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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인물 스크랩 무인열전(23) 최영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81 13.08.21 02: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신장으로 추앙받는 고려의 마지막 기둥


?-대자산(大慈山) 돌아들어 최 도통(崔都統) 적분(赤墳)

??따뜻한 술 붓기를 잊어버려라

??무악재 넘어와서 독립문 앞에

??신들메 다시 한번 조를지로다.-


?최영(崔瑩) 장군의 후손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조선유람가’에서 이렇게 읊었지만 경기도 고양시 벽제읍 대자 2리 통일로 옆 야트막한 야산 기슭에 누워 있는 최 도통의 무덤은 이제 적분이 아니다. 수백 년 동안 황폐했던 붉은 무덤을 후손들이 정화하여 떼를 입혔기 때문이다. “내 평생 탐욕을 가졌으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로되, 그렇지 않았다면 풀이 나지 않으리라”고 유언하고 태연히 칼날 아래 충절의 피를 뿌린 최영 장군, 그는 진정한 무장(武將)의 길, 충성의 길을 걸은 참다운 군인이었다.

?비겁자는 여러 번 죽지만 참으로 용기 있는 사나이는 오직 한 번 죽을 뿐이다.

?‘황금을 돌같이 보며’ 청빈하게 평생을 보낸 최영 장군. 70여 년에 걸친 일생을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전쟁터를 누벼온 고려의 마지막 기둥 최영 장군. 그는 비록 정치군인 이성계(李成桂)의 하극상으로 비명에 갔으나 민중의 영웅신 최 도통의 전설은 영원히 죽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충남 부여군 홍산면 태봉산 위에는 상승장군 최 도통의 홍산대첩비(鴻山大捷碑)가 왜구를 여지없이 무찌른 옛 승전지 홍산벌을 내려다보며 참된 군인의 길을 일깨워준다. 또한 통일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벽제읍 조금 못 미쳐 오른쪽 길가에 필리핀군참전기념비가 나오고, 그 옆에 ‘최영장군묘입구’라고 새긴 표지석이 서 있다. 샛길로 접어들어 300m쯤 들어가면 고양시 벽제읍 대자 2리. 이 마을 뒷산이 대자산으로 개울 줄기를 거슬러 500여m를 올라간 곳에 최영 장군의 묘가 있다.

?최영 장군이 누구인가. 그는 기울어가는 왕조와 운명을 함께 한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었다. 그는 후배 장군 이성계 일파의 쿠데타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가 정의로운 죽음을 택한 참다운 무인의 귀감이었다.

우왕(禑王) 14년(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허수아비 임금 창왕(昌王)을 내세우고 그해 12월에 최영을 처형하자, 그 날 온 도성 사람들이 문을 닫고 저자를 열지 않았으며 가까운 곳에서나 먼 곳에서나 이 소식을 들은 사람은 거리의 어린아이와 아낙네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고, 길가에 버려진 주검 옆을 지나는 사람들 모두가 그의 명복을 빌었다.

?최영은 참형당하기에 앞서서 “내가 평생에 탐욕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하고 태연자약하게 칼날을 받았다. 그 뒤 과연 무덤에 풀이 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적분’-붉은 무덤이라 불렀다. 그리고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500년 동안을 적분은 황폐한 모습 그대로 있었다. 비록 무덤은 벌거숭이로 수백 년 비바람에 황폐했지만 최영 장군이 영영 죽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민중의 영웅신으로 영원히 살아남았다.

?이성계 일파가 최영을 죽이고 정몽주(鄭夢周)를 죽이고 마침내 나라를 빼앗고, 이어서 왕씨 일족은 멸종에 이르도록 도륙을 하고 망국의 유신들을 살육하자, 송도사람들은 치를 떨며 분개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최영 장군을 신장(神將)으로 모시고 섬기며 나라를 빼앗고 숱한 충신을 죽인 이성계를 저주했다. 임진강 건너 송도 가까운 개풍군 풍덕 땅 덕물산 기슭은 서울 이북 경기도?황해도 무속의 본거지로서 산정에 최영 장군을 신장으로 모신 장군당이 있어서 이태 걸러 음력 3월이면 도당굿이 벌어졌다. 덕물산 최영 장군 신당에서 기도해야만 무력(巫力)을 얻는다는 믿음 때문에 전국 곳곳에서 무당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룬 가운데 굿이 벌어지는 것이다.

