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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리 여행5 - 수향인 퉁리고진에서 운하를 걸어 숭본당에서 전족을 구경하다!
2023년 10월 27일 쑤저 우(苏州) 동남쪽에 옛 수향 마을 퉁리 (同里 동리) 로 가기위해 쑤저우역
에서 지하철 4호선 을 타고 한시간후 종점인 퉁리역에 내려 전철을 타고 퉁리 마을에
도착해 입장권을 끊어 마을로 들어가서는....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퇴사원 (退思园) 을 구경합니다.
퇴사원을 나와 운하 를 지나는데..... 배를 타고 운하를 지나는 관광객들을
지나 골목길을 걸어서..... 진주탑경원 (珍珠搭景圓) 건물에 도착합니다.
작은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서 안내도를 보니 독립된 건물 여섯채가 보이고
큰 연못 이 있는데 저 건물들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 합니다.
그러고는 진주탑경원을 나오니 나기 운하이고 저만치 예쁜 홍예교 가 보입니다.
송나라시대 의복 을 입은 여인을 지나쳐서 걸으니 무슨 큰 홍살문 같은게 보이는데... 운하 주변
을 구경하고는 숭본당 을 찾아서 안으로 들어가니 건물에는 많은 것들이 전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결혼증서 라는게 보여 웃음이 나오니 옛날에도 저런게 필요했었나 봅니다.
그러고는 그리고 전족(纏足) 을 보는데.... 예전에 우위안 婺源(무원) 리캉 李坑(이갱)
마을에서 차를 타고 왕구촌 (汪口村) 을 거쳐 장완전 江弯镇(강만진) 에서
마을을 구경하는 중에 民俗館(민속관) 에서 전족을 보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떠오릅니다.
"작은 발 한쌍을 가지려면 한 항아리의 눈물을 쏟아야 한다." 전족의 고통 을 잘 표현하는 말이니...
전족(纏足) 은 송나라 때 시작되어 명· 청 시대에 유행하였던 것으로 여성의 발을 천으로
꽁꽁 동여매 성장을 멈추게 하는 풍습이니 세살에서 다섯살 사이에 시작해야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사전에서는 “전족(纏足) 이란 어린 여자아이의 발가락을 꺾어 발바닥에 붙여 하나로
뭉친 뒤, 발을 천으로 꽁꽁 동여매 일정 크기 이상으로 자라는 것을 막는 중국
의 풍습, 혹은 그 풍습으로 인해 만들어진 작은 발을 일컫는 말이다” 라고 나옵니다.
전족(纏足) 이란 단어에 전(纏)이란 글자는 묶는다, 휘감는다는 뜻이니 (무언가로) 휘감은 발' 이란 뜻
인데 북송 때부터 1,000년 이상 지속되며 20세기 초반까지도 성행하다가 본토에서는 1930년대
후반 들어서, 식민지(대만, 홍콩, 마카오 등) 에서는 식민 모국의 금지 조치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설은 하나라 때부터 나타나고 당 말 오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 유물을 토대로 살펴볼
때 당나라 때까지 전족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실제로 전족이 나타나는 시기는 북송 때 부터로
한족이 자체적으로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서방 지역의 이민족들이 보여주던 발 끝으로
추는 춤 이 중국에 전래되면서 유행하다가... 아예 발을 작게 만드는 식으로 변질 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북송 당시의 전족은 그냥 발을 조여 매서 작게 만든 정도였다고 하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고문 못지
않게 변한 셈이며 북송 시대에는 전족이 유행하지 않았고 기녀나 상류층 에서만 성행했던 것
같으니 북송 초기 태평흥국 8년(983) 때의 돈황 벽화를 보면 귀족 부인들의 발은 전족이 아닙니다.
그 이후에 생긴 것으로 보이니, 전족은 11세기쯤 생겨서 송 휘종 선화 년간에 많이 보급되었을 것으로 추정
하는데, 남송에 이르러 상당히 보급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때도 궁중의 여인들이나 가기(歌妓) 들
에게만 보편적인 것이었을 뿐, 사대부 계층의 여자 가운데에는 여전히 전족이 되지 않는 여자들이 많습니다.
근세 조선의 여자 평균 키가 148cm 정도니 그보다 이전인 북송 대의 중국인 평균
신장은 더 작았을 것으로 본다면 17cm 는 가볍게 전족한 것이며 후기 전족
의 발등이 부풀어오른 형태 보다 보통 발 처럼 평평한 형태를 선호했다고 합니다.
