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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논쟁사의 비평적 성찰
1. 변방지대에서의 이삭줍기
논쟁은 진리를 밝혀주기 보다는 오히려 혼란을 조장한다는 톨스토이의 설교와는 달리 문학사(뿐이 아니라
인류의 진보)는 논쟁을 통한 부정과 수용의 반복으로 이뤄지고 있다.
더구나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내용과 형식을 시행착오의 통과의례로 겪어야 했던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서 논쟁이란 당대적 사조에다 첨단적 유행과 인기까지 독점하는 창조적 묘기의 하나로 추앙받기도 했다.
문학사가 곧 사조사이자 논쟁사라는 관점은 여전히 주효하여 쟁점이 사라진 시대에도 독자들은 타성적으로
타오르는 설전의 불을 끄려는 사이렌소리가 울리지 않으면 활기 없는 문단이라고 두 손을 꼴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문학사에서 논쟁이란 대개 본질을 비켜선 인신공격과 험담으로 목청만 돋구는
선거 유세장과 닮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논쟁이란 넓게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미학적 과제를 향한
끊임없는 탐사작업임과 동시에, 좁게는 신변잡담 차원의 입씨름까지를 포함한다.
앞의 것이 문학사의 흐름과 가치평가를 위한 방향타 역할을 한다면 뒤의 것은 세인의 빈축을 사기도 한다.
앞의 것은 ‘쟁점‘으로 불려지면서 구태여 비판과 반박이 없이 그 주장만으로도 성립되는데 비하여 뒤
의 것은 어떤 주장에 대하여 명백한 반박의 성격을 지닌 글들로 성립된다. “일반적으로 논쟁은
원칙론과 현상론으로 나눠 볼 수 있다”(주1)는 김윤식교수의 명제 역시 이런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쟁점이든 논쟁이든 그 관할권은 비평사의 몫으로 여겨져 이 분야에서는 몇가지 연구목록을 보유하고 있으나,
시단만의 논쟁을 별도로 다룬 예는 적은 편인데(주2), 그나마도 쟁점과 논쟁의 경계선을 허물어 광의의
논쟁사를 다루고 있다. 쟁점이 문학사적 중심부의 풍성한 토양에서 자라난 수확물을 거둬들이는데 비하여
논쟁은 미학적 변방지대에서 이미 추수가 끝난 뒤의 이삭줍기에 지나지 않는다면 지나칠까. 실제로 논쟁이란
중요한 쟁점적 요소를 지닌 몇몇 항목 말고는 설전의 현장감이 생생했을 때의 열기와 사회적 관심이
식어버리고 나면 문학사의 변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쭉정이가 대부분으로 소문난 잔치는 되지만
영양가는 없다는 걸 여러 사실들로 알 수있다.
그렇다고 빈 들에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까닭은 당대적인 문단풍토를 가장 생생하게 재현시켜 줄뿐만 아니라 그 이삭들을 예리하게 분석하노라면 그 해 수확물의 품질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말하자면 문학사의 귀납법적 인식을 가능하게 해 줄 사료들이기 때문이다.
근현대 시를 광의의 논쟁사적 시각으로 접근한 기존 연구에 나타난 중요 쟁점은 아래와 같다.
<<한국 현대시사의 쟁점>>의 경우
총론 ; 근대시. 현대시의 개념과 기점 / 현대시 전통론
일제강점기 ; 일제 강점기 시사의 전개 / 개화기 문체와 장르 / 초기 자유시 형성 / 상징주의의 문제점 / 낭만주의 시 / 프로시 / 국민문학파의 시 / 서사시 논의 / 30년대 순수서정시 / 모더니즘 / 30년대 후반의 시적 상황 / 저항시와 친일시.
분단시대 ; 남북한 시의 변모 / 해방공간의 시단 형성과 쟁점 / 한국전쟁 후 남북한 시단과 시 / 전통 논의 / 순수. 참여 논쟁 / 시의 민중지향성 / 80년대 시의 양상.
<<문학사상>>의 경우
해방전 한국시의 5대쟁점 ; 근대시 기점 / 현대시 리듬론과 자유시 / 근대 서사시 / 3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 / 해방 전 전통주의.
해방 후 한국시의 5대 쟁점 ; 전후 모더니즘운동 / 참여시 / 민중시 / 여성주의 시 / 시적 실험과 시적 초월의 성과 및 한계.
(편의상 목차 제목과 달리 쟁점 위주로 표기했음)
위에 나타난 접근. 분류방식은 논쟁적인 요소도 상당수 포함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쟁점적 요소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근현대 시사. 시문학사. 시론사의 총체적인 인식에 바탕하고 있으며, 문학사적으로도 변방지대가 아닌 중심부를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글은 쟁점이 아닌 논쟁에 그 시각을 맞추기로 하는데, 이유인즉 첫째는 우리의 시문학사에서 논쟁은 폐허에 버려진 채 그대로 썩어가는 이삭 취급을 받기 때문이요, 두 번째는 그나마도 단편적으로 언급된 논쟁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이해가 절실하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문학사에서 가장 비논쟁적인 시문학인지라 소설이나 비평에 비하여 시 논쟁사는 빈약하여 그간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것들 중 쟁점으로 승화될만한 몇몇 사항을 시대순으로 일별하기로 한다. 따라서 비평적 성찰이기 보다는 단편적인 짜집기가 될 것이다.
각 주
1) 김윤식, <<한극 현대시론 비판>>, 일지사, 1975, 324쪽. 그는 원칙론은 “原理知에 대한 다원론의 승인“으로, 현상론은 ”통상 논쟁“으로 풀이하고 있다.
2) 비평사적 시각에서는 김윤식, <<한국 근대 문예비평사 연구>>,한얼문고,1973. 김영민, <<한국문학 비평 논쟁사>>,한길사, 1992, 등이 있다. 논쟁 자료집으로는 구상 편 <<논쟁집 .예술과 인생의 시비>>,자유문화사,1963. 유종호. 염무웅 편, <<한국문학, 무엇이 문제인가>>, 전예원,1977. 임헌영 편, <<문학논쟁집>>, 태극출판사,1978. 홍신선, <<우리문학의 논쟁사>>,어문각,1985. 임헌영.홍정선 편, <<한국근대 비평사의 쟁점>>, 동성사,1986 등이 있다.
한편 시에서의 논쟁이나 쟁점만을 다룬 예는 김윤식, <해방후 시단 논쟁 - 몇가지 사례>, <<한국 현대 시론 비판>>게재. 김용직 외, <<한국현대 시사의 쟁점>>,시와 시학,1991. <해방전 한국시의 5대 쟁점>과 <해방후 한국시의 5대 쟁점>, 월간 <<문학사상>>,1999,5, 및 6월호 연재. 등이 있다.
김재홍, <<현대시와 역사의식>>, 인하대 출판부,1988,은 근현대 시의 여러 쟁점 이해에 도움을준다.
2. 시의 사상성과 신체시
근대시사에 등장하는 첫 인신공격적 화두로 알려진 현철. 황석우. 김유방의 논쟁은 시론의 조율도 안된 시기에 평지풍파식으로 전개되면서 시문학의 초보적인 쟁점을 부각시켜 주었다.(주3) 발단은 <<개벽>> 문예부장 현철이 아래와 같이 시를 정의한 대목에서였다.
