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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정유재란 해전의 기록
고려말 장군이이었던 이성계는 정도전 일파의 신흥사대부와 함께 고려를 무너뜨리고,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는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이해는 1392년, 그리고 1395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게 된다. 조선 건국 후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왕을 거치면서 나라의 근본 제도와 문물, 국가의 체계가 안정화되어 왔다. 그리고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사림 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조선의 정치 운영은 당파를 형성하여 집단적인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조선 건국 후 정확히 200년이 지난 1592년(임진년) 왜군(일본)이 대규모의 군함을 이끌고 조선을 공격하게 되면서 7년간의 왜란은 시작된다,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 1591년 3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대마도주(쓰시마주)의 소오(宗義智)를 통해 조선에 '우리가 명으로 가려고 하니 길을 비켜달라'라는 요구를 했다. 이에 조선은 허락하지 않고 대마도주를 그대로 돌려보냈다.
1.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사회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기에 조선을 통치하고 있던 왕은 선조였다. 조선 건국 후 약 200년 동안 큰 외침이 없었던 조선은 비교적 국방력 강화와 불시에 예상되는 전쟁에 대한 대비에는 소홀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정치판에서는 붕당정치의 폐단으로 세력 경쟁분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국방령 강화와 주변국의 변화에 관심이 없었던 시기였다.
2. 임진왜란을 준비하고 있던 왜군(일본)
15세기 후반이 되면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열도를 질서를 잡아가면서 통일을 이루게 된다. 이 맘때 세양 세력들이 상인들을 앞세워 밀려들어 오게되면서 일본에는 신흥 상업도시가 생겨나게 된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봉건적 질서가 무너질것 같은 위협을 느끼면서 신흥 세력을 몰아내고 국내적으로 힘을 모을 방책을 생각하게 된다. 그 결과로 나타낸 것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3. 조선과 일본의 갈등 발생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조선에게 자기와 함께 힘을 합쳐 명을 치자는 제안을 했다. 명나라를 사대하고 있던 조선의 선조 임금으로서는 이러한 제의를 해온 사신에 대한 서찰만 받고 돌려 보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일본으로 가는 물길이 좋지 않다고 하여 통신사도 보낼 수 없다고 하면서 조선으로 온 사신만 돌려보냈다. 사신들이 돌아간 이후에도 몇번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으나 조선은 거절하다 1589년 일본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한다. 일본에 다녀온 사신들의 견해는 달랐다. 한쪽에서는 일본군들이 병선을 준비하고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 했고, 또 한쪽에서는 일본이 감히 우리를 공격해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한 내용으로 전쟁에 대한 준비와 국방력을 튼튼히 하지 않고 정치적 갈등만 야기시켰다.
<임진왜란 해전도(출처:zum 학습백과>
* 임진왜란 해전 : 26전 25승 1패, 왜군 총 전석 1,039척 격침, 170척 파손, 131척 나포
1592년에 발발한 임진년의 왜란은 1598년까지 약 7년간에 걸친 전쟁이었다. 왜란으로 조선 사회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피폐해졌고, 백성들의 인명피해, 농경지가 황폐해 지는 등 국가 재정에도 큰 손실을 입혔다. 그리고 경복궁, 창덕궁,창경궁, 종묘와 같은 국가 기반이 되는 시설, 역대 왕의 업적을 기록한 신록을 보관하고 있던 사고, 각종 서적 및 미술품 등이 모두 불에 타 소실되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 배경, 조선 사회, 일본과의 갈등을 통해 원인을 알아보았다. 이제부터는 역사속으로 사라져갈 뻔 했던 조선을 다시 한번 살려낸 수군들의 업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역사의 중심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업적을 빼놓을 수 없다.
1. 옥포해전 : 1592년 음력 5월 4일, 경남 옥포 (전선 26척 격침, 조선군 첫 승리)
2. 합포해전 : 1592년 음력 5월 7일, 경남 합포 (전선 26척 격침)
-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휘하의 장수와 의논 끝에 출전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조정에 알리는 한편, 원균에게 양도의 수군이 집결할 장소를 약속하였다.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자 본영(本營:지금의 여수) 앞바다에 집결한 휘하장병과 전선을 점검한 뒤 전대(戰隊)를 편성하니, 전선(戰船) 24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이었다. 음력 5월 4일 본영을 출발하여 소비포(所非浦:고성군 하일면 춘암리)에서 하룻밤을 자고 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원균의 전선 4척, 협선 2척과 합세하여 송미포(松未浦:거제군 동부면)에서 작전을 계획하였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잔 뒤 전함대가 동시에 출항하여 옥포근해에 이르자 척후장(斥候將)인 사도첨사(蛇渡僉使) 김완(金浣)으로부터 적을 발견한 신호를 받았다.
