄 1세의 사위 블루아 백작 스테판 2세 는 명성을 높이라는
드센 아내인 아델라의 등쌀에 견디지 못해 내키지 않는 원정을 떠날수 밖에 없었다 합니다.
여덟 번째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 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서 예루살렘을 순행
한 적이 있었는데 1093년 백작의 지위에 오르자 30대로 십자군에 참가했습니다.
아홉번째 노르만족 탕크레드 는 보에몽 여동생의 아들로 아주 교활하며 유능한 장수 입니다.
열 번째 외스타슈 3세 는 고드프루아의 형으로 장남이라 영지를 물려받아 외스타슈 3세가
되었는데 체면상 참가하지만 타향에서 죽는 동생과는 달리 신속히 귀국합니다.
열 한번째 목수 윌리엄 은 노르만족으로 민중 십자군 에 참가한 자인데 위그
백작의 군대에 합류했지만 안티오크 공방전때 보에몽의 군대에 합류해 명성 을 떨쳤습니다.
제후들의 십자군 에 앞서 은자 피에르 등이 이끄는 민중 십자군은 6만명 에 달했는
데 돈이 없다 보니... 도중에 헝가리와 세르비아, 비잔틴등 기독교
국가 도시들을 약탈하고 도둑질 로 간신히 아시아로 넘어갔으나 여기서도
약탈에 열중 하던 중에..... 니케아 근교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에 전멸 당합니다.
고드프루아를 비롯한 볼로뉴 3형제 와 툴루즈의 레몽 과 아데마르 주교가 이끄는 군대
는 1097년 5월까지 비잔틴에 집결 해 바다를 건너 셀주크 투르크의 수도
니케아를 포위 하는데 동쪽 다니슈멘드와 전쟁중이던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이
5월 21일 니케아에 도착해 남쪽 레몽 4세의 부대를 공격했으나 패하고 성은 함락됩니다.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은 왕비를 버리고 후퇴해 터키 중부 콘야를 새 수도 로 정하고
는 3만의 군대 를 모아 6월 26일 남진하는 보에몽등 1만의 십자군 을
아나톨리아의 고원 지대 도랄라이온에서 습격 했으나 승기를 잡아가던 중에
고드푸루아등 후위부대가 도착하니 중무장 기마병을 깰수가 없는지라 다시 후퇴합니다.
클르츠 아르슬란 은 초토화 작전 을 수행해 우물 하나, 곡식 한톨 남기기를 거부 했으니
십자군은 병사와 말들이 기아와 갈증 으로 인해 고통받고 사망했으며 고통스런
행군은 6주간 이나 이어진후 콘야 에 도달하여 식수와 식량을 보충하고는 동남쪽
아르메니아인 영토 를 통해 안티오키아 를 거쳐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으로 진군합니다.
하지만 볼로뉴 막내인 보두앵 은 장남에게 모든 영지가 상속 되는 관습으로 인해
자기 영지가 없어 형에게 더부살이하던 처지라 자신의 영지를 개척 하려는
흑심을 품고 가족까지 데리고 십자군에 가담했으니 십자군이 실리시안 관문을
통과하자 마자 2500명의 별동대 를 이끌고는 본대를 이탈해 토로스 산맥을 넘습니다.
노르만 타란토 공작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 도 자기 영지가 없는지라 역시 300명 의
병력을 이끌로 토로스 산맥을 넘어서 타르수스 Tarsus 에 도착했으나 병력이
적어 성공하지 못하던차에, 보두앵이 더 많은 군대를 가지고 도착 함으로써
두 장수는 함께 도시를 함락 했지만 도시를 점령한후 보두앵은 탕크레드를 쫓아 냅니다.
보두앵은 도시를 차지하려는 욕심 에 이후 도착한 다른 십자군을 성안으로 들이는
것을 거부 했다가 적의 기습을 받아 전멸 되자 악화된 여론 에 어쩔수 없이
도시를 포기하고 출발했다가...... 탕크레드가 점령한 작은 성 에서
결국 두 군대는 충돌해 전투 를 치르고는 다른 지휘관들의 만류로 간신히 멈춥니다.
1098년초 안티오크 전투 에서 보두앵은 포위전에 참가하지 않고 동쪽을 방어하며 처자식이
죽어가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기회를 잡으니 아르메니아 군주 토로스 (Thoros) 로
부터 원군 요청 을 받고는 2월 6일 수천 병력을 이끌고 에데사 에 도착해 양아들이
된후 불과 한달 후인 3월 7일 양부 토로스를 죽이고는 에데사 백국의 주인 이 되는 것이지요?
