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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회의 신학적 정체성
우리는 방향을 제대로 잡았는가?
“한국 감리교회는 제대로 가고 있는가?” 감리교회의 미래를 전망할 때 먼저 이 물음부터 던져야 할 것입니다. 제대로 가고 있다면, 방향을 잘 잡았으므로 ‘주마가편’(走馬加鞭),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해 더 잘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가고 있지 않다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반성해서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방향과 속도는 둘 다 중요하지만, 먼저 방향이 제대로 잡힌 뒤에라야 속도도 의미가 있는 것이지, 방향이 잘못된 채 속도만 붙을 경우 도리어 위험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북쪽에서 전쟁이 터졌는데, 제아무리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무장을 하고 날쌘 군마를 타고 남쪽으로 달려간다면 승리는커녕 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이런저런 기회를 통하여 제가 들어온 이야기는, 평신도나 목회자를 막론하고 우리 감리교회 내부의 상당수 지도자들이 감리교회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이 보입니다. 심지어 감리사 감독제도, 은급 제도 등등에 신물이 나서 독립교회를 고려하는 이들도 있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이처럼 그동안 우리가 취해온 방향성에 대한 혼란이 가중되고 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으로 교계 안팎이 뒤숭숭한 이때에 우리 감리교회는 무엇보다도 ‘정체성’ 문제부터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교조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91)가 시작했고 발전시켰던 감리교 운동의 참 모습은 본디 이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도대체 얼마만큼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의 뿌리에서부터 이탈되었고, 변질되었고, 오염되었는가를 심각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와 같은 검토와 반성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감리교회성’(authentic Methodism or Methodist authenticity)을 회복하고자 또 다시 분골쇄신(粉骨碎身)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길을 잘못 들었다는 징후가 곳곳에 감지되고 있기에 차제에 과감히 궤도수정을 해서라도 바른 감리교회상을 모색하고 지향하겠다는 것이 이번 심포지엄의 취지로 알고 있습니다.
제한된 시간에 많은 것들을 다 짚어낼 수 없기에 저는 특히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보는 과정에 나서고자 합니다.
첫째, 진정한 감리교회를 탐색한다고 할 때 먼저 과연 ‘감리교 신학’과 ‘감리교 전통’이라는 것이 있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이 물음이 정당한 것은 감리교 운동이 시작된 이래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시대 여러 장소에서 수많은 감리교 신학자들이 활동해오고 있기에 이른 바 ‘감리교 표준 신학’을 설정하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감리교 전통’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웨슬리 이후 지구상에 펼쳐져 온 다양한 감리교 전통들 중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감리교 전통의 모델’이 어떤 것인지를 엄밀히 따져봐야만 할 것입니다. 예컨대 한국에 감리교회를 전해준 미국 연합감리교회(UMC)가 자신의 모체인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으로부터 크게 빗나가 오염되었다면 우리가 본으로 삼기 어려운 전통이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적어도 제가 본 강연에서 ‘감리교 신학’과 ‘감리교 전통’이라는 표현을 쓸 때에는 모든 것을 뭉뚱그리는 일반적(general)이고 기술적(descriptive)인 것이 아닌, 특수하고(particular) 규범적인(normative) 것들임을 밝혀둡니다.
둘째, 감리교 신학과 전통의 중핵(中核/cores) 혹은 정수(精髓/essentials)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묻고 답하고자 합니다. 이 역시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지만 감리교 운동의 발단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감리교 신학과 감리교 전통의 ‘감리교성’(監理敎性/ Methodism/Methodistness)을 규정지을 수 있는 감리교 신학과 전통의 고유성(idiosyncrasy) 혹은 진정성(authenticity)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셋째,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 관한 제 나름대로의 대답 위에 근거해서 보다 진정한 감리교회상을 수립하기 위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합니다. 어쩌면 제 강연의 결론부요 정점에 해당될 이 부분에서 저는 ‘구세군’ 하면 ‘자선냄비’를 연상하듯이, ‘한국 감리교회’ 하면 저절로 떠오를 수 있는 ‘신학적’ 혹은 ‘교파적’ 브랜드가 무엇인가를 탐색해보고자 합니다.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지면에 지금까지 제기한 질문들을 정밀하게 검토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때로 일반화와 비약을 피할 수 없음을 솔직히 자인하고 매우 개략적인 스케치라도 할 수 있고, 아니면 어떤 근본적인 방향제시 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저의 발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감리교 신학’과 ‘감리교 전통’은 있는가?
