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설 때까지도 황간읍성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영동군청 홈페이지 그 어디에도 언급조차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다만 성지기의 희미한 자료에 의지해서 나선 길이다. 그래서 큰 기대도 갖지 못햇던 황간읍성 답사길은 예상과는 달리 많은 것을 보고 듣고 확인하는 의외의 답사가 되어 버린다. 그것은 전적으로 황간면 김광용 부면장님과의 만남 덕택이다.
황간읍지를 보니, 신라시 소라현(召羅縣)은 경덕왕 때 한자식 지명인 황간(黃磵)현으로 바뀌어 영동군의 영현이 되고, 고려때는 현재의 성주인 경산부와 김산군 소속이었다가 조선 태종 13년에 충청도로 예속된다.
면사무소에서 동으로 장교천을 따라 올라가면 냇물 왼편으로 절벽위에 정자가 보이고 돌아서서 구교리 안동네를 지나가면 현재의 황간향교로 들어선다. 현재의 황간 향교자리가 옛관아터였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토성이 이 곳을 지켰다.
낭만적으로 보이는 정자의 이름은 가학루(駕鶴樓)이지만 실은 사방을 살피는 전망대요, 지휘소였다고 한다.
황간읍성에서 영남 옛 과거길 중의 하나인 괘방령(掛榜嶺)과, 영동 노근리 현장까지을 다녀본다.
<자료를 얻기 위해 황간면사무소를 들렀다가. 친절한 김광용 부면장님을 만나다.>

< 황간현 고지도 : 황간읍성의 형태와 건물배치및 주변 지세를 본다 .(황간읍지에서) >

<장교천 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황간읍성 모습 : 황간향교 건물 지붕만이 보인다.>

<가학루 : 깎아낸 절벽아래로는 옛 4번국도가 지나갔고, 지금은 구교리로 해서 향교, 읍성으로 진입하는 도로가로 이용된다.>

<옛향교가 있던 곳이라는 지명의 구교리 동네 한복판을 지나 동북쪽으로 난 동문지 입구>

<마을 광장 같은 이곳에 성안 우물터가 있었다고 한다. : 나중에 다시 발굴 복원예정이라함>

<황간향교 홍살문을 지나면 가학루가 보인다.>

<가학루 >

<가학루(駕鶴樓) 안내판>

<최근 중수기(한국전쟁후)>

<5차 중수기>

<부면장님의 지형설명을 들으며>

<가학루에서 바라본 동쪽 남쪽 지형 - 멀리 황악산도 보인다.:
마침 경부선으로 화물열차는 서울쪽으로 지나가고, 앞에는 장교천이 해자 노릇하고, 기차, 고속도로, 국도, KTX철길 등 모든 길이 한 가닥으로 지나가는 길목을 내려다 본다.>

<가학루 뒷쪽으로 향교 명륜당 뒤로 사군봉( 使君峰 정상에 산성이 있고, 아래에는 기우제를 올리던 제단이 있었단다.
,그 너머로는 백화산 검돌성으로 이어진다.>

<토성으로 된 읍성을 따라 돌아보기 : 왼쪽 급경사 아래로는 대나무가 무성하다.>

<성안의 향교자리가 옛 관아자리라고 한다.>

<성벽위에 있는 포도밭 옆으로 난 토성벽 위에서 월류봉과 사인봉 보기
: 소라천, 초강천 장교천, 석천, 등이 합류해서 송천으로 해서 심천을 지나 금강이 된다.>

<양산 8경의 하나인 월류봉(月留峰) 일대 : 고지도에 나오는 용연과 한천정사가 있고, , 백화산 상주쪽에서 내려오는 석천(돌내)가 합치는 곳>

<과거에 합격하기를 기원하면서 다녔다는 괘방령 고갯길은 옛 영남대로 중의 하나 : 추풍령이 당시의 국도(관도)였다.>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임을 표시해주고 있다. 해발 300여 미터에 불과한 고개>

<괘방령의 남쪽 고개를 내려가면 바로 (김천)직지사로 이어진다.>

<돌아오는 길에 노근리 사건 현장을 둘러보다.>

<사건 개요 안내판 : 쌍굴다리인지, 쌀굴다리인지 한쪽은 보수공사 중>

<기관총 사격 탄흔 부분을 눈에 띄게 흰색 페인트로 표시해놨다.>

(지난날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그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