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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衣觀音圖가 있는 寺刹들***
충남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 '백의관세음보살'
봄경치가 수려한 마곡사는 백제 의자왕 때에 신라 사람인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고려시대에 와서 보조국사(1158~1210)가 중창하여 크게 일어선 절이다.
'麻谷寺'라는 절 이름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할 때의 스승인 마곡 보철화상을 기려 이름을 땄다고도 하고. 보조국사가 고려 명종 2년(1172) 이 절을 재건할 때에 구경오는 사람들로 골짜기가 꽉 찬 모습이 삼밭에 삼(麻)이 선 것과 같아서 붙었다고도 한다. 또 하나 절이 세워지기 전에 마(麻)씨 성을 지닌 토족이 살았다는 말도 있다.
대광보전은 절의 중심되는 건물로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5층탑의 수직성을 보완하듯이 수평으로 듬직하게 앉아 있는 이 대광보전은 보물 제802호로 조선 후기인 정조 12년(1788)에 세워졌으니 정조시대 문화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한 보기가 대광보전 현판인데, 영정조 시대 예원의 총수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글씨이다.
경내 한가운데 길쭉하게 솟아오른 오층석탑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탑과는 달리 상륜부에 금속으로 된 라마식의 탑모양을 마치 모자를 쓴 듯이 얹고 있어서 특이하다.
이런 청동제의 보탑은 풍마동(風磨銅)이라고 하는데 본래 인도탑의 모양이 이러했고 라마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말기에 중국 원나라의 영향을 받을 때에 라마교 양식을 본 뜬 탑이나 불상이 만들어 졌으니 이로 해서 이 탑이 고려 말기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보물 제 799호로 지정되었다.
대광보전 현판을 눈여겨 보세요. 조선 영정조 시대 예원의 총수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글씨랍니다.
대광보전의 문은 모두 '소슬민꽃문'으로 꾸며졌다.
대광보전에 들어서면 본존인 비로자나불이 법당의 서쪽에 동쪽을 향하여 모셔져 있다. 이런 배치는 대개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에서처럼 서방 극락을 주재하는 아미타불이 앉아 있는 방식인데, 이곳에서는 비로자나불이 이처럼 앉아 있어 드문 예를 보인다.
이 비로자나불은 자장율사가 당나라 왕에게서 선물받은 인도의 향단목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기는 하지만, 양식으로 보아서는 인후한 표정과 안정된 자세를 한 조선 시대 불상이다. 게다가 건물이 불탔을 때에 목불상이 온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창건 때에 모셨던 불상에 대한 전설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보물 제802호로 지정돼 있는 마곡사 대광보전에는 2점의 백의관음도가 외부 남측면 포벽과 내부 서측면 후불벽에 그려져 있다.
비로자나불의 뒤로 돌아가면, 뒷벽에 관세음보살 벽화가 있다. 벽면 가득 메우는 이런 관세음보살상은 고려 말기에 성행하였던 수월관음도 형식이 조선 초기에 후불벽에 그려진 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관세음보살은 머리 위에서부터 아래로 백색의 장포(長袍)를 입고 물결이 넘실거리는 해상 위의 기암괴석에, 한 다리는 내리고 한 다리는 다른 다리에 포개 앉은 반가부좌 자세이다.
오른쪽 옆의 선재동자가 고려 시대라면 화려한 옷을 입었을 텐데 조선 시대의 동자여서인지 검소한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청조(靑鳥)를 바치고 있다.
두광과 신광을 갖추었으며, 상호는 초승달 모양의 둥근 눈썹에 꼬리가 위로 올라간 가늘고 긴 눈, 두툼한 코에 작고 붉은 입술을 표현했다 .
외부포벽에 그려진 백의관음은 천의자락을 휘날리며 맨발로 물결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몸을 옆으로 기울여 화면 오른쪽에 합장해 있는 남순동자를 굽어보고 있다. 또 두 손은 앞으로 모았는데 왼손에 정병(淨甁)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감로수가 쏟아지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마곡사 석가모니불괘불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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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 무위사 극락전 '水月觀音圖'
천왕문을 들어서면 자연스러운 계단으로 조금씩 높아진 절 안 정면에 극락보전(국보 제13호)이 보인다. 한 점의 허세나 치장, 허튼 구석 없이 단정한 그 모습은 무위사(無爲寺), 인위나 조작이 닿지 않는 맨 처음의 진리를 깨달으라는 절 이름과 잘 맞아 떨어진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조선 초에 세워진 대표적인 목조 건물로 검박하고 단정하다. 이 집에서 풍겨나는 소박한 아름다움은 절안을 은은하게 채우고 있다.
