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관계도 그렇다. 관계의 묘미는 '밀당'에 있다. 소소하게는 남녀 사이의 단순한 연애사에서부터 사업상의 거래에까지. ‘밀당’이 관여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고난도의 '밀당'에 능통할수록 묘미는 극대화된다. 경직된 관계는 근육을 풀고 말랑해진다. 비례해 따라오는 이득도 크다. ‘밀당'에도 복병이 있다. 자존심이다. 유일신 자본주의가 보기에 그것은 하수의 자제다. 고수는 일보 후퇴 이보 전진을 위해 기꺼이 '존심'을 조절하는 영악함이 있다. 일보 후퇴가 가져다주는 손익계산에 빠른 것이다. 물론 하수에게도 깊은 뜻은 있다. '황새가 붕새의 뜻을 어찌 알리'. 그의 뜻은 물질과는 거리가 먼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한 푼의 이익에 '존심'을 팔기보다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는 일이 우선적 가치다. 굳이 '밀당'을 동원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의사가 없다.
'밀당'의 요령은 타고나지도 습득할 배짱도 없다. 가끔은 주제넘은 욕망이 키를 넘어 속이 들볶인다. 그뿐이다. 처세의 영민함도 붕새의 큰 뜻도 없다. 묻어가는 삶은 자주 우울하고 '존심'에 상처를 준다. 마지못해 받아들인 운명론의 바탕에는 체념과 비겁함이 깔려 있다. 허울은 번드레하나 내면은 허약하기 그지없다. '밀당'의 적절한 운용이 얼마나 리듬의 질감을 생동감 넘치고 풍요롭게 해주는가. 결국 운용의 묘라는 걸 깨닫는다. '밀당'이 쥐약이 되느냐 보약이 되느냐는 내가 대상을 어떻게 운용하느냐다. 살면서 겪었던 크고 작은 갈등의 근원도 내 안의 편협한 경직성이다. '밀당'은 분명 조율의 한 방편이다. 게임의 규칙만 지킨다면 충분히 미학적일 수 있다.
노혜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