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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Thoreau's birthplace, the Wheeler-Minot Farmhouse in Concord
[바닥에 풀이 자라는 평화와 화합의 물길]-콩코드 강
-콩코드 강은 이곳 주민들의 성격처럼 부드럽게 흘러간다.
이 강의 한 지류는 홉킨턴 남쪽에서 흘러나오고 , 또 한 지류는 웨스트보로의 한 작은 호수와 커다란 삼목늪지에서 흘러나와 홉킨턴과 사우스보르 사이를 흐르다가, 프레밍험을 거쳐 서드베리와 웨일랜드 사이를 흐르고- 여기에서는 서드베리 강이라고 부른다- 남쪽에서 콩코드로 흘러들어, 북서쪽 좀 더 먼데서 시작하는 노스라고도 하고 아사벳이라고도 하는 강과 합쳐져 북동쪽으로 흘러나가, 베드포드와 칼라일 사이를 지나 빌레리카를 거쳐 로웰에서 메리맥 강으로 흘러든다.
콩코드 강은 이곳 주민들의 생각처럼 부드럽게 흘러간다.
수백 마리 오리 떼가 쌀쌀한 바람 속에 불안하게 물결에 흔들리며 날아갈 채비를 하더니, 이제 퍼덕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드넓은 들판을 둘러보면서 그들이 언젠가 붓을 든다면 무엇을 쓸지 상상해 보라
나는 1마일에 8분의 1인치 정도의 높이 차이만 있어도 물이 흐르기에 충분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우리의 콩코드 강이 바로 그런 높이 차이에서 흐른다고 생각된다.
콩코드 강은 대체로 참나무류 숲이 군데군데 자라는 드넓은 벌판을 흘러가는데, 어찌나 크린베리 열매가 흔한지 어떤 곳에서는 이끼처럼 땅을 뒤덮는다.
나는 콩코드 강둑 위에 서서 모든 진보의 상징인 강물의 흐름을 바라보며, 우주의 시간과 모든 피조물이 따르는 같은 법칙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다. 강바닥의 물풀들은 물결의 바람에 흔들리며 부드럽게 하류로 몸을 굽힌 채 아직도 씨앗이 가라앉은 곳에서 자라지만, 머지않아 그들도 죽어 물결처럼 떠내려 갈 것이다. 자신의 처리를 개선하려는 바람도 없이 그저 빛나는 조약돌들, 나뭇조각들과 잡풀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성실히 이행하며 떠내려 오는 통나무들과 나무줄기들은 나에게 아주 묘한 흥미를 일으켰다. 드디어 나는 이 강이 나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든 그 물결의 가슴팍위에 띄워 보낼 결심을 했다.p20
[물고기들의 미덕을 사색하다] -토요일
-한적한 곳의 넉넉한 밤소리는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답다
우리는 남쪽을 바라보고 앉아 북쪽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볼스힐에서 칼라힐 다리까지 힘차게 노를 저으며 나아갔다.
[시간의 퇴적 속에 묻혀버린 인디언들 삶의 흔적] -일요일
1839년 8월 31일 토요일, 콩코드 토박이인 우리 두 형제는 마침내 이 강 하구에서 닻을 올렸다. 콩코드도 인간의 영혼뿐 아니라 육신이 들고나는 태양 아래 항구이다. 이 기슭도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 있건만 정직한 이들만이 기꺼이 집을 벗을 뿐이다. 아침부터 따사로운 보슬비가 내려 우리의 여행길이 늦춰질 성싶었는데, 오후로 접어들자 비가 개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면서 드디어 풀과 잎이 마르기 시작했다. 자연은 더 큰 계획을 이루려는 듯, 고요하고 신선해졌다.
우리가 배를 밀어 강에 띄우는 동안, 창포와 애기부들이 우리의 성공을 빌며 조용히 하류로 떠내려갔다.
우리가 올봄에 일주일 동안 공을 들여 만든 배는 어부들의 고깃배와 같은 모양새로, 길이가 15피트, 가장 넓은 폭이 3.5피트이고, 이 배가 아낌없이 자신을 바쳐야 할 초원과 하늘을 상징하여 밑은 녹색으로, 테두리는 파란색으로 칠해놓았다. 어제 저녁, 강에서 반마일쯤 떨어진 집 앞 텃밭에서 손수 키워 거둔 감자와 참외와 약간의 부엌용품, 그리고 폭포를 에둘러 갈 때 쓸 바퀴와 두 세트의 노, 강 얕은 데를 밀고 가기 위한 막대기 서너 개, 돛대 두 개를 배에 실었는데, 돛대 하나는 밤에 텐트 버팀목으로 쓸 작정이었다. 이제부터 얼마동안은 버펄로 가죽이 우리의 침대가 되고, 무명텐트가 우리의 지붕이 될 터였다.
