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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정의실천연대 원문보기 글쓴이: 역사연대
친일오욕의 역사와 대학을 말한다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2009년 12월 28일 이화여자대학교·고려대학교·서울여자대학교·상명대학교·성신여자대학교·연세대학교 등 6개 대학 총장들은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앞으로 매우 이례적인 내용을 담은 청원서를 연명으로 보냈다. 이 청원서는 한국 대학 최고책임자들이 친일문제에 대한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들의 교육철학이 어떠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지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들 6개 대학 총장은 2005년 특별법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국내 주요 사립대학 설립과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한 주요 인사들 대부분”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해 “민족교육에 대한 공헌의 유무와 관계없이 친일행위자로 매도”한 것으로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들이 일컫는 국가기구에 의해 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국내 주요 사립대학 설립과 발전에 기여한 주요 인사들”이란 김활란(전 이화여대 총장), 김성수 고려대학교 설립자(엄밀하게 말하면 원 설립자는 아니다), 유진오(전 고려대 총장), 고황경(서울여자대학 설립자), 배상명(상명대학 설립자), 이숙종(성신여대 설립자), 백낙준(전 연세대학교 총장) 등 각 사립대학교 설립자이거나 총장급 직위를 역임한 인사들을 말하는 것이다. 6개 대학 총장들은 반민진상위가 이들에 대해 “일괄적 잣대로 무리하게 재단하고 폄하하여, 한국사회 발전에 미친 공헌에 마저 부정적 판정”을 매기고 있으며, “일제하의 혼란 속에서 학교를 지켜온 이들의 역할을 폄하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유수한 교육기관으로 성장하고 있는” 해당 대학의 앞날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며 조사 결과에 대한 조속한 시정을 청원”했다.
국가기구인 반민진상위원회나 민간기구인 친일인명사전위원회에 의해 누군가가 친일 인사로 규정되었을 때 관련 유족(또는 기관) 등이 반발하는 것이나 유감을 표명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 친일행위가 결코 자랑스러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수한 교육 기관으로 성장하고 있” 다고 자처하는 대학의 총장들의 청원 내용이 어떤 가치와 시각에서 제기되느냐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김활란·김성수·유진오·고황경·배상명·이숙종·백낙준 등은 친일인명사전에 당연히 수록되었을 뿐 아니라 반민진상위원회에 의해 친일인명사전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될 만큼 친일행위가 심각한 인물들이다. 인터넷에서 이들을 검색하면 누구라도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겠다. 그러나 몇 가지 점은 밝혀야 하겠다.
첫째 교육 분야에서 친일행위를 해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은 의외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친일인명사전의 경우 교육·학술분야에서 친일행위를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수록한 인물은 52명이다. 이들 가운데 해방 전 또는 해방 후 (전문)대학 설립자나 총학장급 지위의 친일인물들은 앞의 7인 외에 박마리아(전 이화여전 강사), 송금선(덕성초급여대 초대 학장), 장덕수(보성전문학교 교수), 조동식(상명대학·동덕여대 설립자), 현상윤(고려대학교 총장), 황신덕(중앙여자중고등학교·추계예술대학 설립자) 등 다 합해봐야 열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일제 강점기 전문대학 이상의 교육분야에서 심각한 친일행위를 한 자는 의외로 적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교육계 인사들은 누구나 어쩔 수 없어서 친일을 했다고 말할 근거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떤 기준에서 친일 인사로 선정되었을까? 친일인명사전의 경우 교육학술 분야 수록기준은 다음과 같다.
1. 교육·학술계에 종사하면서 일제의 식민 지배 이론을 합리화하고 이를 확산시키는 데 앞장선 자
2. 각급 교육기관과 각종 교육·학술단체의 설립자·책임자·운영자로서 전쟁동원을 독려한 자
3. 고등관 이상의 교육 관리
4. 조선사편수회(반도사편찬사업·조선사편찬위원회)의 편수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한 자
5. 좌담·강연 등을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
이 가운데 김성수를 포함한 앞에 언급한 대부분의 교육계 친일인사들은 “각급 교육 기관과 각종 교육․학술 단체의 설립자․책임자․운영자로서 각종 친일 단체의 핵심 간부로 활동하거나 좌담·강연·기고 등을 통해 학생들에게 전쟁터에 나서도록 독려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해서 친일활동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왜 중일전쟁 무렵부터일까?
