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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헤스터와 펄
노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헤스터 프린은 중얼거렸다.
죄받을 소린진 몰라도 저 사람이 밉구나!
헤스터는 이런 감정이 드는 자기를 꾸짖어 보았지만, 그 감정을 억누를 수도, 지워 버릴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런 마음을 억제하려 노력하면서, 먼 나라에서 있었던 아주 오래 전 일을 회상했다. 그때 그 사람은 저녁이 되면 온종일 틀어박혀 있던 서재로부터 나와 가정적이고 따뜻한 난로 곁에 젊은 아내의 미소를 마주하며 앉는 것이었다. 책 속에 파묻혀 있던 오랜 시간의 냉기를 학자의 마음에서 없애자면 이 미소로 몸을 녹이는 게 제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러한 장면이 그때는 행복으로만 여겨졌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그 뒤에 겪은 어두운 생활을 통하여 바라보니 그것은 어느 사이에 가장 추악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 어찌 그런 장면이 있을 수 있었는지 그녀는 의아스러웠다. 어떻게 저런 남자와 결혼할 마음이 생겼을까! 그 남자가 미지근한 손으로 자신의 손을 잡는 것을 참았을 뿐 아니라 자기도 맞잡았으며, 자신의 입술과 눈을 그 남자의 것에 합치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이 가장 후회되는 죄악으로 느껴졌다. 아직 철부지이던 자신을 설득하여 그의 곁에 있는 것을 행복하다고 믿게끔 한 것은 뒷날 그가 입은 피해와는 비교도 안 되는 훨씬 더 비열한 죄악이라고 생각되었다.
역시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어! 헤스터는 아까보다도 더 격심해져 되뇌었다. 그 사람은 나를 속였어! 내가 그 사람에게 한 것보다 그는 내게 더한 몹쓸 짓을 했던 거야! 남성들은 명심할지어다.
결혼 승낙의 표시로 상대 여성의 손만 얻었을 뿐 마음속에 넘쳐흐르는 정열까지 얻지 못한 남성은, 조심할지어다. 그 여성이 보다 강한 남성의 손에 닿아 여성으로서의 모든 감수성이 눈뜨게 되면 로저 칠링워드의 경우처럼 비참한 운명을 걷게 되리라. 또한 남성들이 그녀들에게 만족스런 현실로서 안겨 준 조용한 행복이라든가, 평온한 생활은 오히려 차디찬 대리석의 영상 같은 것으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7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그녀의 가슴에 고통의 화인으로 아로새겨진 주홍 글씨도 그녀에게 회환과 참회의 마음을 주지는 못했단 말인가?
그녀가 로저 칠링워드 노인의 불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섰던 짧은 시간에 떠오른 갖가지 감회는 그녀의 마음에 어두운 빛을 던졌다. 이와 같은 일이 없었다면 헤스터는 자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노인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 헤스터는 아이를 불렀다.
펄! 펄! 어딜 갔니?
정신 활동이 잠시도 쉬는 일이 없는 펄은 어머니가 약초를 채집하는 노인과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심심하지는 않았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처음에는 웅덩이에 비친 제 그림자를 벗하여 놀았다. 손짓해 불러도 물 속의 아이가 나오지 않자, 제가 직접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마침내 자기나 그림자 중 어느 하나는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더 재미있는 놀이를 찾아 다른 곳으로 갔다. 자작나무 껍질로 배를 만들고 조가비를 잔뜩 실어 물 위에 띄웠다. 그 배는 뉴잉글랜드의 상인보다 더 먼 바다를 향해 출범했다. 그러나 배는 겨우 바닷가 근처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펄은 살아 있는 아주 작은 참게, 여러 마리의 불가사리를, 따뜻한 양지쪽에 해파리를 끌어올려 녹여 버리기도 했다. 그 다음에는 밀물의 물결에 줄무늬를 이루고 있는 흰 거품을 잡아서 바람에 날리고는 눈송이 같은 큰 물거품이 땅위에 떨어지기 전에 잡으려고 급히 쫓아가기도 했다. 또한 바닷가에서 먹이를 쪼며 날아다니는 물새 떼를 발견한 이 장난꾸러기 아니는 앞치마에 수북하게 조약들을 주워 모아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숨어서 쫓아다니며 작은 물새에게 훌륭한 팔매질 솜씨를 보였다. 그러나 앞가슴이 하얀 잿빛 물새 한마리가 조약돌에 맞아 부러진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날아갔다. 그러자 이 요정 같은 소녀는 한숨을 쉬며 그 장난을 집어 치우고 말았다. 바닷바람과 같이 싱싱하고, 그녀 자신처럼 길들지 않은 그 어린 새를 해친 것이 마음 아팠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펄이 한 장난은 여러 가지 해초를 뜯어 모아 목도리, 망토, 머리 장식 등을 만들어 작은 인어로 분장하는 일이었다. 이 아이는 여러 가지 장식물이나 의상을 만드는 일에 어머니의 뛰어난 재능을 물려 받고 있었다. 인어 의 옷차림의 마지막 치장을 하기 위해 펄은 미끈미끈한 수초를 얼만큼 긁어와서 어머니 가슴에 달려 있는 것 같은 장식을 만들어 자기 가슴에 달았다.
