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여파로 사람들을 편하게 만나지 못하고 지낸 지 4개월이 넘는다. 하다못해 문병뿐만 아니라 장례식장에도 가지 못하고 있으니 모두들 섬처럼 떨어져서 산다. 웃을 일도 울 일도 반가워 할 일도 손을 잡을 일도 없다. 처음에는 신경을 쓸 일이 없어져서 사실 편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게 아니다. 전화나 카톡으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봐야 허상이다. 온기가 없다. 찬 바람 가운데 맨 몸으로 언덕에 홀로 선 겨울나무처럼 스산하다.
코로나도 피할겸 차라리 산골 종자골 작은 집에서 머무는 날이 많아진다. 그곳에서 잠을 자고 난 아침인데 남편이 나를 급히 부른다. 새벽 6시다. 아무리 손바닥만한 텃밭일지라도 제대로 가꾸려면 부지런하게 일찍 일어나는 것은 기본이다. 빨리 나와 봐 보여줄 게 있어 빨리 와보라니까 빨리. 뒤뜰로 향한 창문에 얼굴을 들이민 그가 손짓을 한다.
지붕보다 높게 자란 자두나무의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인조잔디가 깔린 뒤뜰 후미진 곳에 납작 엎드려 웅크린 채 얼굴을 묻고 있는 저것은 무엇인가. 인조잔디는 진한 초록빛이고 보잘것없이 작은 그것은 진한 회색빛이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쳤을 것이다. 어머어머어머! 내 소리에 놀랐는지 움츠렸던 얼굴을 들어 순진무구한 까만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우리 쪽을 쳐다본다. 경계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순진무구한 눈초리다. 기운이 없는 듯 다시 머리를 가슴에 묻고 자는 듯 하다가 이야기 소리에 고개를 들어 우리 쪽을 다시 바라본다. 초점이 희미한 저 어리디 어린 여리디 여린 목숨은? 어떻게? 이곳에?
웅크린 모양새로 봐서는 한 줌 밖에 안되는 고라니 새끼다. 동물의 본능으로 치자면 사람을 보고 도망을 치는 시늉이라도 해야 맞는데 그게 아니다. 그냥 제가 누운 자리에서 꼼짝을 안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앞에 서 있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평온한 까만 눈동자로 우리를 무심히 바라본다. 바라보다가는 이내 얼굴을 움츠려 제 몸에 묻는다. 젖을 먹지 못해서인지 배가 홀쭉하고 기운이 없는 가엾은 아가다.
어린 새끼가 홀로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 어미와 함께였을 테고 사람 소리에 놀라 어미는 본능적으로 도망을 쳐서 주변에서 엿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새끼를 남겨두고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미의 본능을 어찌 버릴까. 사람이 없다면 제 새끼를 데려갈 것이다. 그러기를 바랐다. 우리는 일단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기다렸다. 두 시간이 지났을까. 남편이 나가보더니 고라니 새끼가 벽 쪽으로 두 뼘 쯤 옮겨 앉았단다.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니. 다행이다 싶었다.
다시 좀 더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내가 살금살금 나가보았다. 세상에! 일어서서 비틀비틀 걸어오는게 아닌가! 그것도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말이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암소가 새끼 낳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미가 혀로 새끼의 온 몸을 핥아 주면 송아지는 쓰러질 듯 하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 일어섰다. 그리고는 비틀비틀 한 걸음 한 걸음 걸음마를 했다. 그 송아지의 걸음과 닮았다. 고라니 새끼는 몸에 비해 다리가 길다.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하지만 쓰러지지는 않는다. 고라니가 걸어오고 있어요 걸어와 여보 빨리 와 봐요
남편은 급하게 신발을 끌며 우유가 담긴 그릇을 들고 나온다. 고라니 가까이 들이밀지만 안중에도 없다. 고라니는 다시 힘겹게 일어서서 넘어질 듯 고꾸라질듯 다리를 휘청거리며 서너발짝 걷더니 더 이상은 걸을 수 없다는 듯 자두나무 그늘로 들어가 웅크리고 앉는다.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터넷에 접속해서 고라니에 대해서 읽어보았다. 태어난지 얼마 안된 고라니 새끼는 연한 야채를 먹기도 한단다. 부랴사랴 상추밭에서 가장 연한 상추를 서너개 뜯어다가 앞에 놓아주었지만, 그것마저도 본체만체다. 아들이 어릴적 잘 먹지를 않아 애를 태울 때처럼 이 말만 되풀이한다. 야 먹어봐 먹어봐 조금만 조금만 응 내 안타까운 말에도 전혀 반응이 없다.