‘감리교 신학’과 ‘감리교 전통’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광범위한 개념입니다. 웨슬리 형제 이후에 영국과 미국에서만도 수많은 신학자들이 ‘감리교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다양한 신학 이론들을 전개해왔기 때문이지요. 감리교 전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웨슬리안’ 혹은 ‘감리교’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운동들과 제도들이 변화무쌍한 과정을 거쳐 오는 동안 각기 거대하고도 독특한 전통과 역사를 이루어왔는데, 그 중에서도 ‘진정으로 감리교적 전통’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인지, 설령 있다고 해도 이것을 추출해내는 작업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의구심은 저의 강연이 단지 감리교 신학과 전통을 소개하는 기술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감리교성을 규정지을 만큼 고유하고 표준적인 그 무엇이 있는가 하는 규범적인 측면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음을 재차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감리교 신학과 전통의 다원성(plurality)이라는 현실 앞에서 과연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표준적인 감리교 신학과 전통’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규명해낼 수 있을까요?
이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매우 유용한 개념적인 도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norma normans’(the rule that rules, 다른 모든 규범들을 규정하는 최고의 규범)와 ‘norma normata’(a rule that is ruled, 상위 규범에 의해 규정되는 규범)입니다. 가령 사도신경을 비롯한 모든 신경들은(creeds) 후자에 속하는 반면에, 성경은 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신경들의 진정성을 규정할 수 있는 최고의 규범은 성경이므로, 예컨대 사도신경의 정당성은 마땅히 성경에 비추어서 판단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개념을 신앙의 진정성과 연계시킬 경우 전통이나 이성, 계시, 체험 등 우리의 신앙을 판단할 수 있는 다양한 규범들이 있겠지만, 역시 최고의 규범, 즉 규범 중의 규범은 성경, 성경 중에서도 신약성경, 다시 신약성경 중에서도 사도신앙을 품고 있는 공관복음서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성경을 가능케 한 궁극적 원인인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이라고 봐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슈버트 아그덴(Schubert Ogden, 1928∼)의 말처럼 모든 기독교적인 신앙의 진정성을 가릴 수 있는 규범들 중에 최고의 규범인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전통, 그리고 그 밖에 ‘일체의 기독교적인 권위를 가능케 하는 제일의 원천’(the primal source of all authority)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개념들을 감리교 신학과 전통에 적용할 경우, 웨슬리 이후에 구라파와 미국에서 전개되어온 일체의 감리교 신학과 전통은 ‘norma normata’일 뿐입니다. 예컨대 앨버트 아우틀러(Albert Outler, 1908∼89)나 콜린 윌리엄스(Colin Williams, 1921∼)의 감리교 신학은 감리교 신학의 ‘norma normans’가 될 수 없겠지요. 당연히 ‘감리교’ 라는 용어를 가능케 한 존 웨슬리의 저술물들과 그의 원시적 감리교 운동만이 여타의 모든 감리교 신학과 전통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최고이자 최후의 규범, 즉 ‘norma normans’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웨슬리의 다양한 저술물들과 초기 감리교 운동의 다양한 양상들 가운데 도대체 어떤 것들, 어떤 층들이 ‘norma normans’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심층적인 해석과 다각도의 토론이 필요할 것입니다. 존 웨슬리의 경우 이 모든 웨슬리적 감리교 운동을 가능케 한 창시자로서, 다른 모든 감리교 신학과 전통의 제일의 원천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없는 성경이나 기독교 전통을 생각할 수 없듯이, 존 웨슬리 없는 감리교 교리나 신학, 감리교 전통과 역사는 상상하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던진 질문 중에 하나의 답이 주어졌습니다. 감리교 신학과 전통은 감리교를 가능케 한 제일 권위의 원천으로서의 존 웨슬리와 그의 저술물, 그리고 그의 원시 감리교 운동 위에 정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웨슬리 이후 전 세계 곳곳에서 전개되어온 일체의 감리교 신학과 전통의 진정성은 이 모든 신학과 전통의 ‘norma normans’가 되는 웨슬리의 저술물들과 웨슬리의 원시 감리교 운동에 의해 판단 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이지요. 이로 보건대 그 어떤 개인이나 공동체도 웨슬리나 그의 저서, 그의 감리교 운동에 의거하지 않은 채 진정한 감리교 신학이나 전통을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졌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심각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웨슬리의 감리교 신학과 감리교 전통의 진정성은 다시금 어떤 잣대에 의해서 평가받아야 할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과 기독교 전통이어야 하겠지요. 