하타이(안티오크) 는 원래 비잔틴 제국의 도시 였는데 무슬림 세력에 넘어간 것은 1085년
이었으니 십자군이 도착하기 불과 12년전 으로 말리크 샤 1세 사후 셀주크 제국은
제후들에 의해 분열된 상태 로 안티오크는 야기 시안 이 1088년 이후 통치하고
있었는데 섬기는 군주는 원래는 말리크 샤 1세의 동생인 시리아의 군주 투투시 1세 입니다.
투투시 1세 는 알레포,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등 시리아의 지배자였지만 1095년에
사망하고 왕위를 이어 받은 것은 아들인 알레포의 리드완 이었는데 그가
권력 독점을 위해 형제들을 죽이기 시작하자... 동생 두카크는 다마스쿠스
로 탈출해 지역 군벌들에게 통치자로 옹립되어 알레포의 형과 대립 하고 있었습니다.
1097년 십자군 침략 시 안티오크의 지배자 야기 시안 은 리드완과 동맹 이었지만 사위가
자신의 영토를 노리는지라... 다마스쿠스의 두카크 와도 은밀히 연합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안티오크가 불과 10여년 전까지도 비잔틴 영토 였으며 기독교의 도시 라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와 시리아 정교회 등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십자군의 침략 을 당하자 본래 지배자인 비잔틴 제국에 동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니..... "야기 시안은 안팍에 적" 을 가진 것입니다!
1097년 10월에 3만이 넘는 십자군이 안티오크로 접근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야기
시안 은 적인 십자군에게 동조할 위험이 있는 그리스 및 아르메니안 정교회등
기독교 신자 성인 남자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 하고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시리아 정교회도들은 도시에 남겨서 성벽의 보수등 필요한 전투 준비 를 서둘렀습니다.
십자군이 1097년 10월 20일 도착했을때 안티오크 성주 야기 시안의 이슬람 병사는 7천 에도
이르지 못하였고 도시 주민은 4만명 에 불과했으나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 시에
증축된 안티오크의 성벽은 난공불락의 요새 였으니, 살푸스산과 오론테스강 성벽 은
튼튼했으며 지중해에서 물자를 보급받기 쉬웠기에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십자군의 식량은 충분하지 못했으니 포위전이 길어진다면 곤경에 빠질 것이며
또 최고 사령관의 부재에 따른 지휘 체계의 혼선 이 문제인데, 선발대 중에 레몽
4세 는 적이 응원군을 부르기 전에 공격에 들어갈 것을 제안했으나 고드프루아와
보에몽은 포위전을 주장 했으니 지휘관으로 생각하는 레몽과 보에몽의 갈등 은 심해집니다.
십자군은 북동쪽에는 보에몽의 부대가 성 바울문 밖에 진지를 구축했고 레몽의 진지
는 서쪽의 개의문, 고드프루아 는 이보다 더 서쪽에 진지를 구축했는데.....
성의 남동쪽은 실푸스산 이 있었으므로 포위가 완벽하지 않아 야기 시안은
식량을 들여올 수 있었으며 더욱 야기 시안은 다마스쿠스의 두카크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두카크는 십자군 보다 알레포 의 형이 더 두려웠으니 십자군을 공격할 때
형의 군대가 등뒤에서 공격을 가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이교도와의 성전을
벌일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 만일 형제가 힘을 합쳤다면 십자군은 큰 곤경 에
빠졌을 것이니 십자군 은 이번에도 무슬림들의 대립과 분열로 이득을 보았던 것이지요!
야기 시안 이 아들을 보내 독촉하자 다마스쿠스의 지배자 두카크가 무거운 몸을 일이킨
것은 포위가 2달이나 계속된 12월 말에 이르러서였는데 십자군도 식량이
모자라니 제노바 함대를 통해 공급 받기는 했으나 도저히 겨울을 날수 없는지라
1097년 12월말 보에몽과 플랑드르의 로베르는 2만의 병력을 이끌고 주변 약탈에 나섭니다.
이에 안티오크의 무슬림군 은 12월 29일 야음을 틈타 성 바울문 쪽에서 총공격을 감행
오론테스 강 너머의 탈란키까지 공격했지만 레몽 4세의 포위를 뚫는데는 실패
했는데, 한편 보에몽과 로베르가 이끄는 약탈 부대가 다마스쿠스 군대 와 마주 치자
소심한 두카크는 후퇴하지만 십자군은 식량을 얻지 못했으며 지진과 비가 수주간 이어집니다.