이 시기는 중일전쟁(1937년) · 태평양전쟁(1942년)으로 이어지면서 일제가 전시총동원체제로 돌입하던 시기이다.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 내의 지하자원은 물론 조선인의 재산마저 ‘국방헌납’이란 명목 아래 전쟁 물자로 수탈하고, 근로보국대와 같은 노동력 수탈이나 지원병·징병 등의 수단을 동원해 조선인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끌고 가던 시기였다. 그러나 일제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조선민중들을 전쟁에 동원하고 천황과 일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세뇌 공작이 필요했다.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 동조동근(同祖同根), 황국신민(皇國臣民)을 정책의 핵심으로 내세우고 조선어를 없애고 창씨개명을 강요해 민족의식을 말살하고자 했다. 이러한 민족의식 말살 위에 조선인들을 전쟁에 대대적으로 동원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일제는 1910년 단계의 매국형 친일파나 이후 조선총독부 소속 조선인 관료와 같은 직업형 친일파와 다른 새로운 형태의 친일파를 필요로 했다. 즉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면서 황국신민화와 전쟁동원에 앞장서는 ‘제국의 나팔수’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런 이데올로기 선전자로서 조선의 명망가, 지식인, 종교인, 문화예술인·교육인·언론인 등이 새로운 친일파로 등장했다. 반민족행위자일 뿐 아니라 아시아민중에 대한 침략전쟁의 적극 협력자였다는 점에서 전쟁범죄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반민족적이면서 반인륜적이었다. 1937년 이후 지식인·문화예술인들의 친일행위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교육자의 경우 이들이 학원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했다는 주장은 그대로 수용되기 어렵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 전쟁이 확대되면서 전황이 악화되자 일제는 조선인 학생을 전쟁에 동원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938년 2월 조선인에 대해 지원병 제도를 실시한다는 방침이 발표되면서부터 학생들을 전쟁터로 동원하는 데 교육자들이 적극 나서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가 1942년 5월에 이르러 1944년부터 조선에서도 징병제를 실시할 것을 확정하고 이어 1943년 8월 해군 특별 지원병 제도, 1944년 1월 학병 제도를 시행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1942년 이후 전황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터로 나간다는 것은 목숨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도 일제가 조선인 학생을 전쟁에 동원하는 과정에서 많은 교육자들이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논리에 맞추어 학생들에게 전쟁터에 나가 ‘천황’과 일본을 위해 목숨을 버리라는 선전 활동에 적극 나섰다. 전쟁 동원의 대상은 군인이 되는 남학생에 국한되지 않았다. 교육자들은 여학생들에게도 ‘총후’ 여성으로 ‘천황’과 일본을 위해 자기 직분을 다할 것을 요구했다. 여성의 직분 가운데는 ‘정신대’도 포함되었다. 여성 교육자들은 자기가 가르치는 여학생들을 ‘정신대’로 내모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요컨대 전시총동원체제기의 학교란 전쟁군인을 대량으로 확보하는 군국주의의 낚시터였다. 그때 이들의 친일은 일제의 강요에 의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심각하고 반복적이었다.
