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팔타커스(Spartacus)
최용현(수필가)
얼마 전에 104세로 타계한 미국 배우 커크 더글라스(1916~2020)는 5,60년대의 명우이며 마이클 더글라스의 아버지이다. 그는 젊은 시절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사극 ‘벤허’(1959년)의 주인공을 원했으나 그 자리는 찰턴 헤스턴에게로 돌아갔다. 그러자 그는 기원전 73년 검투사양성소를 탈출하여 수만 명의 노예반란군을 이끌고 2년간 반로마 항쟁을 이끌었던 노예검투사를 다룬 사극 ‘스팔타커스’(1960년)를 제작기획하고 주인공까지 맡는다.
영화 ‘스팔타커스’(스파르타쿠스가 올바른 표현)는 ‘로마의 휴일’(1953년)의 각본을 쓴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가 각본을 썼고, 감독은 안소니 만이 맡았다가 다시 스탠리 큐브릭으로 바뀌면서 당시로서는 거금인 1,200만 달러의 예산과 스페인 정예사병 8,000명을 지원받아 로마병사로 활용하는 등 1만 명이 넘는 인원을 동원하여 마드리드 외곽에서 대규모 전투 등 야외장면을 촬영하였다.
‘벤허’에 버금가는 스케일과 호화캐스팅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피터 유스티노프) 등 4개 부문을 수상하면서 ‘쿼바디스’(1951년) ‘벤허’ ‘클레오파트라’(1963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고대 로마시대를 다룬 영화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전 명작이 되었다.
리비아 채석장에서 혹독한 노역에 시달리던 트라키아 출신의 노예 스팔타커스(커크 더글라스 扮)는 로마 귀족들의 유흥을 위해 검투사양성소를 운영하는 바티아투스(피터 유스티노프 扮)에게 팔려간다. 고된 검투사 훈련을 받던 스팔타커스는 그곳 식당에서 일하는 여자노예 바리니아(진 시몬즈 扮)와 눈이 맞는다.
어느 날, 로마 최고의 권력자인 크라수스(로렌스 올리비에 扮)가 귀부인들과 함께 검투경기를 보러온다. 출전하게 된 스팔타커스는 키가 큰 흑인 검투사와 싸우다가 패하지만, 그 검투사의 희생으로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다. 스팔타커스는 70여명의 동료 검투사들과 의기투합하여 양성소를 탈출한다.
이들이 베수비오 산에 은신처를 정하자 각지에서 도망친 노예들이 속속 모여든다. 크라수스에게 팔려 바티아투스의 마차를 타고 로마로 가던 바리니아도 극적으로 도망쳐서 합류하고, 크라수스의 노예였던 시인 안토니누스(토니 커티스 扮)도 합류하여 스팔타커스를 보좌하게 된다.
스팔타커스가 이끄는 노예반란군은 어느새 9만 명으로 불어나 알프스 산맥을 향해 북진하면서 로마군을 연달아 격파한다. 그러다가 알프스산맥을 넘지 않고 다시 남하한다. 이들은 드디어 이탈리아 남부 해안에 도착하였으나 배를 제공해주기로 했던 해적들이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시칠리아 섬으로 가지 못하고 다시 북쪽으로 향한다.
한편, 수도 로마에서는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3두 정치를 하던 원로원 의원 크라수스가 노예반란군을 토벌하면 제1집정관이 되어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보장 받는 조건으로 8개 군단을 이끌고 반란군 토벌에 나선다.
크라수스의 대군과 맞부딪친 스팔타커스의 반란군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참패하고 만다. 북쪽으로 도망친 수만 명의 반란군들은 해외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폼페이우스의 군대에게 모두 죽임을 당했고, 크라수스의 대군에게 붙잡힌 6천여 명의 포로들은 아피아 가도에서 줄지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는다.
크라수스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원로원 의원 그라쿠스는 크라수스의 부하들이 곧 자신을 체포하러 올 것을 알고 크라수스가 탐을 내던 바리니아를 면천(免賤)해주고 자결한다. 자유인이 된 바리니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아직 숨이 붙어있는 스팔타커스에게 그의 어린 아들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는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기라성 같은 배우들의 명연기로 러닝 타임 3시간 16분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어서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초반부의 검투사양성소의 훈련과정과 검투시합 장면, 후반부의 로마 정규군과 노예반란군과의 치열한 전투 장면, 그리고 줄지어 늘어선 포로들의 십자가 처형장면 등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포로가 된 노예들 앞에서 크라수스가 ‘누가 스팔타커스냐?’고 묻자, 무더기로 앉아있던 포로들이 ‘내가 스팔타커스다(I am Spartacus)!’라고 외치며 줄줄이 일어서는 장면은 뭉클하다. 스팔타커스의 반란이 실패하면서 2,00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노예제도가 폐지되지만, 그의 꿈과 의기(義氣)는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스팔타커스의 반란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알프스산맥을 넘어서 국경을 벗어난 후에 각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려는 스팔타커스와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고 수도 로마로 진격하자는 갈리아 출신 크릭서스와의 갈등 때문이다. 결국 당시 7만이던 병력을 둘로 나누었고, 크릭서스가 이끄는 3만의 병력은 로마군에게 대패하고 크릭서스도 전사한다. 힘을 합쳐도 될까 말까한 반란군의 적전분열(敵前分裂)은 실패의 지름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둘째, 스팔타커스가 이끄는 4만의 병력은 북부전선에서 계속 승리하여 병력이 거의 2배로 늘어나지만 알프스 산맥을 넘지 않고 갑자기 남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러다가 반도의 최남단에 도착했으나 배를 제공해주기로 했던 실레지안 해적들이 크라수스에게 매수되는 바람에 배를 구하지 못해 다시 북진하다가 로마의 대군에게 참패한 것이다. 처음 계획대로 알프스 산맥을 넘었더라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노예반란군들이 알프스 산맥 앞에서 갑자기 남하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스팔타커스는 영화에서와 달리 전투 중에 사망했으며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스팔타커스에 대한 영웅담이 확대 재생산되어 민중들에게 널리 퍼져나가 오랫동안 로마 귀족들을 괴롭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