이때 도도(藤堂高虎) 지휘하의 왜선 30여척은 홍백기를 달고 해안에 흩어져 있고, 왜적들은 포구로 들어가 분탕하고 있다가 아군의 기습공격에 당황하여 6척을 앞세워 해안을 따라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아군은 이를 포위하고 맹렬하게 포격을 가하여 왜선 26척을 격파하고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3명을 구출하여 임진왜란중 해전에서의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날 전투에서 탈출에 성공한 왜선은 몇 척에 불과하였으며, 미처 승선하지 못한 왜적은 육지로 달아났다. 아군은 달아나는 왜적을 추격하여 영등포(永登浦:거제군 장목면)를 거쳐 합포(合浦:마산시)에서 5척, 다음날 적진포(赤珍浦:통영군 광도면)에서 11척을 각각 분파하고 9일 본영으로 돌아왔다. 이순신은 이 전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관계를 받았다.
3. 적진포해전 : 1592년 음력 5월 8일, 경남 고성 (전선 11척 격침)
4. 사천해전 : 1592년 음력 5월 29일, 경남 사천 (전선 12척 격침)
- 1592년(선조 25) 5월 29일 이순신(李舜臣)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사천 앞바다에서 13척의 왜선을 무찌른 해전이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거북선을 포함한 전선 23척을 이끌고 5월 29일 여수를 출발, 노량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이끌고 온 원균(元均)과 합세하였다. 그리고 곤양 쪽에서 사천으로 향하는 왜선 1척을 발견하고 뒤쫓아 격파하였다. 그때 사천선창에는 왜선 12척이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열박(列泊)해 있었다.
이순신은 때마침 조수가 나가 전선의 활동이 좋지 못함을 판단하고 유인작전(誘引作戰)을 세워 퇴각할 기세를 보이게 하자, 적들은 외양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뒤 이순신은 조수가 밀려드는 것을 계기로 거북선을 선두에 세워 적함대 가운데로 먼저 돌진하게 하자, 뒤따른 전선들도 일제히 철환(鐵丸)과 장편전(長片箭) 등을 쏘아 왜선 10척을 분파하고 다음날 나머지 2척도 분파하였다. 전투중 거북선건조에 공이 많았던 나대용(羅大用)과 이설(李渫) 등이 화살을 맞아 부상당하였으며 이순신도 왼편 어깨에 철환을 맞았다. 이 전투는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참가한 해전이다.
<사천해전도(출처:위키백과)>
5. 당포해전 : 1592년 음력 6월 2일, 경남 통영 (전선 21척 격침)
6. 당항포해전 : 1592년 음력 6월 5일, 경남 고성 (전선 26척 격침)
-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고성(固城)의 당항리 앞바다에서 왜선을 격파한 해전이다. 1차 해전은 1592년(선조 25) 6월 앞서 있었던 당포해전 때 도주한 왜선이 당항포에 머물고 있음을 탐지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경상우수사 원균(元均)과 합세하여 51척으로 공격, 왜선 26척을 격파하고 적수(賊首) 50여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7. 율포해전 : 1592년 음력 6월 7일, 경남 거제 (전선 26척 격침)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이 거느린 수군이 율포에서 왜선을 무찌른 해전이다. 1592년 5월 29일 겨우 23척으로 제2차 출전을 단행한 이순신은 중도에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3척과 합세하여 사천ㆍ당포(唐浦)에서 왜선을 무찌르고, 이어 뒤따라 온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棋)의 25척과 합세하여 당항포(唐項浦)에 침범한 왜선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6월 7일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선을 경계하던 중 왜의 큰 배 5척과 중간배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쪽으로 도망가는 것을 발견, 이순신이 즉시 추격을 명하자 율포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 여러 전선들이 역풍에 노를 재촉하여 율포 근해까지 추격하자 다급해진 왜선들은 배안의 짐짝을 버리면서 뭍으로 도망치려 하므로, 우후(虞侯) 이몽구(李夢龜)가 큰 배 1척을 나포하고 1척을 불태운 것을 비롯하여 우척후장 김완(金浣), 좌척후장 정운(鄭運), 중위장 어영담(魚泳潭), 가리포첨사 구사직(具思稷) 등이 서로 힘을 합하여 왜선 5척을 나포 또는 격파하고 수많은 왜병의 목을 베었다. 이때 전세가 불리해진 것을 본 왜장 구루시마(來島通之)는 뭍으로 도망쳐서 자결하고 말았다. 뒤이어 여도권관(呂島權管) 김인영(金仁英)과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 이영남(李英男)은 위험한 적중에 돌입하여 남은 왜병의 목을 베는 등 마지막 승리를 장식하였다. 이 해전은 제2차 출전 때의 마지막 전투로서 제1차 출전 때의 합포(合浦) 및 적진포(赤珍浦) 해전에서와 같이 소수의 왜선을 상대한 것이지만 이순신의 철저한 경계로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8. 한산도대첩 : 1592년 음력 7월 8일, 경남 통영 (전선 59척 격침, 전선 14척 나포)