시라고 하는 것은 운문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그 특색은 노래로 부를만한 음조를 가진 것과 또 형식이 긴장한 것과 보통의 문장과 비교하여 전도되어 있는 것이니 이상 3종의 성질 중 어떠한 것이든지 일종만 구유(具有)한 것이면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가사와 시조는 조선 고래의 시요 근자 신체시는 서양시를 모방한 것이요 한시는 지나의 시이다.(주4)
이미 <조선시단의 발족점과 자유시>(주5)에서 신체시란 일본의 전통시가 서구시의 유입으로 변이해 가는
과도기적 형식으로 한국은 이를 모방할 단계를 지나 자유시를 지향할 때라고 주장한 바 있던 상아탑은 즉각 반박하고 나섰다. <‘희생화’와 ‘신시’를 읽고>(주6)에서 황석우는 먼저 현진건의 <희생화>를 “예술적 형식을 갖추지 아니한 그저 사실이 있는대로 그대로 기록한 소설도 아니고 독백도 아닌 일개 무명의 산문일다”고 혹평한 뒤, 오상순의 시 <구름><생의 철학>에 대하여 “서정시 되기에는 너무 사상에 소(訴)하여 지나(쳐)있고 또는 사상시로서는 요령을 이해키 어려울 만큼 수사가 어지러져 있으며 또는 표현이 너무 유치하다 할 수 있다”면서, “군에게 대한 우의로 보든지 무엇으로 보든지 대단히 유감”으로, 할말이 많지만 참는다고 시평을 끝내고는 사족처럼 예의 현철이 쓴 ‘신체시’를 거론했다.
상아탑은 현철의 글 중 세가지 요소 중 한가지만 갖추면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신문 3면 기사의 전도된 것도 시며 긴장미를 가진 보통문의 격문도 시인가”고 추궁하면서, 특히 “신체시는 서양시를 모방한 것”이란 대목에서 격분을 터뜨린다.
그는 신체시를 일본 명치 초기의 특칭이라 못박은 뒤(주 7), “최근의 일본 시단이나 또는 우리들이 쓰는 시는(시형은 비록 서시형을 모방하였다 하더래도) 곧 일본인이 창조한 시, 또는 우리가 창조한 독립한 시일다. 시형과 시는 다르다. 시를 덮어놓고 서양시의 모방이라 하는 것은 적어도 일민족의 그 국민시가(詩歌) 운동에 여(与)하는 이 위에 더 넘는 심한 큰 모욕은 없는 줄 안다” 고 글을 맺었다.
현철은 <<개벽>> 편집부에서 황석우의 글을 먼저 읽고 자신의 반박문을 같은 호에 게재했다. <비평을 알고 비평을 하라>는 글(주 8)에서 현철은 신체시가 비록 일본이나 한국에 유입되어 그 고유의 위치를 지니게 되었을지라도 그 단초는 서양시의 모방이라는 게 뭐가 잘못이냐고 따졌다.
반박에 나선 황석우는 신체시의 서양시 모방에 대해서는 수긍하면서도 “신체시가 없어진 지 몇 십 년이나 되는 금일에 재하여 ‘근자 신체시는’ 운운 하는 군”에게란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상징주의를 염두에 둔 자유시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이에 대한 현철의 반론(주 9)에서 제기된다.
현철은 신시. 신체시를 전통시와 구분되는 근대시의 통칭으로 본데 비하여 황석우는 개화기의 특칭으로 보는 데서 빚어진 이 논쟁은 인신공격과 욕설이 오가면서 ‘민족문학 형식’ 문제로 승화했다.
황석우가 “문자는 어느 민족이 발명한 문자든지 이것은 조금도 상관 없소”라며,
다만 그 민족에게 통용되는 문자면 ‘국민문학’이 된다고 주장한데 비하여, 현철은 “국민시가를 창설하려고 하거던 그 순서로써 먼저 우리의 고시를 연구하여 그 시상과 시형이며 또는 그 민족성이 나변에 있는 것을 깊이 안 후에 조선문을 -조선어- 를 신고(新古) 물론하고 잘 알아야 할지요, 그런 뒤에는 외국시상이나 시형을 배울 것이며”라고 하여 둘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이어 현철은 “근래 우리 문단(?)에서 신시이니 상징주의이니 하여 몽롱체를 표현하는 그 학리에 대하여 논평적 태도”로 대하면서, “정동(情動)도 없고 알지 못할 시를 공개하며 자기 개인의 소주관”에 집착하는 시단에 대한 불신감을 노골화시켰다.
논쟁이란 항용 그렇듯이 한창 쟁점에 이르는가 싶으면 끝나고 만다. 이후 황석우는 반론을 안썼는데, 엉뚱하게도 <<서광>>(통권8호)의 <목하 우리 조선인의 결혼 급 이혼문제에 대하여>란 설문에서 조선인은 “성교의 순간이 지나면 개나 원숭이같이 일일에도 몇 번씩 다투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릴밖에 무엇이 있느냐”는 등의 글을 썼다가 ‘홍양(洪陽)청년무리’(홍성군내 청년단체인 듯)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게된다.(주 10)
바로 황석우를 비판한 투고문 뒤에다 “황. 현 양인의 감정 충돌이라고 오해하는 이가 없지 아니하기로 이에 양인은 악수 상의한 결과 그 문장 구절에 감정적 언사가 될만한 것은 취소하기로 하였기 자에 근고합니다”란 <근고>를 실으면서 사실상 근대시의 첫 논쟁은 막을 내렸다.
이 논쟁은 그 원인과 진행 결과에 관계없이 신체시 규정, 시와 국어 및 민족시 형식, 상징시와 몽롱시에 대한 비판 등 중요한 쟁점을 제기하고 있다.
각주
3) 김용직, <<한국 근대시사>> 상, 학연사,1986,170 - 171, 참고. 그는 황석우의 신체시 비판을 “새것 컴플렉스”로 파악하고 있다.
4) <<개벽>>, 1920.11,94쪽. 현철의 글임이 나중에 밝혀졌으나 발표 당시에는 무기명으로 같은호에 실린 황석우의 <최근의 시단> 이 끝난 자투리란에 실림. 이 호에 현진건의 소설 <희생화>와 오상순의 <신시>도 실림.
5) <<매일신보>>,1919.11.10. 이 글에서 참된 자유시의 전형을 프랑스에서 구하며, 다른 시론에서도 상징주의 이입에 열심이었던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6) <<개벽>>, 1920.12.
7) 김학동은 <신체시와 그 시단의 전개>(이재선.김학동.박종철 공저 <<개화기문학론>>,형설출판사,1985게재,161쪽)에서 동경대 교수들 주축으로 편찬된 <<신체시초>>(1882)가 이 명칭의 기원이라 밝혔다.
8) 전 13쪽에 이르는 이 글은 ‘미세(微蛻)’란 익명의 <11월호 <<개벽>>을 읽고>(<<시사신문>> 1920.11.10)에 대한 반론이 11쪽이고, 황석우에게는 마지막 2쪽에 걸쳐 반론을 폈다.
