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향교 간행 「금성충효록(錦城忠孝錄)」의 미능재(未能齋) 정은수(鄭訔秀) 공 행장
「금성충효록」의 간행일은 명시되지 않았으나, 순천(順天) 박인규(朴仁圭)의 발문(跋文)이 신해년(1971년) 10월이다. 나주향교(羅州鄕校)에서 나주 지역 충신으로서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중 순절한 11인의 열사(烈士)와 그들의 아들 행적을 모아 「금성충효록(錦城忠孝錄)」을 간행하였다. 이들 열사 중에 광주정씨의 정언우(鄭彦佑) 공과 아들 미능재 정은수(鄭訔秀) 공이 포함되었다. 불행히 정언우 공의 기록은 ‘금고보결(今考補缺)’ 상태로 싣지 못한 채 남아있다. 아쉬운 대로 미능재 공의 행장을 살펴 보고자 한다. 대부분 족보나, 세차약기(世次略記)에 추증 등 소개되지 않은 새로운 내용도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기간 중 3대에 걸친 창의(倡義)와 순절과 충절의 격동이 끝나고 홀연히 초야로 물러난 후 사그라진 불꽃처럼 홀연히 잊혀지니 그 여운은 길고 아쉬움은 크다. 사우(祠宇) 건립이 실행되지 못한 일은 더욱 아쉽다.
< 능파정공파(凌波亭公派) 미능재 정은수가(鄭訔秀家) >
未能齋鄭公行狀
夫三網天之經地之緯也. 人生斯世若一日 無三纲則國不為國人不為人. 故忠孝烈三件中有其一焉 朝家旌贈之士林薦揚之. 其無所本而然㦲. 未能齋鄭公 諱訔秀字景献卽 忠孝兩全之人也. 以嘉靖丁卯二月三日生于羅州西門外景賢里. 第賦性剛毅 風儀魁偉 能知愛親惟命 是從語默 動止自中規矩 就塾受學才誠兼備. 考遯菴公知其志 尚有在嘗誡之曰 人貴有學 學貴有成. 公受為懷中簡 焚膏繼晷年 續舞勺學己頭腦矣. 成童後就栗谷先生門下 執經問難屢蒙獎詡 甲申遭山梁之痛心喪三年. 考遯菴公 移寓玉川赤城江上 公與南原淳昌士友交遊 而諸儒敢望焉. 戊子中生員進士 兩試兩館儒生 莫不以師表待之矣.
壬辰倭寇 自鳥嶺破彈琴臺申砬兵 直入京都. 大駕播越 陵寢宮關 俱當掘燒隨後 追平壤則 遯菴公倡起義旅直到清州而殉節. 公收屍返葬于羅州馬峙. 代領父兵所 向無敵直到京城. 翊年癸巳 大駕還御 除軍資監正不就. 卽爲還鄉 守盧墓側 有神虎衛墓之異. 鄉人稱其蘆前松曰‘忠孝亭’. 萬曆壬子十月六日卒. 享年四十六 訃聞特贈兵曹參判. 仁祖登極加贈吏曹判書. 葬于羅州西門外.
公光洲人. 以高麗贊成事諱臣扈爲上租 生諱允孚開城府尹 以體察使留鎮羅州 設倉以便轉漕 生諱麟晉全羅監司 生諱存玉果縣監 生諱以忠雲峰縣監 生諱晊贈左贊成. 於公五世以上 高祖諱應鍾號退隱逸禮會判書. 曾祖諱貅持平. 租諱仁良進士. 考諱彥佑號遯菴 妣光山金氏聲振女.
配平澤林氏 父參奉蓀 墓雙窆. 男安民丙子倡義事載「湖南飾義錄」. 誼民號遲軒丙子倡義到清州聞和成痛哭 南下屏跡自靖 贈司僕寺正. 熙民副護軍. 孫男命世副護軍 好世 翊世 緯世. 餘不盡錄竊. 惟以公貫日之忠 出天之孝. 遽當千古所未有之大亂代領父兵屢建奇勳. 守盧墓側誠感神虎. 味没草野 以終其世. 身後貤贈隆崇 「禮曹文帖」積成卷軸. 而立祠腏亭之議 屢發旋止抑 亦待後日也. 歟公之後孫成林與其族兄京林來訪 狀德之文 素所景仰之餘 不辭以諾畧撮槪要 以竣人表隨者之擇焉.