보성전문학교의 사주 행세를 한 김성수는 1935년 경기도청의 주도로 ‘경기도내의 사상선도와 사상범의 전향 지도 보호’를 목적으로 조직된 소도회(蘇道會)의 이사로 선출되었고,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가 되었다. 1943년 조선인에게도 징병제가 실시되다는 발표가 있자 「문약(文弱)의 고질(痼疾)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는 징병격려문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김활란(金活蘭, 창씨명 天城活蘭)은 1936년 말부터 교육과 여성계몽 분야에서 친일활동에 앞장서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8월에 애국금차회의 발기인과 간사를 맡았다. 애국금차회는 귀족·고위관료 부인들과 여류 명사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뽑아 바치자고 조직한 단체로서 황군의 환송영, 총후가정(銃後家庭)의 위문과 조문(弔問), 일반 가정부인의 시국인식 강화 철저와 국방헌금·위문금품 헌납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41년 당시 조선 최대의 친일조직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부인대 지도위원을 거쳐,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를 지냈다. 1942년 ‘징병제와 우리의 각오’(신시대 1942.12) 등의 전쟁 찬양 글을 발표했다.
백낙준(白樂濬, 창씨명 白原樂濬) 은 교육계와 기독교계의 거물 친일인사로 1941년 미영타도 좌담회에 참석했으며, 조선장로교신도 애국기헌납기성회에서 활동하면서 수많은 친일 문필활동과 강연을 했다(너무 많아서 생략한다).
이들의 친일은 학교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구실과는 별개였다. 학교란 엄밀하게 말해 진리 탐구와 학생 양성을 위해 존재한다. 진리를 말살하고 학생을 전쟁에 보내는 것이 과연 학교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 학교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기실 이들의 친일행위가 지킨 것이 있다면 설립자 자신들의 기득권 아니겠는가. 그들이 지킨 것은 학교 재산이지 학생이나 교육 이념이 아니었다. 이런데도“민족교육에 대한 공헌의 유무와 관계없이 친일행위자로 매도”했다고 항변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겠다.
‘세계적인 수준의 대학’ 아니 상식이 통하는 대학이라면 결코 이렇게 총장들이 패거리를 지어 제국주의에 협력한 자기 학교의 설립자를 지키기 위해 추한 행태는 벌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짓이야말로 전리의 전당인 대학을 특정 설립자의 방어 도구로 이용하는 부끄러운 작태라 하겠다. 차라리 6개 대학 총장이 ‘과거 설립자들이 이런 저런 동기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아시아민중에 대한 침략전쟁에 가담한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하며, 앞으로는 권력과 금력에 굴하지 않는 진정한 진리의 전당으로 만들겠다’는 발표를 했더라면 그것이 오히려 더 교육자의 양심에 걸맞았을 것이다. 이 정도의 ‘학격(學格)’은 있어냐 ‘세계 유수’는 아니더라도 세계의 상식수준의 대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출발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러한 반성조차 없이 私主 지키기에 총장마저 앞장서는 이 세태는 무슨 까닭일까? 한 마디로 해방 후 대학이 친일세력의 도피처이자 온상이 되었으며, 대학이 설립자나 그 후계자를 위한 거대한 사유재산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미군정이 친일청산을 끝내 거부하고 오히려 친일 세력을 군정 초기부터 국가 기구 요소요소에 앉힘으로써 이들이 조직적으로 저항할 수 있게-아니 오히려 친일파 청산을 외치는 세력을 탄압할 수 있는 권력과 명분을 주었다. 그나마 1947년 7월 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민족반역자, 모리간상배등 처벌에 관한 특별법률 조례’를 제정해 최소한 건국 이전에 친일파를 청산하고자 했으나, 미군정은 이마저도 인준보류 통지를 함으로써 친일파 청산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그 시간만큼 친일파는 권부 속에 더욱 깊게 자리 잡았다.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국민의 열망에 힘입어 반민족행위조사특별위원회가 1948년 9월에 발족하면서 다시 친일청산의 길이 트였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저항과 공격 그리고 이승만정부의 방해에 의해 1년도 못가서 무참하게 와해되고 말았다. 친일부역세력들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집요하게 방해하였고, 마침내 1949년 6월 친일부역경찰들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해 반민특위 요원을 폭행하고 경찰서 유치장에 가두는 전대미문의 사건마저 일어났다. 결국 반민특위는 이승만정부에 의해 1949년 9월 해체되고 말았다.