9) 황석우, <주문치 아니한 시의 정의를 일러 주겠다는 현철군에게>, <<개벽>> 1921.1. 이 글 끝부분에는 언어와 국민(민족)문학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논쟁 가운데로 뛰어든 글은 김유방, <‘비평을 알고 비평을 하라’를 읽고>, 같은 호 게재,가 있으나 논의의 전개에 별 도움이 안된다.
현철, <소위 신시형과 몽롱체>, <<개벽>>,1921.2.
10) <잡지 ‘서광’을 읽고 황석우군에게>,<<개벽>> 1921.5. 공교롭게도 이 글에서 황석우를 일러 국적이 어디냐고 묻는 구절은 현철의 민족문학 형식을 상기시킨다.
3. 분석적 시 비평의 접근
박월탄은 <문단의 1년을 추억하여 - 현상과 작품을 개평(概評)하노라->에서 안서의 시 <대동강>을 비롯한 6편의 시(<<개벽>> 1922.7)에 대하여 <꿈의 노래> 등을 호평하는 한편 전반적으로는 “서정의 노래이었으나 사람으로 하여금 아찔한 법열 속에 취케 할만한 무드가 없으며 또한 그의 즐겨하는 베를레느의 마음 썩는 오뇌의 심벌도 없다. 예의 그 ‘여라’ ‘서라’ ‘러라’가 공연히 독자를 괴롭게 할 뿐이다”고 혹평하면서 특히 아래 부분을 강조했다.
대개 그의 시는 전체를 통하여 앨 써 너무 기교를 취하랴 하는데 큰 결점이 있다. 예를 들면 <가을> 제2절 1.2.3행에
지금이야 야릇하게도 웃음을 띈 눈이나,
핼끔하게 파리한 가이도 없던 그 얼굴과,
하얗게도 병적의 연약한 손가락이나마
이것을 보면 얼마나 그가 시상 그것 보다도 말 만들기에 고심초사하는 것을 알 수있다.(주 11)
이에 대한 김억의 <무책임한 비평 - ‘문단의 1년을 추억하여’의 평자에게 항의> 란 반론 요지는 “시평에는 (1)분석(시상의), (2)리듬(한데 이 리듬은 시인마다 각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무드의 세가지가 있을 것”이라면서,“주관적 감정”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항의한다. 이어 “었어라”등의 어미에 대하여 “”었‘은 과거이며, ’어라‘는 부정법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동사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는 ’가다 오다‘와 같은 것입니“다고 해명했다.
기교문제에 대하여 김억은 “나는 사상의 표현에 대한 가능의 문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하는 것만큼, 그만큼하게 조금도 허물내지 않고 문자가 생각을 표현시킬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며 김억-황석우로 이어지는 근대시 초기의 기교파의 연결고리를 감지케 해준다.
박월탄은 이내 <항의같지 않는 항의자에게>에서 “사상을 표현시키는 데는 기교 그것이 필요“하나, ”강한 뜨거운 사상을 표현시키는 역(力)의 기교를 갖지 못하고 말 만들기에 고심초사하는 언어 또는 문자의 공각적(空殻的) 과중 형용뿐만을 가졌단 말씀이외다“고 공박한다.
황석우. 현철 논쟁과 함께 이 공방전은 국민문학파 내부의 기교문제 논쟁의 서단을 장식했으나 본론과 전혀 관계없는 문단 부재론으로 얼버무려 버린 양주동의 허세로 일단락 되어버린 것은 자못 아쉽다.
각주
11) <<개벽>> 1923.1. 이에 대한 반박으로 김억의 <무책임한 비평>, <<개벽>>,1923.2. 다시 박월탄의 <항의같지 않는 항의자에게>,5월호. 이어 양주동의 <김억 대 월탄 논전을 보고>,6월호로 이 논쟁은 끝남. 이 논쟁에서는 일어식 한자숙어의 사용이 문제되었는데, 둘 다 일어를 피하자는 점에서 일치했다.
4. 시평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들
김동환의 시 <약산 동대가(薬山東台歌)>(<<조선일보>> 1927.10.28)는 육자배기나 성주풀이식 속가 형식으로 전4련이다. 1련에서는 진달래꽃밭의 아름다움을, 2련은 이를 구경하는 천하 조선 사람들의 것임을, 3련은 그 꽃처럼 아름답게 살아보자고, 이어 마지막 연은 그 험준한 꽃바위 언덕의 끝간데 없는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영변 출신 유도순이 “예술에 있어서 작품의 내용이 개념적이라거나 추상적이라는 말은 심히 불명예스러운 비평입니다. 예술의 내용은 사실에 입각한 정서적 구상화가 아니면 그 생명이 없습니다”고 혹평하고 나섰다.(주12)
그는 약산이 지닌 웅휘한 자연적 아름다움과 이괄의 난의 현장으로서의 역사적 의의 및 고전 중 약산 동대를 노래한 명시를 소개하면서 김동환의 시는 너무 피상적이고 추상적이라고 일갈했다. 비전문인으로부터 날아든 이 비판에 대하여 김동환은 약간 근엄하게 문학적 상상력에 대하여언급하고 있다.
가령 만리 밖에 있는 애급의 금자탑을 우리가 노래하자면 그가 삼각형이고 사막 위에 섰고 나일강이 부근을 흐른다는 상상만으로도 능할 것이니 금자탑의 어느 부분에 촌충이 매어달렸고 청태가 끼었고 야자나무가 섰더라는 극세부분은 알지 못하여도 무관할 것이다. ...... 시가가 다른 과학보다 특수하다는 점은 상상력 위에서도 능히 서진다는 것이다. .....
이제 미지의 유도순씨로부터 <약산 동대가>는 상상력만 가지고 썼기 때문에 내용 전반이 무가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내 머리가 극히 범용함을 알기에 걸작이 나오리란 자부는 가진 적이 없지만 상상력으로 되었다는 죄로 시가가 잘못되었다면 시가의 특질을 무시한 말씀이라 시가를 위하여 변명하고 싶다. 사실 나는 약산 동대를 못 보았다.(주 13)
이 논쟁은 문학적 상상과 실증적 자료를 둘러싼 문제제기일 터인데, 김동환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예컨대 기행소설과는 달리 기행시도 가보지 않고 쓸 수 있는가라든가, 상상력이 대상을 왜곡시켜도 좋은가란 등의 문제는 피해가고 있다. 유도순은 “봄이면 와자작 피었다가 가을이면 뚝뚝뚝 떨어진다”는 구절을 들어 진달래는 봄에 피었다 봄에 지는 불과 일주일의 개화기라 밝히면서 상상력의 한계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물론 김동환은 이 구절에 대하여는 승복하면서도 다른 모든 사실은 시적 상상력이란 단어로 함구하고 말았다. 이 문제 역시 문맥으로 보건대 유도순의 문학적 사상(내용) 우위론과 기교(형식)우위론의 대립상으로 풀이할 수있다.