이 경우 웨슬리와 그의 감리교 신학과 전통이 ‘norma normata’가 되고 그리스도와 성경과 전통이 ‘norma normans’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리교 신학과 전통의 진정성은 기독교 신학과 전통이라는 훨씬 더 넓은 지평에 의해서 평가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 감리교도들이 제아무리 웨슬리 신학과 감리교 전통을 자랑스러워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의 상위 규범일 뿐 아니라 최고의 규범인 성서에 정합(整合/appropriate)하지 않을 경우, 그리고 무엇보다도 웨슬리를 비롯한 모든 기독교적 권위를 가능케 하는 제일가는 권위의 원천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정합하지 않을 경우, ‘진정으로 기독교적’(authentically Christian or Christianly authentic)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웨슬리가 교파우월주의나 성차별주의, 노예제도를 지지하거나 조장했다고 할 경우 성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합치하지 않으므로 ‘진정으로 기독교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은 참으로 중요한데, 여하한 일이 있어도 웨슬리나 그의 신학, 그의 감리교 운동의 전통을 절대화하거나 우상화해서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웨슬리보다 훨씬 더 크신 분, 즉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히 12: 2)가 우리의 궁극적 관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웨슬리와 그의 감리교 운동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하나의 ‘표식’(sign)이나 ‘방향 지시기’(indicator)일뿐이지 궁극적 실재나 목표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웨슬리보다 더 크신, 모든 권위의 제일의 원천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제쳐두고 웨슬리 타령만 하거나 ‘norma normata’로서의 웨슬리신학과 전통만 떠받들고 이것의 ‘norma normans’, 즉 상위 규범 혹은 최고의 규범인 성서와 기독교 전통,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도외시한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달을 본다고 하면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고맙고 중요한 한 가지 진실은 존 웨슬리의 신앙과 삶, 그의 교리와 신학, 그리고 그의 감리교 운동이 성서와 기독교 전통은 물론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매우 훌륭하게 구현했다는 부동의 확신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감리교인으로 불리기를 기뻐하고 또한 감리교 전통 안에 확고히 머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2) 감리교 신학과 감리교 전통의 중핵은 무엇인가?
이미 감리교 신학과 전통에 관한 숱한 연구 발표가 있어왔기에 그동안 알려진 사실을 요약하는 수준에서 이 물음에 답하고자 합니다. 감리교 신학과 전통에 있어서 정말 이것 없이는 ‘감리교’라는 말을 붙이기 어렵다는 웨슬리적 본질을 살펴보기 전에 아우틀러의 경고를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웨슬리는 제대로 읽혀지기 보다는 숭배되기에 급급했으며 바로 이해되기 보다는 찬양받기에 더 바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웨슬리를 한 사람의 조직 신학자로 보기 보다는 실천적 행정가나 열광적 부흥사에 불과하다고 폄하해서 안 됩니다. 영국 국교회나 가톨릭교회, 혹은 루터-칼뱅 선상의 개혁 신앙의 아류 정도로 치부해서도 안 됩니다. 가톨릭적인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고 개신교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1738년의 올더스게이트 회심 체험만 일방적으로 강조해서도 안 됩니다. 웨슬리의 고(高)교회적 측면만 강조해서도 안 되고, 웨슬리의 성례전에 대한 관심은 무시한 채 복음주의적인 저(低)교회적 측면만 강조해서도 안 됩니다. 웨슬리를 자유주의적 경험신학의 선구자로서 이해하거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성된 신정통주의 입장에서 루터나 칼뱅, 바르트의 빛에서 읽는 것도 적절치 않습니다. 웨슬리가 초대교회 교부들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에서, 특히 동방 정교회의 편향된 시각에서 해석하려는 시도 역시 온당치 않습니다. 구라파 대륙의 경건주의와 청교도주의가 웨슬리와 감리교 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해서 감리교 운동을 경건주의나 청교도주의의 한 분파 운동으로 이해하려는 작업도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웨슬리와 감리교 운동을 이와 같이 편향된 시각에서 읽으려는 시도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으로 웨슬리의 총체적인 모습, 즉 88세의 긴 생애와 특히 66년 동안의 목회 사역 기간 동안 약 400여종의 저술물을 남긴 전(全)웨슬리의 사상과 목회 사역의 연속성과 변화를 공정하게 조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제가 강조하고 싶은 요점은 감리교 신학과 전통의 고유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어떤 특정 신학적 입장이나 조류에 의해서가 아니라 웨슬리 본인과 그 시대적 삶의 자리에서 한 편으로 초기(1733∼38), 중기(1738∼65), 후기(1765∼91)의 세 국면에 있어서의 웨슬리의 사상과 목회의 변화를 미시적으로 밝혀내고, 다른 한 편으로 웨슬리 신학의 근저에 유유히 흐르는 하나의 불변하는 고유 광맥을 거시적으로 밝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웨슬리 신학과 전통의 정수는 무엇일까요?
