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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의고찰 최성의 원조 소벌도리(崔姓의 元祖 蘇伐都利) 우리 최씨의 득성(得姓)과 함게 원시조가 되는 신라 개국공신으로 양자 혁거세왕과 더불어 신라 천년사직을 이루며 오늘날 찬란한 문화와 화랑정신을 만대에 계승 발전시켰다. 년원(淵源) 진한의 소벌도리와 최씨(辰韓의蘇伐都利와崔氏) 최씨는 우리 겨래 가운데서도 가장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로 역사상 숱한 명신 열사, 학자, 문인을 배출한 라조(羅朝) 이래의 전통 있는 명문으로 손꼽히는 삼한갑족(三韓甲族) 이다. 소벌공은 본래 진한 사람으로 신라를 창건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니 삼국사기, 신라본기 동국통감에서 본 그의 사기는 다음과 같다. 6촌장과 진한(六村長과辰韓) 기원전 57년경 고조선의 북부여 유민들이 동해빈의 여러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촌락을 이르고 있어는 데. 첫째마을은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둘째 마을은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셋째마을은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네째, 취산진지촌(취山珍支村 혹은 宇珍村)다섯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여섯째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라는 마을들이 있었다. 소벌공과신라건국(蘇伐公과新羅建國) 위와 같이 삼한이 반도남부에 정립하고 있었으나, 진한은 명실공히 군주국가가 되지 못하고 백성들만이 마한의 침략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 백성들은 항상 국가건설을 계획하고 있던 터로서 마한의 양왕5년(단기2265년한무재(韓武宰) 원년)임자 어느날 6촌의 고허촌장 소벌공은 다른 촌장들을 소집하여 건국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소벌공은 그해 3월 삭일에 양산촌장 알평, 대수촌장 구례마, 진지촌장, 지백호,가리촌장기타, 고야촌장 호진등 다섯 촌장과 더불어 알천안상에서 회의를 열도록 소벌공이 제안하니 각 촌장들은 이에 모두 찬동하고 각기 자제들을 거늘리고 참석하였다. 소벌공은 이 회의서 의장 격이 되어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의 많은 민중이 기름진 좋은 땅에서 태평성대 하게 살면서도 우리를 다스릴 어른(君主)이 없는 까닭에 백성이 모두 제멋대로(放逸)하며 살고있으니, 뭉치고 단합하는 힘을 갖지 못하는 형편이므로, 항상 남의(馬韓)나라의 부당한 간섭과 제어(制御)를 받게되고, 또 인접한 변(弁韓)한도 종 종 침해하는 일이 자주 있을 뿐 아니라. 멀리 북으로부터 한(漢)의4군이 머리를 누르고있어 언제나 그것들이 우리의 진전에 크게 방해되는 바인즉 우리는 지금부터 좋은 군주를 얻어 뫼시고 국가정사를 새롭게 하면 이거야말로 자손만대에 백년대계를 이르게 될 것이니 이를 위해 총력을 다함이 어떠하겠는가 ? 고 말하니 모든 촌장과 자제들은 이에 동의함은 물론, 크게 협력할 것을 결의하게 되었다. 6부에6성 사성 (6部에6姓 賜姓) 신라의 3대 유리왕은(신라9년2365) 구진한의 6부에 지명을 개칭하여 양산촌을 급량부(及梁部)로 고허촌을 사량부(沙梁部)대수촌을 잠량부(잠梁部)로 간진촌을 본피부(本皮部)로 가리촌을 한저부(漢저部)로 명활촌을 습비부(習比部)로 하는 동시에 그6부의 장(長) 에게 각각 성을 내렸으니 賜 사량부(고허촌)의 장 소벌공은 최(崔)씨의 성을 받았다. 그 외 양산촌,알평에게는 이(李)씨, 대수촌 구례마에계는 손(孫)씨 진지촌 지백호에게는 정(鄭)씨 가리촌 기타에게는 배(裵)씨 명활촌 호진에게는 설(薛)씨 이렇게 하여 6부의 6성을 내린 것은 원래 진한의 6촌장이 신라국에 큰공을 세운 연유로 사성(賜姓)이 되었으며 당시 민간으로서는 처음 성을 갖게 된 것이다. |
최치원(崔致遠)
857(문성왕19)-?신라말기의 학자. 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자는 고운(孤雲) 또는해운(海雲).경주사량부(沙梁部,혹은 本彼部) 출신.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출신이다. 특히 최씨 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실라말기 3 최 의 한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 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 최치원이 868년 (경문왕8)에 12세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라고 격려 하였다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뒷날 최치원 자신이 6두 품을 득난(得難)이라고 한다고 하여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던 점과 아울러 신흥가문의 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나있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 만에 874년에 나이로 예부시랑 (禮部侍郞) 배찬이 주관한 빈공(賓貢/외국인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의 자격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 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는데. 그때 지은 작품이<금체시 今體詩)5수1권<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100수1권<잡시부 雜詩賦>30수1권 등이다.
