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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에 대하여
제1강
마 13:1-30
이제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것을 토대로 삼아서 앞으로 교회가 이 세대에서 세워주신 아버님의 거룩하신 뜻이 무엇이며, 아버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바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므로 그런 것을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땅 위에 있는 신령한 이스라엘의 사명이라는 것은, 신령한 이스라엘로 즉 거룩한 교회가 아니면 나타낼 수 없는 것들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 교회에 부탁하사 그 말씀의 능력과 내용을 가르치고 증거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올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개인이 성경에 의해서 자기의 생활에 도덕적인 선택들 그런 것에 의미를 가지는게 아니고, 그러면 그 개인이 도를 해서 잘 도인(道人)이 되면 도덕적인 인물이 되면 될거란 말이오. 교회라고 하는 한개의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형성한, 그러나 본질적으로 신령한 한 그리스도의 지체는 (그것이) 그 구성분자가 여러 인간이라는 인격자들의 집합인 까닭에 그런 여러 인격자들의 집합으로 말미암아서 나타나야 할 특권적인 하나님 말씀의 정신은 그 하나님 말씀 가운데 살아 계시하신 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대권의 구체적인 작용과 발휘를 다른 어디서 보다 교회에서 드러내야 할 것이올시다.
한 정권이나 통치권의 구체적인 작용과 발휘라는 것은 국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 국가가 없으면 안되는 것이오. 국가가 있은 다음에야 그 국가의 주권이 발휘되는 것이오. 주권이 없을 때는 국가도 없는 것이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주권이 존재하는 데 있어서 주권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서 발휘되되 땅 위에서는 교회라는 형식을 취하사 사람들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사회적인 생활의 형식을 통해서, 사회적인 구성의 형식을 통해서 통치의 대권이 발휘되는 것이올시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 할 때는 개인이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이고 또 개인의 어떤 사명을 생각하고 나간다는 그런 점에 있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통치의 대권이라는 것은 나 개인의 생활 가운데에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사회적인 형식 위에, 동시에 사회적인 형태를 형성한 각 사람의 심령이 한 개의 사회를 형성해서 그 심령의 세계에서 또한 나타나는 것이올시다.
이러한 말씀의 권위를 증시함에 있어서 그 하나님 나라라 할 때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인가 하고서 물으면 성경은 이것이다라고 한두어 마디로 규정해 놓지 아니했어요. 하나님 나라라 할 때 물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대권의 영역과, 대권의 작용과, 통치를 받는 사람들, 혹은 그 영들을 의미할텐데 그렇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참된 유일의 보편적인 교회가 그것이겠지만, 그러나 교회라는 말을 쓰지 않고 하나님 나라라고 할 때는 통치권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교회라는 말을 쓸 때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결과 또 가지고 있는 속성을 표시하려고 할 때에는 교회라는 말, 신령한 교회다는 말을 쓰게 되는데, 이 하나님의 통치의 대권이 보이지 않는 교회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만일 나타나려면 볼 수 있는 형태를 먼저 취하여야 할 것인 까닭에 여기에서 개인이 아니고 교회라는 사회적인 한 집합체, 집합으로 말미암아 구성된 개체, 그런 body에서 나타날 것이오.
그런고로 이러한 하나님의 그 크신 거룩한 도리가, 그 권능의 대권이, 한 분이 구체적으로 땅 위에 나타나는 동시에 그것이 나타나 있는 역사를 땅 위에 건설해 나갈 때 적(敵)이 있고, 그 적들은 나타나서 그 적은 적대로 그걸 방해할 때, 적을 물리치고 적과 더불어 싸우고 필연적으로 여기 하나의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듯한 한 생생한 역사(history)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오. 이 생생한 역사를 만드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잘 보고 거기에 의해서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바로 늘 생각해 나간다는 것이 그것이 심히 중요한 일이오. 교회라는 것이 조그마한 단체로 어떤 기관이 있어서 다른 큰 교회들이 하는 것을 모양 삼아서 보고 또 그대로 따라 나간다 하는 그것이 교회의 하는 일들이 아니고, 사실상 교회라는 것은 작든지 크든지 하나님께서 왜 이 땅 위에 그것을 두셨느냐 하는 것을 아는 데, 알려고 하는 데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 것이오.
하나님께서 땅 위에 교회를 두셨다는 거룩하신 뜻을 우리는 먼저 알고 다음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대권을 구체적으로 땅 위에서 드러내사 반신국적(反神國的)인, 반신적(反神的)인 모든 요소와 세력과 대항해서 싸워가면서 전진하는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점을 우리가 본다 할 것 같으면, 반신적인 요소와 그 세력들이 어떻게 움직여 왔으며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또한 우리가 안다는 것도 중요한 일이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반신국적인 요소가 언제든지 이 세상의 여러 정치적인, 문화적인 현실 속에서 강하게 움직여왔다는 것을 다 느끼는 것이오.