십자군은 기아상태로 내몰렸으니 1098년초 기아로 십자군 7명 중 1명이 사망 했으며
말도 700마리를 제외하고 다 죽었고 살기 위해 죽은 말은 물론 무슬림의 시체
까지 먹었다니... 일부 식인종으로 변모한 십자군 은 추운 비를 맞으며 진창
으로 변한 진지 안에서 굶고 있는 중에 신의 징벌로 생각되는 지진 까지 발생 합니다.
십자군은 참회의 기도를 하고 진지안에서 매춘부를 내치며 금식 기도를 했으니 살기 위해
도망치는 이들도 있었으니 은자 피에르도 탈영중에 붙잡혀 탕크레드의 병영으로
끌려왔다고 하는데 불신해 왔던 비잔틴 제국과 십자군이 갈라진 것도 이 시기니
비잔틴 장군으로 군사 자문을 하던 타티키오스가 1098년 2월 갑자기 철수 한 것입니다.
1098년 알레포 리드완이 구원병을 보내왔으나 2월 9일 하림에서 십자군에게 격파 되는데
3월이 되자 정복왕 윌리엄에 밀려난후 비잔틴까지 와서 경호대로 일하던 자칭
영국왕 에드가가 함대를 이끌고 시메온항에 도착했는데 병력외에 공성무기등 보급품
을 가지고 있었으니 3월 6일 탈취하려는 투르크 군대의 공격을 고드프루아가 물리칩니다.
봄이 되자 식량 사정은 나아지긴 했지만 안티오크는 여전히 난공불락 이었는데 셀주크
와 종교적, 정치적으로 대립중인 이슬람 파티마 왕조로 부터 동맹 제의를
받습니다. 반면에 모술의 지배자인 아타베그 카르부카 가 십자군을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집결 시키는데 그들은 십자군이 비잔틴 제국의 용병 이라고 잘못 판단했습니다.
이집트 파티마왕국 은 투르크 라는 공통의 적 때문에 비잔틴 제국 과 사이가 좋았으니
협상에 들어가나 십자군과 이집트가 예루살렘을 자신들이 가지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협상은 성과없이 끝나고, 모술의 아타베크 카르부카가 대군을 소집했으나
2달 전인 1098년 3월 에데사의 백작이 된 보두앵 때문에 먼저 에데사 부터 공격 합니다.
보에몽 은 안티오크의 두자매의 탑을 지키던 아르메니아인인 피루즈와 은밀히 접촉해 1098년
6월 3일 새벽 피루즈가 내려준 사다리 덕으로 도시에 침투한 십자군은 무슬림
은 물론 시리아 정교회등 수많은 기독교인들도 학살하고 전리품을 약탈 했는데
보에몽은 성 함락에 주도적인 역활을 했으니 도시의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 합니다.
야기 시안은 죽고 아들 샴스 알다울라를 포함한 투르크군은 요새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저항하는 가운데 보에몽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레몽은 도시가 비잔틴 황제의 것
이라고 주장했지만 지휘관들은 보에몽의 요구를 들어주었는데 승리의 기쁨은 잠시뿐
카르부카가 무슬림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 도시를 다시 포위 했으니 공수가 뒤바뀝니다!
1092년 말리크샤 1세 사망후 아나톨리아 고원 에서는 룸투르크의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과 다니멘슈드가 대립 했고 시리아를 지배하던 말리크샤 1세의 동생 투투시
1세 사후 아들인 형은 알레포, 동생은 다마스쿠스를 지배하며 서로 다투었
는데 이라크와 페르시아등 영지는 말리크 샤 1세의 네 아들들에게 분배 되었습니다.
따라서 안티오크 공방전 당시 십자군을 저지할수 있는 무슬림 지배자들은 모술 에,
서로 싸우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가 아니라면 이슬람 보다는 비잔틴과 우호적인
이집트의 이슬란 시아파 파티마 왕조 정도였는데 알레포와 다마스쿠스가 패하니
이제는 모술의 지배자 아타베그 카르부카 만이 십자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모술의 카르부카는 성전을 벌인다는 명분을 내걸고 병력을 모았으니 다마스쿠스의 두카크
까지도 참가했는데 간발의 차이로 안티오크에 도착하니 성벽위에는 십자군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는데... 십자군도 도시를 점령해 보니 야기 시안의 보급품과 식량이
오랜 포위전으로 거의 다 떨어진 것이라..... 결국 포위된 십자군은 다시 굶주리게 됩니다.
그러나 카르부카는 부하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으니 휘하의 에미르 들과
두카크 마저도 그가 승리한다면 시라아의 새로운 지배자로 군림하지 않을지
걱정하고 있었으니... 모래알 처럼 쉽게 흩어질 군대 였는데 십자군도 문제가
많으니 안티오크 함락 하루 전날 블루아 백작 스테판이 패배를 직감하고 철군했습니다.