어쩌나 어쩌나. 인터넷을 다시 뒤져봤다. 동물 보호단체가 있어서 신고를 하면 데려간다는데 마침 하남시에 있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고라니 새끼가 제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신고를 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리라. 탁자 옆에 웅크리고 있던 고라니는, 자두나무 그늘에 눕더니, 잠시 뒤에는 큰 바위 옆에 눕더니 다음에는 언덕배기 아래쪽에 영산홍 그늘에 눕는다. 고라니가 움직인 동선을 연결해보면 조금씩 산 쪽으로 이동하는 모양세다. 이십여 분 뒤 다시 나가보니 없다. 없다. 주변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하면서도 걱정스러우면서도 다행이다 싶다.
한밤중이면 몰래 텃밭에 들어와서는 접시꽃 잎사귀며 옥잠화 잎사귀며 제 입에 맞는다 싶으면 인정머리 없이 바짝 잘라 삼키는 동물이 고라니다. 덫을 놓을까 라는 생각도 했으나 덫에 걸려 울부짖고 허우적대는 짐승을 어찌할 것인가를 놓고 나도 남편도 자신이 없어서 그만두었다. 고추잎이며 도라지잎이며 배추잎이며 가리는게 별로 없다. 먹을게 없으면 매화나무 밑둥에서 자라나는 새순을 싹뚝 잘라먹기도 한다. 우리는 궁여지책으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고라니의 긴 다리로 껑충 뛰어오르면 웬만한 높이는 다 넘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어느 해에는 울타리를 넘어 배추 싹을 싹쓸이 해 갔다. 토끼똥 같은 똥들만 오므르르 남겨놓고 사라지는 고라니는 얄미운 불청객중 불청객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고라니가 싹 먹어치워 텅텅 비어버린 땅은 할 일이 없었다. 빈둥거리며 여유롭게 여기저기 이집 저 집 기웃기웃 마실을 다녔다. 산책을 하였다. 고라니처럼 말이다. 다음과 같은 글이 나왔다.
고라니와 농부
밤새 고라니가 텃밭에 다녀갔다 푸른잎들 알뜰하게 서리해 가고 흙빛 여백을 남겨놓았다 무밭을 매줄 일도 근대를 수확할 일도 상추를 솎아낼 일도 없어졌다 비운만큼 채워진다 했던가 상추와 무우싹이 잘린 자리에서 퍼렇게 돋아나는 시간들 수북하다 야들야들하다 숲길을 산책 하고 이웃집에 들러 차를 마시고 들꽃과 나무와 새와 시냇물과 바람을 만났다 겅중겅중 온 동네에 발자국을 눌러 놓았다 앞니로 보드라운 시간을 사각사각 잘라 삼켰다 내일 아침 뒷간에는 고라니똥 닮은 똥들이 오므르르 쌓이겠다
그럼에도 이상한 일이다. 새끼는 그냥 아가로 보인다. 아군인지 적군인지조차 모르는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지닌 아가 말이다. 어미를 잃었으니 가엾고 측은하다. 어미 곁으로 꼭 돌려보내주고 싶어진다. 텃밭의 새싹들을 얄밉도록 말끔하게 잘라먹는 고라니의 새끼이지만, 아가는 아가다. 목숨은 목숨이다. 혹시나 하고 저녁이 되도록 고라니가 있던 장소를 여러차례 둘러봐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다음과 같이 추측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분명 어미가 가까이에 있었을 것이다. 위쪽 어디에선가 어미는 낮은 목소리로 새끼를 부르고 있었을 것이다. 어서 일어나 일어나 천천히 걸어와 넘어지지 말고 엄마 여기 있다 여기 있다 끊임없이 소곤거렸을 것이다. 젖을 먹이는 포유류의 자식에 대한 애착은 그리 쉽게 포기되는 본능이 아니다. 어미 고래가 죽은 아기 고래를 가슴에 받쳐 안고 바다 속을 유영하는 영상을 본 적도 있다. 원숭이가 목숨을 잃어 축 쳐진 아가를 끝까지 가슴에 안고 나무를 오르내리는 영상을 본 적도 있다. 어미는 절대로 포기하기 않았을 것이다. 분명 어미는 애끓는 가슴으로 새끼를 향해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새끼는 그 신호를 향해 제 힘껏 한 발 전진하고 잠시 쉬고 한 발 전진하였을 것이다. 둘은 만났을 것이다.
사흘 뒤 다시 그가 종자골에 갔고 나는 고라니 소식부터 물어보게 된다. 혹시 고라니 새끼 보이지는 않아? 다른 동물한테 공격을 받고 어디 구석에서 죽어있는 거 아냐? 차근차근 둘러보세요. 남편은 대답했다. 아니 여기 도착하자마자 샅샅이 찾아봤는데 없어 없어 어미 찾아간 게 분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