- 임진왜란 때 한산섬 앞바다에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및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거느린 조선수군이 왜수군의 주력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은 수륙병진계획으로 조선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그들 수군이 남해ㆍ서해로 침범하던 중 옥포(玉浦)ㆍ당포(唐浦)ㆍ당항포(唐項浦)ㆍ율포(栗浦) 등지에서 연전연패하자, 수군의 유능한 장수였던 와키사카(脇坂安治)는 정예병력을 증강하여 73척을 이끌고 거제도 등지로 침범하고, 역시 수군장수였던 구키(九鬼嘉隆)는 42척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왜 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고 7월 6일 본영을 출발, 노량(露梁: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거느리고 온 7척과 합세하니 3도의 전선은 모두 55척이었다. 이어 7일 저녁 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목동 김천손 (金千孫)으로부터 왜선 70여척이 견내량(見乃梁:거제군 사등면 덕호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8일 한산섬 앞바다에 이르러 이를 확인하였다. 그때 왜수군의 세력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서 지휘관은 수군장수 와키자카였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板屋戰船)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함을 확인하고 전략상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하여 격멸할 계획을 세웠다.먼저 판옥전선 5, 6척으로 하여금 왜수군을 공격하게 하여 반격해오면 한산섬으로 물러나면서 유인하도록하자, 왜수군들은 그때까지의 패전을 보복하려는 듯 의기양양하게 공격하여왔다.
전기(戰機)를 포착한 이순신은 모든 전선으로 하여금 학익진(鶴翼陣)을 형성하여 공격하게 하자, 여러 장령(將領)과 군사들은 지자ㆍ현자총통(地字ㆍ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 중위장 권준이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하여 47척을 분파(焚破)하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왜수군장 와키자카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함으로써 이 해전은 조선 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으며, 400여명의 왜병사들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하였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이 해전을 진주성대첩ㆍ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부른다.
이 대첩은 왜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함으로써 그들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고, 그때까지 육지에서의 패전으로 사기가 저하된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으며, 조선수군이 남해안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이미 상륙한 적군에게 위협을 주어 그때까지 매우 불리하였던 임진왜란의 전국을 유리하게 전환시킬 수 있었다는 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 해전과 하루 뒤에 있었던 안골포(安骨浦:진해시 안골동)해전을 승리로 이끈 전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이억기ㆍ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의 관계를 받았다.