안티오크성 함락후 다시 모술의 군대 가 진격해오자 탈영한 십자군들은 블루아 백작의
패잔병에 합류해 도망치다가 비잔틴 알렉시우스 1세의 원군을 만났으나 철수합니다.
무슬림 군대는 6월 7일의 기습이 효과가 없었으므로 포위를 유지하기로 했으니
십자군 을 굶겨서 궁지에 몰 생각이었지만 십자군에 속해 있던 수도승이 술수를 부립니다.
피에르 바르톨로뮤 가 예수 그리스도를 찌른 성창(롱기누스의 창) 을 발굴(?)해 기세가
오른 십자군이 성문을 열고 나오자 카르부카는 한번의 전투로 적을 괴멸시켜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십자군을 넓은 평원으로 끌어내는데 십자군은
굶주림에 지치기는 했으나 중무장에 잘 훈련된 군대 였으며 지휘관은 역전의 용사들 입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투르크 기마 궁병은 화살로 십자군을 공격했으나 갑옷을 입은 십자군
기사들은 적의 화살에도 강했으니 오랜 금식에다가 종교적 열정이 더해져
성 조지, 성 드메트리우스, 성 마리우스 가 인도(?) 하는걸 보았다나 어쨌다나?
이에 투르크군은 크게 흔들렸으니.... 적과 협상을 시도한 오만한 사령관을 배신 합니다.
다마스쿠스의 두카크가 먼저 카르부카를 버리고 퇴각하니 대세를 눈치챈 많은 에미르
들이 후퇴하니 마침내 카르부카가 퇴각할 때 쯤 그의 부대는 보잘것 없는 수준
으로 변해 몰락하고 말았으니 전투는 십자군의 대승리 였으나 다시 논쟁의
불이 붙었으니 안티오크는 누구의 것인가? 보에몽은 자신의 권리 를 강하게 주장합니다.
그는 비잔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 한게 언제냐는 듯 황제의 신의 없음을 비난 했으며
안티오크 함락에서 자신의 역활을 강조하자, 툴루즈 백작 레몽 4세는 물론
아데마르 주교도 반대했으니 혼자 안티오크를 점령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베르망두아 백작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했는데 황제는 추가 파병을 하는 것을 거부 합니다.
한편 보에몽과 레몽 4세의 대립은 위험한 수준 에 이르렀으니 궁전을 분할 점령 했으며
도시는 보에몽의 통제하에 있다지만 남부 프랑스인과 북부 프랑스인에 이탈리아
노르만 족에 의해 분할되어 내분이 무력 충돌로 번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오랜 기아 로 인한 영양 실조와 비위생적인 환경 이 겹쳐서 장티푸스 가 돌기 시작합니다.
영적인 지도자인 아데마르 주교등 많은 군인이 장티푸스로 죽자 십자군이 떠나니.....
도시를 차지한 보에몽 은 안티오키아 공국 을 세우고는 아르메니아 실리시아 의
일부를 노리는데 고드프루아는 투르베셀을 차지하고 로베르 2세는 라타키아 항구를
점령하지만 그래도 나머지 장수들은 우여곡절 어려운 전투 끝에 예루살렘을 함락 합니다.
십자군은 로렌공작 고대프루아 를 추대해 예루살렘 왕국 을 세우는데 1144년 모술의 태수
장기 에 의해 에데사 백국이 점령되자 놀란 유럽에서는 교황 에우제니우스 가
베르나르도를 보내 국왕들을 설득하니.... 1145년에 프랑스왕 루이 7세 와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 콘라트 3세 와 독일왕이 이끄는 2차 십자군 이 일어납니다
1187년에 쿠르드족 출신으로 장기 를 이어받아 아랍세계를 통일한 이집트 술탄 살라딘
이 행동을 개시해 갈릴리의 하틴 전투 에서 십자군을 대파 하고 예루살렘왕 기 드
뤼지냥을 비롯 십자군 지도부를 생포 한후 여세를 몰아 10월에 예루살렘을 함락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신다" 는 구호를 내걸고 이교도 이슬람으로 부터 에루살렘성을 회복해
기독교 왕국 을 세웠는데 다시 이교에게 빼겼으니... 충격에 빠진 교황
우르바노 3세는 또다시 국왕들에게 호소하니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프랑스의
필리프, 영국 리처드의 3차 십자군 이 일어나지만.... 결국 예루살렘 탈환은 실패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