그런데 이 역사를 통해서 반신국적인 요소가 움직여 온 그 배후 혹은 이것을 참으로 통재(統栽), 지배하는 그 배후의 세력은 두 말할 것 없이 사탄의 세력이라 하는 것을 늘 생각하는 것이오. 사탄이 영계(靈界)와 혹은 인류사회에 있어서 하나님과 맞서서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정당한 말이오. 하나님과 맞서서 싸우는 건 못해요. 사탄이 하나님과 감히 맞서 싸울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닌 것이오.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사탄이 같은, 우리 보기에는 신비하고 거대한 세력을 가진 자라고 할지라도 결국은 일개의 피조물인데, 일개의 피조물이 적극적으로 대항해서 싸우겠는가? 그건 하나님께 대한 모독인 것이오.
그러나 사탄은 적어도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일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만은 제 힘이 미치는 한 저항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것만은 사실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적으로 막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이오. 하나님께서 해를 우리에게 비취실려고 하는데 사탄이 일어나서 해를 못비취게 두 팔을 짝 펼치고 있으면 그냥 구름이 껴 가지고서 해가 못비치게 되는 법은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내리시고자 하는데 사탄이 막아서 못 내리는 법은 없는 것이오. 다만 사탄이 작용하는 한계는 오직 하나님을 직접 대상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인 인격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오. 하나님은 대항 못하나 사람은 대항하는 것이 사탄이오. 다른 말로 말하면 처음부터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으셨을 때 그 사람을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게 하려고 할 때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혜를 막을 수는 없으나 사람이 받고 안 받는 것만은 사탄이 가서 주장질을 하든지 꾀이든지 해가지고 변경을 시킬수가 있었더라 그 말씀이오.
그러므로 사탄이 맨 처음에 한 일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에 언제든지 접촉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주셨으면서 동시에 사람에게 그것을 취사(取捨)할 수 있게, 버릴 수도 있게 하시고 취할 수도 있게 하신 고유한 자유를 주셨으니까, 요컨대 사람이 버릴 수도 있다는 그 여지를 사탄이 들어가서 유혹으로써 선을 취하지 않고 악을 취하게 만든거라 그 말씀이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그 사람이 고귀한 목적과 고귀한 표준을 향해서 목표를 향해서 행진하여 완성하도록 만드신 까닭에 참으로 저 보다도 더 우수하고 위대하고 아름다운 소망과 기대와 전제를 가지고 피조된 사람인 까닭에, 지금 자기가 가장 접촉하기 쉬운 경지에 있을 때 떨어뜨리지 않으면, 앞으로 영화(榮化)돼 버리면 도저히 접촉할 수도 없고 손댈 수 없는 걸 아는 까닭에, 사탄은 하루가 늦을세라, 하루라도 더 늦어서 얼른 생명과실을 따먹고 영화의 경지를 향해서 점점 빨리가면 갈수록 자기가 접촉하기 어렵고 자기 힘이 거기 미치기가 어렵게 될 것을 알고 사람이 각자 가진 고귀한 희망, 그런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볼 때 부럽기도 하고 말하자면 시기심, 시기지심(猜忌之心), 질투심 (jealousy)이 나서 사람을 떨어뜨렸다 하는 것이 아마 제일 좋은 생각 방식일 것이오. 질투(jealousy)라는 것, 혹은 시기하는 것 특별히 질투라는 말보다는 시기라는 말이오. 질투라는 말은 거기에 해당 안해요. 그렇게 시기하는 것, 아주 사탄적인 것이오.
사탄의 맨 처음 성격은 시기에서 나타났어요. 사람이 나보다 나아진다는 말이냐, 세상이 또 나보다 낫고, 나보다도 더 훌륭한 것이 이제 앞으로 생겨나겠구나. 어떻게든지 못하게 해야겠다 하고 나섰단 말이오. 훌륭하게 된 다음에는 꼼짝을 못하니 좀 더 훌륭하게 되기 전에 나하고 그래도 교제라도 있는 동안에 떨어뜨려야겠다 하고 떨어뜨렸어요.
첫째는 시기(jealousy), 그것이 사탄의 성격인데, 그 사탄이 jealousy라는 기본적인 욕망, 혹은 성격을 가지고 사람을 떨어뜨렸는데 사람을 떨어뜨려서 항상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수하에 두고 자기가 접촉할 뿐 아니라 마음대로 잡아 흔들 수 있는 발 아래다가 두려고 그러지 자기 보다 높이 올라가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는 것이오. 그러니까 사탄이 항상 적으로 삼는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을 적으로 삼는 것이오.