초기 시단의 화두 제공자의 하나였던 황석우가 자신의 해명대로 “신비적 상징주의”를 “사회운동 전선에 나섰을 때 이미 청산”해버린 채 “상아탑이라는 호조차 쓰지 않”으며 문단적인 침묵을거쳐 시집 <<자연송>>을 낸 것은 1929년이었다. (주 14)
이 시집을 내면서 그는 지나친 자가발전을 시도하여 즉각 주요한의 반격을 받는다.(주 15)
주요한은 먼저 “지구는 곧 태양이 세운 그 최대의 기업장, 그 제품은 ‘행복’, 태양이 말하기를 ‘고통’은 태양의 의사에 반하는 인간의 나쁜 ‘오제품(誤製品)’이라고”나, “봄의 치마는 동풍, 그 빛은 초록, 봄의 얼굴은 둥굴고 눈같이 희다. 봄의 눈의 분홍빛의 비둘기눈, 봄의 마음은 꿀빛의 사랑의 샘, 봄의 직업은 꽃 제조, 빛 제조, 노래 제조, 봄은 곧 아릿다운 생명을 만드는 여류기사(技師),봄은 태양의 젊은 영부인” 등 몇몇 우수한 구절을 긍정한 뒤 나머지 대부분을 “시의 모독”으로 “동화로 생각하고 썼다 하면 그 표현의 졸교(拙巧)는 막론하고 감상가의 재고를 요할 제재가 많을지도 모르겠다”고 극언했다.
정노풍도 “그 유현모호한 상징미는 거의 사라졌다고도 볼 수가 있겠으나 그는 정도의 차이뿐으로 역시 상징적
경향이 이 시집의 기조라 본다”고 전제하고서 “우리의 생활과는 훨씬 유리된” 애송할 맛이 없는 것으로 비판해
버린다.(주 16)
여담이지만 황석우에 대한 평가는 상징주의와 연관된 부분은 긍정적이나
그 뒤의 활동은 거의 부정적으로 보고있다.(주17)
1930년 초 김안서의 시 <꽃다발> <그대의 길>을 “안서식 애상의 시편들”이라는 촌평 뒤에다 “이 시인은 격조시형을 논의하였거니와 하나도 새로운 틀을 낳아주지 못하였다. 무슨 틀을 분석하여 그 조직을 설명하였을 뿐 그 설명으로 말미아마 공헌한 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하여 매양 소소한 말기(末技), 자자구구의 문제에만 주의를 돌리고 연마한 연장으로서 무엇을 만들 것인지?”라고 해묵은 시와 기교문제를 제기한 것은 정노풍이었다.(주18)
초기 시단의 가장 활발한 논객이었던 김안서는 <격조시형론 소고>(주 19)에서 언어와 시, 시형식과 언어, 운율, 한국어의 특징에 따른 음격문제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 도이 고우치(土居光知)로부터 시사받아 썼다는 이 글은 지금도 검토할만한 가치가 있는데, 특히 인간의 호흡에 따른 낭독을 위하여 시행을 17 - 18음절 이상은 무리라든가, 한국어의 음력(音力)은 세 음절이면 분절시켜 발음하게 된다는 등 구체적인 작품 예를 들어 분석함으로써 시론사의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정노풍이 이를 기교 우선으로 몰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비난하자 김안서는 정노풍의 시<꽃다발>과 자신의 <꽃다발>을 비교하여 기교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반박문을 썼는데 아마 욕설이 없는 건실한 논쟁의 한 모범이 될 것 같다.(주 20)
시 논쟁사의 필수인 사상과 기교, 내용과 형식은 언제나 반복되면서도 미해결로 남는 게 정상인데, 카프쪽에서는 대중화 논쟁으로 김안서의 시형태론에 시선을 돌릴 틈새도 없었는데 조벽암이 기교론과 정형론이란 두가지에 초점을 맞춰 본격적인 반론에 나섰다.
그는 김안서가 주장했다는 “자유시는 너무도 자유스러우니까 긴장과 노력과 고심이 적으니 정형시 - 즉 자유롭지 못한 데에서 자유로운 자유를 구함에는 어디까지든지 긴장과 노력과 고심이 있는 것이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인간에게 자유가 고귀하듯이 자유시의 고귀함을 역설한다. 시의 형식을 강조한 나머지 김안서가 “자유시형은 과도기”의 현상이라고 강조했다며 조벽암은 정형시의 전근대성을 지적했다.(주 21)
기교에 대하여 냉담한 듯하던 정노풍이 임화의 시 <양말 속의 편지>를 “너무나 평면적이다. 서사시적 표현기능에 있어서도 파인과 임화씨를 비견해 본다면 이러한 느낌은 누구나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파인이 보담 기복적이요 입체적인데 반하여 임화는 보담 평면적이다.”고 비판하면서, “좀 더 이 시인이 표현기술에 유의하여 써 보담 큰 대중적 효과를 획득하도록 노력하기만 부탁해 둔다”(주 22)고 했다. 대논객 임화는 반론에서 마치 시인에게 투쟁의 격문을 쓰듯이 격앙된 문체로 일관하면서 시의 사상성과 기교주의의 부당성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곧 닥칠 시와 기교주의 논쟁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각주
12) 유도순,<김동환군의 ‘약산 동대가’를 읽고>, <<동아일보>>,1927.11.13-15.
13) 김동환, <시가와 상상력>, <<동아일보>>, 1927.11.19.
14) 황석우 <‘자연송’에 대한 주군의 평을 跪読하고서>, <<동아일보>>,1929.12.24 - 25. 이 글은 (주 15) 주요한의 글에 대한 반론임.
15) 황석우는 자신이 주재하던 잡지 <<조선시단>>에다 박우천의 <황석우씨의 시를 읽고>, 전운향의 <조선 신시단의 慈父 황석우씨의 재현> 등을 실었다. 박우천은 “시성 푸시킨을 연상”한다면서 “조선시단의 창시자인 씨는 또 시단 부흥자가 되어 줌은 기쁜 소식이외다”고 추켜 세웠고, 전운향은 “오오 우리 시단의 위인 황석우씨여 당신은 확실히 우리 조선시단의 눈물겨운 자부시며 또한 우리 젊은 시인들의 참으로 신뢰할 천분을 가진 목자시여이다. 우리 시단은 당신의 재현에 의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것이오이다.”고 했다.
반론으로는 주요한, <‘자연송’과 自家頌 - 황석우군의 시집을 독함->, <<동아일보>> 1929.12.5 - 6.
16) 정노풍, <己巳시단 전망>중 <3. 황석우 시집>, <<동아일보>>, 1929.12 .9 - 10.
17) 김윤식은 <한국근대 시사고 -- ‘장미촌‘을 중심으로- >(<<한국현대 시론비판>> 게재)에서 주요한을 타당한 것으로 보고 당연히 이 시집이 나왔을 때 “이미 황석우는 구제될 수 없을 정도로 시가 파탄되고 있었다”고 했다. 김용직 역시 <<한국근대 시사>>에서 “상식의 테두리밖에 서 있음”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이에 대비되는 견해는 유성호의 <<한국 현대시의 형상과 논리>>(국학자료원 1997)로, 그는 “우주적 일체감, 태양 숭배로서의 밝은 이미지”를 제공하여 “1930년대 이후 등장하는 김기림의 관념적 시들의 선편을 잡았다고까지 평가될 수 있다”고 했다.