첫째, 웨슬리 신학은 철두철미 인간의 구원 문제에 천착해 온 ‘그리스도-구속론 집중적 신학’이었습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 비견할 수 있는 ‘구원의 길’(via salutis) 혹은 ‘구원의 순서’(ordo salutis)에 집착했습니다. ‘은혜, 창조, 인간의 타락’ → ‘죄를 자각케 하는 은혜와 최초 회개’ →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신앙의인화’ →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주어지는 신생’ → ‘구원의 확신’ →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성화’ → ‘최후 의인화’ 순으로 구원의 순서 문제를 ‘오직 믿음으로’(faith alone)라는 개신교적 대원리와 ‘성결의 삶’(holy living)이라는 가톨릭적인 대주제로 풀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웨슬리적 구원의 순서에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며 끝없는 성결과 자기 혁신의 과정을 통하여 마침내 기독자의 완전에 까지 이르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주류를 이룹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죄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심으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gift)인 동시에,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완성에 인간 편에서 동참하도록 재촉하시는 ‘요구’(demand)입니다. 랜디 매닥스(Randy Maddox)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총 없이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없으며, 우리의 참여(은총으로 능력이 부여되지만 결코 강압적이지 않은 바) 없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웨슬리적 은혜 개념은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 전적으로 값없이 베푸시는 초월적 선물로 보는 개신교적/하향적 은혜 개념과, 인간 편에서의 책임적 결단과 윤리적 동참을 요구하는 가톨릭적/상승적 은혜 개념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매닥스가 말한 것처럼 ‘책임적 은혜’(responsible grace)에 다름 아니지요.
이제 중요한 사실은 개신교 주류가 성화를 약화시키며 오직 의인화에만 매여 있음으로 수동주의 혹은 정적주의에 빠질 수 있고, 가톨릭이 신앙 의인화보다 성화에 더 깊이 몰두함으로 공적주의 혹은 율법주의에 흐를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웨슬리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인화)과 ‘성결의 세계적 확장’(성화)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점에서 웨슬리 신학은 양자택일의 신학이 아니라 상극적 대립을 창조적으로 통합시키는 ‘연결의 신학’(connectional theology)이요, ‘접속의 신학’(conjunctive theology)입니다.
실로 웨슬리는 머리와 가슴, 자연과 은총, 의인화와 성화, 믿음과 선행, 가톨릭주의와 개신교주의 등등의 대립되는 요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일관된 주제로 화해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여왔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웨슬리가 비록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적 노선 위에 서 있었지만, 개신교의 치명적인 약점(흔히 반율법적인 경향성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인한 인간의 무력화 현상)을, 가톨릭적인 장점(흔히 인간 편에서의 율법적인 구원협조와 성결화 과정에 대한 강조)을 받아들임으로써 극복했다고 봅니다. 이러한 절충주의적 특징 때문에 웨슬리는 신교나 구교 모두로부터 오해와 공격을 당할 여지가 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어 왔지만 아우틀러가 주장하듯이 이와 같은 ‘웨슬리적 종합’이야말로 교회사를 그토록 오랫동안 양분해온 신앙과 선행, 의인화와 성화, 개신교주의와 가톨릭주의의 첨예한 긴장을 해소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웨슬리적 구원론의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성결’, 즉 성화의 강조에 있을 것입니다. 루터와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주의자들이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이신칭의’(以信稱義)가 일어나는 순간에 어느 정도의 성화도 함께 일어난다고 봄으로써 칭의와 성화를 날카롭게 구분하지 않은 것과 달리, 웨슬리는 칭의를 머나먼 기독교적 순례의 삶에 있어서 하나의 출발점으로 보면서 성화에 훨씬 더 큰 무게를 두었습니다.
