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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영양 지경리 마을과 남자현 지사
남자현지사의 애국정신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추모각.
■ 독립군 어머니 남자현 지사
일제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남편 대신해 독립운동
북만주 일대 농촌 누비며 여자교육회 설립 등 '큰 공'
■ 항일 의병대장 이현규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소식에 지인들과 의병 일으켜
헌병부대 토벌·왜관 격파 등 혁혁한 수훈 세워
의병대장 이현규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85년 지경리 마을 입구에 세운 기념비.
□석보면 지경리 마을과 남자현 지사
안동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청송군 진보면을 지난 영양군 입구로 들어서 석보면으로 가는 911호 지방도로를 5분간 타고 가다보면 석보면 지경리 마을이 보인다. 지경리(地境里)는 석보면과 입암면의 사이가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의 위치에 따라서 상지경과 하지경으로 부른다.
본래 영양군 석보면의 지역으로 진보군과 경계가 되는 마을이라 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월동 일부를 합해 지경리라 불렀으며, 의병대장 이현규(李鉉圭) 장군이 태어난 마을로 5개의 자연 부락으로 이뤄져 있다.
옛날에는 석보장이 이곳에 섰으나 인구가 증가하고 장터가 비좁아지면서 원리의 장터로 옮겨가고 장터만 남아 남아있고 마을의 상징적인 것으로는 독굴과 당나무를 들 수 있는데 독굴이라 함은 도둑의 굴이라는 말인데 노달(老達) 마을에 있는 큰 굴로서 약 5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로, 이곳이 도둑의 소굴이었다고 전해진다.
마을 당나무는 지경 마을앞에 있는 소나무인데, 지금까지도 해마다 정월 보름에 마을제를 지내며, 독립군의 어머니로 존경받는 남자현 생가는 1999년에 복원한 여성독립운동가의 산실이다.
△남자현 지사와 남자현 지사 생가지
남자현(南慈賢, 1872~1933) 지사는 영남의 석학인 남정한의 3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나 19세에 영양군 석보면에 사는 의성 김씨 김영주와 혼인을 하여 단란한 생활을 꾸리게 됐으나 일제의 만행이 점차 극성을 부리자 남편 김씨는 결사보국을 결심하고 영양 의병장 벽산 김도현 의진에서 왜군과 전투 중에 전사했다.
남자현은 나이 46세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에 대항해 나라를 구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닫고 같은 해 3월 9일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에 망명해 그곳에서 비밀무장단체인 서로군정서에 가입, 군사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남자현 지사는 북만주 일대에 농촌을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건립했고,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권신장과 자질향상에 주력했으며, 망명생활 6년을 맞은 1925년에 일본 재등실(齋藤實) 총독을 주살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해 거사를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1927년 봄에 안창호가 길림 조양문 밖에서 정의부 중앙간부와 각 운동단체간부·지방유지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석주 의사 추도회 겸 민족장래에 대한 강연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자, 일제는 안창호·김동삼 등 3백명을 체포하게 됐는데 이에 남자현은 투옥중인 많은 애국지사들이 석방될 때까지 정성껏 옥바라지를 했다.
1932년 9월에는 국제연맹조사단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 천에다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했다.
1933년 초에 만주국 건국일인 3월 1일에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일본전권 대사 무등신의(武等信義)를 제거하기로 했으나 일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영사관 유치장에 감금돼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식투쟁을 벌였으나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로 사경에 이르게 됐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본 경찰은 보석으로 석방했는데,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시 하얼빈에 있는 어느 여관에서 남자현은 아들 김영달(金英達)에게 중국화폐 2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이 돈을 희사하라고 하며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뤄지느니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향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남자현을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하고 하얼빈 남강외인(南崗外人) 묘역에 안장해 생전의 공로를 되새겨 정부에서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1999년에 생가터에 전통 건축양식과 현대식 양식이 혼재돼 있는 본채와 부속채를 복원했다.
남자현 생가 입구에 '남자현 지사 항일 순국비'라고 새겨진 비석 1기가 서있고,앞뒤로 본채와 부속채, 추모각이 각각 한 동씩 배치돼 있으며, 순국비는 1999년 국문과 한문이 혼용해 박영석(朴永錫)이 짓고, 유한상(柳漢尙)이 썼다.
본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이다. 가구는 오량이고 홑처마로 사방에 토석담장을 두른 독립적인 건물로, 입구에 5칸 솟을대문을 세워 출입하게 했으며,솟을대문은 좌측에 문칸방을 들여 놓았고, 우측에는 헛간과 비슷한 2칸의 공간이 마련돼 있다.
본채는 축대 위에 설계돼 있는데 입구에 장독대가 있고, 장독대 뒤에 아궁이를 넣은 부엌을 두었으며,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우측에 온돌방 1칸이 있고, 고방으로 짐작되는 쪽방이 있으며, 마루에는 뒷문을 달아 여름철 통풍에 효율성을 높였다.
부속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를 가진 맞배기와집으로, 공동화장실 옆에 마련했으며, 또한 영정을 모신 추모각(追慕閣)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으로 복원했다.
△지경리가 낳은 의병대장 이현규
이현규(李鉉圭 1874~1917) 장군의 본관은 재령으로 석보면 지경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적부터 기품이 늠름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투철했으며,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주변의동지들과 협의해 각지로 연락을 취해 11월 하순경에 청송의 주왕사(周王寺)에서 동지 수십명과 더불어 회합해 적을 토벌할 것을 결의하고 여러 군과 읍에 격문을 보내 거의(擧義) 뜻을 전했다.
그 해 12월 중순에는 울진의 불영사(佛影寺)에서 안동, 진보, 청송, 영양 등의 지역에서 모여든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중의(衆議)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돼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 무기, 군자금 등을 모으니 500여명이 의병에 투신해 왔으므로 이들을 청량산과 주왕산에서 훈련을 시킨 뒤 이듬해인 1906년 2월에 의진(義陳)을 편성했다.
아울러 유시윤 중군장(中軍將)에, 신형일을 소모장(召慕將)에, 김대규를 도포장(都砲將)에, 권대성을 집사(執事)에 각각 임명해 전투 태세를 갖춰 진격해 일본군과 수 차례 걸쳐 교전(交戰)을 했으며, 그 해 4월 진보 근처 '오누지(池)'가에서 강원, 경상도 의병의 소탕 책임자인 일본 헌병 오장(伍長) 무등(武藤) 이끄는 헌병 부대와 교전해 치열한 전투끝에 일본군이 패해 달아나니 의병진을 이끌고 파천면 의천까지 추격해서 대장 이하 적군 수 명을 사살했다.
이 전투에서 의병장인 이현규는 심한 상처를 입고도 다시 의병을 정비한 후 5월에는 죽변에 있는 왜관(倭館)을 격파하고 이어 영양의 북쪽에 있는 적군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이 증원부대를 이끌고 대대적 공격을 해 악전고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포장을 비롯한 많은 의병들을 상실해 의병진을 수습해 후퇴해 재기를 약속하고 해산했다.
이처럼 독립 의진으로서 활약을 하는 한편 신돌석 의진과 연합해 돌격장으로 선봉장을 맡은 이현규 서문을 파괴하고 불을 질러 영해성을 함락하는 크나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 후에는 포항시 청하면 모진리에 피신해 상처를 치료하면서 글방에서 2세 교육에 주력하는 한편 항일구국사상을 고취시키며 재기를 도모했지만 총상으로 인한 여독으로 1917년 2월 사망했으며,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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