그것은 A자였다. 그러나 주홍 색이 아니라 싱싱한 초록 색이었다! 아이는 턱을 가슴에 대고 그 글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목적은 그 글씨 뒤에 숨겨진 뜻을 알아내는 일이기라도 한 듯 이상한 흥미를 나타내고 있었다.
엄마에게 이 뜻을 물어볼까? 펄은 생각했다. 마침 그떄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펄은 어린 바닷새처럼 가볍게 뛰어서 엄마 앞에 가서는 춤을 추며, 웃는 얼굴로 자기의 가슴에 단 장식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헤스터는 잠시 말없이 펄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녹색 글씨는 아이들 가슴에 달아도 아무 뜻도 없어요. 하지만 엄마가 달고 있어야 하는 이 글씨의 뜻을 펄, 너 알고 있니?
알아요, 엄마. 아이는 말했다. 대문자 A자죠. 엄마가 책에서 가르쳐 줬잖아요.
헤스터는 물끄러미 펄의 작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눈동자 속에는 전에도 곧잘 나타나던 기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지만, 펄이 과연 이 글씨에 대해 어떤 의미를 느끼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긋에 대해 확인해 보고 싶은 병적인 욕망을 느꼈다.
엄마가 왜 이 글씨를 달고 있는지 아니?
알고말고요! 펄은 어머니의 얼굴을 명랑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대답했따. 목사님이 가슴에 손을 얹고 다니는 거나 같은 이유지 뭐!
그 이유란 뭐지? 헤스터는 뚱딴지 같은 아이의 말에 웃었으나, 다시 생각해 보고 얼굴빛이 달라졌다. 이 글씨가 엄마말고 딴 사람의 가슴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냐?
몰라요, 엄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야. 펄은 여느때보다도 심각한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엄마와 이야기하던 저 할아버지에게 물어 봐요! 가르쳐 줄는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엄마, 그 주홍 글씨의 뜻은 뭐예요? 왜 엄마는 그것을 가슴에 달고 다니죠? 왜 목사님은 가슴에 손을 얹고 다니고?
펄은 어머니 손을 자기이 두 손으로 잡더니, 여느때의 변덕스럽고 난폭한 성격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심각한 눈길로 말끄러미 어머니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헤스터는 이 아이는 지금 어린아이다운 본심을 털어놓고 자기에게 가까워지려는 게 아닌가, 모녀의 기분이 일치되는 세계를 찾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따.
그래선지 여느때의 펄과는 달라 보였다. 지금까지 헤스터는 자신의 가슴속에 깃든 모든 애정을 쏟아 펄을 키워 왔으나, 그녀로부터는 4월에 부는 산들바람은 변덕스러워 가볍고 상쾌하게 불다가도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정열적인 돌풍으로 변한다. 기분이 퍽 좋다가도 갑자기 발끈 성을 내기도 하고 가슴에 끌어안아도 쌀쌀맞게 모르는 체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알 수 없는 부드러움으로 볼에 키스를 하고,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사람의 마음에 꿈 같은 쾌감을 남겨 놓고는 딴청을 피우며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이 아이의 성질에 대한 어머니의 평가였다. 다른 사람들이 이 아이를 관찰했다면 귀염성 없는 성질만이 눈에 띄어 실제보다도 훨씬 더 음울한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펄은 놀라울 만큼 조숙하고 예민한 아이여서 엄마의 친구가 되어도 좋을 만한 나이가 된 게 아닌가 싶었으며, 엄마의 슬픔을 있는 대로 다 털어놓아도 모녀가 서로 거북하게 느끼는 일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펄의 조그만 혼돈된 성격 속에는 굽힐 줄 모르는 용기라든가, 지기 싫어하는 강한 의지, 자존심으로 발전하게 될 굳건하고 자랑스러운 태도, 허위로 보이는 숱한 일에 대해 나타내는 맹렬한 경멸심 등을 포함한 어엿한 주의 주장이 싹트기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싹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록 지금까지는 아직 덜 익은 과일처럼 씁쓸하고 맛없는 것이긴 했지만, 더없이 풍부하고 향긋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훌륭한 성격을 고루 갖춘 이 요정과 같은 아이가 장차 고귀한 여성으로 자라지 못한다면 아마 어머니로부터 물려 받은 죄가 너무도 크기 때문일 거라고 헤스터는 생각했다.