?굿이 끝나면 잔치가 베풀어지는데 이때 가장 진미로 치는 음식이 돼지비계로서 사람들은 이를 ‘성계육(成桂肉)’이라고 불렀다. 최영 장군의 원통하고 억울한 혼령을 위로하고 그를 죽인 이성계를 저주하기 위해 돼지비계를 이성계의 살점이라 부르며 씹어 먹었던 것이다. 고려 유민의 분노와 원한의 응어리는 무속의 형태로 이렇게 남아 전해져 왔다. 덕물산 신당에는 최영 장군의 원혼이 깃들어서 때때로 사나운 비바람을 부르며 괴이한 일들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지금은 임진강 건너 북녘 땅에 있기 때문에 가 볼 수가 없다.

?임종 직전 16세인 외아들에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마지막 가르침을 남기고 떠난 최영 장군의 부친 최원직(崔元直)의 묘 바로 아래 부인 문화 유씨(文化柳氏)와 합장한 최영 장군의 묘가 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고 수백 년 무상의 세월 속에 말없이 누워 비?바람?눈과 서리를 맞아온 붉은 무덤이 분묘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조선왕조 시대를 통틀어 벼슬길에 나아가 영달한 후손이 없어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봉분조차 밋밋한 평지로 바뀌어갈 무렵 동주 최씨(東州崔氏) 문중에서 비로소 묘역정화사업을 벌였던 것이다. 봉분을 새로 만들고 석인과 상석과 석등 따위 석물을 조성했는데, 무덤 앞에는 비석 2기가 서 있다. 하나는 처음 묘역을 정화하던 1928년에 18세 방손 최영태(崔榮泰)와 19세 방손으로 육당 최남선의 부친인 최헌규(崔獻圭)가 세운 것인데 이렇게 새겨져 있다.

?-高麗盡忠奮義佐命安社功臣判密直事

??大將軍門下侍中贊成事六道都巡察使

??鐵原府院君諡武愍東州崔公諱瑩之墓

??三韓國大夫人文化柳氏부左-

?또 하나의 비석은 1970년 10월 3일에 장군의 26세손으로 국방대학원장을 지낸 최대명(崔大明) 예비역 소장이 묘역을 재정비하면서 세운 충혼비이다.

?기록에는 최영 장군이 충숙왕(忠肅王) 3년(1316년)에 사헌부규정 최원직의 외아들로 태어난 사실뿐 그의 출생지가 어디라는 이야기는 없다. 본관이 지금 강원도 철원인 동주(東州)이고 대대로 벼슬살이를 하던 가문에서 태어난 것으로 미루어보아 철원 아니면 고려조의 도성이었던 개성이 출생지로 여겨진다.

?<고려사> ‘열전’ 최영편에 따르면 그는 평장사 최유청(崔惟淸)의 5세손, 사헌부 규정 원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풍채가 늠름하고 기골이 장대하며 용력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어려서부터 무술을 닦고 병서를 익혀 문관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무관의 길로 들어서서 일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던 것이다.

?최영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35세 때였다. 그 해 충정왕(忠定王) 2년(1350년)에 양광도도순문사의 휘하 장교로 여러 차례에 걸쳐 왜구의 침략을 물리친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서해와 남해를 침범한 왜구를 무찔러 전공을 세우고 왕실의 근위대에 발탁된 최영은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년)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호군으로 승진했다. 호군은 장군을 공민왕 때 개칭한 정4품 무관직이다. 이어서 공민왕 3년(1354년)에 최영은 종3품 대장군인 대호군에 올랐다.

?그 무렵은 원 제국도 말기로 접어들어 사정이 어수선하기는 고려나 별다름 없었다. 150년 동안 짓밟혀 죽어지내던 중국의 원주민 한족(漢族)이 마침내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원나라는 이리저리 토벌군을 보냈으나 역부족이었으므로 사위의 나라인 고려에도 원병을 청했다.

