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스여 그리이스 신화의 시지프스는 세계 제일의 교활한 사나이다. 빈사의 자리에 누워 있던 그는 "내 시체를 매장하지 말고 광장의 한 가운데에 버려주시오" 하고 아내에게 말했다. 죽은 후 시지프스는 지옥에 떨어졌다. 그는 명부(冥府)의 왕 하데스에게 간청했다. "제 아내는 어찌 이다지도 매정할 수 있습니까? 저를 위해 기도도 하지 않고 시체를 광장에 버렸습니다. 하데스왕이시여, 아내를 징계하기 위해서 저를 다시 지상에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심술궂은 사자(死者)의 왕 하데스도 시지프스의 말에 공감되는 바가 있었던지 그는 지상인 코린토스의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그대로 지상에서 물과 태양을 만끽하면서 살고 있었다. 이것은 사기이다. 시지프스는 사자의 왕을 속인 것이다. 하데스로부터 여러 차례 소환명령이나 신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살아간다. 그 때문에 마침내 영겁의 형벌을 짊어진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는 시지프스를 지옥으로 보내 거기에서 신벌(神罰)을 내렸다. 즉, 그는 지옥에서 거대한 바위를 산꼭대기 까지 밀어올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바위는 산꼭대기에 달할 때마다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버리고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시지프스는 다시 내려가서 또 밀어올리기를 시작한다. 몇 천번, 몇 만번 그리고 오늘도……, 미래의 영원토록 그 작업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될 형벌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가. 인간은 무의미한 작업에는 견디지 못한다. 인간에게는 뭣인가 목적과 의미가 있어야 하거늘. 아서라, 19세기 시베리아의 유형자(流刑者)들에게 다음과 같은 형벌이 과해졌다고 한다. 즉, 백미터 쯤 떨어진 A·B 두 지점에 물통을 준비해 두고 죄수는 물이 가득찬 물통을 A지점에서 B지점까지, B지점에서 A지점까지 운반하고 또 운반하고 하루종일 단조로운 작업을 계속하는 것인데…. 그 형벌은 너무 끔직하여 결국 몇 퍼센트는 미쳐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무의미한 형벌이 시지프스와 유형자들에만 과해진 형벌인가. 시지프스의 신화와 시베리아 유형자의 형벌은 그야말로 우리들 존재의 상징인 것이다. 그것이 윤회의 존재이다. 태어나 자라고, 번뇌하고, 고통받고,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거기에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다시 시작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다시 태어나 번뇌하고, 버둥거리고 그리고 죽지 않으면 안되면 안되며 그 후에도 똑 같은 되풀이가 계속될 뿐이거늘. 그래서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해탈이다. 마음의 자유다. 하지만 우리들 범부들은 번뇌에 속박되어 있다.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도,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도 다 같이 상대에 묶여 있다. 사랑이란 복종과 속박 그리고 번뇌이다. 미움도 마찬가지이다. 물욕과 권세욕, 명예심, 본능 등도 마찬가지이다. 집착하기 때문에 마음은 속박되어 있다. 집착을 떠나면 마음은 자유가 된다. 자재하다. 그 마음의 자유자재가 해탈이다. 윤회는 마음이 사로잡힌 상태이다. 해탈은 집착을 떠나서 얻어지는 마음의 자유이다. 자재이다. 시지프스의 그대여! 마음을 놓아버리게나. 어서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