사탄은 누구를 가장 큰 적으로 삼느냐 하면 하나님의 자식들을 가장 큰 적으로 삼는거요. 세상 사람이야 도덕적이려면 도덕적이거라. 얼마든지 괜찮다. 너는 내 수하에 있고 내가 내 멋대로 너를 할 수 있으니까 네가 좀 더 도덕적이어도 괜찮다. 좀 더 종교적이어도 괜찮다. 너는 힘껏 최상의 예술, 최상의 과학을 다 해도 괜찮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의 자식으로서 하나님의 법대로 성신에 의지해서 살기만 하지 말아라. 이렇게 하는 날엔 내가 너를 지배할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못 갖는다. 너는 내게서 떠나 너는 나를 지배하는 관계로, 말하자면 전도(顚倒)된 관계 가운데 들어갈테니 내가 그를 견딜 수가 없노라 하는게 사탄의 생각이기도 하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사탄이 항상 복음의 광채는 못비취게 하고 복음의 광채가 비취었을 때는 어떤 선의 목적을 향해 가되 악의 방식으로 가라고 기묘한, 가장 좋은 방식으로 가라고 늘 일러주는 것이오. 즉 그가 죄에 아직 매여 있는 동안에는 걱정할 것 없으나 죄에서 해방이 돼 가지고 마치 아담같이 죄라는 것과 죄의 세력이 그를 지배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아담을 꾀는 방식을 쓴다 그 말씀이오. 그런고로 마귀의 시험이라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가 아니고 믿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오. 죄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로 일단 낙착을 지은 사람들에게 대해서, 혹은 죄가 저를 지배할 수 있는 그런 죄의 절대의 지배권에 있는 사람이 아닌 까닭에 저걸 내가 어떻게든지 넘어 뜨려야겠다 하는 것이오. 아담을 향해서, 예수를 향해서 사탄이 시험하는 건 무죄한 자를 시험하는 것이고, 죄 있는 사람이야 죄의 지배권에 있어서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라 해서 죄의 종노릇 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사탄이 가지고 있는 즉 가장 유효한 방식은 사탄이 그 사람을 저가 영화돼서 위대하게 될 것을 볼 때, 이상적인 그 영화의 상태, 고귀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자기가 바라볼 때 그걸 떨어뜨려야겠다 하고 떨어뜨리는데 쓰는 가장 예리한 훌륭한 무기가 속임이오. 역사의 처음부터 흘려 내려온 이 사탄의 무기는 속임이오. 그래가지고서 역사의 처음부터 속임수를 써서 사람을 타락을 시켜가지고, 타락한 사람은 사탄의 꾀임에 빠져서 속아 가지고 자기 자신이 속음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하나님의 징벌과 죄의 형벌과 또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죽음이라는 흑암, 암매의 경지, 즉 죄로 말미암은 본질의 부패, 오염, 또 그 다음에는 죄로 말미암은 형벌들, 죄책으로 말미암은 형벌의 공포 이것들을 지고서 내려왔다 그 말씀이오. 이 비참한 상태, 죄의 오염과 죄책으로 말미암은 형벌의 공포와 또한 지적인 부패에서 일어난 허다한 암매 때문에 일으키는 인간의 모든 비극과 갈등과 고통과 또 정서의 부패와 의지의 부패로 말미암은 인간들의 왜곡된 부도덕한, 불의하고 괴악한 생활방식, 요컨대 사탄이 제 나라를 땅 위에다가 배포해 놓은 것과 같은 그런 현상을 나타내고 그때부터 역사가 쭉 흘러가는 것이오. 한 마디로 속임으로 말미암아서 사람이 타락한 연고로 그렇게 된 것이오.
그러나 이 속임으로 한번 타락한 사람은 그 속임 때문에 받은 고통이 지긋지긋해서 다시는 속임을 미워하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고 사탄의 꾀임을 받아 가지고 타락한 인간의 그 부패라는 것은 사탄적인 여러 성격을 또한 드러내게 되는 것이오.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까닭에 이제는 자기 자신이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서 자기가 벌거벗은 것을 보았다 하는 식으로 악한 방면에 지혜를 얻게 되었어요. 항상 순진하고 깨끗한 사람이 큰 죄를 범하면, 죄에 물들어 갔다 하면 그 다음부터는 도무지 생각지 않던 악한 방면에 눈이 뜨여 가지고서 악을 행하기 시작하는 것이오.
사람이 양심의 등불이 자기를 비취고 있을 동안에는 자기가 무엇을 해서는 안되고, 또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러나 양심의 불이 꺼져 버리면 상당히 많은 꾀가 생기는 것이오.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싶고 무슨 명예를 가지고 싶으면 이렇게 하면 되겠는데, 그렇게 하려면 사람도 죽여야겠고 도적질도 해야겠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짓을 해야겠다, 어디 그럴 수 있느냐? 못하겠다 하고 양심의 등불이 비취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도무지 생각지 않고 그걸 처음부터 반대라도 하지만 양심의 불이 한번 꺼진 다음에는 사람을 죽이고라도, 남의 생명을 늑탈하고라도, 남의 행복을 희생의 댓가로 지불해 버리고라도 내가 이걸 득하면 되겠다는 꾀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오.