몇몇 마을 친구들이 하류 쪽으로 튀어나온 벼랑에 서서 작별인사로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흔치 않은 모험에 나서는 이들에게 어울릴 만한 의식을 간소하게나마 치른 만큼, 보기만 할 뿐 말은 하지 않은 채 콩코드의 단단한 땅, 사람들이 모인 강가의 쓸쓸한 여름 풀밭을 지나 물살을 가르며 조용히 나아갔다. 곧장 멀리까지 나아가서는 우리의 엽총으로 작별인사를 했으니, 그들의 눈에서 우리의 모습이 사라질 때쯤 숲이 다시 메아리로 답해주었을 것이다.
곧 우리는 독립혁명의 최초 격전지를 지나 아직 물 밖으로 몸을 내놓은 노스브리지 기둥 사이에서 잠시 노를 뉘어놓고 쉬면서, 노스브리지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눈으로 강바닥뿐 아니라 나무와 하늘의 물그림자까지 보려면, 또 다른 눈의 의지로서 보다 자유롭고 추상적인 시야를 갖출 필요가 있다. 어느 대상이든 여러 겹의 시야로 볼 수 있으며, 아무리 흐릿한 물체라도 거죽에는 늘 하늘이 비치고 있음을 깨닫는다. 어떤 사람은 저도 모르게 이 대상에게로 눈길이 가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저 대상에게로 눈길이 가는 것이다.
물고기들은 예배당 가는 처녀처럼 서두루지 않고 찬찬히 움직였다. 금빛은빛 황어 떼가 하늘을 보러 물위로 올라왔다가 거무스름한 복도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움직이는 듯 쉬지 않고 서로 자리를 바꾸면서도, 여전히 투명한 막에 싸인 알들처럼 대열을 한 치도 흩뜨리지 않은 채 획 지나갔다.
우리가 그놈들을 강가로 몰아 떼어놓으려 하자, 재빨리 하나로 합쳐지더니 배 밑으로 빠져나갔다.
인디언들이 쇼샤인이라 불렀던 현재의 망령 든 늙은 발라리카이다. 나는 이 마을이 젊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여기를 보라. 자연이 썩어 문드러지거나, 농장이 온통 못 쓰게 되거나, 교회당이 세월과 함께 무너져 내린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 마을 초기 시절을 알고 싶다면, 저 목초지에 있는 늙은 회색 바위들에게 물어보라. 이곳에는 멀리 콩코드 숲까지 울려 퍼지는 종이 있다. 나도 그 종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아, 지금 그 종이 울린다. 처음 종이 종루에 걸렸을 적에 그 소리가 백인 농장을 넘어 숲 저편에까지 울려 퍼지면서 단꿈을 꾸던 인디언을 놀라게 하고, 그의 사냥 짐승들을 떨게 했을 것이다.
실제로 시골 살림에는 땅에서 나는 소출을 늘리고 철따라 과일을 따는 소박한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 하지만 영웅의 정신은 항상 더 먼 곳으로 더 험한 길로 나아가길 꿈꾸고, 땅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정원과 꽃밭을 가꾸며 짬짬이 견과와 물 과일을 모아 살림을 이어가거나, 물 과일처럼 무심히 과수원 과실을 모아 살림을 이어간다.
신화는 어떤 초인적 지능이 그림글자를 이용하여 인간 무의식에 있는 생각과 꿈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1839년 9월 1일(소로는 1817년생)이날 우리 또한 팀을 이루어 북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처지에 맞는 신을 모신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막연하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욕구를 갖고 있는데, 그래야 결국에는 자신에게 이로울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 종교라 부르는 것에서 고약한 냄새가 날 때가 있다.(p99)
언젠가 나는 뉴햄프셔 주에 있는 어느 고개를 넘어가다가 어느 교회당 마구간으로 불쌍한 짐승을 몰고 가는 성직자에게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안식일에 교회당이 아닌 어느 산의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미들섹스 성직자에게 일요일에 그의 성당에서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면, 그는 내가 자기 방식대로 기도하지 않는다며 또는 성직 임명을 받지 못했다며 거절할 것이다. 태양 아래에서 이와 같은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남태평양에서 고래잡이를 하는 뱃사람들이 더 참다운 교리를 말한다. 교회는 사람들의 영혼을 치료하는 병원과 같은 곳인데, 육체를 치료하는 병원만큼이나 사이비들로 넘쳐난다. 그곳에 가면 당신은 종교 불구자들이 따뜻한 햇볕을 쬐기 위해 길게 늘어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요양원이나 은퇴선원 휴양원의 연금생활자들처럼 살아간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들이 어느 날엔가 그 안에 병실 하나를 차지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즐거운 노동을 그만 두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가 임종을 앞둔 환자들을 기억하면서, 그 병실을 자신의 목표로 바라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 노 젓는 소리가 강 건너편 마을들에까지 울려 퍼진다.