1948-49년 약 1년간 반민특위는 682건을 조사하여 체포 305건, 미체포 193건, 자수 61건, 영장취소 30건, 검찰송치 559건의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반민특위 소속의 특별검찰부가 기소한 것은 221건이며, 특별재판부가 재판을 종결한 것은 28건에 지나지 않았다. 기소자들도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려나서 실제 처벌받은 자는 십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마저 6·25전쟁 전에 다 풀려나와 사실상 친일청산은 전무했다고 봐야 한다. 일제 35년간 민족에 해악을 끼친 친일파에 대한 청산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친일파의 거물 가운데 대부분 지식인 출신들이나 부호들이 많았다. 이들은 친일파 숙청이 실패한 덕으로 친일의 대가로 보존해온 자신의 기득권을 해방 후에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정계, 재계, 관료집단, 문화, 언론, 학술, 교육계 등에 실력자·원로로 자리 잡으면서, 자신의 친위세력이나 방어조직을 광범위하게 구축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친일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금기가 되고 말았다.
특히 친일부호들은 친일파에 대한 민중의 분노, 반민특위에 의한 친일파 처벌과 농지개혁에 따른 토지 상실 우려(물론 유상매입 형태이기는 하지만) 등의 요인이 겹치자 해방 후 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시대적 요구와 맞물려 학교를 설립하는 데 재산을 투자했다. 일부 부호들은 과거 친일행위를 반성하는 의미가 있었지만 상당수는 재산도피수단이자 교육을 통한 모리행위로 이어졌다. 오늘날 사립학교문제라고 하면 설립자를 중심으로 한 숭조사업의 수단이자 사학의 재정·인사비리가 연상될 만큼 그 출발이 본래의 교육입국 취지와 멀었던 것이 큰 원인이었다.
한편 해방 후 만들어진 전문대학·일반대학의 경우 친일 지식인들의 대규모 온상이 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국립 서울대학의 경우 조선사편수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이병도가 국사학과를 이끌었고, 친일문학이론의 거두인 최재서가 문학을 담당했다. 서울대학교 미대는 노수현·장우성 등이 또아리를 틀었고 음대는 친일음악 분야에서 최악질로 불릴만한 현제명이 초대 학장이 되었다.
국립대학이 이 모양이니 사립대학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백낙준은 1951년 문교부 장관을 거치고 1957년에는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었다. 친일 문인으로 오명을 남긴 유진오는 고려대학교 교수와 총장을, 김활란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을, 황신덕은 추계예술대학 설립자가 되는 등 수많은 친일파들이 교육계에 포진해 그 핵심을 장악했다. 미술인의 ‘명문’이라는 홍익대학 미대는 심형구와 같은 친일 화가가 창설했다. 자연히 이들과 연결된 수많은 친일 지식인들도 대학 내의 교수로 포진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해외 망명에서 돌아온 노독립투사가들이 뜨거운 열만으로 설립한 홍익대학이나 신흥대학은 되려 관련 독립운동가들이 납북되거나 또는 이승만정권에 탄압을 당하면서 위축되었다. 이들 대학은 친일 인사나 학원 모리배 또는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사리는것에 관심없는 재력가의 손으로 넘어가 버렸다.
문제는 친일세력들이 대학을 장악한 것은 교육계에 대한 영향력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른바 교육의 신성함을 내세우면서 신성한 교육자, 민족교육가로 변신을 꾀하는 한편, 학연·혈연·지연으로 이어진 그 후계조직들은 설립자를 위한 각종 동상이나 기념관, 니념사업 등을 통해 친일 역사를 덮어버리고 학교를 설립자를 미화시키기 위한 숭조사업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화여대의 헬렌관(김활란의 미국 이름)과 김활란 동상, 고려대의 인촌기념관과 인촌 동상과 ‘인촌로’라는 기념도로 등 유달리 친일한 사람들에 대한 기념조성물이 넘쳐나고 있다. 이뿐 아니다. 학내 교수나 외부 문필가를 동원해 위인전 수준의 평전을 만들어 보급하기도 한다. 이런 입체적인 숭조사업을 통해 친일인사들을 애국자·민족교육의 성자로 추켜세우는 ‘범죄의 재구성“을 시도하고 있다.
