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死)의 찬미(讚美) - 윤심덕(尹心悳/1926 발표)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德壽丸:도쿠주마루) / 윤심덕(尹心悳) / 김우진(金祐鎭)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 너 찾는 것 허무(虛無)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 너 죽은 후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 너 찾는 것 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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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 유행한 다른 노랫말>
이래도 한세상 / 저래도 한평생 / 돈도 명예도 / 사랑도 다 싫다.
녹수청산은 변함이 없건만 / 우리 인생은 나날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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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 ‘사(死)의 찬미(讚美)’는 1926년에 윤심덕(尹心悳)이 발표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이다.
이 노래는 루마니아의 군인이자 작곡자였던 이바노비치(Iosif Ivanovici)가 작곡하여 발표하였던
‘다뉴브강의 잔물결(도나우강의 잔물결)’이 원곡인데 윤심덕이 편곡하고 번안(飜案)하여 발표한 곡이다.
윤심덕(尹心悳:1897~1926)은 조선시대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는데 1923년 동경음악학교를 관비생(官費生)으로 졸업하고 돌아와 음악활동과 교편생활을 하였는데 1926년 극단 토월회(土月會) 회원으로 신극(新劇)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26년 7월, 연극관계로 알게 된 이기세(李基世)의 주선으로 당시 유행하던 번안(飜案)가요 ‘매기의 추억’, ‘어여쁜 새악시’ 등 10곡의 노래를 취입(吹入)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간다.
8월 1일, 취입 예정에 없었던 이바노비치 작곡인 경음악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를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로 취입(吹入)하는데 가사는 윤심덕이 썼다고 한다.
윤심덕(尹心悳)은 순회극단에 참여하면서 극작가(劇作家) 김우진(金祐鎭/필명:정로생)과 알게 된 후 사랑에 빠지는데 두 사람은 1897년생으로 나이는 동갑이었다. 드라마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한 윤심덕은 풍부한 성량(聲量)과 당당한 용모로 큰 사랑을 받았다고 나온다.
윤심덕의 대표곡인 위의 노래 ‘사(死)의 찬미(讚美)’는 영화 ‘해어화(解語花)’에 등장하기도 했다.
해어화(解語花)는 ‘말하는 꽃’이라는 의미인데 ‘뛰어난 기생, 미인’을 뜻하는 말이다.
1991년에 나온 영화 ‘사(死)의 찬미(讚美)’는 청룡영화상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싹쓸이했고 대종상, 대한민국 영화협회가 주최하는 춘사영화상에서도 다수 수상했다.
김우진(金祐鎭)은 우리나라의 선구적 극작가이자 최초로 신극(新劇) 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동우회 순회연극단을 조직하고 공연비 일체와 연출을 담당하기도 했다.
김우진은 부인과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었는데 윤심덕과 사랑에 빠져 1926년,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덕수환(德壽丸:도쿠주마루) 배에서 현해탄(玄海灘)에 몸을 던져 함께 생(生)을 마감하는데 두 사람은 향년(享年) 29세로 함께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두 사람이 바다로 투신하는 것을 본 사람이 없어 사실이 아니라는 루머가 떠돌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3년에 비행기가 최초로 나오게 되니 비행기가 없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