“다른 모든 교리들을 포함한 우리 감리교회의 중심 교리는 회개와 믿음과 성결입니다. 회개는 종교의 현관이며 믿음은 종교의 문이며, 성결은 종교 그 자체입니다.”(Our main doctrines, which include all the rest, are three, that of repentance, of faith, and of holiness. The first of these we account, as it were, the porch of religion; the next, the door; the third, religion itself.) ― In Wesley's The Principles of a Methodist Farther Explained(1746)
“하나님의 계획은 … 새로운 교파를 세우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국, 특히 영국 국교회를 개혁시키는데 있었습니다. 바로 성서적 성결을 영국 전체에 확산시키는 것이었습니다.”(God's design was … not to form any new sect; but to reform the nation, particularly the Church; and to spread Scriptural holiness over the land.) ― In Wesley's Large Minutes(1770)
둘째, 웨슬리는 강단 신학자가 아니라 재야 ‘풀뿌리 신학자’(folk theologian)로서 신학의 실천화에 기여했습니다. 실천적인 생활 신학자였다는 말이지요. 웨슬리에게 있어서 신학은 삶을 변혁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필요한 도구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매닥스가 주장한 것처럼 그에게 ‘신학은 신자의 기질과 삶의 실천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세계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아우틀러가 지적한 것처럼 웨슬리는 루터나 할레의 경건주의자들과 같이 대학과 같은 어떤 학문적 기반도 갖지 못했고, 칼뱅이나 낙스와 같이 어떤 정치적인 기반도 없었으며, 새로운 교파를 창립할 의도도 없었는데, 그저 열심히 갱신운동과 성결운동을 하다 보니 저절로(spontaneously) 감리교 운동을 촉발시킨 민초 신학자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과 목회 현장이 따로 떨어져 노는 고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한 묘약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학교와 목회 현장을 첨예하게 분리하는 근대적 경향이 신학의 전문화와 독립성, 그리고 고도의 엄밀성을 위해 크게 공헌할 수 있다는 이점은 있지만 신학교와 목회현장, 신학자와 목회자 혹은 평신도 사이를 소외시킨다는 사실에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아우틀러는 1960년대 초만 해도 웨슬리 신학이 단지 강단 신학과는 궤를 달리하는 재야 신학이라는 사실만 강조했는데, 80년대 중반부터는 웨슬리의 실천 신학적 모델은 이미 그 자체로서 건전하며 창조적인 까닭에 오늘의 강단 신학과 부정적인 비교를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강단 신학자들이 기독교인들의 일상생활이나 실제 예배, 복음 전도 등에 적실성(relevance)이나 유익(benefit)을 주지 못한 채 ‘강단의 독백’만 일삼고 있을 때, 웨슬리 신학은 오히려 이런 강단신학을 교정하고 갱신할 수 있는 생활신학 혹은 실천신학의 주요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실로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88)가 킹스우드 학교의 개교식에서 어린이를 위해 지은 찬송시에서 읊었던 노래처럼 “그토록 오랫동안 서로 따로 떨어져 놀았던 지식(knowledge)과 긴요한 경건(vital piety)을 하나로 통일시킨” 신학의 생활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웨슬리 신학은 교회일치를 지향하는 보편주의적 신학입니다. 웨슬리는 1725년 영국 국교회의 사제로 안수 받은 이후 결코 자발적으로 성공회를 떠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국교회 안에서 ‘교회 안에서의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로 교회내의 갱신운동을 하기 원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영국 국교회의 ‘39개 강령’과 ‘공동 기도서’, ‘설교집’ 등을 그대로 고수하고자 했던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실로 웨슬리는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자비를 구하며 종교적 관용과 신학적 다원성을 긍정하는 열린 신학자요 목회자였습니다.
