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가 선정한 이 한 편의 시 후보작(여름호)
주식株式, 주식主食
김혁분
마이더스 손이라 했다 손잡고 대우량건설 감자주를 샀다 마이더스 손은 삽질하는 마이너스의 손이었다
주식은 퍼 넣을수록 뼈아픈 밥 같았다 전광판 가득 오르내리는 말씀의 장에 들어도 선약해 놓은 요람 가득 푸른 화살만 빗발쳤다
누군가는 치고 빠지다 자빠지고 누군가는 치고 들어가다 자빠졌다 찬밥이 될지 쉰밥이 될지 모르고 뜨신 밥이라 믿었다
김빠지는 소리가 들려도 운칠 삼기는 재력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며 끌어 모은 전錢을 투하했다 뒤늦게 틀어쥔 상투였다 치고 빠질 순간에 치고 들어가는 개미의 악수握手였다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뛰어야 장이라고 물 타기를 한다 하수도 안 잡는 떨어지는 칼날을 잡았다 끝까지 가보는 거다
치고 빠지는 묵언수행도 세시 반이면 해제되지만 밑장 빼서 다진 쌍바닥은 한밤중에도 묵언중이다
관은 영관을 달고 외인은 와인을 들고 돌아설 때 눈감고 경구를 외는 신념은 독실한 신앙이 되었다
주식株式은 삼시세끼 어금니를 씹어야 하는 주식主食과의 악수惡手였다
----{애지}, 2019년 봄호에서
목련의 시간
황영숙
목련이 지고 나니
세상이 텅 비었다
봄이 봄 같지 않는 것들은
끼리 끼리 모여 키득거리며 박수 친다
아우성처럼 다시 피어나는 꽃들의 축제
무성 영화처럼 흩날리는 봄날의 시간
너무 일찍 떠난 영혼들의 독백처럼
봄이 흐른다
시간의 뒤쪽은 대부분 움막처럼 낡아
지나가다 잠시 뒤적여 보는 것
만나고 싶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것처럼
잠시 손 잡아 주고 떠난
목련의 시간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만 남아있는 봄날의 한쪽이
텅 비어 있다
----{애지}, 2019년 봄호에서
냉이꽃
손택수
냉이꽃은 무릎 아래서 핀다
냉이꽃을 보려면 우선 걸음을 멈추는 게 좋다
일단 멈추게 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뻣뻣하던 허리도 배꼽인사라도 하듯이 낮아지고
마침내는 무릎을 구부리고 쪼그려 앉게 된다
냉이꽃 뒤엔 냉이 열매가 보인다
작은 하트 모양이다 이걸 쉰 해만에 알다니
봄날 냉이 무침이나 냉이국만 먹을 줄 알았던 나,
잘 익은 열매 속 씨앗은 흔들면 간지러운 옹알이가 들려온다
어딜 그렇게 쏘다니다 이제사 돌아왔니
아기와 어머니가 눈을 맞추듯이
서로 보는 일 하나로 가지 못할 곳이 없는 봄날
나는 훗날 냉이보다 더 낮아져서,
냉이 뿌리 아래로 내려가서
키 작은 냉이를 무등이라도 태우듯
들어올릴 수 있을까
그때, 봄은 오고 또 와도 새
봄이겠다
----{애지}, 2019년 봄호에서
사방치기*
김석
아이가 죽었다
깨금발로 뛰다가 죽었다
금 밟고 죽었다
죽은 아이가 울고 있다
너 왜 울고 있니?
죽었으니까요
죽은 아이가 울고 있고
죽은 아이를 보며 산 아이들이 웃고 있다
넌 왜 웃고 있니?