명나라때 전족 처럼 발등이 부풀어 오른 형태가 되려면 발 뼈를 꺾어야 하는데 남송 시절 전족 유물들은
14cm 정도였으니 아직 발 뼈를 깍을 정도는 아니었으며 북송시대 11세기 정이(程頤) 나 남송시대
13세기 차약수(車若水) 등은 퍼져나가던 전족을 반대하고 집안 여인들에게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원나라 때는 몽골족 부터 전족 풍습을 받아들여 남송보다 훨씬 심해졌으니 원나라 잡극 이나 산곡에서
사람을 묘사할 때 발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없고, 작은 발에 대하여 악명 높은 삼촌금련
(三寸金蓮) 이 언급되니 이상적인 발은 크기 3촌(9cm) 쯤 되고 모양이 금빛 연꽃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명나라 대에 궁의 여자들에겐 전족이 필수 가 되었으니 홍무제 주원장은 자신 에게 끝까지 저항한 장사성
의 본거지 백성들을 처벌할 때, 남자는 글을 배우지 못하게 하고 여인은 전족을 못하게 했다는데 이후
전족이 되지 않는 것이 천민과 죄인의 상징 처럼 통하여 전족이 더욱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남자들은 아내 신발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자랑 하고 다녔다는데 친구들 사이에서도 아내의 신발
이 유독 작으면 그만큼 부러움을 샀던 모양이니 주원장의 황후인 효자고황후 마씨는 본래 하류층 출신
이었기 때문인지 전족이 되지 않아 발이 컸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에게 '큰 발 마황후' 라고 놀림을 당했습니다.
청대의 만주인 여자 들의 발은 전족이 되지 않도록 엄하게 금했으니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에 보면 전족이 됐는지 여부로 한족과 기인(旗人) 여성을 구별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족 여인들은 청이 전족을 금하자 "남자들은 굴복해 변발 을 하지만,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다." 라며
전족을 더 심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는데..... 기막힌 민족 투쟁 정신으로 애초에 만주인들은
여진의 기마 전통의 기풍이 남아 여인이라 해도 승마를 권장 했기 때문에 전족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강희제 때 잠깐 전족금지령 이 내려지기도 했으나 극심한 반발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갔으니
무엇 보다 정치와 크게 상관 없는 여자들의 일인지라, 문자 하나 하나까지 트집 잡아
한족 문인들을 탄압한 청나라도 극심한 반발을 감수하고 관여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나 봅니다.
변발령은 종교인을 제외한 남성을 대상으로 하고, 머리를 자르기만 하면 변화가 직관적 으로 보이지만 전족
금지는 그렇지 않으니 전족 금지령을 내려봐야 이미 어린 시절에 전족을 해서 작아진 발 이 커지지도
않고, 적용 대상도 금지령이 나올 당시 아직 전족을 하지 않았거나 갓 했던 소수 여아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건륭제 처럼 한족 여인의 전족을 아주 좋아한 황제 도 있었으니 청대의 전족 변형으로 10대 초중반
만주족 여자아이들 이 한 도조아 가 있는데, 도조아는 여자의 자율에 맡겼고, 한족보다 시행 연령이
높고 길이가 길었으며, 발을 부러뜨려서 묶는 게 아니라 발이 커지지 않도록 꽉 조이는 정도 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염증이나 감염, 기형의 위험 은 전족과 비슷비슷하긴 했어도 최소한 한족 여자
처럼 장애인으로 전락하진 않았으니, 도조아 말고도 만주족 귀족 여인들은
하이힐 처럼 굽이 높은 나막신 을 신고는..... 전족한 여인의 종종걸음 을 모방 했습니다.
화분혜 (花粉鞋) 라는 신발인데, 저 신발로 걷는데는 자력으로는 걷기 어렵고 시녀의 도움 을 받아야 했다고
하는데.... 전족을 한 것처럼 종종걸음을 걷기 위해 신발굽이 매우 불안정한 모습 으로 디자인 되었습니다.
명청대에는 원나라 때 나온 삼촌금련이란 말이 더 발전하여 '발의 크기는 9~10cm 를 넘지 않고, 칼날
처럼 가늘며 냄새까지 좋아야 한다.' 는 현대인 관점에선 야만스럽기 그지없는 기준이 확고히 자리
잡았으니 그리하여 여자들의 고통이 극심해졌으며 전국적 으로 전족 미인 선발대회 까지 열렸습니다.