3) 진정한 감리교회상의 모색을 위한 몇 가지 제언
이제 지금까지 말씀드린 감리교 신학과 전통의 중핵이 오늘 우리가 추구하려는 진정한 감리교 운동에 어떤 빛을 던져주는가에 대해서 물을 차례입니다. 분명히 웨슬리 신학과 그의 감리교 운동은 그 본질에서 상당 부분 이탈했다고 판단되는 한국 감리교를 비판하고 교정하는데 결정적인 준거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주의해야 합니다.
먼저 웨슬리 운동이 우리에게 전수할 수 없는 것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첫째, 웨슬리가 처했던 독특한 상황은 전수받을 수 없습니다. 웨슬리는 산업 혁명이 동터오던 18세기의 영국이라는 매우 독특한 종교 사회적 상황 속에서 감리교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21세기의 한국이라는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사역하는 우리가 그의 시대 상황을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둘째, 웨슬리와 더불어 일했던 사역자들을 그대로 옮겨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배경의 사역자들과 더불어 감리교 선교를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셋째,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데, 우리는 웨슬리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웨슬리를 그대로 흉내 내려는 모방 심리일 것입니다. 우리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개성적인 인격 존재일 뿐 꼭 웨슬리처럼 될 필요가 없습니다. 선불교의 유명한 구호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와 스승을 만나거든 죽여라!”는 말처럼 웨슬리를 뛰어넘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웨슬리를 무비판적으로 추앙하고 모방만 할 것이 아니라 창조 비판적으로 극복해나가는 것이 웨슬리가 진실로 원하는 바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웨슬리 운동이 우리에게 전수해줄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웨슬리 운동의 원리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보편적이며 초문화적인 원리들을 배워서 우리 자신의 개성과 독특한 상황에 맞추어 사용화(私用化/appropriation)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웨슬리 운동은 진정한 감리교회상을 모색하는 우리에게 하나의 모델이요 원리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웨슬리 운동의 전개과정을 배워야 합니다. 감리교회는 결코 의도적으로 생겨난 교파가 아닙니다. 웨슬리는 새로운 교단을 창립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화석화된 국교회를 갱신하기 위해 성결운동을 하다 보니까 저절로 생겨난 교파가 감리교였습니다. 제가 유독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감리교 ‘운동’이 점차 하나의 제도적 ‘교회’로 순응하고 변질되는 과정을 눈여겨보자는 취지 때문입니다.
셋째, 웨슬리 운동의 방법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웨슬리가 착안했고 활용했던 수많은 성결 방법들은 웨슬리의 신학 사상과 목회의 구체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사실 ‘Methodist’라는 말도 옥스퍼드의 신성회(Holy Club) 시절 성결과 기독자의 완전에 이르기 위하여 가지가지 성결 방법들(methods)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칼뱅주의자들이 경멸적으로 부쳐준 별명이었습니다. 건강해지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식이요법을 쓰듯이, 감리교인은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다양한 성결 방법을 찾는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웨슬리가 사용했던 방법들은 우리 시대 우리 상황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와 같은 방법의 고안과 활용이라는 점에 있어서 웨슬리는 언제나 그 방법의 실용성(pragmatism)과 적응성(adaptation), 그리고 수용성(receptivity)을 중시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컨대 야외 설교를 했다는 사실이나 보통 사람의 가슴에 와 닿는 대중적인 복음성가를 불렀다는 사실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실용적인 선교 전략을 수립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제 우리가 진정한 감리교 운동을 지향하기 위해서 ‘웨슬리 운동’과 ‘웨슬리 교회’의 차이점을 식별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운동’이라 함은 훨씬 더 순수하고 이상적인 교회 개혁이나 갱신, 그리고 성결 노력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하지만 ‘교회’(‘교파’ 혹은 ‘제도’라는 말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라 함은 상당 부분 그 근본적인 운동 정신이나 원리로부터 이탈해서 사람들과 사회의 필요성에 부응하는 현실적인 제도와 조직을 의미합니다. 마치 ‘예수 운동’이 라틴어를 쓰는 ‘서방 가톨릭교회’로 제도화되어 교황직과 같은 계급적인 중앙 관료 조직으로 변질된 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국에서 발원한 감리교 운동이 영국 전역과 미국에 까지 확산되는 과정은 운동에서 제도적 교회로의 변형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웨슬리는 일생 동안 감리교를 하나의 ‘갱신 운동’ 혹은 ‘성결 운동’으로 보았지, 하나의 ‘독립 교회’나 ‘교파’로 보지 않으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특히 웨슬리가 미국에 건너간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들에게 여하한 일이 있어도 성례전을 집전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에서 입증됩니다. 