<한산대첩 학익진(출처:http://www.topicsinkoreanhistory.com)>
9. 안골포해전 : 1592년 음력 7월 9일, 경남 진해 (전선 59척 격침, 전선 42척 나포)
- 1592년(선조 25) 7월 9일,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안골포에서 일본수군의 주력대를 격멸한 해전이다. 1592년 7월 8일, 이순신이 원균ㆍ이억기 등과 합세하여 한산섬 앞바다에서 왜수군장 와키자카(脇坂安治)가 이끄는 주력대를 격멸한 뒤에 가덕(加德)으로 향하던 중 안골포에 왜선이 머무르고 있다는 탐망꾼 보고를 듣고, 10일 새벽 작전계획을 수립,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포구 바깥에 진치고 있다가 본대가 접전하게 되면 복병을 배치한 뒤에 달려와서 전투에 참가하도록 하고, 이순신의 함대는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먼저 진격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그 뒤를 따르게 하여 일제히 안골포를 진격하자 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 왜선들은 모두 42척으로서 그 중에 3층으로 된 큰 배 1척과 2층으로 된 큰 배 2척은 포구에서 밖을 향하여 떠 있었는데 수군장 구키(九鬼嘉陸)와 가토(加藤嘉明) 등이 이끄는 제2 수군 주력이었다. 그러나 포구의 지세가 얕아서 큰 배는 쉽게 출입할 수 없어서 여러 번 왜선을 포구 밖으로 유인하려 하였으나 왜병들은 험고한 곳에 의지하여 응하지 않았다.
이에 이순신은 계획을 변경, 여러 장령에게 번갈아 포구 안에 출입하면서 총통과 장편전(長片箭) 등으로 왜선을 공격하자 왜병들도 대응하였고, 때마침 이억기의 함대가 달려와서 합세하게 되자 전투는 절정에 달했다. 특히 왜병들은 사상한 자를 작은 배로 실어내고 다른 배의 병사들을 큰 배로 옮기는 등 총력을 기울였으나, 종일토록된 싸움에서 왜선들은 결국 거의 깨지고 250여명이 사살되자 나머지 왜병들은 뭍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때 이순신은 승리와 함께 이들 왜병들이 밤중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올 것을 예측, 왜선 중 일부는 남겨둔 채 포구 밖으로 이동하였다.이 해전의 승리는 이틀 전 한산해전의 승리와 함께 일본 수군의 주력을 격멸하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10. 장림포해전 : 1592년 음력 8월 29일, 부산 장림 (전선 6척 격침)
11. 화준구미해전 : 1592년 음력 9월 1일, 부산 몰운대 (전선 5척 격침)
12. 다대포해전 : 1592년 음력 9월 1일, 부산 다대포 (전선 8척 격침)
13. 서평포해전 : 1592년 음력 9월 1일, 부산 감천 (전선 9척 격침)
14. 절영도해전 : 1592년 음력 9월 1일, 부산 영도 (전선 2척 격침)
15. 초량목해전 : 1592년 음력 9월 1일, 부산 초량 (전선 4척 격침)
16. 부산포해전 : 1592년 음력 9월 1일, 부산 좌천 (전선 128척 격침)
- 경상도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휘하 장수를 소집하여 의논하였다. 이 자리에서 찬반 양론이 제기 되었으나 이순신은 경상도로 출병을 결정하였다. 전라도 수군은 부산포로 오는 도중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렀으며, 9월 1일 가덕도 북방을 출발하여 부산포로 향하였다. 이때 적들은 부산진성 동쪽 산의 언덕에 삼군으로 나누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적함의 수는 470여 척이나 되었다.
그러나 통분할 일도 있다. 그것은 적군 속에 부역자가 많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9월 1일 하루종일 계속된 전투에서 승전한 아군은 계속 적을 토벌하려 했으나 중지하였다. 그 이유는 일본군은 기병을 가진 반면 우리 수군은 군마를 갖지 못하였으며, 병력의 숫자도 열세였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장기간에 걸친 항해에다 종일토록 항전했기 때문에 군사들이 피로하여 육지에서 전투하기가 어려웠으며, 날도 저물었기 때문이었다.
9월 1일 가덕도로 되돌아와 밤을 새고, 다음날 연합함대를 해체하고서 이순신의 전라수군은 여수 본영으로 돌아갔다. 이에 부산포해전은 막을 내렸다. 부산포 해전은 숫적으로 우리 함대의 수가 적에 비해 3분의 1밖에 안 되었으며, 또 적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있었기 때문에 아군에게는 아주 불리한 여건이었다.아울러 부산포 해전은 병사들이 오랜 항해로 지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전투로서 임진왜란 해전 중에서 대승을 거둔 승첩 중의 하나였다. 사실 부산포 해전은 전술적으로 적군을 사살하기보다는 적선을 깨뜨리는 데 주력하여 적선 100여척을 격파한 대첩이었다.
