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가 있어야 한다. (서문교회와 우리가족)
본인은 개인적으로 서문교회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 왜 하필 서문교회일까? 서울에서의 활동을 접고 청주로 내려온 게 ‘70년대 중반이었나 보다. 엑스폴로74의 여의도 집회(빌리그래함 목사)에서 안사람이 연합성가대원으로 활동한 후였으니... 그러나 당시에 교회(신촌 성결교회 :최학철 목사)는 열심히 다녔어도 생활은 매우 곤핍했던 때였다. 삶에서 막장이라는 것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때다. 내가 청주로 내려오게 된 이유는 ’나의 막장시대‘라 여겼기 때문이다. 충북대를 다니며 자취하는 두 아우가 있다는 사실이 청주로 내려온 동기이기도 하다.
생활에 지쳐서 몸도 마음도 심령도 황폐화 되었고, 희망도 없이 막연히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헤메던 시기였다. 서울 연희동의 산동네에 있던 조그만 집을 처분하지 못한 채 가방 하나, 낡은 카메라(캐넌1.7) 한 대 덜렁 메고 내려왔던 것이다. 금천동 어느 과수원 곁 외지고 허름한 집 곁방을 아주 값싼 사글세방으로 얻고 사과궤짝 하나 구해서 찬장으로 썼다.
청주에서 초, 중학교를 다녔으니 고향이나 진배없건만 반겨주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청주 생활이었지만 넷째아우의 도움으로 참 좋은 사람을 만났다. 사진현상소(DP&E)인 금광사의 김용현 사장이다. 그는 말없이 최선을 다해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다. 물론 넷째와 다섯째아우가 그동안 신뢰를 쌓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어간에 서울 집을 정리하고 집근처에 처가를 위해 방을 따로 장만했다. 집사람과 난 각기 카메라 한 대씩 둘러메고 발이 부르트도록 뛰었고 차츰 자리를 잡아갔다. 석교동으로 이사하고 사진관을 개업하면서 집사람은 가까운 교회로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성결교회 목사이신 아버지의 권유로 청주서문교회로 적을 옮겼다. (‘77대성회를 서문교회에서 보냈다.)
난 초등학교 3학년부터 청주제일 장로교회에서 초, 중등부를 보냈다. 구연직 원로목사님이 계셨고 홍 **목사님이 담임이셨다. 고등학교는 서울로 진학했고, 서울흑석동교회에서 고등부를 다니고, 청년회 회장과 성가대활동을 하며 결혼도 했다. 그 후는 직업과 생활을 따라 전전하면서 가까운 성결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를 두루 다녔다. 한 군데 뿌리를 내리지 못한 ‘떠돌이 신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청주로 오면서 청주서문교회는 비로소 모교회라고 할 만큼 정이 들었다. 여진헌 목사님과 장로, 권사, 집사님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출사(出寫)를 전문으로 하는 사진관을 경영하며 차차 안정을 찾게 되었고, 교회에서는 집사와 초등부부장의 직임으로 봉사도 했다.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지만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안사람은 같은 교회에서 집사와 유년부부장을 맡기도 했다. 고교졸업 무렵 당시 신익호 전도사의 권유와 어머니의 기도제목이기도 해서 헌신을 다짐하고 이운집 담임목사의 추천으로 신학교 문 앞에까지 갔다가 포기했지만, 그게 또 항상 마음의 무거운 짐이기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항상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끼며 살았던 거다.
청주로 내려오기 전인 1970년에 서울신대 입학을 했지만 중도 포기한 전력이 있고, 청주에서 숨을 돌리자 연희동에 손TG 목사가 개설한 신학교에 복학형식을 빌려 적을 두었었고, 연희동의 한 개척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전담하는 전도사역할도 했었다. 그 교회에서 자면서 신학교를 다녔고, 사진관과 생활은 전적으로 안사람에게 맡겼다. 생활력이 강한 안사람은 신학을 계속하려는 나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또 서울에서의 독방신세를 청산하고 청주로 내려왔다. 어머니는 여전히 쉬지 않고 ‘맏아들은 하나님의 것이니 목사로 세워 달라.’는 기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자격미달이긴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무녀도(巫女島)의 목회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진헌 목사님과 박부도 전도사님 그리고 서문가족들의 작별인사와 격려를 받으며 떠난 해가 1982년 8월 한여름이었다. 당시 서문교회에서 함께했던 이들 중에 이양배(순복음)목사, 차익환(기성)목사, 권석현, 박정규, 이재복(장로교)목사가 있고, 본인은 성결교회목사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자녀 삼남매는 서문교회에서 주일학교, 중, 고등부 혹은 대학부를 거쳤다.