우리는 정오 못 미쳐 파우툭케트 폭포 바로 위쪽 미들섹스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침착하고 너그러운 갑문지기가- 일요일이어서 그럴 의무는 없을 듯한데- 갑문을 열어주어 메리맥 강으로 들어섰다. 정직한 두 사람이 눈길을 나누듯, 우리는 그와 잠시 숨김없는 눈길을 나누었다. 두 사람의 눈의 움직임은 그들 사이에 쉼 없이 오가는 호의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 악한은 눈을 똑바로 마주보지 않는데 비해, 정직한 이는 자신을 알아달라는 듯 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눈이 마주쳤을 때 언제 눈길을 돌려야 할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몇 명 만나본 적이 있다. 이런 만남에서 진정으로 자신감 있고, 너그러운 이는 상대방보다 높은 자리에 서려는 이보다 훨씬 슬기롭다. 누가 더 끈질기게 바라보느냐로 승부가 나는 동물은 뱀뿐이다. 친구끼리는 서로 얼굴을 똑바로 보고 나서 무심히 볼 뿐, 그게 다이다.
즉시 우리와 그 사이에 좋은 관계가 맺어졌다. 서로 간단히 인사말만 주고받았지만, 그 갑문지기가 우리와 우리 여행에 관심이 있음이 뚜렷이 드러났다. 우리는 그가 고등수학을 좋아해서 어떤 거창한 문제에 골몰해 있음을 눈치 챘다. 우리는 그를 지나쳐가면서 우리의 짐작을 작은 소리로 주고받았다. 그가 우리에게 메리맥 강의 자유를 선물로 주었다. 이제 실제로 바다의 흐름에 배를 내맡긴 듯 느껴졌고, 드디어 메리맥 강물 위에 떠 있음을 알고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노를 저으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무리 못해도 말이 끄는 튼튼한 써레 하나와 깨지지 않는 화덕 하나, 그리고 건강한 책 몇 권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한다.
-가장 매력적인 글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 진솔한 글이다.
가장 매력적인 글은 지혜가 가득 담긴 글이 아니라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 진솔한 글이다. 말하는 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안다는 듯, 탁 터놓고 잘라 말하기에, 슬기로운 글은 못 된다 해도 적어도 확실히 터득된 글이기는 하다.
짧은 겨울 해가 지고 어둠이 오기 전에 패서 묶어내야 할 장작들이 많이 쌓여 있는 작가를 상상해보라. 그는 일터에서 쓸데없이 춤을 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시간을 아껴 굳은살이 박인 투박한 손으로 도끼를 들어 장작을 내리찍는 소리가 찌렁찌렁 숲을 울릴 것이다. 이렇게 일하는 투박한 손에서 나온 그의 글들은 도끼 소리가 잦아들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독자들의 귀에 쩌렁쩌렁 울릴 것이다. 학자는 손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강인한 진실을 쓰기 위해 애써야 한다.
-자연에 귀 기울인 책이 진실하다.
대부분의 학자는 몸소 겪는 일조차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가령 얼마간이라도 진지하게 자연을 말할 수 있는 사람조차 극히 드물다.
모름지기 좋은 책이란 남의 말을 흉내 내서는 안 되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야깃거리 자체가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아무리 날씨가 맑더라도 또다시 빛이 들어갈 여지는 있는 법이다. 그렇더라도 그 덧붙여진 빛이 그날의 날씨를 훼방 놓지 않듯, 어떤 주제를 고르든 진실한 책이 쓰여질 여지는 언제나 넉넉히 남아 있는 법이다.
- 인디언의 삷 의 흔적이 흠뻑 배어 있는 워카서크 섬
[정오의 철학을 즐기는 시간 ] 월요일
심장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주머니에는 뱃삯을 치를 방법도 간직한 훌륭한 종교인들이다.
우리는 가끔씩 단풍나무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참외 한 덩이를 쪼개 나눠먹고 기운을 되찾으면서, 강물과 인생의 흐름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다. 나뭇가지와 잎이 떠가는 모습과, 온갖 물체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이 강물 위 멀리 도시와 시장에서는 여전히 똑같은 일상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시인이 이야기하듯, 사람의 일에도 어떤 흐름이 있으니 모든 것은 흐르기에 다시 돌아오고, 밀물이 있으면 썰물이 있게 마련이다.