또 대학이 갖는 사회적 힘을 행사해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그물망과 같은 설립자를 위한 강력한 보위조직을 구축하고 있다. 애교심이라는 미명을 동원해. 이런 상황 아래 대학의 학문 연구의 영역에서도 친일문제는 금단의 영역이 되었다. 설립자나 총장이 친일인사들이고 그 후계조직이 숭조사업에 혈안인 현실 속에서 친일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학위 주제로도 선정되기 어려우며 이것을 주제로 쓴다한들 교수로 임용되기 난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친일문제는 학문의 자유마저 가로막았고 학문의 어용성을 요구하는 학계풍토와 이어져 있다!
오늘날 한국 대학이 유독 설립자의 고매한 인격과 열렬한 애국애족정신을 강조(학교만 지으면 민족교육이라 떠드는 이 풍토!)하는 것은 그만큼 설립자들이 ‘민족’ 앞에 흠결사항이 많기 때문이라는 역설도 충분히 가능하다. 한국의 학술세계가 유달리 권력에 대해 비판의식이 약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스승 상당수가 일제 식민지기 권력에 굴복했던 그 유산이 학계 또는 교육계 내에서 지양되지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친일지식인들이야말로 근대 한국의 순응형 지식인, 시류영합형 지식인의 원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색이 교육기관인 이상 그래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금도는 있다. 친일 행위가 다대한 설립자를 온통 미화하는 위인전을 제작해 설립자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읽히고 독후감을 쓰게 하는 것은 적어도 역사에 관한 한 범죄행위이다. “학병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냐. 제군은 오늘 이때를 영구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가라! 전선으로 그 뒤는 우리가 맡겠다”고 조선 청년들을 사지에 내몰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유일한 여성 이사로서 “황국의 여성으로서 미래 지원병, 황군용사의 어머니로서 심신 모두가 건전한 여성을 창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떠든 사람을 평화운동가·여성운동가로 둔갑시켜 관련 기념상을 제정하는 망발은 그만 두어야 한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대동아성전이라고 떠들고 ‘鬼畜英米’를 떠들어 대던 자를-그 학교의 총장을 역임했다고 해서- 대학의 홈페이지에 “인간을 존중히 여기고 겨레와 민족에 봉사하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몸소 실천하셨을 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의 이념을 설정하시고 제도의 기초를 놓아 새 나라를 세우신 민족의 선각자이고 겨레의 스승”이라고 버젓하게 올리는 것은 차마 교육의 양심으로 못할 짓이다. 이런 작태가 세계의 유수 대학과 어깨를 겨눈다고 자부하는 학교의 실상이다.
오죽하면 2005년도에 몇 몇 대학교 학생들이 각 대학에서 친일인사인 설립자에 대한 재단과 학교측의 미화와 역사왜곡에 항의해 '친일파 진상규명을 위한 대학생 민간법정'을 열려고 했겠는가.
마지막으로 김성수 등의 친일문제는 해당 대학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변명도 성립하기 어렵다. 이들의 친일은 학교 때문에 한 것이 아니며 설령 학교를 핑계 삼더라도 교육이념을 지키기 위한 것도 학생을 보호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 대학의 설립자나 총장이 친일했지 그 대학이 친일한 것은 아니다. 그 대학 출신자로서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따라서 그 행위 당사자가 책임질 문제이다.
그런데도 이들과 혈연·학연으로 이어진 일부 세력은 김활란·김성수·백낙준 등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목한 것을 마치 대학을 친일로 몰고 가는 식으로 은연중에 유도하고 있다. 즉 개인을 대학 전체와 동일시함으로써 대학의 권위와 힘을 동원해 개인(私主)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한다. 대학을 개인의 이권 보호 수단으로 사용화하는 것, 그것이 6개 대학 총장의 청원서가 지닌 본질이다. 일제시기 그들이 친일했을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