?고려에서는 최영을 비롯해 유탁(柳濯)?염제신(廉悌臣)?나영걸(羅英傑)?인당(印?)?이권(李權)?김용(金鏞)?강윤충(康允忠)?정세운(鄭世雲)?이방실(李芳實)?안우(安祐) 등 장수 40명에 육군 2천 명과 수군 300명을 파병했다. 그 해(1354년) 8월에 원나라 수도 연경에 도착한 고려군은 재원(在元) 고려인 중에서 2만 3천 명의 군사를 뽑아 고우성(高郵城)을 근거지로 한 장사성(張士誠)의 반란군을 쳤다. 토벌군은 총 80만 대군으로 원나라 승상 탈탈(脫脫)이 지휘했고. 고려군 2만 5천 명은 선봉부대가 되었다.

?고우성전투 이후에도 고려군은 수십 차례의 싸움을 치렀고, 그 해 11월에는 중국 남부의 반군 소탕작전에도 나서서 육합성(六合城)을 탈환하고, 팔리장(八里莊)?사주(泗州)?화주(和州) 등지에서 격전을 벌였는데, 특히 회안성(淮安城) 공방전에서는 혈전에 혈전을 거듭하여 이권?최원 등 장수 여섯이 전사하고 최영도 여러 군데 부상을 당했으나 굴하지 않고 용전분투하여 적을 물리침으로써 중국대륙에 널리 용명을 떨쳤다. 고려의 원정군은 그 이듬해에 귀국했다.

?최영 장군은 싸움터에서 겁을 먹고 도망치는 자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용서 없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군율을 엄하게 시행하니 장병들이 목숨을 내놓고 용감히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듬해인 공민왕 8년(1359년) 12월 8일에 홍건적 4만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침공해 와 의주를 함락하고 부사 주영세(朱永世)를 비롯한 주민 1천여 명을 학살했다. 적의 괴수는 모거경(毛居敬). 홍건적은 그 다음날 정주를 함락하고, 이어서 인주를 함락한 데 이어 28일에는 서경까지 점령했다. 홍건적의 제1차 침공은 그 이듬해 2월 16일 패잔병 300여 명이 압록강 건너로 도망쳐버리는 것으로 끝났는데, 다시 그 이듬해인 공민왕 10년 10월에는 괴수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가 이끄는 홍건적 10만 대군이 물밀듯이 압록강을 건너와 닥치는대로 살인?방화?파괴?약탈을 자행했다.

?정부는 이방실을 서북면도지휘사로, 안우를 상원수로, 김득배를 도병마사로 삼아 적을 막으라고 보냈으나 홍건적의 기세가 워낙 강해 서울인 개경까지 함락당하고 공민왕은 복주, 오늘의 경북 안동까지 피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경을 수복한 것은 이듬해 정월이었다. 총병관 정세운(鄭世雲) 이하 최영?안우?이방실?김득배 등이 이끄는 고려군 20만 명은 개경을 포위하고 총공격을 개시, 마침내 성 안의 홍건적을 섬멸했다. 이때 최영은 서문을, 이성계는 동문을 맡았다. 이성계가 친병 2천 명을 거느리고 선봉에서 활약, 적의 괴수 사유와 관선생을 잡아 죽임으로써 큰 공을 세우고 각광받은 것이 이 싸움이었다. 또 이성계는 이를 계기로 중앙 정계에 들어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최영 장군은 개경탈환의 전공으로 훈1등의 도형벽상(圖形壁上)에 전리판서로 입각했다. 도형벽상이란 공신의 초상화를 그려 벽에 걸어 놓는 것이다. 하지만 어지러운 나라에 장수로 태어났기에 한가로이 서울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해 4월 충청도 해안으로 홍건적이 상륙하여 노략질을 하자 다시 양광도진변사로 출정하여 이를 섬멸했다. 또한 공민왕 12년(1363년)에는 간신 김용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최영은 안우경(安愚慶)?김장수(金長壽) 등을 지휘하여 이를 깨끗하게 소탕했다. 김용의 난은 공민왕이 안동?상주를 거쳐 개경으로 돌아와 불탄 대궐 대신 흥왕사에 들르기로 하자 임금을 해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음모는 최영의 날카로운 눈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정세운?안우?이방실?김득배 같은 명망있는 선배 장군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할 때부터 최영은 김용을 의심스럽게 여겨 남몰래 동태를 살펴 왔던 것이다. 김용은 흉계를 실천하기도 전에 최영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온갖 죄악상이 백일하에 낱낱이 드러났다. 김용은 일단 밀성- 밀양으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계림- 경주로 옮겨져 거열형을 당했다. 최영은 이때 훈1등에 진충분의좌명공신호를 받고 종2품 판밀직사사로 승진되었으며, 다시 문하평리를 거쳐 정2품 문하찬성사로 올랐다.