이 전투 이후로 일본의 수군은 거의 대부분 와해되고 말았다. 특히 부산포 해전은 전라수군과 경상수군이 연합하여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는 데도 의의가 크다.
17. 웅포해전 : 1593년 음력 2월 1일, 경남 진해 (전선 4척 전복)
18. 제2차 당항포해전 : 1593년 음력 3월 4일, 경남 고성 (전선 31척 격침)
-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고성(固城)의 당항리 앞바다에서 왜선을 격파한 해전이다. 2차 해전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된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왜적의 동향을 살피던 중 1594년 3월 왜선 31척이 당항포로 이동하고 있음을 탐지, 삼도수군을 먼저 견내량(見乃梁)과 증도(甑島) 근해에 배치, 왜선의 퇴로를 막고 조방장(助防將) 어영담(魚泳譚)에게 군사 31인을 주어 왜선을 치게 하여 당항포 근해의 왜선 10척을 격파하였다. 이어서 전군이 일제히 공격하여 포구(浦口)에 정박한 나머지 21척을 모두 불태웠다.동일한 지역에서 두 번이나 왜선을 크게 무찌른 당항포해전은 이순신의 주도면밀한 작전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19. 장문포해전 : 1543년 음력 10월 4일, 경남 거제 (전선 2척 격침)
20. 칠천량해전 : 1597년 음력 7월 16일, 경남 거제
-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원균(元均)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칠천량에서 참패한 해전이다. 임진왜란ㆍ정유재란중 조선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임진왜란중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번 조선 침범이 실패한 것은 바다를 제패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먼저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제거하려는 이간책을 꾸몄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당쟁에 휘말려 이순신을 하옥하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일본군은 다시 조선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 섬멸하고자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유혹하자 도원수 권율(權慄)은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상의하여 원균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원균은 무모한 출전으로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 등을 잃고 되돌아와 본인은 한산도의 본영(本營)에 앉아서 경상우수사 배설로 하여금 웅천(熊川)을 급습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전선(戰船) 수 십척을 상실하고 패하자, 권율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원균을 태형(笞刑)에 처한 뒤 다시 재출전을 명하였다.
원균은 부산의 적 본진(本陣)을 급습하기 위하여 삼도수군 160여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 7월 14일 부산 근해에 이르자, 이 사실을 사전에 탐지한 적들의 교란작전에 말려들어 고전을 하다가 되돌아오던 중 가덕도에서 복병한 적의 기습을 받아 400여명을 잃고 칠천량(지금의 거제군 하청면)으로 이동하여 무방비 휴식상태에 있었다.
이때 적은 조선수군에 대한 기습계획을 세워 도도(藤堂高虎)ㆍ와키자카(脇坂安治)ㆍ가토(加藤嘉明) 등 수군장수들은 7월 14일 거제도 북방으로 이동한 뒤 15일의 달밤을 이용하여 일제히 수륙양면기습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당황한 원균과 여러 장령(將領)들은 응전하였으나 적을 당해낼 수 없어 대부분의 전선들이 분파(焚破)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 등 수군의 장수들이 전사하고, 원균도 선전관 김식(金植)과 함께 육지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고, 오직 경상좌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방면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하였다.이로써 삼도수군이 일시에 무너지고 적은 남해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서해로의 진출이 가능하였으며, 우키다(宇喜多秀家)ㆍ고니시(小西行長)ㆍ모리(毛利秀元) 등이 쉽게 남원 및 진주 등지로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7월 21일 원균과 함께 탈출하여 겨우 살아나온 김식으로부터 패전의 보고를 접하게 되자 크게 놀라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명하여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21. 어란포해전 : 1597년 음력 8월 27일, 전남 해남
2.2. 벽파진해전 : 1597년 음력 9월 7일, 전남 벽파진
23. 명량해전 : 1597년 음력 9월 16일, 전남 해남 (전선 31척 격침, 92척 파손)
-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이순신(李舜臣)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수군을 명량(울돌목)에서 대파한 해전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수군은 대부분 패하고 말았으며, 그해 7월 22일 유성룡(柳成龍) 등의 간곡한 건의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휘하군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하였으나 남아 있던 전선(戰船)은 겨우 12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일본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고 있었으며, 육군의 육상진출과 더불어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하여 이진(利津)ㆍ어란포(於蘭浦) 등지를 거쳐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이동하였다. 일본수군은 벽파진에 있는 조선수군에 여러 차례 야간 기습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우리측의 철저한 경계망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적정(敵情)을 탐지한 이순신은 명량을 등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9월 15일 조선수군을 우수영(右水營:해남군 문내면)으로 옮겼다. 다음날인 16일 이른 아침 일본수군은 명량으로 진입하고 있었으며, 망군(望軍)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은 출전령을 내리고 최선두에 서서 명량으로 향하였다. 그때 명량의 조류는 거의 정조시기(停潮時期)였으며 일본수군의 전선은 133척으로 확인되었다.