이날만은 남편 이외 남자에게 보여주어선 안되는 전족된 맨발을 문 밖으로 내놓고 남자들의 평가 를 받았고
이 대회에서 우승 하면...... 그 집의 남자는 모든 남자들의 부러움과 선망 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심사 기준이 발 모양만 예쁘면 되는 게 아니라 모양만 예쁜 것은 제일 낮은 등급이었고, 모양도 좋고 촉감도
좋은 전족이 중등급, 모양과 촉감에다 향기까지 좋은 전족이 최상급 의 전족으로 평가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태평천국에서 전족을 금지 했고 변법자강 운동을 전개한 캉유웨이와 량치차오가 전족을 금하는
모임을 만들었으며, 1894년엔 서태후도 다시 금지령 을 내렸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게 전족이 곧 미인, 아름다운 여자의 기준 이 되는 바람에 전족이 안 되면 시집을 못 갔기
때문으로..... 더군다나 이 당시 여자들에게 시집은 일평생의 생존 이 달린 필사적인 문제 였습니다.
한창 성행할 때 전족은 신분상승의 수단 이었으니 전족에 완벽하게 적합한 발을 가진 여자아이
가 태어나면 가족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 가 되었으며 어떤 여자아이든,
아무리 가난하고 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도 전족만 완벽하게 되면 꽤 높은 가문에
시집을 갈 수 있었고, 가족들의 출세는 물론 그 여자아이를 배출한 마을의 자랑이었다고 합니다.
단순히 천을 감싸서 발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실제 행위가 너무나도
잔혹하기에 내용을 생략하고 또 생략한 것이니 중국 측 기록을 보면, 아이가 4~5세 때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발가락들을 발바닥 쪽으로 꺾은 다음에 천으로 동여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뼈를 부러뜨리고 묶어서 성장을 못하게 하는 것인데.... 그 당시는 당연시 했지만, 오늘날 보기
에는 잔혹한 아동학대에 불과하며 무사히 전족 만들기를 마쳐도, 전족을 한 여자는 발에
영구적인 장애를 입게 되어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니 X-ray 촬영사진을 보면 발등뼈가 반으로 꺾였습니다.
또한 발을 동여매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았으니 전족이 되기 시작한 초기 1-2년 정도를 억지로
많이 걷게 해서 발가락 관절에 일부러 상처 를 내고 부러트리며, 그걸 반복 했으니 그렇게
되면 뼈가 곪아서 연해지니, 계속 강하게 동여매서 크기를 작게 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아이가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 으로 죽거나..... 더 큰 장애를 가지게 됩니다.
멀쩡한 뼈를 부러트리고 관절을 뭉개며 살을 괴사 시키는데 아무 일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건데...
이렇게 전족이 완성되기 까지는 3년이 걸리며 이렇게 완성된 전족의 X-ray 사진을 보면 척골
이 발등 쪽으로 둥글게 휘어 솟아올라 있으니 엄지발가락과 발뒤꿈치가 맞닿아 있는 형태 입니다.
전족을 통해 지배층이 우월감을 표출 하려 했다는 설이 있으니 전족이 된 여자는 걸어 다니는 것도 힘들
어서 지팡이를 짚고 종종걸음 으로 다녀야 하는지라 가내수공업을 제외하고는 전족이 된 여자는
노동력이 없으니 때문에 전족이 된 아내 = 부의 상징 이 되어 부자들이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족이 된 아내를 선호했으며, 이것이 유행으로 번져 평민들까지 전족을 좋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했다는 설은 설득력이 없으니.... 과거 중국 역사상 남자가
여자보다 많았던 기간은 없었으니 중원국가 간의 내전은 물론, 외부 이민족의 침략
때문에 남성인력의 전투손실 이 상당했기 때문이고 아내가 도망가면 새로 아내를
들이면 되는 시대였으며 또 전족은 상류층 에서 시작되었는데 흔하게 가출했을리가 없습니다.
예상외로 전족된 발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선호했다는 설이 있으니 전족 관련 자료의 대부분은 중년
혹은 노년의 여인들의 발을 찍은 사진들이 대부분인데, 젊고 어린 여자들이 노출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니 실제로 어린 여자의 전족된 발은 대부분 아기 처럼 부드럽고 야들야들 했다고 합니다.
전족이 여자의 조임을 향상 시켰기 때문에 기득권자인 남자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유행처럼 번져
나가 사회 풍습이 됐다는 설도 있으며, 최근 연구에서는 여자를 소녀 때부터 장시간 앉혀
가족을 위해 직물을 짜고 옷을 만들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전족을 만들었다는 설이 제기됐습니다.