여러분, 양심의 불이 있어서, 빛이 있어서 아직 순진하고 아직 죄악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지하고, 즉 죄악에 대해서는 별로 무감각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남의 생명을 희생시켜 가면서 자기의 행복을 세운다면 할 수 있는 일이냐 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일단 그가 죄 가운데 빠져 들어가서 자기의 마음 가운데 악한 지혜가 생기면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지듯이 그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그 품성이 그대로 우리 속에서 작용하기 시작하면 음식을 만들어서 곱게 단장을 하고 다른 사람의 눈을 홀려 사먹도록 만들되 먹으면 그 사람 속에서 무서운 암이 자라든지 독을 붙이든지 하는 것도 아무 상관없이 음식에다가 유독한 염료를 넣고 반죽을 해가지고 우선 당장에 보기에만 좋고 단정하고 편하게 만드는 꾀가 생긴다 말이오.
지금 이와같은 악질적인 식료품 같은 것을 만드는 꾀라는 것이 지금부터 20년 전이나 30년 전에는 생각지 못하던 것이오. 30년이 지난 오늘날은 이와같은 악질적인 일을 얼마든지 하는 것이오. 그리고 어디가든지 악질적으로 사람의 약점을 잡아 가지고 그 약점을 기회로 자기 이익을 따내려고 하는 것은 아주 가장 빈천하고 빈곤한 짓인데, 오늘날은 기독교 사회 가운데서라도 얼마든지 그걸 하고 있다는 말이오. 이것이 옛날, 신앙이 참으로 바로 커서 바르게 살아보겠다 하던 그런 사회에서 있지도 못하던, 생각지도 못하던 일이오. 이러한 죄악적인 일이라는 것은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으매 눈이 곧 밝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게 아니라 자기의 벌거벗은 것을 보기 시작했다 그 말이오. 언제는 뭐 안 벗었던가, 전에는 벌거벗었어도 왜 도무지 그걸 못 봤나? 마음이 순결하니까 그랬다 그 말이오. 순결한 까닭에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말이오. 이제 불의의 심정이 들어올 때에는 이제 눈에는 벌겋게 피가 오르고 벌써 눈에는 다른 피까지 딱 덮어 묻어 가지고서 모든 걸 볼 때에는 자기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다 그 말이오.
이렇게 해서 사람이 부패하고 타락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악한 지혜가 발달하는 데 있는 것이오. 이 악한 지혜가 사람의 사회에서 발달하게 되니까 악한 자가 더욱 성해서 저도 속아 넘어가지만 남을 속여 먹기 시작했단 말이오. 이렇게 해서 인류의 역사는 처음부터 마귀가 한번 속여 가지고 인류를 타락시킨 이래로 속임이라 하는 것이 역사의 성격상 현저한 성격의 하나인 것을 늘 주의해야 해요. 왜냐하면 마귀의 특성이라는 것이 첫째는 속임이요. 속임이라는 방법을 써서 죄악과 타락을, 또 불행을 인류 사회에 도입한 까닭에 속임으로 말미암아 불행해진 사람들 속에는 속임이라는 악의 요소가 그냥 퍼져 있어서 그 악으로써 사람들을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것이오.
이러한 일, 곧 속임은 마귀의 성격, 이름, 호 포네로스(O πονηρO?), 그 악한자, 이 악한 자라는 말에 표현된 그 악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데 중요한 방도가 됐어요. 즉 하나님의 완전, 혹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 때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완전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까닭에 항상 악이라든지, 결핍이라, 이 악, 결핍, 이것은 속임으로 말미암아 더욱 조장돼서 이 속임의 중요한 역사적 성격의 하나는, 역사의 총체적인 내용을 한마디로 하면 항상 악이라는 것이 크게 물들어 가지고 있다는 것이오. 인류사회에 악이라는 것이 도도하게 물들어서 거기는 속임이라는 중요한 방식, 중요한 도구가 늘 활용되어 가지고 있어요. 그뿐 아니라 사탄이라는 말 자체가 적이라 하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적이라, 대적이라 하는 말인 것같이 항상 반동적이고 적대적인 이런 심리가 인류 속에서 움직여 나와서 맨 처음 죄를 짓고 난 다음에 다시 두번째 현저하게 역사상 나타난 큰 죄악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인데, 거기에 살인이라는 즉 증오, 사랑이 아니고 증오라는 악의 중요한 현상이 또 하나 있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하니까 “모릅니다.” 자기가 죽여놓고 모른다고 거짓말 했다 그 말이오. 당장에 속여요. 거기서도 거짓말을 당장에 하는 그 상태가, 거기 증오와 기만이라는 것이 거기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니” 이렇게 해서 맨 처음 살인하는 것이 곧 마귀라 하는 걸 나타내요.