18) 정노풍, <신춘 시단 概評>, <<동아일보>>1930.2.10 - 23. 이 중 김안서에 대한 것은 6.11회분.
19) 김안서,<格調詩形論 소고>, <<동아일보>>,1930.1.16 - 30. 전 14회에 이르는 이 글은 시사에 나타난 첫 형태론적 접근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안서는 이후에도 <詩形. 언어. 押韻>(<<매일신보>> 1930.7.30 -8.10) 등을 통하여 일관된 시형태론을 주장했다. 김춘수로 이어지는 형태론의 성과이다.
20) 김안서,<감상안 상실된 詩評에 대하여 - 정노풍에게 주는 駁文>,<<대조>>,5호.
21) 조벽암, <김안서씨의 정형시론에 대하여>, <<조선일보>> 1933.1.12 - 15. 이 글에 따르면 조벽암은 김안서의 <표현 언어 훈련 - 특히 시가에 ->(<<신조선>> 1932.10.11 합병호)를 읽고 반박한 것이라고 하는데, 김안서의 글은 확인 못했음.
22) 정노풍, <3월 시단 概評>, <<대조>>,4호. 이에 대한 임화의 반론은 <노풍 시평에 항의 함>,<<조선일보>>,1930.5.15 - 16.
5. 기교주의 논쟁
일제 강점 시기의 시 논쟁사 중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은 대중화론, 카톨리시즘과 현대시, 센티멘탈리즘, 모더니즘론 등 굵직한 쟁점적 화두들이 있으나 여기서는 할애하고 기교주의만 거론하는 것은 그 논의의 희귀성과 지금까지 다뤄온 소재에서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다.
발단이 된 임화의 글은 20년대의 훌륭한 시인들이 자유시에서 도리어 내용과 형식이 두루 정형화해 간다고 비판하면서 그 뒷 세대들에 의한 순수시운동에다 시선을 돌렸다. 김기림의 <시에 있어서의 기교주의의 반성과 발전>을 새로운 시운동의 주류로 본 임화는 우선 이 논리를 비판적으로 수용한다.(주 23) 즉 기교주의를 비판적으로 본 점은 수용하면서도 그가 예술지상주의를 윤리적인 문제로 부인하는 한편 기교주의를 미학적인 문제로 접근하는 데에는 비판적이었다.(주 24)
임화의 기교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김기림으로 하여금 30년대 시단의 대세이자 세계 시사적 흐름이라며 “”내용과 기교의 통일을 통한 전체적 시론“(주 25)을 주장하는 반론을 쓰게 했다. 물론 임화는 이에 대응하는 <기교파와 조선시단>에서 기교주의를 ”낡은 ‘예술을 위한 예술’사상이란 전세기의 유물의 부활“로 보면서 김기림의 조화적 통일론을 ”형식논리적 여훈(余薫)“이라고 끝맺었다.(주 26)
형식적으로는 막을 내린 기교주의 논쟁은 이를 전후하여 직간접적인 형태로 꾸준히 지속되었다고 볼 수있다. 예를 들면 이원조의 경우에는 낭만파. 감각파. 센티멘탈리즘을 동시에 배격하면서 김기림을 “감각파적 경향의 시인인 씨로서도 마침내 이 객관적 제약을 초월하지 못하는 경지가 가까이 보일 때 감각파적 경향 그것을 위한 동정의 미소도 금치 못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비꼬았다.
이어 이원조는 “이 감각파적 문학 경향은 부르주아문학의 한 방계적 현상으로서나 부르주아 인테리층을 대표하는 것이니 그네들의 섬세한 감각 그리고 그 감각에서 일어나는 델리키트한 신비감, 그리고 그 신비감의 추구에 대한 부절한 갈망 이것들이 곧 감각파의 전면적 특색인 동시에 이 특색을 우리는 김기림씨의 몇 편의 시에서도 역력히 볼 수 있는 것이다”면서 <황혼>을 분석했다. (주 27)
기교주의 논쟁의 방계로 볼 수 있는 것이 정지용 시에 대한 평가일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할애한다.(주28)
전후문학에서 기교주의는 다시 살아난다. 김규동은 한국시의 기교주의를 이상. 김기림 등 모더니즘과 다다이즘계의 기교, 영랑의 음악 상태적 기교, 김종문. 박인환 등의 추상. 무의식의 세계를 추구하는 기교로 파악하면서 기교의 필요성은 수긍하나 지나친 기교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주 29)
이 해묵은 논쟁은 시각에 따라서는 쓰잘 데 없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크게는 내용. 형식이나 사상과 기교는
물론이고,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논쟁으로도 연계되어 민중시 논쟁까지
뻗어갈 성질임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예술지상주의론을 기교주의의
핵으로 보는 관점일 경우에는 그 찬반 자세에 따라 기교주의의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각 주
23) 이 논쟁을 다룬 글로는 김윤식 <기교주의 논쟁> , <<한국 근대문학 사상>>,서문문고,1974, 게재. 이승훈, <<한국현대 시론사>>,고려원,1993, 중 박용철. 김기림. 정지용. 임화 항목 참고할 것.
김기림, <시에 있어서의 기교주의의 반성과 발전>,<<조선일보>>,1935.2.10 - 14. <<시론>>에서 제목을 <기교주의 비판>으로 바꿈.
24) 임화, <曇天下의 시단 1년 - 조선의 시문학은 어디로?->,<<신동아>> 1935.12.
25) 김기림, <시인으로서 현실에 적극 관심>, <<조선일보>> 1936.1.1 - 5. <<시론>>에서는 <시와 현실>로 개제.
26) 임화, <기교파와 조선시단>,<<중앙>> 1936.2. 이 글에서 임화는 박용철의 <을해 시단 총평>에 대해서도 비판했으나 별 다른 내용이 없음. 박용철에 대해서는 김훈의 <박용철의 순수시론과 기교>(<<김용직 외 <<한국현대시사>> 게재) 참고할 것.
27)
이원조,<시학도의 눈에 비친 근래 시단의 한 경향><<조선일보>>1933.4.26 -29. 이외에도 그는 <현대시의 혼돈과 그 근거>(<<시학>>1939.3)에서는 “현대시의 불행은 상징주의” 라며, 시적 기교의 초보인 이미지와 수사학 과잉을 비판함으로써 기교주의를 거부하는 자세를 굳힌다. 또 <시의 고향 - 편석촌에게 부치는 단신->(<<문장>> 1941.4)에서는 김기림의 주지적 경향과 모더니즘을 싸잡아 부정한다.
28) 김환태의 <정지용 시>(<<시원>> 1935.5), 양운한의 <시와 사상>(<<조선중앙일보>> 1936.2.11 -16), 이병각의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조선일보>> 1936.4.7 -10) 및 <예술과 창조>(<<조선일보>> 1936.5.31- 6.6), 김동석 <조선시의 片影>(<<동아일보>> 1937.9.9 -14) 등이 이와 관련되는 글들이다.