펄이 집요하리만큼 수수께끼 같은 주홍 글씨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몸의 일부로 지니고 나온 성질 탓인 것 같았다. 세상 물정을 조금씩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치 자신의 사명이나 되는 것처럼 이 수수께끼를 풀려고 했었다. 하느님이 이 아이에게 이러한 특별한 성격을 주신 것은 정의와 보복의 계획을 이행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헤스터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처음으로 ,하느님의 계획 속에는 자비와 은혜의 계획은 함께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펄이 이 세상의 아이로서뿐 아니라 정의와 신앙을 지닌 하느님의 사자로서 나타난 것이라면, 어머니 마음속에 차디차게 자리잡고 그 가슴을 무덤처럼 만들었던 슬픔을 잊게 해 주려는 사명을 지닌 게 아닌가?
지금 헤스터의 마음에 떠오른 이 같은 생각은 마치 누가 귓속말을 해 준것처럼 뚜렷한 인상을 남겨 놓았다. 그 동안에 펄은 엄마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고개를 쳐든 채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엄마, 그 글씨의 뜻이 뭐예요? 왜 엄마는 그걸 가슴에 달고 있지? 왜 목사님은 손을 얹지?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헤스터는 생각했다. 안 왤 일이다! 가령 이 아이의 동정을 살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은 말할 수 없다!
이윽고 헤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펄은 참 바보 같구나.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세상에는 아이들이 물으면 안 되는 일이 많이 있단다! 엄마가 목사님의 가슴에 대해서 알 리가 있겠니? 그리고 이 주홍 글씨를 가슴에 달고 있는 것은 금실이 좋기 때문이야!
지금까지 7년 동안 헤스터 프린은 자신의 가슴에 단 상징에 대해 단 한번도 거짓말을 한 일이 없었다. 이 상징은 엄격하고 가혹하면서도 한편으론 수호천사와 같은 역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헤스터를 저버리고 말았다. 엄격하게 헤스터의 마음을 감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새로운 악이 스며들었거나, 아니면 오래된 악이 추방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음을 알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펄의 얼굴에는 이제 조금 전과 같은 진지한 표정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아이는 이 문제를 그대로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니었다. 모녀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는 두세 번, 저녁을 먹을 때도, 잠을 재우고 있을 때도 몇 번이고 똑같은 질문을 하였다. 그리고 이젠 곤히 잠든 줄 알았는데, 검은 눈동자를 장난스럽게 반짝이면서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묻는 것이었다.
엄마, 그 주홍 글씨의 뜻이 뭐야?
다음날 아침, 펄이 잠을 꺠자마자 베개에서 머리를 들면서 물은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늘 주홍 글씨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 뒤따라 나오는 또 하나의 질문이었다.
엄마, 목사님은 왜 늘 가슴에 손을 얹고 계셔?
입 닥치지 못해, 못 되게시리! 어머니는 지금까지 보인 일이 없는 엄격한 말투로 대답했다. 엄마를 놀리면 못 써. 정 그러면 깜깜한 광 속에 가둘 테야!