고려 시대 건물인 수덕사 대웅전이나 부석사 조사당을 많이 닮은 맞배지붕 겹처마에 주심포 집인데, 1983년에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명문에 따르면 세종 12년(1430)에 지어졌다. 당시 극락전 건립 공사는 나라의 인정을 받은 고급 기술자들이 참여한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루어졌고 효령대군이 공사에 깊이 관여했다고 한다.
극락보전은 비탈진 지세를 따라 앞쪽에만 얕은 축대를 쌓은 기단 위에 아무 조각도 없는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 기둥을 세워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검박하고 단정한 건물이다.
기둥과 들보들이 드러나 보이는 옆모습은 꼭 필요한 부재만이 사용된 간결하고 짜임새 있는 건물의 면모를 눈으로 실감하게 한다.
나뭇결이 드러난 소슬빗살문은 소박하면서도 단정하다.
법당의 중심인 아미타삼존상은, 가운데 아미타불이 있고 그 오른쪽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있으며, 왼쪽에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있는 전형적인 아미타삼존상이다. 양쪽의 두 보살은 각각 바깥쪽 다리를 늘어뜨린 자세를 취했다. 금물이 올려져 있지만 원래 목조상인데 다들 얼굴선이 부드럽고 단아하며 기품이 있다.
조선 후기로 오면 불상이 법당의 규모와 어울리지 않게 무작정 거대해지는 예가 보이는 데 비해, 무위사 극락보전에서는 법당과 불상, 후불벽화가 적당한 눈높이에 적절한 규모로 조성되어 있어 차분한 조화를 이루었다.
불상 뒤의 아미타삼존도는 지금 남아 있는 조선 시대 아미타불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 호화롭고 섬세한 고려 불화의 전통을 이으면서 전체 구도와 광배, 부처의 머리 모양 등에서 조선 초기의 특색을 보이는 걸작이다. 그림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전설이 깃들었다.
극락보전을 완성한 후 백일기도를 드리고 있던 어느 날, 남루한 차림을 한 노승이 절에 찾아 왔다. 그는 법당에 벽화를 그리겠다고 하더니 49일 동안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다. 노승이 법당에 들어가더니 문을 모두 잠근 후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음식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궁금증을 못 참은 주지스님은 문틈으로 법당 안을 엿보았다.
아! 그 때였다.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다 그린 후 막 관음보살의 눈에 눈동자를 그리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인기척을 느낀 파랑새는 붓을 떨어뜨리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후불탱화의 관음보살의 눈에는 눈동자가 없다는 것이다.
아미타삼존도 뒷면에 또 하나의 벽화가 있다. 고려 불화의 전통을 이어받은 수월관음도이다. 얼굴과 목, 어깨가 건장한 남성적인 인상의 관음보살이 버들가지와 정병을 들고 연잎 모양의 대좌 위에 서서 아래쪽의 선재동자를 내려다본다. 이 그림의 선재동자는 일반적인 모습과는 좀 다른데 승복을 입은 늙은 비구니로 보인다.
관음보살의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모두 보름달처럼 둥그렇고 주변에는 물결이 표현되어 바다 위에 떠 있음을 나타냈다.
관음보살의 시선이 닿는 왼쪽 아래 구석에,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노스님이 그려져 있다. 스님의 어깨 위에는 파랑새 한 마리가 머리를 돌려 관음보살을 바라 보며 앉아 있다.
선재동자를 노스님으로 그린 것은 혹시 전설과 연관된 표현???
'극락보전 관음보살의 눈에 눈동자가 없다'는 것을 대충 얻어 들은 사람이 수월관음도를 보면서 "눈동자가 분명히 있는데..." 하며 투덜댔다.
앞쪽으로 가서 후불탱화를 찬찬히 살펴보세요. 탱화의 관음보살 눈동자가 있는지 없는지...
아미타여래내영도(阿彌陀如來來迎圖.1476년 제작. 흙벽에 채색) 염불을 잘 행한 사람이 죽을 때 아미타불이 마중 나와 서방 극락세계로 맞이해 간다는 내용을 그렸다. 아미타불과 8보살 6비구가 늘어서 있는 배치구도를 하고 있다.
원래는 극락전 서측 벽면에 있었던 것을 1976년 극락전을 수리할 때 벽채로 떼어 내어 보존각에 보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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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백의관음보살좌상'
능가산은 범어로 '그 곳에 이르기가 어렵다'는 뜻을 지닌 이름이고, 소래산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찾아온다'는 뜻을 담고 있다.