김재홍,<정지용, 또는 역사의식의 결여>(<<현대시와 역사의식>> 게재, 주 1 참고)에서도 8.15 직후 김동석 조연현이 전개한 정지용에 대한 엇갈린 평가를 소개하고 있다.
29) 김규동,<현대시와 기교 -- 기교주의 시론의 비평 - >, <<자유문학>> 1957.6. 이밖에도 최일수의 <반성하는 현대시 - 안솔로지 ‘현대의 온도’의 경우>, <<현대문학>>1957.6 - 7 연재,도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6. 이성과 접신술과 역사
8.15직후의 이데올로기 지향성 논쟁에서 시는 부록이었다. 이어 한국전쟁을 전후한 비시적인 계절을 맞아 논쟁은 문학사에서 추방이나 당한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5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전후문학‘이라는 새 물결이 넘실거렸고, 실존성, 전통론 등 몇가지 문제가 논쟁과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시단은 조연역으로 만족했다.
그래서 고난에 지친 독자들이 식민지 시기의 서정시나 읽도록 방치하면서도 난해시 혹은 관념시로 문예지를 채우던 시기에 한 잡지가 한국시의 문제점을 들고나섰다. <한국 시단의 현황과 현대시의 기본과제>란 제목으로 13명의 응답을 실었던 이 특집은 50년대 우리 시에 대한 처음이자 진솔한 견해들이 담겨있는데, 우선 당시 시단의 정황 파악을 위해 설문을 보기로 하자.
설문
현재 우리 시단에는 그 성명의 전부를 기억하기 곤란할 정도로 다수의 시인이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쌍수를 들어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시인의 존재가 정말 어떠한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많은 시인의 활동이 우리 문단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하는데 대한 반성은 다량의 시인의 존재를 환영하는 것과 아울러 중요한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면 아니된다. 이번에 본지는 현역시인 74인집을 특집하는 것과 아울러 이 문제에 관련된 다음 두가지 사항을 주로 시인 자신들과 그 보다는 좀더 객관적인 위치에 있는 평론가들에게 문의해 보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시단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함께 더 많은 반성과 토의가 있기를 빈다.
1. 귀하는 우리 시단의 현황을 어떻게 보는가.
2. 현대시의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주 30)
문단의 급팽창과 특히 시에서의 관념화가 두드러져 신구세대간의 시세계가 현격했던 시대의 분위기를 이 설문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응답 내용의 거의 전부가 난해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데, 예컨데 “시의 난해성을 주지성으로 착각”(정태용)한다거나, “상아탑의 실험실에서 나온 고증을 위한 작품같은 것이 하나의 주류처럼 생각되었을 때 벌써 침체가 왔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경험이다.”(정한모) 등 그 표현법은 다르나 전후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강했음을 알 수있다. 중요한 두 번째 설문은 어떤가.
...오늘의 단계에 있어서는 한편으로 암담한 상황에 함락되어 있는 인간성의 그 인도문제에 있음을 미력이나마 시인된 진실성으로서 다시금 확인하고 진력하여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유치환)
신의 발견(또는 회복) (서정주)
꽤 추상적이지만 우리 시인들은 피부에서 느끼는 서구의식과 영육에서 오는 동양사상과를 다같이 호흡, 소화해서 재현, 창조하는 성실한 태도가 중요하다고 봅니다.(윤병로)
...한국의 모더니즘은....근본적 반성이 있어야 하겠다. (문덕수)
영원히 구원받을 수 있는 소리를 찾아서 시로 엮어야겠다.(김양수)
시문학사 1세기 중 당대에 이뤄진 성과로는 가장 빈약한 작품과 연구성과를 낸 시기였던 이 50년대를 김규동은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1950년 전반기를 기점으로 새롭게 일어난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의 시인들은, 시론으로 볼 때는 네오리얼리즘에 가까운 것이나, 그러한 구획분류를 내릴 수도 없다.
6.25동란을 전후해서 탄생된 <<후반기>>그룹(김경린.박인환.이봉래.김규동.김차영.조향)의 운동은 어느 정도 현대시에 대한 논리적 미의 구축이란 이름 밑에 이념을 같이 하기는 했으나 계속적인 집단운동을 전개치 못하였다.
한편에 있어서 시인 김춘수, 김종문, 이인석, 김수영, 전봉건, 김현승, 유정 등이 다시 또 하나의 세계를(새로운 현실주의적 방향에로) 개척해 나가고, 김윤성, 이형기 등이 개성있는 작용(표현파)을 가하였다. (주 31)
50년대 시단의 현장감각을 김현승의 시선으로 보면 현대적 인간에 대한 연민을 나타내는 김규동, 영미계에 가까운 모더니즘의 김경린, 슈르리얼리즘계의 조향. 송욱. 김종문, 안정된 역량의 김춘수. 김구용, 독자적 행보의 김수영 등으로 압축된다. 이어 김현승은 전후 한국시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한다.
결국 서구시에 익숙한 30대의 시인들이 그들의 참신한 역량과 지성으로써 한국적인 방향을 어떻게 새로이 개척하여 나갈 것이냐 하는 것과 함께, 50대에 가까운 시인들이 그들의 경험과 예지로써 현대를 어떻게 해석하여 나갈 것이냐 하는 것은, 촉망할 수 있는 20대의 시인들이 훨씬 성장하기까지 적어도 한동안은, 한국현대시의 주류를 형성하는 의미에서도 흥미진진한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주 32)
그리고는 60년대를 맞는다. 전후 문단사에서는 처음으로 <한국현대시 50년이 남긴 제문제>심포지움(<<사상계>> 1962.5)이 열렸으나 쟁점은 주로 전통론으로 귀착해 버린 아쉬움을 남겼다.이 쟁점에 대한 목록은 너무 많아 여기서는 지나치는 게 좋을 것이다.
장황하게 전후문학을 화두로 삼은 까닭은 논쟁이 사라졌던 시대의 공백 뒤에 맞게된 서정주. 김종길의 논쟁을 바로 보기 위해서다. 김윤식으로부터 “어떤 유파의 감정적 옹호나 대립을 떠나 개인적 어법과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은 말꼬투리나 잡고, 편견에 헛갈리기 쉬운 우리 논쟁사에서는 하나의 예외적인 것”이라고 평가를 받은 이 논쟁은 “비평가와 시인 사이의 논쟁이라는 점보다는 50년대와 60년대 초기에 걸쳐 한국시를 율(律)하는 척도에 관련되어 있다”(주 33)는 평을 받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전후시부터 60년대 초반에 이르는 황량한 시단, “별다른 재질이나 역량도 없이 실험에만 골몰하든지, 상당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실험의욕이 지나치든지 또는 덮어놓고 터무니 없는 것을 써놓고 그것이 새로운 작품인 줄 알고있는 듯한 시인”들로 팽배해있던 시절에 김종길은 서정주의 시 <외할머니네 마당에 올라온 해일>(<<현대문학 1963.7)과 <이 비인 금가락지 구멍>(<<사상계>>1963.문예 증간호)을 들어 영매(靈媒) 혹은 접신술(接神術)의 시로 “이성적 구조”를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했다.(주 34)
이 논쟁이 자못 주목할만한 것은 기성 시인의 세계로 상정되는 서정주와 서구의 원전을 통한 현대문학 이론가 사이의 신구 시관을 쟁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다. 시사적으로 본다면 서정주도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뒤 동양 - 신라에로 귀의하던 중임은 다 아는 사실이다. 김종길이 지적한 두 작품이 아니더라도 이미 서정주에게 영매나 접신술의 징조(위의 <<현대문학>> 앙케이트를 보라)가 있었고 그것은 관점에 따라서는 오히려 시세계를 보다 심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를 굳이 ‘이성’적 미학관으로 비판한 것은 전통(혹은 보수 또는 인습?)부정론이 문단을 강타할 당시(<<사상계>> 논쟁을 상기하라)의 분위기를 감안해야 이해되는 대목이다.