?그때 김용이 부정축재한 갖가지 진기한 재물 보화가 환수되어 도당(都堂)에 쌓이자 모든 대신이 흥미롭게 구경하는데 최영 홀로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용이 그런 물건에 마음을 빼앗겨 몸을 망쳤는데 제공은 무엇이 좋아 그렇게 구경을???? 하고 있소?”

?과연,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는 최영 장군다운 고매한 태도였다. 뿐만 아니라 최영은 머리에 든 것은 없이 겉만 번드르하게 잘 차려입고 으스대는 자들은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공민왕 14년에 장군은 50세였다. 그 해 3월 왜구가 교동도와 강화도를 침범하자 그는 동서강도지휘사로 출정해 격퇴시켰다. 또 공민왕 22년 10월에는 육도도순찰사로 군호?병적을 바로잡고, 전선과 화전?화통 등 무기를 만들어 군비를 강화했고, 그 이듬해 7월 탐라에서 목호(牧胡)의 반란이 일어나자 양광전라경상도도통사, 즉 경기이남 총사령관이 되어 전선 314척에 군사 2만 5천 600명을 거느리고 가 이를 완전히 섬멸했다. 그때 최영은 병사들이 소와 말을 함부로 잡아먹으면 용서 없이 사형에 처하거나 팔을 잘라 군기를 엄하게 세웠다.

?그런데 그 해 10월 개경으로 개선했을 때 공민왕은 이미 암살당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최영은 우왕 원년(1375년)에 종1품 판삼사사에 승진했는데, 그 이듬해 7월에 유명한 홍산대첩이 있었다. 왜구 수만 명이 쳐들어와 공주를 함락하고 연산 개태사를 점령하여, 적을 치러 간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까지 전사했다는 급보가 올라왔다. 최영이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출전을 자원하자 어린 임금은 “장군이 너무 늙어서 싸우기에는 무리”라고 말렸다. 최영이 이에 뜻을 굽히지 않고 재삼 간청했다.

??“지금 왜구의 발호를 제압하지 않으면 뒤에 가서는 뿌리 뽑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이 비??? 록 늙었으나 뜻은 쇠하지 않았으니, 원컨대 나아가 싸우게 해 주소서. 신의 마음은 오로지??? 나라를 편안케 하려는 것뿐입니다.”

?임금이 마침내 허락하니 61세의 노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밤낮을 쉬지 않고 남녘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때 왜구는 부여 홍산 일대에서 사람들을 마구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며 노략질에 여념이 없었다.

?양광도도순문사 최공철(崔公哲), 조전원수 강영(康永), 병마사 박수년(朴壽年) 등 휘하 장수와 군사를 이끌고 홍산에 다다르니 왜구는 삼면이 절벽이고 한 면만 길이 난 고지에 진치고 있었다. 군사들이 두려워 전진하지 못하자 장군이 태연히 앞장서서 말을 몰아 좁은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숲속에 숨어 있던 왜구 하나가 장군을 겨누고 활을 쏘았다. 화살이 장군의 아랫입술에 맞아 피가 주르르 흘렀다. 하지만 그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화살을 뽑아 그놈을 쏘아 죽이고 칼을 휘두르며 산상으로 돌격했다. 그 모습을 보자 군사들이 와아 함성을 올리며 무섭게 장군의 뒤를 따라 총공격을 개시했다. 왜구는 고려군의 용맹스러운 기세에 눌려 진을 버리고 홍산벌로 내달았고, 최영 장군은 군사를 휘몰아 그 뒤를 추격하여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어 죽이니 이 싸움에서 적은 완전히 섬멸되었다. 8월에 개선하자 우왕은 문무 대신들을 이끌고 교외까지 나가 장군을 환영하고 논공(論功)에 따라 문하시중, 즉 수상으로 임명하려 했다. 최영이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은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신이 시중이 되면 쉽사리 외지로 출정할???? 수 없으니 왜구의 뿌리를 뽑을 때까지 명령을 거두어 주소서.”