16. 숲속의 산책
어쩌면 더욱 극심한 고통에 직면하게 되거나 또 장래에 어떤 궁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모를 일이나, 딤스데일 목사의 우정과 신뢰를 얻고 있는 한 남자의 정체를 그에게 알려 주어야겠다는 헤스터 프린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목사가 반도의 바닷가나 부근 숲 속을 산책하는 습관이 있음을 알고 있는 그녀는 그를 만날 기회를 얻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며칠 동안은 허탕치고 말았다. 설령 그의 서재로 찾아간다 해도 나쁜 소문이 날 리는 없었으며, 목사의 청렴결백한 명성에 영향을 끼칠 염려도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주홍 글씨가 나타내는 죄에 못지않은 죄악을 고백하기 위해 그 서재를 찾아가곤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남 몰래, 아니 어쩌면 공공연히 간섭하고 나서지나 않을까 걱정되었고, 아무도 그들의 비밀을 알 턱이 없었으나 지레 의심받는 것이 두려웠으며 또 그와 이야기하는 동안보다 넓은 세계에서 호흡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헤스터는 비좁은 서재보다 탁 트인 하늘 아리서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헤스터는 어느 병자의 집으로 간호를 하러 갔을 떄 목사가 그 전날 인디언 개종자들과 함께 살고 있는 엘리어트 전도사를 만나러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오후쯤이면 돌아오리라는 것이었다. 이튿날 헤스터는 그가 올 무렵에 펄을 데리고 나섰다. 펄이 곁에 있다는 것이 간혹 불편할 떄도 있었지만, 어머니가 외출할 땐 으레 동행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반도에서 본토 쪽으로 들어가니 길은 오솔길이나 다름없었다.
그 길은 신비스러운 원시림 속으로 꼬불꼬불 휘어들고 있었다. 길 양쪽에는 하늘이 가려질 정도로 숲이 뺵뺵이 들어차 있었기 때문에 헤스터는 그녀가 오랫동안 방황해 오던 정신의 황야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날씨는 쌀쌀하고 음산했다. 머리 위에는 잿빛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지만 바람이 조금씩 살랑대고 있었다. 그로 인해 흔들리는 한 줄기 빛이 가끔씩 오솔길 위를 희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흔들리는 밝은 빛은 숲 속 저쪽 끝에만 비치고 있었다.
이 장난스러운 햇빛은 모녀가 가까이 다가가면, 저만큼 멀어져 버려 아까까지 햇빛이 뛰놀던 자리는 한층 음울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녀가 햇빛이 잘 드는 곳으로 나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걸었기 때문이다.
엄마. 펄이 말을 걸었다. 해님은 엄마가 싫은가 봐. 엄마 가슴헤 단 것이 무서워서 도망쳐 숨어 버리나 봐. 자! 저기 봐! 저쪽에서 졸고 있잖아. 엄마는 여기서 좀 기다려 봐요. 내가 뛰어가서 잡아 볼 테니. 나는 어린 아이니까, 나한테서는 도망치지 않을 거야. 내 가슴에는 아직 아무것도 달지 않았으니까!
나중에라도 달아나서는 안 돼.
헤스터는 말했다.
왜 안 돼? 펄은 막 뛰어가려다 말고 우뚝 멈춰서며 물었다. 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게 아냐?
자 빨리 뛰어가기나 해! 어머니가 말했다. 해님을 잡는 거야, 또 금방 없어지겠다.
펄은 재빠르게 달려가더니 정말 햇빛을 붙잡아 그 가운데 서서 환하게 웃었다. 온몸에 햇빛을 받고 선 펄은 달음박질 때무에 생긴 활기로 빛나고 있었다. 햇빛은 마치 동무가 생겨서 기쁘다는 듯이 혼자 서 있는 어린아이 둘레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그 햇빛의 마술적인 원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도망간단 말야!
펄은 고개를 내저었다.
봐라! 헤스터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엄마도 손을 뻗치면 조금은 잡을 수 있어.
헤스터가 손을 내밀자 햇빛은 사라져 버렸다. 아니, 사라져 버렸다기보다 펄의 얼굴 위에서 춤추고 있는 밝은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이 아이가 햇빛을 몽땅 흡수하였다가, 자신들이 더 어두운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그 햇빛을 발산하여 길을 밝혀 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펄의 특성 가운데서 헤스터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자신에게서 물려 받았다고는 이들은 거의 조상들로부터 선병과 함께 슬픔이라는 병을 유전받는 법인데, 펄은 전혀 그런 질병과는 인연이 멀었다. 아니, 어쩌면 도리어 그것이 일종의 벙인지도 모른다. 펄이 태어나기 전에 온갖 슬픔과 싸워야 했던 헤스터의 투쟁에 대한 반동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것이 이 아이의 성격에 굳은 금속과 같은 광택을 주는 기묘한 매력임에는 틀림없었다. 이 아이에게는 사람을 깊이 감동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다운 동정심을 갖게 하는 그런 비애의 마음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 펄에게는 충분한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이리 와! 헤스터는 아까 펄이 햇빛에 싸여 서 있던 곳을 둘러보며 말했다. 숲 속으로 좀 들어가서 쉬기로 하자.