사탄이 살인이라는 남의 생명을 도말을 해 가지고 제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오. 제가 행복을 얻겠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행복을 터득하는게 아니라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불안과 시기를 만족시키고 시기심으로 일어난 불같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오. 이것이 마귀가 사람을 시기해 가지고 떨어뜨리듯이 가인이 아우를 시기해 가지고 죽였다 말이오. 그 시기라는 것이 사람을 죽이기까지 만들었다 그 말이오. 강한 마귀의 성격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인격자에 있어서는 시기라는 것, 그리고 방법은 항상 속임이라는 것,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동적인 심리, 항상 적대 행동을 하는 것, 하나님께 대해서도 적대 행위를 하고 나갔다 그 말이오. 하나님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하고서 감히 불쾌한 마음으로 대답했어요. 마귀의 큰 성격들이 거기 드러나 있어요. 시기하고 속이고 반동하고 하나님 앞에 적대하는 행동을 하고.....
이렇게 해서 역사를 통해서 마귀의 작해라는 것은 점점 내려 왔는데 여기 또 한가지 우리가 이제 볼 수 있는 것은, 가인이 아벨을 정의와 도리를 가지고 마땅히 너는 죽음의 형벌에 해당하다고 논란한 건 아니요. 그는 더 의롭고 이는 더 악한데 악한 자가 일어나서 의로운 자를 때렸다 그 말씀이오. 그래 가지고 죽였어요. 악한 자가 의로운 자를 이기는 방식은 최후에 가서 실패할지언정 목전의 길은, 유일의 방식은 물리력(物理力)을 쓰는 것이오. 폭력을 쓰는 것이오. 여기서부터 인류 사회의 역사는 폭력이라는 것이 계승해 왔어요. 폭력으로 말미암아 한번은 전 세계가 홍수로 멸망을 받은 때가 있어요. ‘강포가 땅 위에 가득하니라’해서 홍수로 멸망시켰어요. 이와같이 강포라는 것은 두드러진 역사상 성격인 것이오. 강포의 배경에는 항상 힘이, 물리력의 집적, 즉 물리력을 쌓아 가지고 있다 그 말이오. 가인은 물리력을, 아벨 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이오. 어쨌든지 아벨이 일어나서 대항할 수 있는 틈을 주지않고 재빠르게 아벨을 쳐 죽였으니 폐일언(蔽一言)하고 죽인 자가 죽은 사람보다 언제든지 재빠르게 또 더 악하게, 더 결정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은 분명해요. 누가 힘이 더 세었느냐 하는 건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오. 가령 아벨이 힘이 더 셌다고 할지라도 가인측에서 힘을 더 많이 썼다 그 말이오. 즉 아벨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쓰기 전에 결국 타격을 주어버렸다 그 말이오.
이렇게 폭력의 행사라는 것은 언제든지 유효하게 그 편에서 다른 폭력으로 대항할 여지를 주지 않고 유효하게 사용하려고 하는 거요. 그 큰 역사적 선례(先例)를 우리가 많이 보는데, 이렇게 해서 폭력, 속임, 시기 그리고 증오. 시기가 증오하면 나중에 막 미워하기 시작하는 거요. 폭력이라든지 속임이라든지 증오라든지 또한 반동, 적대행동 이런 것이 그 후에 역사 위에 쭉 흘러서 인류의 역사를 볼 것 같으면 온 세상이 그 악한 자에 처해 있어서 그 악한 자의 원하는 대로 폭력의 수라장도 되고 시기의 수라장, 또 증오 그런 것이 현저하게 여기저기 나타나는 그런 곳, 그리고 거짓이 여기저기서 현저한 그런 곳이 되고 말았어요.
사람이 문화를 창건해 나가고 사람이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가 다른 나라가 와서 점령하고 그런다고 할지라도 그런 모든 흥망성쇠의 역사는 그건 표면에 나타나는 현상들이고, 배경에 도도히 그 이 세상의 임군과 함께 죽지 않고 수천 년을, 4천 년이나 5천 년을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큰 물결은 아까 말한 대로 속임이라는 것인데, 속임이라는 그 성격이 늘 존재하고 폭력이라는 성격이 늘 존재하고 증오, 시기라는 성격이 늘 끊어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것은 합해서 항상 의와 선과 미에 대해서, 하나님께 대해서 적대 행동을 하는 반신적인 방향으로 늘 행동하고 나갔다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어요.