?우왕은 할 수 없이 최영을 철원부원군에 봉하는 것으로 그치고, 휘하 막료 중 한 사람이 홍산파진도를 그려 바치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으로 하여금 찬사를 짓게 했다. 부여군 홍산면 북촌3리 연봉마을 뒷산에 오르면 1978년 1월에 건립한 높이 212cm, 너비 90cm, 두께 27cm 크기의 홍산대첩비가 산정에 우뚝 서서 빛나는 옛 싸움터 홍산벌을 내려다보고 있다.

?홍산전투에서 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노략질은 그칠 줄 몰랐다. 그 이듬해 우왕 3년 3월에도 수원과 강화에 침입하여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므로 최영이 육도도통사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승천부, 덕풍으로 쫓아나가니 왜구가 갈팡질팡 놀라 도망쳤다. 왜구를 무찌르고 돌아오자 임금은 장군의 공을 기록하고, 요즘의 훈장 격인 철권(鐵卷)을 하사한바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여러 장수 중에서 가장 많이 싸우고 가장 공이 큰 사람이 곧 경이다. 또한 충성을 다해 임금을 받들고 백성을 보호하니 재상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재상이다. 공신에게 전민(佃民)으로 상을 주는 것은 예부터 통례이나 경의 청렴결백함은 타고난 성품이라 이를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으므로 이에 다만 철권만을 내리되 그 축(軸)을 옥(玉)으로 하여 특별히 뛰어난 공로를 표한다. 아! 공은 큰데 상은 적으니 짐이 실로 부끄럽도다. 경이 혹 잘못을 범하여 아홉 번에 이를지라도 처벌하지 않을 것이요, 열 번에 다다른다 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그 은전을 깎지 않을 것이며, 자손들에게도 이와 같이 할 것이다. 뒷날의 군신(君臣)들도 마땅히 나의 뜻을 체득할지어다. -

?하지만, 왕명보다 창검이 더 가까운 난세에서야 철권 아니라 금권(金卷)인들 무슨 소용이랴. 우왕 7년 2월 임금은 장군을 부수상 격인 수시중에 임명하고, 그의 선친 최원직에게도 정1품 벽상삼한삼중대광 등의 벼슬과 동원부원군의 작위를 추증하고, 어머니에게는 삼한국대부인의 작위를 추증했다.

?우왕 14년(1388년) 운명의 해가 밝았을 때 백전노장 최영은 백발?백수가 성성한 73세 노인이 되어 있었지만 꿋꿋한 기상과 매서운 기개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 해 정월에 최영은 문하시중, 곧 수상에 임명되었다. 그와 함께 이성계는 부수상인 수문하시중에, 이색은 판삼사사에, 정몽주는 삼사좌사에 각각 임명되었다. 그 해 3월에 임금이 장군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고자 하므로 “신의 딸은 초취(初娶)의 소생이 아니라 폐하의 배필이 될 수 없습니다. 굳이 원하신다면 신은 머리를 깎고 입산하고 말겠습니다” 하고 사양했으나 결국 그 딸은 대궐로 들어가 영비(寧妃)로 책봉되었다.

?그 해 3월 원나라를 본고장인 몽고로 쫓아내고 대륙의 새로운 주인이 된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고했다. 철령은 강원도 회양과 함경도 사이의 고개인데 공민왕 때 쳐 없앤 쌍성총관부가 있던 곳이다. 전에 원의 영토였으니 이제 명나라가 차지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억지였다. 철령위란 요양에서 철령 사이 70여 군데에 보급기지를 설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분개한 최영은 우왕과 더불어 이성계?정몽주 등 반대파의 주장을 억누르고 요동정벌을 추진했다.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에, 조민수(趙敏修)를 좌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우군도통사에 임명하고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려 군사를 모집했다.

?우왕 14년 4월 18일 요동정벌군 약 5만은 서경을 출발, 북진을 개시했다. 5월 7일에는 압록강 가운데 위화도에 이르렀는데 억수같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이성계의 걱정대로 장마가 시작된 것이었다. 한편 서경에서도 불길한 조짐이 일어났다. 총사령관인 최영의 출정을 겁많은 임금이 붙잡고 가지 못하게 말렸다.