분단 고착화로 시단에 군림하던 서정주로서는 이 기습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 못한 채 자신의 시 해설로 대부분의 지면을 메우면서, 자신도 “영통자(靈通者)로서의 역사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과, 은근히 교묘하고 지극히 간접적인 표현으로 “영교(靈交)” 없이는 역사를 바로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건 유물주의적 맥락으로 이어진다는 진술을 한다.
8.15 직후의 숱한 논쟁을 관전한 이 시인으로서는 6.25까지 겪으면서 자신의 시세계를 비판하는 것은 유물주의적이라는 무의식이 작용했는지 아니면 ‘영통’인지는 모르나 이 세대들이 지녔던 인문학적 천박성과 도식적인 순수문학관의 일단이 삐죽히 추하게 노출된 대목이었다. 서정주의 인문학적 무지가 가여울 지경이다. 여기에다 스스로를 ‘역사의식’까지 지녔다고 주장한 데에 이르면 논적 김종길의 진의에서 한참 벗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논쟁의 문맥만으로는 김종길의 논리가 정연하나, 70년대 이후 시의 다원화가 주류가 되어버린 오늘의 시점에서는 그 당시 서정주의 작품은 남을 정도가 아니라 다른 실험파보다 더 소중해져 버렸다는 점에서 당대적 시론의 한계를 감지하게 된다. 물론 서정주가 평가받는 대목은 자신의 해명처럼 영교를 지닌 ‘역사의식’의 소유자로서가 아니라 김종길이 비판했던 바로 그 점이란 사실은 흥미있는 역설적인 사건이다.
각주
30) <<현대문학>> 1958.6. 응답자는 신석초, 유치환, 정태용, 서정주, 윤병로, 김현승, 곽종원, 문덕수, 김양수, 정창범, 김상일, 정한모, 김우종.
31)김규동,<우리 시가 걸어온 길 - 해외시의 영향 아래 탄생된 제유파->,<<신문예>>1959.3. 이 글은 육당에서 50년대까지를 두루 다루고 있다.
32) 김현승,<현대시의 재의미 - 한국적인 주류를 위하여 ->, <<현대문학>>1959.2. 그는 여기서 “이제 우리도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할 때”라며, “이상의 시를 과대평가하는 일부의 경향은 위험한 일”이라 했다.
33) (주2)의 김윤식 <해방 후 시단 논쟁 - 몇가지 사례->.
34) 이 논쟁은 <<문학춘추>>를 통해 이뤄졌음. 김종길 <실험과 재능 -우리 시의 현항과 그 문제점->(1964.6), 서정주 <내 시정신의 현황 - 김종길씨의 ‘우리 시의 현황과 그 문제점’에 답하여- >(7), 김종길<시와 이성-서정주사백의 ‘내 시정신의 현황’을 읽고->(8),서정주<시평가가 가져야할 시의 안목 - 김종길씨의 ‘시와 이성’을 읽고->(9), 김종길 <센스와 넌센스>(11).
7. 시와 역사의식
쟁점적 관점으로 보면 참여시 논쟁은 민족문학 - 사실주의 - 농민. 노동자문학 - 민중시와 같은 맥락으로 엮어진다. 근대 이후 80년대까지 통시적인 시각으로 민중시를 검토한 김재홍의 <한국 현대시와 민중 의식의 전개>는 이 쟁점의 지평을 확대시켜 준다. 그러나 현대시사에 나타난 참여시 논쟁은 그 기원을 관념시 혹은 난해시 비판부터 전통 긍정을 거쳐 60년대의 김수영. 이어령 논쟁까지를 지칭한다. (주 35)
구체적으로 시와 현실성을 중심한 논쟁은 김수영. 전봉건에서 출발한다. <<사상계>> 1964년 5 -8 및 12월호에 쓴 김수영의 시평에서 발단된 이 논쟁은 문단사적 시각 위주로 접근하는 연구풍토 때문에 간과되어 왔으나, 분단 고착화 이후 참여. 민중시의 개념 규정과 문제점을 처음으로 제기한 중요한 논쟁이다. 시세계를 바꾼 김수영의 활동 전반에 걸쳐 비판적인 시각으로 본 전봉건은 <사기론 - 김수영 시인에게 부쳐->(주 36)에서, “사기를 세련된 현대성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김수영의 일련의 글에 대하여 도리어 김수영의 <강가에서>는 “비속적인 것”으로,
<이사>는 “보수적 양반적 무사상”의 시로, <거대한 뿌리>는 난해성의 시로써 참여시란 “사기”라고 반박한다.
김수영이 본 당대 한국시의 문제점은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나는 우리의 현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 보다도 더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이 뒤떨어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이상한 역설 같지만 오늘날의 우리 현대적인 시인의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 그가 ‘앞섰다‘면 이 ’뒤떨어졌다‘는 것을 확고하고 여유있게 의식하는 점에서 ’앞섰다‘."는 문장에서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앞섰다는 것은 기교주의적. 난해. 관념시를, 뒤섰다는 것은 이와 대칭적인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전봉건은 이 문구를 들어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를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는 구절을 들어 전봉건은 아래와 같이 풀이하는데 이 대목은 매우 시인다운 예지가 있다.
.....매우 충격적으로 오는 낱말 하나가 나와 있습니다. ‘반동’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그 존재를 부정해 마땅한 상대, 공격을 가하고 모욕을 퍼부어서 마땅한 그런 상대를 지칭하거나, 매우 격한 감정으로 지칭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웬만한 사람이면 김시인이 여기서 쓴 ‘반동‘이란 말은 그런 것이 아니고 기실은 뒤떨어진 현실의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인 온갖 것으로 해서 짓눌려 허덕이는 무수한 사람들에 대한 열띤 표현의 반어요 애정 표현의 반어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매우 충격적인 반어를 내지르다시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리만큼 기막히게 큰 연민과 애정 없이 저항과 옹호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을 짓눌러 허덕이게 하는 것에 대한 저항과 그것들에게서 그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옹호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현실 참여‘ 바로 이것 말입니다. 따라서 그 ’무수한 반동‘(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은 김시인이 ’현실을 직시‘함으로서 지니게 된 양심의 정체라 할 것인즉 그의 현실직시나 현실참여는 의심할 바가 없는 것이 됩니다. (주 37)
<거대한 뿌리> 중 ‘반동’의 의미를 천착해 준 탁견으로 김수영도 이를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전봉건이 겨냥한 것은 그 ‘반동’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써야 진정한 참여시지 “겉치레만 그럴듯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는 ‘거대한 뿌리’와 같은 반참여”라는 비판이다. 카프 시절의 대중화 논쟁을 연상하는 이 지적은 시각에 따라 일리가 있기도 하지만 딱히 맞는 논리는 아니어서 모처럼의 참여시 논쟁을 빗나가게 만들고 말았는데, 김수영은 그 반박에서 참여시가 난이도에 있는 게 아니라 포오즈 문제라고 해명했다.