그러면 그와같은 역사적인 사실들을 놓고 오늘날 하나님이 부르사 하나님의 신권정치의 아름다운 것과 능력있는 것과 영광스러운 것을 우리라는 거룩한 교회에서 실현하게 하시려고 역사를 만들었어요. 그 만들어지는 역사라는 건 또한 동시에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온 세상, 폭력과 거짓과 증오와 적대적인 모든 성격이 강력한 이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과 더불어 늘 대립하고 대전하면서, 싸우면서 나간다 하는 것이 우리가 크게 볼 수 있는 우리 현실이란 말씀이오. 그렇게 나타나는 것......
그러면 이제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이 시대의 여러가지 현상은 어떠냐 하는 점이오. 오늘날. 여기도 물론 속임이 있고, 폭력이 있고, 증오라는 사실이 있고, 하나님께 대한 적대적인 행위가 있단 말이오. 그런데 그 속임이라는 것은 주로 어떠한 방향을 늘 취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면 이건 사탄이 어떻게 발호(跋扈)해 왔느냐는 것을 성경 역사에서 쭉 뽑아 가지고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할 것이오. 마귀가 어떻게 그 나라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조직적이고 치밀하며, 어떻게 스스로 잘 통재돼 있으며, 어떻게 큰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그는 민활하게 활동하고, 어떻게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궤휼을 쓰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광명한 천사인체 하고 나타나고 어떻게 그 부하들을 땅 위에다가 두고 있으며 어떻게 그 마귀의 자녀라는 것들이 땅 위에 있을 뿐 아니라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성경이 다 가르친 바요. 그리고 가라지라는 것도 있어요. 교회에는 가라지가 있어서 성경에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나타난다고 그랬어요.
그러면 이와같이 명백하게 여러가지를 써 왔으니까 이제는 그것을 그렇게 있는 여러가지 원칙들, 재료들을 놓고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시대와 우리의 현실에 무엇이 있는가 돌아다니면서 쭉 조사를 해 보면 ‘아! 이게 뭐구나’ 하는 걸 알 것이 아니냐 하는 것 뿐이오. 또 우리의 시대까지 흘러오고 있는 여러가지 잡다한 것들을 켓취(catch)해서 조사해 보면 ‘아! 이것이 뭐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아니냐 말씀이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결국 마귀가 자기의 부하를 데리고 자기 자식들을 사방에다 교회 안에다까지 심어 놓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고 있는가? 역사와 혹은 전체 인류 사회의 거대한 현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즉 교회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고, 정치 사회에서는 무얼 하고 있고, 문화 세계는 무얼 하고 있는가? 이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그것이 우리의 적군이니까--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자꾸 알게 될 것이오.
그러면 마귀가 역사 위에서는 어떻게 했는가를 우리가 한 가지씩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마귀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마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마귀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마귀라는 것을 잘 모르면 그것을 공부를 하셔야 해요. 그냥 아는 것같이 지내고 내 버리면 안되고 꼭 공부를 해 가지고 있고 이제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마귀라는 것이 어떠냐에 대한 조직적인 논리적인 공부가 아니고 역사적인 공부요.
마귀는 그러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흘러 일을 해 나가느냐 하는 것을 공부하자는 것이오. 역사적인 공부라는 것이 재미있는 공부인데 역사적인 공부를 하려면 마귀는 무엇이냐를 알고 있어야 하며 마귀의 부하는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것을 대개 알아야 하고 마귀의 자식들은 어떻게 생겼느냐 알아야 역사를 공부해도 그게 마귀다 아니다, 그게 마귀에 속했다, 아니 했다는 걸 차츰차츰 짐작해 나갈 것이오. 이제는 사탄의 역사요. 사탄의 준동한 역사요. 아담 하와 때부터 시작해 가지고 준동해 나오는 역사의 얘기요. 사탄이 몇이나 됩니까? 마귀들린 사람 많이 봤지요? 여럿이요, 하나요? 사탄의 수는 몇이나 되요? 군대, 군대도 있어요. 사탄 군대, 거진 2천 마리나 됐는데, 한 사람 속에 들어갔던 놈이. 막 2천마리 돼지 속에 들어갔어요. (하나요.) 그러면 사탄의 수가 하나이면 어떤 사람이 사탄 들었으면, 미국에 지금 어떤 사람이 사탄이 하나 들려있으면 여기 한국에는 사탄들린 사람 없어요? (사탄 자체가 거기 들어 있으면 여기는 없죠.)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은 뭐요? (사탄의 휘하들이오.) 그러면 사탄이 안 들어가고 사탄의 부하, 사귀가, 귀신이 들어 가지고 병을 일으키는 것 하고 뭐 얼마나 다를 것 없다면 사탄이 들어가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사탄이 반드시 하나야 한다면 하나는 무슨 특권이 있느냐 말이오?