??“부왕(공민왕)도 장군이 탐라정벌로 조정을 비웠을 때 시해되었는데, 나 혼자 두고 가면??? 어쩌오?” 하는 바람에 귀중한 시간만 헛되이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최고지휘관이 없는 군대, 그것도 불만이 가득 차서 억지로 떠난 장수가 거느린 부대였다. 평생을 군문에서 보낸 최영 장군이 그런 군대의 생리를 모를 턱이 없었다. 이성계는 사지(死地)에 군사를 끌고 들어갈 수 없다면서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회유하여 그 해 5월 22일 역사적인 위화도회군을 감행했다. 왕명을 거역하고 최영과 맞서기로 작정한 것이니 그 순간부터 이성계는 고려조의 역적이 되었다. 이성계의 회군 속도는 진격할 때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질풍같이 남하하여 최영이 임금을 모시고 개경으로 돌아간 서경을 통과, 6월 3일에는 개경 공격을 개시했다.

?최영은 이성계에게 지휘권을 맡긴 일생일대의 실수에 대해 후회할 겨를도 없었다. 급히 끌어모은 의용방위군을 데리고 유만수?조민수의 부대를 악전고투 끝에 물리쳤지만 이성계가 이끄는 정병에는 역부족?중과부적이었다. 선죽교와 자남산에서 밀려 만월대 궁궐까지 후퇴한 최영은 마침내 칼을 내던졌다. 임금과 눈물의 작별을 하고 난 최영은 반란군 앞으로 나섰다.

??“너희가 찾는 최영은 여기 있다! 폐하께는 아무도 손대지 말라!”

?스스로 걸어온 최영을 보자 이성계는 외면한 채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죄인을 묶지 않고 뭘 하느냐!” 온몸이 묶인 최고사령관 최영이 후배 장군이며 쿠데타군의 우두머리인 이성계에게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역적 성계야! 너 때문에 태조(太祖 : 王建) 이래의 고구려 옛 땅을 찾으려는 꿈이 깨지고 말았다! 이 대역죄인아!”

최영은 그 날로 오늘의 고양시 일산신도시인 고봉으로 유배당하고, 이어서 24세의 우왕도 최영의 딸 영비와 함께 강화도로 쫓겨났다. 정권을 잡은 이성계와 조민수는 아홉 살짜리 철부지 창(昌)을 왕좌에 앉혔다. 충주로, 마산으로 유배지를 옮겨다니던 최영은 그 해 12월 조민수마저 내쫓고 국정을 전단하던 이성계에 의해 참형을 당했다.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고려의 마지막 기둥을 완전히 쓰러뜨려 없애야겠는데 아무리 털어보아도 마땅한 죄목이 없었다. 그래서 윤소종(尹紹宗)이란 자가 제안한 ‘공은 한나라를 덮었으되 죄가 온 천하에 가득찼다(功盡一國 罪滿天下)’. 즉 고려를 위해 세운 공로는 크지만 대국인 명나라에 죄를 졌으니 죽어야 마땅하다는 해괴한 죄명을 씌웠던 것이다.

?호가 기봉(奇峰)인 최영 장군은 문화 유씨 부인에게서 아들 담(潭)을 두었다.

?밖에 나가서는 장수로 백전백승한 상승장군이요, 안에 들어와서는 부정?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청렴결백한 재상이었던 최영 장군. 그가 누명처럼 과연 나라와 겨레의 큰 재난을 불러일으켰다면 어찌하여 저자의 부녀자?어린이까지 처형 소식을 듣고 구슬피 통곡하며 애통해 했을까. 장병들에게는 엄격한 사령관이었으나 전쟁터의 진중에서도 시를 읊으며 풍류를 잃지 않던 최영 장군. 비록 요동정벌로 고구려 옛 터전을 되찾으려던 웅대한 포부는 한을 남기고 꺾여 버렸으나 한점 티 없이 나라와 겨레 위해 평생을 바친 장군의 고귀한 정신은 참된 무인의 길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 천세 만세의 스승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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