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는 말씀은 “신약에서 가장 훌륭한 복음의 요약이다”(W. H. Taylor).
구원을 얻었나니(세소스메노이, σεσωσμένοι)는 완료형 분사의 수동태이다. 구원은 미래에만 받을 것이 아니라, 이미 받았고 계속해서 받고 있는 것이다(고전 1:18, 롬 5:9, 벧전 2:2. F. W. Beare). 이디(Eadie)는 이를 파선된 배에서 구조선으로 옮겨진 사람으로 비유하였다. 그의 완전한 구원인 육지는 아직 저 멀리 있으나 구원은 구조선에서 벌써 실현되었다는 것이다.1)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 편의 유일무이한 조건은 ‘은혜’(2:5의 주석을 보라.)이며, 인간 편의 유일무이한 조건은 은혜를 인한 믿음( 1:13의 주석을 보라.)이다. 이 점에 대해 렌스키(R. C. H. Lenski)는 “구원을 얻는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의하여 초래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근원과 기원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리고 오직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죽은 자가 자신의 소생에 있어서 최소한의 노력도 할 수 없듯이 그의 영적인 죽음도 그 영적인 생명을 획득함에 있어서 최소한의 기여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투토, τούτο)에 대해서는 (1) 믿음,2) (2) 구원,3) (3)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실4) 들이라는 견해가 있다. 믿음과 구원의 원천인 은혜가 선물과 같은 의미의 말이라는 점과【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in 이상근. 2) “Erasmus, Beza”(in T. K. Abott), J. A. Bengel, “Grotius, Hodge”(in 이상근), C. H. Dodd, W. G. Blaikie, F. Foulkes, H. C. G. Moule, “Van Leeuwen”(in 박윤선). 3) J. Calvin, H. Alford, “Harless, H. A. W. Meyer, Eadie”(in 이상근), “Wuest”(in 박윤선), A. S. Wood. 4) J. Wesley, “Theophylact, Macknight”(in 이상근), W. H. Taylor, M. Henry, 黑崎幸吉, 윤성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는 말씀을 미루어 볼 때 (3)설이 가장 적합하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2:8 후반)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양심에 따른 선행이나 윤리적 행위 또는 율법 행위나 종교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모든 사상을 한마디로 배격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의 부당성은 원죄로 타락한 인간(롬 3:10-18, 5:12)의 양심이란 선악을 판단하기는 하나 선악의 절대적 법정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양심의 법과 하나님의 의지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사 55:8-9, 시 130:3)에 있다. 또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인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율법”1)을 본래의 의미대로 지키기는커녕, 올바로 이해할 수도 없다는 점에 있다. 더욱 결정적인 증거는 양심과 율법과 종교가 있는 인간 세상에 바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 성취하시는 것은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인 것이다. 바울은 그 이유(원문에는 10절 첫 부분에 가르, γάρ가 있다.)를【10】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만드신 바(포이에마, ποίημα)는 이곳 외에 로마서 1:20에만 나타나는 말로서 (1) 육적인 생명을 창조하신 것(Gregory of Nazianzus, Basil, Tertullian),2) (2) 육적 및 영적인 생명을 창조하신 것(“Pelagius”,3) “Bullinger”4)), (3) 영적으로 중생케 하신 것이라는 해석이 있는데, 전후 문맥상 대부분의 학자들1)처럼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고린도후서 5:17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롬 7:12. 참조: J. S. Stewart, op. cit., p.109. R. Longenecker, The Ministry and Message of Paul(Michigan: Zondervan, 1973), p. 94. 2) in 이상근. 3) in T. K. Abott. 4) in 이상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전 것은 지나갔으나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요한복음 3:5, 갈라디아서 6:15, 디모데후서 1:10, 디도서 3:5 들을 들 수 있다.
바울은 더욱 자세하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이란 그리스도의 전 구원 사건(선재, 성육, 생애, 죽음, 부활, 승천)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하도록 영적 생명을 얻게 된 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선행이 구원의 요인이 아니라, 믿음 또는 구원의 결과라는 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듯이”(마 7:17) 선한 일을 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약 2:18의 주석을 보라.) 여기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창조하신 목적이 들어 있다.
이 일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새로 지음받은 일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변천되었고, 또한 변천될 상대적인 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해 놓으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 주신 선을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의미의 “선행이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책임이기도 하다”(W. Hendriksen). 그러나 참된 기독교인은 믿음 또는 신생에서 나온 선행일지라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 그 까닭은 그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는 말씀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는 말씀을 알기 때문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J. Calvin, A. Clarke, T. K. Abott, “Salmond, Eadie”(in 이상근), M. Henry, E. F. Scott, R. P. Marti, H. C. G. Moule, F. F. Bruce, C. R. Erdman, F. Foulkes, G. H. P. Thompson, J. A. Allan, F. J. Dake, R. C. H. Lenski, G. Barlow(p. 158), A. S. Wood, 黑崎幸吉, 이상근.
<필자의 newrema.com의 ‘에베소서 주석’, ‘난해성구 사전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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