평신도가 성례전을 행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제도권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므로 오로지 순수 복음의 선포와 성결의 확장에만 집중하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 웨슬리는 안수 받은 성직자들만이 성례전을 집례할 수 있다는 원칙을 성직자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한 미국 땅에서도 엄격히 고수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스트로브릿지(Robert Strawbridge, 1732∼81), 헥크(Barbara Heck, 1734∼1804), 엠버리(Philip Embury, 1728∼773), 웹(Thomas Webb, 1724∼96), 등과 같이 미국에 건너온 초기 순회 설교자들(circuit riders)의 경우 ‘웨슬리적 원칙의 고수’와 ‘제도권 교회로의 편입’ 사이에서 힘겨운 내홍(內訌)을 겪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내홍이야말로 ‘운동’에서 ‘제도권 교회’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감리교 운동이 새로운 제도권 교회로 변형되기 시작한 본격적인 계기는 웨슬리가 미국의 총리사(general superintendent)로 파송한 코크(Thomas Coke, 1747∼1814)와 에스베리(Francis Asbury, 1745∼1816)의 도미(渡美)에 있었습니다. 특히 에스베리는 그 유명한 1784년 볼티모어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연회에서 웨슬리가 극구 만류한 감독제를 채택해서 미국 감리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초대 총리사(감독)로 선출된 뒤, 감리교의 미국적 토착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타교단의 성직자들 역시 감리교 운동을 하나의 독립 교단으로서, 감리교 목사들을 동료 성직자들로서 인정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이제 이러한 복잡한 과정을 세세히 소개할 수 없고 다만 우리가 찾고자 하는 진정한 감리교 운동을 위한 몇 가지 교훈을 찾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합니다. 진정한 감리교회성을 모색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감리교회의 현 제도적인 적실성’의 문제를 예민하게 검토해봐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의 운동으로서의 감리교회는 언제나 ‘영혼 구원’과 ‘성서적 성결의 세계적 확장’에 전력해왔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개인적인 복음전도와 마음과 생활의 성결, 그리고 사회적인 구원과 성화의 일환으로서 빈자들과 약자들을 돌보는 자선의 실천에 매진해왔습니다. 감리사나 감독 제도는 어디까지나 이와 같은 본질적인 운동을 더욱 더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방편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한국 감리교회는 이러한 본래적인 감리교 운동 정신을 망각하고 제도적 관료주의에 안주할 뿐 아니라 정치적인 감투싸움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감독제는 감독제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파송권과 치리권을 상당부분 상실한 채 기형적인 퇴화 상태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리교의 혼란과 부패에 가장 큰 몫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과감한 수술이 불가피해 보입니다. 정말 만인이 존경하고 신뢰할 수 있는 영적 지도자를 감독으로 모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각종 인연과 정치적인 서클로 이합집산을 한 채 어떤 수를 써서라도 표를 모아 당선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감이 감독제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영혼 구원과 성결의 세계적 확장이라는 웨슬리-에스베리적인 본질은 상실한 채 영적 지도력이 아닌, 정치적 자리로 변질해버린 감독제 자체에 냉철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와 같이 세속적인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을 방불케 하는 교권 다툼이야말로 진정한 감리교회성의 ‘norma normans’가 되는 웨슬리 정신과 예수 정신에 부합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덧붙여 이미 앞에서 감리교 신학과 전통의 중핵을 살펴볼 때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가 진정한 감리교회를 회복하기 위해서 웨슬리가 본래 그랬듯이 어떻게 해서라도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온 감리교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개인 구원과 성화에만 안주하지 말고 사회적인 구원과 성화에도 앞장 서 자선과 박애의 실천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른 앎(orthodoxy/정통교리)과 바른 체험(orthopathy/정통체험)과 바른 실천(orthopraxis/정통실천)이 한데 어우러져 전인적 구원과 성결이 이 나라와 온 세계 전역에 확산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가) 신학을 의학이나 법학과 마찬가지로 그 학문적 이론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장(場/context)을 가진 ‘실정 학문’(positive science)으로 본 것처럼 한국의 신학 교육 역시 영혼의 구원과 성결의 확장에 적실성을 던져줄 수 있는 건강한 신학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감리교인들은 