그런 문제에 대해서 그러면 또 한번 물어 보십시다. 옛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려고 성만찬을 하시고 끝났을 때 사탄이 어디에가 있었어요? 그때.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었습니다) 가룟 유다 속에 들어갔지요?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가 활동한 얘기는 다 있는데. 유표하게 그 말이 어디에 있어요? (요한복음 13장 27절) 13장 27절에 있어요. 한번 읽어 보세요.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 갔지요? 사탄이 들어간 사람이 무엇을 했어요? 사탄이 들어가서 가룟 유다가 무엇을 했어요? (예수를 팔았어요) 예수를 팔어? 예수를 잡는 일을 했지요? 예수는 벌써 팔았어요. 가룟 유다는 팔아서 잡아 줄 뜻을 벌써 마음에 두고 있었어요. 2절 말씀 “예수를 잡아 줄 뜻을 가룟 유다의 마음에 두었더니.” 이제 떡을 먹고난 후 사탄이 들어와서 이제는 그걸 할 용기도 없고 사실은 할까 말까, 할 수 있을까 망설이고 있는데, 딱 해버렸다 말이오. 최후의 일각, 마지막 장면의 지금 예수 그리스도요. 마지막 십자가에 달릴 장면이요. 이렇게 해서 사탄이 들어 갔을 때는 가장 무서운 것을 한 것이오. 귀신들린 것하고는 다르잖아요?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귀신들린 것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사람은 생각 얼마나 하는가? (하나님 나라에 가장 큰 해를 끼치는) 하나님 나라에 어떤 모멘트(moment), 어떤 가장 중요한 문제,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계되려고 할 때는, 그러니까 사탄은 일을 보되 사람이 보듯 안 보고 핵심을 뚫어 보고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거냐? 그 놈을 찾자. 예수님을 죽인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귀신들려 돌아다닌다는 것 하고는 전혀 다른 얘기 아니요? 얼마나 그게 신중한 일이냐 말이오.
사탄이 자식들이 있습니까? 내가 있다고 그랬지요? 그건 또 마귀의 자식들이 있느냐 말이오? 하나님의 자식과 마귀의 자식들을 이로써 갈라 놓는다 해놨지요? 마귀의 자식들은, 예를들면 어떤 경우에 어떤게 마귀의 자식이요? 성경에 있는 얘기로는 비유를 들어서는 어떤게, 무엇을 마귀의 자식이라? (가라지.) 어디 한번 읽어 보세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마 13:38) 가라지는 마귀의 아들들이라고 그랬어요? 악한자라 그 말이오. 가라지. 악한자는 누구요? (악한자는 마귀요) 악한자가 마귀죠? 악한자가 어째서 마귀요? (요일 5:19 - “온 세상은 그 악한 자 안에 처하여 있느니라) 그런다고 마귀는 악한자이냐? 물론 그 악한자요. 아주 정관사를 붙여서 호 포네로스(O πονηρO?) “그 악한자”라고 이름 한 악한자가 있어요. 다 알고 있는 “그 악한자”라 그 말이오. 항상 정관사를 써서 그 악한자(the evil one)를 표시했어요. 그러니까 성격이 악한 사람이 그 악한자라고 하는 것은 아니오.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악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놈이 됐든지 악한 놈이 악한자라는 말은 아니오. 여기 호 포네로스(O πονηρO?) “그 악한자”라 그 말이오. 그건 이제 마 13:19에 뭐라고 썼어요?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거기도 악한자가 있어요. 이제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는 그 놈이 악한 놈인데 그 놈이 곧 가라지, 악이라 말이오. 그리고 요일 5:19절에 있는 “온 세상을 손에다 쥐고 있는 자”라 그 말이오. 그게 악한자요. 그런데 그게 마귀라는 말은 어디에 있느냐 할 때는 막 4:15을 보세요. 눅 8:12에 또 있어요. 막 4:15에는 천국 말씀을 빼앗는 자를 뭐라고 했어요? 지금 마태복음에서는 그것을 “그 악한자”라고 했는데 그 악한자인데 (사탄이라고) 사탄이라고 그랬지요? 거기는 사탄이지요. 눅 8:12절에는 꼭같은 사람은 뭐라고 했어요? 같은 이야기를 해 놓고. (마귀요.) 거기는 마귀라 그랬지요? 이게 한 비유인데, 동일한 비유인데 동일한 비유를 해석하면서 그 해석한 부분을 쓸 때 마태는 악한자란 말을 쓰고, 마가는 사탄이란 말을 쓰고, 누가는 마귀란 말을 써놨단 말이오. 씨를 빼앗는 것은 그건 한 놈인데 그건 마귀도 되고 사탄도 되고 악한자도 되고 그래요. 묵시록 12:9을 보면 ‘용이라고도 하고 옛뱀이라고도 하고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 하는자라.’ 이렇게 말을 여러개를, 이름을 붙였어요.