살아 있으니까요
‘괜찮다’고 한다 울면서 ‘괜찮다’고 한다
죽어도 ‘괜찮다’고 한다
죽은 아이를 보고 웃어도 ‘괜찮다’고 한다
죽어서 다시 죽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고 한다
‘괜찮다’라는 말, 참
슬프다
----{애지}, 2019년 봄호에서
보르게세
강윤미
손을 잃어버린 것처럼
두 손바닥으로 혹은 열 개의 손가락으로
눈을 덮고 있으면 보르게세 공원의 푸른 나뭇잎들이
살랑거리네
이제 사진 속에만 있는 세 살의 아이
얼룩말을 발음할 수 없었던 아이와 공원 벤치에서
보르게세 미술관 입장 시간을 기다렸지
보르게세 미술관으로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렀던 보르게세 공원이지만
보르게세 보르게세
발음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엉뚱한 소용돌이가 쳐서
아이가 로마에서 훌쩍 다 자라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지
그림 그림이 벽마다 벽의 벽마다 벽을 빼앗을 듯 걸려 있었지
한꺼번에 찾아든 명화의 행렬에 현기증이 나고
아이와 나는 한국어로 소리쳤네 아무도 못 알아들어서
나는 아이에게 욕을 가르칠 수도 있었지만 보르게세 보르게세
말의 낯선 부드러움에 반해 그림 속 아이를 안은
귀부인처럼 아이를 훔치고 말았네
시차를 이기지 못한 아이가 팔꿈치에 얼굴을 대고 잠에 빠져들고
나는 가장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을 잡고 편지를 그려놓았네
연약한 구름이 훌쩍 자라 내가 사는 곳으로 당도할 때쯤이면
아이가 보르게세 공원의 나뭇잎 냄새를 맡으며 비 냄새를 읽을 것
----{애지}, 2019년 봄호에서
창백한 푸른 점
황유원
꿈에 지구가 되었다
어둡고 찬 공간 속에 붕 뜬 채
계속 돌았다
돌기만 했다
다른 별들이 말 걸지 않았다
서로 너무 멀리 있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인간으로 돌아온 후
여전히 내 발 아래 지구로 남아 있는
지구를 생각했다
그때 해줄 수 있는 게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인간으로 돌아왔는데
지구는 여전히 그 시커멓고 차가운 집
우주宇宙에 남아 있었다
* 칼 세이컨의 책 제목
----{애지}, 2019년 봄호에서
맹그로브
남상진
뿌리로 숨을 쉬는 생도 있다
척박한 땅에 난생의 몸으로 떨어져 망망한 대해를 떠돌다 다다른 지표면
붙잡을 피붙이 하나 없는 물컹한 진흙 바닥에 그래도 단단히 뿌리 내렸다
눈물보다 짠 바닷물이 푸른 혈관의 통로를 지나 두꺼운 손가락 마디 끝
꽃잎으로 빠져나오는 수변
성성한 자식들 뭍으로 내보내고 맨몸으로 파도를 견뎌온 나무
밀물과 썰물이 수시로 드나드는 간석지에서
나무로 살아가는 일이 속내를 숨기고 혀를 깨무는 여정이라지만
얼마나 숨쉬기 버거웠으면
혀를 뿌리처럼 물 밖으로 밀어 올려
가쁜 숨을 내뱉았을까
울먹이는 누이의 손을 잡고
어둑한 맹그로브 숲으로 들어가는 저녁
요양원의 긴 복도를 따라
수면 위로 뿌리를 드러내고 가쁜 숨을 이어가는
맹그로브 뿌리같이 수척한 아버지
이불같은 밀물이 밀려와
머리끝까지 아버지를 덮고 있다
----{애지}, 2019년 봄호에서
어느 미혼모의 질문
천양희
슬픔 아픔 고픔
이따위 단어들은
왜 늘 현재진행형일까요
어제 그날 옛사랑
이따위 단어들은
왜 모두 과거완료형일까요
구름 여울 바람
이 따위 단어들은
왜 다들 정처가 없는 것일까요
울음바다 눈물바람
이따위 단어들은
왜 또 과장되는 것일까요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네요
저 아이는
지 불행을 아는 듯
한번 울면 오래가요
저것이 저 아이의 미래형일까요
----{애지}, 2019년 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