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2020년 8월호(통권 618호)>
구기자 꽃/ 김종호
멀쩡한
저 꽃들을
구기자고 모의한다
구긴다고
구겨질까
히히히 웃음 난다
그래도
구기자 구기자
보는 이들 다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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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학 2020년 9월호(통권 619호)>
산촌(山村)· 외딴집/ 김영석(송파)
메아리가 다녀가서
앞산 뒷산 사이좋다
산꿩이
뻐꾸기가
화답하며 보낸 하루
저녁놀
언제 보아도
외딴집에 쉬어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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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돌/ 김진광
몸이 야무진 돌들은
야무진 생각을 해요.
먼 옛날 석기시대에
돌이 처음 생각한 선물
돌망치
돌도끼
돌칼
돌창
돌화살…
돌이 꼼짝 않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은
생각을 하는 중이지요.
-사람들이 감사하는
돌이 되고 싶어!
이런 생각을 했지요.
-사람들이 기도하는
돌이 되고 싶어!
또, 이런 생각을 했지요.
징검다리
돌담
성벽
돌기둥
돌 조각
돌부처
돌탑…
-야, 참 대단한 작품이군!
돌 앞에서 고개를 끄덕여요
나도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돌은 생각이 야무져요
돌 앞에서는 부끄러워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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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학 2020년 10월호(통권 620호)>
삐걱거리는 세월- 민속촌에서/ 윤용순
바람이 불 때마다
녹슨 경첩이 삐걱거린다
허리를 구부리고 드나들던
삼간초가(三間草家)
녹슨 경첩에 겨우 붙어 있는
문짝들이지만
열렸다 닫혔다 하던
지난 일들이
나름대로 생각을 갖게 하는가
믿고 바라고
그리고
참고 견디어 온 세월이
속절없이 삐걱거리면서
내려앉은 안방 여닫이
문 한쪽이
내 마음 속으로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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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학 2020년 11월호(통권 621호)>
...(상략)
권력을 쥔 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마련인데, 그것이 곧 국민의 삶을 눈에 잘 뜨이는 쪽으로 유도하는 재주를 부리게 됐다. 물가, 주거, 직업 안정에 노후보장, 균형발전, 치안과 국방에 주력한다. 코로나 사태로 국민들이 경황 없게 되자 더욱 경제적 처방에만 몰두한다.
위기에 사람을 위로하고 연대하며 통합하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인류 사회에 정신적 회복 탄력성을 제고하는 명약이라는 걸 생각조차 못한다. 행복과 평화와 자유가 물질보다 정신사에 있다는 걸 간파하지 못하는 응급 처방술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예술이 생업인 작가들은 재난 상황인데도 지원받기 어려울 뿐 아니라 생계수단인 글조차 쓰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최근에 예술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예술 활동 취소나 연기된 것이 무려 87.4퍼센트나 된다고 한다. 일방적 계약해지도 40.5%라고 한다.
- 권두언/ 김홍신(소설가·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글 속에 피가 흐른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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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수위(危險水位)/ 최숙영
하늘이 노하셨나 쏟아붓고 쏟아붓네
지구가 아프다며 소리쳐 외쳐대도
딴청만 피우는 세상 혼찌검을 내나 보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빈번한 홍수 가뭄
억 년 수림(樹林) 불에 타고 대기오염 심각해도
제 나라 이기심으로 세계는 수수방관(袖手傍觀)
코로나 출현으로 생활이 멈춘 한 해
일상의 소소한 행복 소중함을 깨우치며
경고성 문자 메시지 아이폰에 저장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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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학 2020년 12월호(통권 622호)>
파초우(芭蕉雨)/ 조지훈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촛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조 앉어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 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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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 냄새를 읽다/ 조정환
어머니는 삶은 햇콩을 띄워
청국장을 잘 만드셨다.
그것은 가난을 발효시켜 풍성한 밥상을 차리는 비결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효소를 물려받아 무엇이든
발효시키기를 좋아했다.
이를테면
생각을 발효시켜 문자를 활성화하거나
행간을 발효시켜 의미를 도출(挑出)하거나
시간을 발효시켜 미래를 꿈꾸거나
세월은 발효가 되지 않고
물그림자를 얼굴에 그리는 동안
생각의 갈피만 끝없이 늘어났다.
사람들은 왜
냄새 없는 청국장을 만든다고 맛을 버리고
발효되지 않는 지폐를 부풀리다가 빨간 경고등을 켜는
물의를 빚는 것일까?
어머니의 정직한 솜씨를 뒤늦게 깨달은 나는
겨우 문장을 발효시켜 시(詩)를 지었다.
청국장 맛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을
나는 애독자(愛讀者)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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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밥/ 윤평현
간절한 소망을 섞어
시간을 쪼개어 먹는다
좁은 틈바구니
지친 몸 달래며
가난한 주머니 털어
희망을 마신다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
오늘도 다짐을 껴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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