내소사는 이 능가산 의 품에 안긴 풍경 소리 그윽한 고찰이다. 내소사 홈피에 의하면, 來者皆蘇(여기 오는 모든 이를 소생하게 하소서) 에서 내소사 명칭을 따왔다고...
내소사 대웅보전은 조선 인조 11년(1633)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낮은 기단과 거의 다듬지 않은 주춧돌을 놓고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이 건물은 못을 쓰지 않고 나무토막을 깎아 끼워 맞춰 세운 것으로 그 공력과 기술에는 탄복할 수밖에 없다.
정면 세 칸 모두 여덟 짝의 문짝이 온통 연꽃과 모란과 국화꽃으로 수놓인 화사한 꽃밭이다. 한 송이 한 송이 온갖 정성을 다 쏟아 조각한 조선목수의 혼이 피어나 있다.
단청이 모두 퇴락하여 나무결이 그대로 드러나 오히려 화려하면서도 고졸한 분위기가 나그네의 마음을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법당 내부의 제공 뒤뿌리에는 모두 연꽃봉우리를 새겨, 우물반자를 댄 천장에 가득한 꽃무늬 단청과 더불어 법당안에 화사함을 뿌린다.
법당 내부를 장식한 단청에는 한 군데 빠진 곳이 있는데, 여기에는 전설이 한자락 물려 있다.
법당 건물이 완성된 후 한 화공이 찾아와 단청을 하겠다고 자청을 하면서 100일 동안 아무도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부탁을 하였다. 99일째 되는 날, 사미승이 궁금증을 못 이기고 몰래 들여다보고 말았다. 법당안에서는 파랑새 한마리가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다가 사미승이 엿보는 것을 알고는 그냥 날아가버렸다.(무위사의 전설과 흡사하다)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건축이지만, 이 법당은 인간의 힘으로는 완성할 수 없는 미완성의 작품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대웅보전 어칸의 빗연모란꽃문
문수보살 * 석가모니불 * 보현보살
대웅보전 불상 뒤편 벽에 그려진 백의관음보살좌상벽화는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백의관음보살 그림 중에 가장 크며, 좁은 통로를 옆 걸음으로 가면서 관음보살과 계속 눈을 맞출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
옆으로 가는 동안 눈이 계속 맞춰지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설이 전한다. 실은, 화공이 관음보살의 대자비심을 마음 깊이 받아 그렸기 때문에 누구나 눈을 맞출 수 있다고.
이같은 특이한 구조는, 불단 앞의 중생은 피안의 세계에 있지만 차안의 세계인 불단 뒤의 중생은 번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바, 이들을 이끌어 제도하고자 관음보살은 대 자비심으로 비좁은 후불벽에서 고해속의 중생을 향해 계신다고 한다.
내소사 영산회괘불탱화 (보물 제12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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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관음(水月觀音)이란?
화엄경 '입법계품'에는 선재동자가 인도 남쪽 바닷가에 연한 보타락가산에서 법을 설하는 관세음보살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 관음을 수월관음이라 부른다.
수월관음(水月觀音)이라 한 이유는 달이 높이 떠올라 휘영청 밝은 가운데 관음이 물가의 벼랑에 앉아서 선재에게 법을 설했기 때문이다. 마치 해변에 위치한 보타락가산의 물위에 달처럼 아름다운 관음이 현신하듯 말이다.
달과 밤과 물, 그리고 관세음보살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것을 일러 수월관음상이라 하며 중국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 단독으로 모셔진 관음도(觀音圖) 대부분은 화엄경 계통의 수월관음도인데 특히 고려 불화의 수월관음도가 유명하다.
고려불화가 160여점 정도 남아있다고 한다. 그 고려불화중에서 백미(白眉)로 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이다.
안타깝고 분한 것은 이토록 귀중한 작품이 우리나라에 있지않고 일본 개인소장가의 소유물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수월관음도는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종교적인 아름다움과 격식을 지닌 작품으로
보통 수월관음도는, 그림 왼쪽에는 동해 용왕 일행을 그렸고, 술병같은 병이 있고, 이 병에는 버드나무가 꽂혀 있는 것이 정형화 되어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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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얼마 전, 사찰답사기를 써 드리는 선원에 내소사를 소개했더니 가깝게 지내는 불자 한 분이 마곡사 백의관음을 좋아한다는 댓글을 다셨더군요. 그 분을 위하여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백의관음 세 분을 한자리에 모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