엄마, 난 피곤하지 않은걸. 하고 펄은 말했다. 하지만 엄마가 이야기를 해 준다면 그렇게 할게.
이야기라니! 무슨 이야기 말야?
그야 악마 이야기지, 뭐! 펄은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으며 반은 정색을 하고 반은 장난기 어린 눈으로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숲 속에 사는 악마 얘기 말야. 무쇠 장식이 달린, 크고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니다는 악마 이야기..... 무서운 악마는 숲 속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책과 펜을 내밀고 모두 자기 피로 이름을 쓰게 한대나 봐. 그러면 악마가 가슴에 표시를 달아준대! 엄마는 악마를 만난 일이 있어?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지. 펄?
헤스터는 그 무렵에 유행하던 미신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 물어 보았다.
엄마가 어젯밤 병간호하러 간 집이 있잖아, 나로 옆 구석에 앉았던 할머니가 해 줬어.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할 떄 할머니는 내가 자고 있는 줄 알았나봐. 이 숲 속으로 악마를 만나러 와서 책에 이름을 쓰고 가슴에 표시를 단 사람은 몇 천 명이나 된대요. 그 기분 나쁜 히빈스 아줌마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래요. 그리고 엄마, 그 할머니가 그러는데 이 주홍 글씨는 악마가 달아 준 표시래. 밤중에 이 어두운 숲에서 엄마가 악마를 만날 때는 빨간 불꽃처럼 빛난다고 그러던데? 정말야, 엄마? 밤중에 악마를 만나러 가?
네가 잠이 꺠었을 때 엄마가 없었던 일이 있니?
헤스터는 물었다.
잘 모르겠어. 나를 집어 두고 가는 게 걱정이 되거든 데리고 가도 돼.
기꺼이 따라갈 텐데! 하지만 엄마, 이것만은 지금 가르쳐 줘. 악마라는 게 있어요? 엄마는 만난 일이 있어? 이게 정말 그 표시야, 엄마?
한 번만 말해 주면 엄마를 귀찮게 굴지 않지?
하고 헤스터가 물었다.
응, 모두 말해 주면.
펄은 대답했다.
지금까지 꼭 한 번 악마를 만난 일이 있단다! 이 주홍 글씨가 그 표시야!
그들은 이런 얘기를 나누며, 오솔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숲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이끼가 수북하게 낀 바위 앞에 이라자 그들은 그 위에 걸터앉았다. 아마 전세기 어느 시기에는 어두운 숲 그늘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 높이 뻗어올라갔을 거대한 노송이 있던 자리인지도 모른다. 둘이 않은 곳은 작은 골짜기였는데, 나뭇잎이 깔린 둑이 양쪽으로 봉곳이 솟아 있고, 그 둑 사이로 시냇물이 나뭇잎이 가라앉은 바닥 위를 흐르고 있었다. 냇물 위로 휘눌어진 큰 나뭇가지들이 군데군데 흐르는 물을 막고 있어 여기저기에 소용돌이와 깊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물살이 센 곳에서는 조약돌과 누렇게 빛나는 모랫바닥이 드러나 보였다. 시냇물의 흐름을 눈으로 쫓으면 숲 속으로 조금 들어간 부분에서 수면에 반사되는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수풀과 잿빛 이끼가 덮인 바위들이 들쭉날쭉한 곳까지 오면 이미 빛은 흔적오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 거목이나 화강암등은 모두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 자취를 숨기는 데 열중해 있는 것같이 보였다. 시냇불의 끊임없는 수다가 원류가 있는 태고적 숲 속의 얘기를 재잘거리거나, 못의 매끄러운 표면이 숲 속의 은밀한 신비를 모조리 반사시키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시냇물의 물줄기는 쉴새없이 부드럽고 조용하게, 마음을 어루만져 주듯 정답게 재잘거렸다. 그러나 어린시절을 슬픈 사람들과 침울한 사건들 사이에서 아무런 재미도 없이 지냈기 때문에 도통 명랑해질 줄 모르는 아이의 목소리처럼 우울하였다.