그 뒤 876(헌강왕2)년 당나라의 선주(宣州)율수헌위(?水縣尉)가되었다. 이때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을 추려 모은 것이 <중상복궤집 中山覆?集)1부5권이다 그 뒤 887년 겨울 율수위를 사직하고 일시 경제적 곤란을 받게되었으나 양양 이위의 문객이 되었고 곧 이서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 이 되었다.
그러나 명문을 천하에 떨치게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 뒤 4년 간 고변의 군막에서 표(表). 장(狀). 서계(書啓). 격문(檄文)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되었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내공봉(承務郞 殿中侍御使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며, 겸하여 포장으로 비은어대 (緋銀魚袋)를 하사 받았으며, 이어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고변 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간에 지은 글이 표. 장. 격.(檄) 서(書). 위곡(委曲) 거첩(擧牒) 제문(祭文). 소계장(疏啓狀) 잡서(雜書)시 등 1만여 수에 달하였는데, 귀국 후 정선하여<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討黃巢檄)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동안 고운(顧雲),나은(羅隱) 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 명이 수록되게되었는데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 22권 잡문(雜文)의 당서에 최치원 전을 세우지 않은데 대한 논의 에서 <당서>열전에 최치원의 전기가 들어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하여 시 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 시랑 지서 서 감사 (侍讀 兼 翰林學士 守兵部 侍郞 知瑞 書 監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문명을 떨쳐 귀국한 다음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 비문(大崇福寺碑文)등의 명문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하여 국왕에게 진헌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호적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앙정부는 주(州)군(郡)의 공부(貢賦)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여 국가의 창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한 실정이었다.
889년(진성여왕3)에는 마침내 주, 군의 공부를 독촉하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최치원은895년 전국적인 내란의 와중에서 사찰을 지키다가 전물 한 승병들을 위하여 만든 해인사 경내의 한 공양탑(供養塔)의 기문(記文)에서“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흉(凶)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옭겨져 와서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하여 굵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고 당시의 처참한 상태를 적었다.
당나라에서 직접 황소의 반란을 체험 바 있는 그에게는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과 재난이 당나라의 것이 파급, 연장된 것으로 느껴졌던 모양으로, 당대 제일의 국제통 (國際通)다운 시대감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귀국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으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에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하여 890년에 대산군(大山郡:지금의 전라북도 태인)천령군(天嶺郡:지금의 경상남도 함양)부성군(富城郡: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였다.
부성군수로 있던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가지 못하고 , 그 뒤에 다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일이 있다. 894년에는 시무책(시무책) 10조를 진성여왕 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10여 년 동안 중앙의 관직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 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직접 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무책은 진성여왕 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 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든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아니 되어 실정을 거듭 하든 진성여왕 이 즉위한지 11년 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 에게 선양(禪讓)하기에 이르렀다.
최치원은 퇴위하고자 하는 진성여왕과 그 뒤를 이어 새로이 즉위한 효공왕을 위하여 각 각 대리 작성한 상표문(上表文)에서 신라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을 박진감 나게 묘사하였다. 이에 이르자 최치원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세 장년 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실현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즐겨 찾은 곳은 경주 남산 강주(剛州)지금의 의성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합포현(合浦縣지금의 창원)의 별서(別墅)등 이었다고 하는데 이밖에도 동래의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하여 그의 발차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만년에는 모형(母兄)인 僧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 그가 지은 신라 수창군호국성 팔각 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褸記)에 의하면 908년 (효공왕12)말까지
사성공파 예(汭)
공의 휘는 예 이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최치원)의 12세손이시며 5세손 선지(善之)의 직계 7세손인 홍재(弘載), 홍재의 2자이시다, 父는 고려 문과 참판을 하신 홍재 이시다. 공은 공민왕 22년 癸丑(1373)에 출생하시다.
공은 이 태조 개국 2년 癸酉(139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 병조좌랑(兵曹佐郞), 선공감정, 면천군수, 성균관 사성(成均館 司成) 등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청백리로도 명성을 날리시였고 세조 甲寅年(1434)에 壽 62세로 卒하시었다.
묘는 울주군 두남면 활전리 능주봉산 아래 건좌에 있다.
배위는 金씨인데 고려 시중이신 관의(寬毅), 의 여식이며, 숙인이시며, 세종 己未年(1439)에 卒하시니 묘는 공과 함께 부장하였으며 후손들이 매년 음력 10월10일 묘제을 지내고있으며 (재숙은 전천제(箭川齌)라고 한다.)
첫댓글 공부 잘해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