.....‘시에 신념있는 일관성’이 있는 것하고, ‘지성인으로서의 기저에 신념이 살아 있는 것’하고는 시를 논하는 데 있어서 하늘과 땅 사이만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그(전봉건)가 말하는 ‘일정한 목적으로 일정한 연장에 의해서 찍어내는 브로크’ 같은 작품이 나오지만 --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정당의 강령을 신봉하는 프로파간더시 같은 것이 나오지만 -- 후자의 경우에는 한국 같은 무질서한 시단의 모법이 될만한 진정한 현대시가 나온다. 전자는 비참을 초래하지만, 후자의 경우의 신념은 아무리 혼란한 시대에도 굳건히 대지에 발을 붙이고 힘차게 일어설 수 있는 구원의 시를 낳는다. (주 38)
30년대 이원조의 포오즈론을 연상하는 이 대목은 참여시의 이론 정립 초보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전봉건은 분명히 김수영을 의식하면서 “이 사회가 요청하는 시인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그 의식과 그 의지에는 나를 요청하는 사회의 어떤 계층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에의 동의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라며 참여시의 계급성을 거론했다.(주 39)
이를 전후한 참여문학론은 김유중의 <순수와 참여논쟁>(주40)에 잘 요약되어 있다. 다만 70년대로의 길목에서 전개되었던 이어령. 김수영 논쟁은 그 화제성 때문에 너무 각광을 받고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근대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저질 논쟁의 표본이기도 한 이 설전은 당시 인문 사회과학과 문단의 지적 수준으로 볼 때 상식을 밑돌았으며, 다만 보수 대 진보의 대리전 양상을 띈 화제였다는 점만이 주목될 뿐이다. 언론 자유조차 없었던 이 시기의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이어령의 사회과학에 대한 천진스러운 지식에 바탕한 야비한 공격과 이에 대응하는 김수영의 자기 정체 숨기기의 모순어법은 한국적 지성의 비극적 양상이었다. 선우휘. 신동엽. 박태순 등의 참여론과 세대론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시는 1973년 신경림의 <<농무>>를 기점으로 참여시 논란을 촉진시켰다. 김우창. 김종길. 백낙청의 좌담 <시인과 현실>(주 41)은 이미 문단적으로 제 위치를 차지한 이성부. 조태일. 김지하 제씨의 시세계가 지향하던 참여시의 실체를 김수영. 신동엽. 신경림과 병행시켜 논의한 데 의의가 있다. 뿐만 아니라 60년대의 참여시가 김수영으로 상정된 데 비하여 이 좌담에서는 신동엽의 중요성이 거론되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대목이다. 그러나 백낙청의 참여시 긍정론과는 달리 시집 <<농무>>의 주인공들이 “이것을 읽고 자기들을 확인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김우창)와, “어디에 무대를 가설해 놓고 동원이 되어서 구경을 가는 듯한 그런 느낌”(김종길)이라는 반론은 나중 민중시로 그 해답을 넘기도록 만들었다. (주 42)
각 주
35) 김재홍, <<현대시와 역사의식>>, (주 1) 참고. 60년대 참여문학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는 임영봉,<<1960년대 한국 문학비평 연구 - 비평 세대와 문학 인식의 분화 양상을 중심으로 - >>, 중앙대 박사논문 1999,참고.
36) 이하 김수영. 전봉건의 참여시 논쟁 자료는 홍신선 편 <<우리문학의 논쟁사>>(주1)에서 인용. 자세한 목록 및 게재지 생략.
37) 위와 같음.
38) 김수영, <문맥을 모르는 시인들 - 사기론에 대하여 ->, 위와 같음.
39) 전봉건, <참여라는 것>, 위와 같음.
40) 김유중,<순수와 참여 논쟁>, (주 1) 참고.
41) <시인과 현실 - 신경림 시집 ‘농무’의 세계와 한국시의 방향 ->, <<사상계.>> 1973.7.
42) 이 쟁점은 시에서의 리얼리즘. 모더니즘 논쟁으로 승화하는데, 리얼리즘론에 대한 단행본은 윤여탁. 오성호 편 <<한국 현대 리얼리즘 시인론>>(태학사 1990), 최두석 <<리얼리즘의 시정신>>(실천문학사 1992), 이은봉 엮음 <<시와 리얼리즘>>(공동체 1993), 윤여탁 <<리얼리즘 시의이론과 실제>>(태학사 1994) 등.
8. 최동호. 이승훈 논쟁
이제 최근의 논쟁을 이야기할 자리가 마련되었다. 최동호 .이승훈 논쟁으로 이름 부칠 수 있는 이 쟁점은 우리 시사에서 매우 중요한, 특히 90년대 이후 한국시의 진로 모색에 절실한 화두를담고 있으면서도 설전이 확대되지 않은 채 언젠가의 폭발을 기다리는 사화산으로 남게 되었다. 시의 본질과 오늘의 시에 대한 평가, 포스트모더니즘론을 두루 포함하는 이 논쟁은 앞으로 점점 분화. 승화되어 재생할 가능성이 높다.(주 43)
시를 정신사적으로 접근하려는 최동호의 입장은 그간 <<현대시의 정신사>>(열음사 1985),<<삶의 깊이와 시적 상상>>(민음사 1995), <<하나의 도에 이르는 시학>>(고대 출판부 1997) 등에서, 해체주의에 입각한 이승훈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론>>(세계사 1991), <<해체시론>>(새미 1998)에서 저마다의 시론을 전개해 왔었기에 이 논쟁의 기본적인 이해에 필수적인 자료들이다.
이 글은 가장 중요하고 절박한 이 논쟁을 할애하기로 한다. 지면 제한도 있지만 토론이 더 필요한 진행형 논쟁이란 점 때문이다.
논쟁사란 참여자는 바뀌어도 그 주제는 언제나 비슷하다면 지나친 말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견대로 ‘비평적 성찰’이 아닌 단편적인 짜집기 형태로 되고 만 게 아쉽다.
각주
43) 이 논쟁은<<문학사상>>에서 전개되었는데 그 목록은 최승호 <시의 부정. 해체 그리고 시적 생성>(1996.10), 이승훈 <시적인 것도 없고 시도 없다>(11), 이성선 <정신주의의 서정성과 우주적 생명관 확보>, 박상배 <‘시대의 문학’이란 유령과의 투쟁 선언>(이상 12), 김준오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기 위한 논쟁>(1997.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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