결코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s)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교파일치 운동과 대화와 평화 운동에도 앞장 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1972년 아우틀러에 의해 처음 제안된 이래 웨슬리 신학을 상징하는 하나의 신화가 되어버린 바, ‘성서 전통 이성 경험’의 ‘사변형의 원칙’(quadrilateral, 요즈음에는 ‘사중주’/quartet라는 말도 쓰임)에 충실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성적 열광주의자’(reasonable enthusiast)로서의 웨슬리가 그 후예들이 빠질 수 있는 모든 편향적, 극단적 경향성으로부터 벗어나 중용과 조화, 일치의 신학을 추구하도록 방향을 잡아 준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끝으로 진정한 감리교회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우리가 정말 고민해야 할 문제는 과연 한국 감리교의 고유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가톨릭은 김수환 추기경 이래 사회적인 빈자들과 약자들을 위해 많은 선익을 베푸는 종교로 각인이 되고 있습니다. 기장(基長)이나 성공회 역시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교파로 인식되고 있지요. 구세군의 경우에도 가난한 이들의 교회답게 ‘자선냄비’ 하나로 자선 운동에 솔선수범하는 교회로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감리교회가 내세울 있는 ‘감리교성’ 혹은 ‘감리교적 브랜드’는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대해서는 물론 다각도의 심층적인 토론이 필요하겠지만 아무래도 ‘성결을 향한 엄격한 훈육과 감독’을 들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미국 연합 감리교의 교리장정을 ‘The Book of Discipline’(훈련 지침서)로 부르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 감리교인들은 다가올 진노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돌아보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 훈련하고 훈련받고 서로 감독하고 감독받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생활 신앙 운동 혹은 생활 성결 운동으로 감리교인은 정직하다, 약속을 잘 지킨다, 선행에 열심이다, 라는 칭찬과 더불어 실추된 공신력을 하나 둘 회복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실로 공신력을 쌓는 일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나 실추하는 일은 순식간입니다. 132년 동안 쌓아올린 감리교의 위상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작금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멀고 험합니다. 그럼에도 이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웨슬리의 다음과 같은 우려가 그 어느 때보다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저는 감리교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유럽이나 미국[한국]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단지 감리교가 종교의 형식만 갖춘 채 능력 없는, 죽은 교파가 될까봐 두려울 뿐입니다.” (I am not afraid that the people called Methodists should ever cease to exist either in Europe or America [or Korea]. But I am afraid, lest they should only exist as a dead sect, having the form of religion without the power.) ― In Wesley's Thoughts Upon Methodism(1786)
참고 도서(Bibliography)
Collins, Kenneth J,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 The Heart of John Wesley's Theology, Nashville: Abingdon Press, 1997.
Maddox, Randy L, Responsible Grace: John Wesley's Practical Theology, Nashville: Kingswood Books, 1994.
Maser, Frederick E, “The Movement That Launched A Church.” In Lectures on Several Occasions Number One, Perkins School of Theology, Dallas, Texas: Center for Methodist Studies at Bridwell Library, 1997.
Ogden, Schubert M, The Point of Christology.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2.
Outler, Albert C, Theology in the Weslyean Spirit, Nashville: Tiding, 1975.
, “The Place of Wesley in the Christian Tradition.” In The Place of Wesley in the Christian Tradition: Essays delivered at Drew University in Celebration of the Commencement of the Publication of the Oxford Edition of the Works of John Wesley, ed. Kenneth Rowe. Metuchen, N.J.: The Scareerow Press, Inc. 1976.
김흥규(내리교회)
첫댓글 코로나19로 모두 힘든 시기입니다
생활이 어렵다.보니 카페일도 싫어지네요,,
약값이 매일 들고 공과금을 내야 합니다
먹을것(식품,반찬거리) 사도록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먹을것 반찬거리도 사야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어려우시더라도 회원님께서는
작은 사랑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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