다섯째 아우 범수가 청년회장으로 봉사하다가 여진헌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첫째아들 주훈, 둘째아들 주형의 결혼식도 서문교회에서 치렀고, 내 막내아우 영수도 서문교회 중, 고등부를 거치고 서울신대를 졸업한 후 이스라엘로 건너가 여행사 대표로 있다. 둘째아들 주형은 청주지방회 서문교회소속 전도사, 선교사로 이스라엘에 파송되었다. 딸 현주는 대학생활중 2년간 주일학교교사로 봉사했다. 처제인 김순자도 주일학교 교사이면서 청주YWCA간사로 여러 해 봉사했고, 현재 농촌교회(상곡교회)의 사모다. 여진헌 목사님의 배려로 부친 이종덕목사의 충북지방회 명예목사 추대식을 서문교회에서 치렀고, 본인은 늦게나마 1992년 서문교회에서 개최된 ‘교단 제48회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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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딸과 만약이라는 전제로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만약 천재지변이나 어떤 재난으로 이산가족이 되었다면 어떻게 헤어진 가족들을 찾을 수 있을까? 만약 그런 사건이 생긴다면 KBS에서 벌인 ‘이산가족찾기’ 캠페인처럼 서문교회를 가족상봉 센터로 삼기로 하자!” 섬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안사람은 가끔 “서문교회에서 평신도로 봉사할 때가 참 좋았었는데!”라고 푸념했다. “지금쯤 권사가 되었을 텐데!”라고도 했다. 사모의 길이 결코 녹녹치 않음을 토로하는 거였지만 나는 못들은 체 했다. 그런데 섬으로 들어간 지 15년 만에 육지로 나오게 되었고, 모교회인 서문교회 수양관 관리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서문교회에서 파송한 요르단선교사로 봉사하다가 은퇴, 명예협동목사가 되었다. 안사람은 옛날 신우(信友)들인 권사, 집사들을 만나면서 여전히 권사가 되고 싶어 했다. 박대훈 목사의 배려로 결국 그 소원을 이루어 서문교회 권사가 되었다. 지금은 할렐루야 성가대원으로 서문가족들을 자주 만나면서 옛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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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이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준 교회, 헌신의 발판이 되어준 교회, 신앙생활에 있어서 고향과도 같은 교회에서 재차 봉사하게된 것만 보아도 우리 가족은 서문교회와 특별한 관계라 아니할 수 없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 멀리 떨어진 남해에서 인터넷을 통해서 실시간예배로 동참하면서 서문교회와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백성이며 동시에 ‘서문가족’임이 분명한 것이다. 생활형편에 따라서 여러 교회들을 옮겨 다니며 신앙생활을 유지하기도 했지만 ‘우리교회’라 할 만한 고향같이 마음이 끌리는 교회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문교회는 분명히 ‘우리교회’라고 당당하게 밝힐 수 있다. 할렐루야!
-觀-
덧글;
일기를 쓰지 않았으니 자세한 내용을 기억할 수 없지만,
생각나는 대로 지난 날의 개인사를 몇 글자 써 보았다.
신촌성결교회는 당시 숙모(임금화 권사)님의 권유로 함께 다니면서
안사람은 성가대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연희침례교회(양희협 목사)는 천막치고 가마니 깔고 시작한
개척초기 무렵에 다닌 기억이 있다.
미국인들이 단체로 들어와 연희동과 모래내를 돌며 전도할 때
안사람은 안내를 맡아 함께 다니며 열심히 전도활동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