庚戌(1970년) 十二月 旣望 慶州 崔炳夏 謹撰
미능재 정공 행장
무릇 삼강(三綱)은 하늘의 벼리(가로줄)이자 땅의 씨줄(세로줄)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하루를 살아도 삼강이 없다면, 나라는 나라답지 못하고 사람은 사람답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충효열(忠孝烈) 세 가지 중 그 하나만 있어도 조정에서는 정려와 증직을 수여하고, 선비들은 이를 천거하고 칭송해 왔다. 이러한 일들이 어찌 아무런 근거 없이 그리되겠는가?
미능재(未能齋) 정공의 휘는 은수(訔秀)이고 자는 경헌(景獻)인데 바로 충성심과 효심을 모두 갖춘 분이다. 가정 정묘년(1557년, 명종12년) 2월 3일에 나주 서문 밖의 경현리(景賢)에서 태어났다. 품성은 굳세고 의연했으며 풍채는 크고 당당했다. 부모를 공경하여 오직 그 명령에 따랐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멈추는 것이 저절로 법도에 맞았다. 글방에 나아가 배움을 받을 때는 재능과 정성을 모두 갖추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둔암공(遯菴公)이 그 뜻이 숭고한 곳에 있음을 알고 일찍이 경계하며 말하기를, "사람은 배움을 귀하게 여기고, 배움은 성취가 있어야 귀하게 여긴다" 라고 했다. 공(公)은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 품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등불을 밝혀 학업에 매진했다. 열세 살 무렵에 이르러서는 이미 학문의 기틀을 잡고 두각을 나타냈다.
성인이 된 뒤에 율곡(栗谷) 이이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경전을 잡고 어려운 문제를 물으니 여러 번 칭찬과 격려를 받았다. 갑신년(1584년, 율곡 선생이 서거한 해)에 스승을 잃은 슬픔(山梁之痛)을 만나 마음으로 3년 상을 치렀다. 돌아가신 아버지 둔암공(遯菴公)이 옥천(玉川) 적성강(赤城江) 가로 거처를 옮겼을 때, 공은 남원과 순창의 선비 및 벗들과 교유하였는데, 여러 유학자가 그의 높은 인품을 우러러보았다. 무자년(1588년)에 생원과 진사 두 시험에 모두 합격하니, 성균관의 유생들은 그를 사표(스승의 모범)로 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임진년(1592년)에 왜구가 조령을 넘어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의 군대를 깨뜨리고 곧바로 한양으로 들어오니, 왕(선조)의 수레가 의주로 피란(播越)하였고, 왕릉과 궁궐이 모두 파헤쳐지고 불타버렸다. 임금의 뒤를 쫓아 평양까지 파천하게 되자, 아버지 둔암공이 의병을 창의하여 곧장 청주(淸州)까지 나아가 싸우다 순절하셨다. 공은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나주(羅州) 마치(馬峙)로 돌아와 장사를 지냈다. 공은 아버지를 대신해 군대를 이끌고 가는 곳마다 무적의 기세로 곧장 한양까지 진격했다. 이듬해인 계사년(1593년)에 왕이 한양으로 돌아왔고, 공에게 군자감정(軍資監正)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즉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친의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묘살이(守盧)를 하니, 신령스러운 호랑이가 무덤을 지키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 고향 사람들이 그 여막 앞의 소나무를 일컬어 ‘충효정(忠孝亭)’이라 불렀다.
만력 임자년(1612년) 10월 6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56세였다. 부고가 조정에 전해지자 특별히 병조참판(兵曹參判)로 증직하였다. 인조 임금이 즉위한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높여 추증하였고, 나주(羅州) 서문 밖에 장사 지냈다.