“길가에 뿌린 씨는 밟히고 공중의 새들이 먹어 버렸고” 하는 뜻을 해석할 때 ‘이는 곧 악한자, 곧 사탄, 곧 마귀가 그 씨를 빼앗는 것이니라’ 뜻하신 거라 말씀이오. 여기서 “그 악한자”는 곧 사탄이오. 마귀라 그 말씀이오. 또 요일 5:19에서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그 악한자 안에 처한 것이며” 하는 그 악한자도 역시 그것이오. 마귀라 말씀이오. 사탄. 그런데 이 악한자가 마귀인데 마귀의 자식들이 있는 것을 예를들면 가라지라고 그랬지요? 그러면 비유를 해석한 결과 그것은 뭐였지요? 가라지란 뭐요? 가라지란 건 뭐요? 비유를 해석한 결과 가라지는 뭐요? 악한자의 자식들이라고 그랬지요? 거기는 해석했는데. 그러면 알곡은 무엇이요? 천국의 아들들이지요? 그런데 그 비유대로 보면 지금 가라지는 어디에 가 있고 알곡은 어디가 있는거요? 다같이 함께 섞여가지고 있지요? 그래가지고서, 그런데 그 가라지가 어떻게 해서 생겼어요? 밤에 다 잘 때, 조용할 때, 즉 아무도 모를 때, 그러니까 이제 다른 사람 몰래했다 그 말이오. 이건 아무도 모를 때 와서. 원수가 어떤 자요? 아까 말한 원수라는 자. 그것도 마귀요. 또 마귀 원수라고 그러지요? 사탄이라는 말 원수죠? 적이라 그 말이오. 원수가 와서 가만히 뿌렸다 그 말이오. 아무도 몰래 모르는 사이에 어디다 뿌렸어요? 뿌리기를. 그 밭은 지금 누가 있는 곳인데? 천국의 아들들이 지금 살고 있는데 거기에다 뿌렸다 그 말이오. 천국의 아들들이 사실 모여 있는데 뿌렸다 그 말이오. 그 밭이라는 곳은 천국의 아들들 이외에 다른 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입니까? 천국의 아들 이외에 다른 것 엉겅퀴도 있고, 가시덩쿨도 있고, 무화과도 있고 그냥 장미꽃도 있고, 그냥 한꺼번에 있어야 할 자리냐 말이오? (아니오) 꼭 천국의 아들들만 있어야 할 자리죠? 그러면 그건 뭐요? 천국의 아들들만 있어야 할 순수한 자리가 땅 위에서는 교회요. 그런데 그 놈이 속에다 아무도 모르는 새에 가만히 슬그머니 가라지를 뿌려 놓았다 그 말이오. 또 가라지라고 그랬는데 여기 우리 말로. 아까 최선생 물었지만 어디 밀하고 가라지 하고 있는데, 그 팔레스틴에 있는 밀하고 가라지하고 어떻게 흡사한지 몰라요. 도저히 볼 수 없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 이제 비유가 뭐요? 그 다음의 비유의 내용이? 어디 그 다음의 얘기는 뭐요? 뿌려 놨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됐어요? 그 다음에 무엇이 있지요? (“싹이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 마 13:26-30).
그러면 싹이나고 결실할 때요. 쏙 올라와 가지고 싹이 쏙쏙나고 이제 열매를 맺기 시작할 때 비로소 가라지도 보였다 그 말이오. 열매 맺을 때까지 보면 대체로 잘 모르나 열매를 맺어 놓으면 그것은 가라지는 가라지로 나타난다 말씀이오. 어떤 사람은 그 가라지가 가라지로 나타난다는 말을 보통 그냥 부흥회 때 흔히 쓰는 말들 있지요? 곡식은 알곡을 가지면 그것이 고개를 숙이지만 가라지는 빳빳하다 한다고, 그런데 노상 그런 것도 아니요. 밀이라는게 이렇게 고개를 숙입니까? (안 숙여요.) 이 나락 농사 짓는 한국서만 생각해 버릇해 놔서, 이건 팔레스틴 땅이오. 다 같이 반듯하게 있지 가라지가 자기가 가라지라는 걸 드러내려고 특별히 이렇게 고개를 빳빳이 하고 고개를 숙일 때 안 숙입니까? 거짓 선지자라도 양의 옷을 입는다고 그랬어요. 껍데기에 있어서는 다를 것이 없다는 거요. 다 다를 것 없으니까 그것 가지고 고개 숙이는데 하나는 빳빳하다 해서 교만하다고 부흥회 할 때는 교만을 찾느라고 아주 묘한 예가 되는 것 같지만 예가 못되요 당초에.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가라지가 나타나는 때는 언제냐 하면 교회가 결실을 할 때인 것을 알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