이순신은 명량으로 들어서면서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하여 일본수군의 수로통과를 저지하려 하자, 일대 혼전이 전개되고 조류는 서서히 남동류(南東流)로 전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수군은 이순신이 타고 있는 전선을 포위하려는 기세였다. 매우 위급한 순간, 이순신은 뒤에 처져 있는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中軍) 김응함(金應緘) 등을 불러들여 적진으로 돌진하게 하자, 전투는 절정에 이르렀다.
또한, 전류하기 시작한 조류는 소수의 전선이 활동하는 조선수군에 비하여 많은 전선을 거느리고 있는 왜군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하였으며, 협수로에서의 불규칙한 조류분포로 인하여 서로의 진형(陣形)과 대오(隊伍)가 붕괴되고 있었다.격전중 이순신의 전선에 동승하였던 투항왜인 준사(俊沙)가 적선을 내려다보며 "꽃무늬 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 때의 일본의 수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다."라고 외치므로 이순신은 김석손(金石孫)을 시켜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자, 이를 본 일본수군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에 전기(戰機)를 잡은 조선수군은 현자총통(玄字銃筒)과 각종 화전(火箭)을 쏘면서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丁應斗) 등 여러 장령들이 적선 31척을 분파하자 일본수군은 퇴주하고 말았다.
이 해전은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10배 이상의 적을 맞아 협수로의 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그들의 서해진출을 차단함으로써 정유재란의 대세를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열세한 병력을 지휘한 이순신은 위장전술로써 피난선 100여척을 전선으로 위장하여 뒤에서 성원하게 하였다는 것과, 철쇄(鐵鎖)를 협수로에 깔아서 적선을 전복시켰다는 기록도 일부 전해오고 있다.
<명랑해전 상상이미지(출처:www.dicajigi.com/호그니)>
24. 절이도해전 : 1598년 음력 7월 19일, 전남 고흥 (전선 50여척 격침, 50척 파손)
25. 장도해전 : 1598년 음력 10월 2일, 전남 순천 (전선 30척 격침, 11척 나포)
26. 노량해전 : 1598년 음력 11월 19일, 경남 남해 (전선 200여척 격침, 150척 파손, 100척 나포)
-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麟)이 이끄는 조ㆍ명연합함대가 노량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임진왜란중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이 승리와 함께 전사한 해전이다. 1597년 재침한 왜군은 그해 9월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던 중 다음해 8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병사하자,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 수군진영을 떠나 노량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倭橋)에 진을 치고 있는 왜군 고니시(小西行長)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고니시는 수륙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어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애원하는 통신선 1척을 빠져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泗川) 등지의 시마쓰(島津義弘)와 연락하여 남해ㆍ부산 등지에 있는 그들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ㆍ
명연합수군을 협격하면서 퇴각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러한 전략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진린을 꾸짖고 함께 진형을 재정비하여 왜군을 맞아 격멸하기로 하였다
11월 18일 밤 이순신이 예견한 대로 노량수로와 왜교 등지에는 500여척의 왜선이 집결하여 협격할 위세를 보였다. 200여척의 조ㆍ명연합수군을 거느린 이순신은 전투태세에 들어가 19일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순신과 진린은 서로 위급함을 구하면서 독전하자 200여 척의 왜수군이 분파(焚破)되고 패잔선 50여척이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관음포(觀音浦)로 마지막도주하는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지자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는 세계사상 길이 빛나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 해전에서 명나라장수 등자룡(鄧子龍)과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등이 전사하였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하여 시마쓰의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철퇴하였으며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충무공 이순신 이미지(출처:http://ko.wikipedia.org/)
거북선 이미지(출처:http://ko.wikipedia.org/)
판옥선 이미지(출처:http://ko.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