공의 본관은 광주(光洲)이고 고려 찬성사를 지낸 신호(臣扈)공이 상조(上租)이다. 그 아들은 개성부윤 윤부(允孚)이고 체찰사로 나주진에 머물며 창고를 지어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였다. 그 아들은 전라감사 인진(麟晉)이고, 그 아들은 옥과현감 존(存)이며, 그 아들은 운봉현감 이충(以忠)이다. 그 아들은 증좌찬성 질(晊)로서 공의 5세 이상의 선대이다. 고조의 휘는 응종(應鍾)인데 호는 퇴은(退隱)이고 숨은 인재로 천거 받아 예조판서를 지냈다. 증조는 지평 휴(貅), 조는 인량(仁良)으로 진사이고, 선친은 언우(彥佑) 호는 둔암(遯菴)이다. 모친은 광산김씨 성진(聲振)의 따님이다.
부인 평택임씨의 부친은 참봉 손(蓀)이신데 묘소는 쌍분이다. 아들 안민(安民)은 병자년에 창의하였고 「호남절의록(湖南飾義錄)」에 기록되었다. 의민(誼民)의 호는 지헌(遲軒)인데 병자년에 의병을 일으켜 청주에 당도하였는데 화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남하하여 초야에 은거하였다.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희민(熙民)은 부호군이다. 손자 명세는 부호군이고, 호세, 익세, 위세를 두었고 할 말은 많으나 다 기록하지 못한다.
생각건대 공은 해를 뚫을만한 충성심과 하늘에서 낳은 효심이 있었다. 천고에 없던 큰 난리를 당하여, 부친의 병력을 대신 통솔하여 여러 차례 특출난 공훈을 세웠다. 묘소 곁에 여막을 세워 지킬 때, 성심에 신령한 호랑이도 감복케 하였다. 명리를 멀리하고 초야에 묻혀 평생을 마쳤다. 사후에 나라에서 내린 추증이 매우 융숭하여, 예조에서 내린 문서가 쌓여 책을 이룰 정도였다. 사당을 세워 배향하자는 의견도 여러 차례 일어났으나 중지되었고 후일을 기약하게 되었다.
공의 후손인 성림(成林)과 족형인 경림(京林)이 찾아와서 공의 덕을 기록하는 글을 부탁하기에, 평소 존경하던 마음이 있었으므로 사양하지 않고 수락하였다. 대략의 요점을 요약하여 향후 행장을 짓는 사람이 선택하여 쓸 수 있도록 하였다.
무신(1970년) 12월 16일 경주 최병하(崔炳夏) 삼가 지음
* 풍의괴위(風儀魁偉) : 풍채와 용모가 당당하고 늠름함.
* 동지자중규구(動止自中規矩) : 행동거지가 하나하나 저절로 예법과 규칙에 맞아떨어짐.
* 회중간(懷中簡) : 품속의 편지, 평생 마음에 새겨 잊지 않는 교훈을 의미함.
* 분고계궤(焚膏繼晷) : 기름을 불태워 해를 잇다. 즉, 밤낮으로 쉬지 않고 공부함.
* 무작(舞勺) : 주나라 제도에서 13세가 된 소년이 배우던 춤으로, 여기서는 13세 전후의 어린 나이를 뜻함.
* 문난(問難) : 풀기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다.
* 산량지통(山梁之痛) : 산과 대들보가 무너지는 아픔. 1584년(갑신년) 스승 이이(李珥, 1536~ 1584.2.27.)의 사망
* 사십육(四十六) : 56세의 잘못, 공의 생몰년이 1557년과 1612년이므로 56세가 맞다.
* 병적자정(屏跡自靖) : 세상에 나서지 않고 자취를 감추어 스스로 평안과 절개를 지키다.
* 최병하(崔炳夏, 1911~1976) : 최익현 선생 족후손
첫댓글 컴퓨터를 바꾸면서 지난 2년 간 작업했던 방대한 자료들이 손상되었습니다. 광주세설의 '시조공 소고' 부터 월파 정시림 공의 유고 소개 까지. 복구가 안된다고 해서, 시간 나는 대로 기억을 되살려 재작성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