시냇물아! 어쩜 그렇게 바보 같고 기운이 없니! 펄은 시냇물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외쳤다. 어째서 그렇게 슬프니? 기운을 내! 언제나 그렇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지만 말고!
그러나 시냇물은 숲 속의 나무들 사이에서 지낸 짧은 일생을 통해서 몹시 엄숙한 경험을 해 왔으므로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같았고, 그밖에 할말은 아무것도 없는 성싶었다. 이 시냇물은 신비로운 원천에서 솟아났고, 답답하고 침울하게 그늘진 광경 속을 흘러온 점으로 봐선 펄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냇물과 달리 펄은 춤추고 반짝거리며, 즐겁게 지껄이면서 제 길을 가는 것이다.
이 시냇물은 왜 슬퍼하는 거지, 엄마?
네게 슬픈 일이 있으면 시냇물이 그것을 가르쳐 줄 거야. 어머니는 대답했다. 지금 엄마에게 가르쳐 주는 것처럼! 그런데 펄, 엄마에게는 누군가 산길을 걸어오는 발소리와 나뭇가지를 헤치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너는 저만큼 가서 놀고 있거라. 엄마는 저기 오는 분과 이야기를 좀 할 테니.
그 사람은 악마예요?
펄은 물었다.
저기 가서 놀라니까. 어머니는 되풀이했다. 하지만 너무 숲 속으로 들어가면 안 돼요.
엄마가 부르면 곧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야 해.
그래요, 엄마. 펄은 대답했다. 하지만 만일 그 사람이 악마라면 좀더 이곳에 있게 해 줘요.
그 큰 책을 끼고 있는 것이 보고 싶으니까.
자, 어서 가요, 바보 같은 소린 하지 말고. 어머니는 초조한 듯이 말했다. 악마가 아니야.
벌써 나무 사이로 보이잖니. 목사님이시잖아!
정말! 저것 봐, 엄마, 가슴에 손을 얹고 계시잖아! 목사님이 악마의 책에 이름을 썼을 때 저곳에 표시를 달았기 때문인가? 그런데 왜 엄마처럼 가슴 위에 달지 않으실까?
자, 어서 가요. 나중에 네 이야길 다 들어 줄게! 헤스터 프린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멀리 가면 안 돼.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곳에 있어야 한다.
아이는 노래를 부르면서 시냇물 쪽으로 걸어갔다. 우울한 시냇물의 속삭임에 좀더 밝은 노랫소리를 혼합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시냇물은 위안받기를 싫어하듯 이 쓸쓸한 숲 속에서 일어난 구슬픈 사연의 비밀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지껄이고 있었다. 아니,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언의 애가를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의 짧은 인생 속에 지나칠 만큼 어두운 그림자를 간직한 펄은 이렇게 불평만 하고 있는 시냇물과는 친해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오랑캐꽃, 홀아비 바람꽃, 그리고 높은 바위 틈에 나 있는 빨간 미나리풀꽃 따위를 모으기 시작했다.
요정 같은 딸아이가 가버렸으므로 헤스터 프린은 숲으로 빠지는 오솔길 쪽으로 한두 발짝 걸어가다가 그대로 울창한 나무그늘에 서 있었다. 오솔길을 걸어오는 목사가 보였다. 그는 혼자였고, 도중에서 나무로 만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의 수척한 모습은 몹시 초췌해 보였고, 절망의 빛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그것은 보스턴 거리를 걷고 있을 때나, 남의 눈에 띌 우려가 있는 곳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이처럼 한적한 숲 속에서 혼자일 때 그것은 보기에 딱할 정도로 눈에 띄었다. 아마도 혼자 있다는 그 자체가 그에게는 큰 정신적 시련이었는지도 모른다. 걸음걸이조차도 모든 일이 귀찮은 듯. 마치 더 이상 발을 옮겨 놓을 이유도 의욕도 없고 그대로 가까이 있느 나무 뿌리 곁에 몸을 내던지고 일생 동안 꼼짝없건, 나뭇잎이 그 위에 덮이고, 그대로 흙이 쌓여 작은 무덤을 만들 것이다. 그러면 죽음은 스스로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확정적이었다.
헤스터의 눈에는 딤스데일 목사가 뚜렷하고 생생한 고뇌에 잠겨 있는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펄이 말판 것처럼 가슴에 손을 얹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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