이 악습 은 근대 내내 축출하려고 했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러나 5.4 운동 이후 중국인
들도 인식이 바뀌게 되면서 전족이 사라지는데 큰 기여를 했으니 중국이 서구 열강에 침략
당하는 상황에서 전족은 여성들을 억압하고 중화 민족을 나약하게 만든 원흉 으로 지목당했습니다.
당시 중국 여인이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 전족이 된 발을 보여 준다는 것은 맨몸을 보여준 것만큼 수치스러운
것이었으니 변법자강운동 당시 일어났던 천족운동(天足運動) 은 전족된 발을 모두 풀고 전족도 금지하는
것이었는데, 강제로 전족된 발을 보이게 된 여자들은 수치심에 못 이겨 자살 하는 사건도 빈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10년대 부터 해안가 지역에서 부터 여자아이 한테 전족을 시키는 풍습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유행은 내륙지역으로 전파되었지만 중화민국 시절에는 행정력이 전국에 완전히 미쳤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족 풍습이 완전히 근절되지 못했지만, 전족을 한 발이 미의 증표 로 보는
시각이 많이는 줄어들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인 1950년대에는 전족 풍습이 완전히 사라 집니다.
오랜 기간의 풍습답게, 전족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문학 작품 도 무척 많으니 금병매에서는 서문경이 반금련의
전족에 반한다고 나오며 영화로 만들어진 금병매에서도 이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에 나오는 전족은 그냥
크기가 작아진 발 정도로 나와 사람들이 "독특하긴 하지만 이해 못할 취향은 아닌 것 같아." 하고 반응했습니다.
미국인 소설가 펄 벅 은 "중국에서 가장 없애야 할 것이 전족" 이라고 할 정도로 매우 싫어했는데
하지만 소설 대지 3부 '아들들' 에선 "중국인은 모두 전족을 한다." 고 말하며 비웃는 백인
들을 풍자하기도 했으니 분명 타파해야 할 악습이긴 하나 서양인들이 함부로 시혜적
으로 보고 조롱할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 본인이 주체적으로 없애야 한다고 보았던 듯 합니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위해서 건강을 해친다는 점에서는 하이힐이 현대의 전족 이라는 시각도 있으니
하이힐과 전족은 배경과 형태, 미용효과를 생각하면 차이가 크긴 하다지만
전족이 된 발의 실루엣 은 어찌보면 웨지힐 형태의 하이힐 모습과 상당히 유사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전족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발' 이 미인의 한 가지 조건 이었음은 서양에서도 비슷
했던듯 하니 근대 영국 배경인 유명한 동화 <소공녀> 에서 주인공 세라 크루의
작은 발 을 놓고 제시가 라비니아에게 "분명 비싼 신발로 작아 보이게 했을 거야."
라고 크게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오며 또 멀리까지 갈 것 없이 신데렐라 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직접 노동하는 하위계층' 과 '직접 노동하지 않고 하위계층의 생산력 으로 부양받는 상위
계층' 이 분화된 문화권에서는 육체노동을 천시 하는 풍조가 나타나고,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풍조의
문화권에서는 육체노동에 유리한 큰 손과 큰 발의 신체적 특징을 천시 하는 풍조 역시 흔하게 나타납니다.
남자에 대해서도 '큰 발' 을 노동계급의 신체적 특징 이라고 여겨 천시했으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소설에서
남주인공 레트 버틀러 가 남자다운 당당한 풍채를 가지고 있고 말타기나 사격 등 신체적 활동능력 역시
뛰어나다고 묘사된 것과는 별개로, 이 인물의 외견에 대한 묘사에는 “귀족적인 작은 발” 이 포함되었습니다.
당대의 유럽 보다 귀족주의 문화의 영향력이 훨씬 약했던 근대 미국에서 조차, '작은 발' 과 같은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신체적 특징을 귀족적인 면모 로 보고 아름답게 여기는 풍조는 있었던 것인데.....
더욱이 여자는 대외활동을 제약받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런 특징이 선호되는 경향이 더욱 강했던 것입니다.
경극에서 전족을 나타낼때 특수한 신발 을 신어 표현하는데 이 기술을 교공(跷功) 이라 하니 경극에서 여자배우
들의 출연이 금지 되자 나타난 기술로, 아무리 이쁘장한 소년이나 미남들을 여장시켜 출연시킨다지만
이들은 발을 동여매지 않았으니 아름다운 전족을 지닌 여인을 표현하기 위해 저런 기술이 등장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