노인들은 삶을 되돌아보지, 앞날을 점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오늘과 앞날을 자유로이 뒤섞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노인들은 해가 저물자마자 어둠 속에서 쉴 생각부터 한다. 그들은 밤과 잠을 위해 생각에 잠길 뿐, 다음날 아침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해밝은 삶의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이나 하루가 저물길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그와 같은 희망이나 바람은 갖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인가? 행함이란 무엇인가? 맡겨진 의무란 무엇인가?
결국 삶의 실상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몸소 하는 일들이란 아주 하찮은 것들이다. 나는 이 메뚜기의 노랫소리를 듣기 위해 모든 일을 뒤로 미룰 수 있다. 내가 겪은 일 중에서 가장 찬란히 빛나는 것들은 내가 무엇을 했거나 하고자 작정한 일이 아니라, 내가 간직한 어느 한순간의 생각, 비전, 꿈이다. 나는 하나의 참된 비전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의 온갖 부, 온갖 영웅들의 온갖 행위까지도 기꺼이 치르겠다.p187
[뱃길 따라 정착민의 삶과 애환을 엿본다] 화요일
우리는 동틀 기미도 보이지 않는 한밤중에 땔감을 구하러 손도끼를 들고 밖으로 나가 아직 꿈꾸며 자는 나무들을 쳐서 쩌렁쩌렁 울게 했다.
메마른 식물들이 바람에 날려 쌓인 눈에 파묻히듯, 모래에 반쯤 파묻힌 채 서 있다.
바닷가에서는 몇 마리 검둥오리와 쓸쓸한 돛단배 한 척만이 경치의 단조로움을 깨트린다. 몇 마일을 걸어도 주변 언덕들보다 뾰족한 모래언덕 하나와 말뚝 하나만이 경계표로 눈에 들어오고, 음악으로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소리와 해변에 사는 새들의 음산한 울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우리가 크롬웰 폭포에서 기다리는 동안, 운하용 짐배 몇 척이 갑문을 지나갔다. 한 배의 이물 쪽에 억센 뉴햄프셔 남자가 모자는 쓰지 않고 셔츠와 바지만 입은 채 돛대에 기대 서 있었는데, 저 광활한 산지의 고장에서 바다까지 내려온 거친 아폴로와 같은 사람이었다.
예의가 있고 없고를 따지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어떤 이들은 겉으로 드러난 태도가 아주 거칠어서, 나무에 빗대자면 거친 나무껍질만 있고 무른 고갱이나 백목 질은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때때로 나그네에게 무뚝뚝하다고 일컬어지는 우락부락한 사람들, 산악길가에 사는 아마존의 아이들을 만나곤 한다. 그들의 인사는 상대편 손을 움켜잡는 억센 손만큼이나 거칠고, 늘 예사로 대하듯 사람들을 대한다. 하지만 그들도 개간지를 넓혀 더 많은 햇빛을 받아들이거나, 많은 물자가 오가는 들판이나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언덕 남쪽 기슭으로 옮겨가 거친 고기와 도토리는 덜 먹으면서 낟알을 위주로 살아가기만 해도 충분히 도시 거주민처럼 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우화에 나오는 시타로스 못지않게 무례했다. 하지만 나는 묵묵히 그가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었고 - 내가 왜 자연과 다툴 필요가 있겠는가? - 심지어 이런 특유의 자연 현상을 알게 되어 기뻤다. 나는 그를 예법에 무관심하고 거칠지만 나름대로 어떤 유쾌함을 지닌 사람으로 대했다. 나는 자연에게 캐물을 생각은 없었고,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자신으로서 그를 알고 싶었다. 나는 동정, 친절, 사교가 아니라 새로운 체험과 모험을 위해 여기에 온 것이고, 여기에서 자연이 무엇을 낳았는지 알기 위해 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그의 무례에 발끈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들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오랜 세월 이어져온 드라마의 어느 한 장을 읽듯, 그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법을 익혔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거칠고 물질적이어서 앞서 말했듯 무례한 사람이었지만, 단지 자연과 싸우고 인류와 싸우는 자신의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언짢음에는 어떤 인위적인 겉치레 같은 것은 없었다. 근는 분명 흙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그 안에 질 좋은 흙도 들어 있고, 그 밑바닥에는 인내심 강한 색슨족의 성실함도 들어 있었다. 누군가가 그에게 참모습을 말해준다면, 어떤 붉은 인디언처럼 색슨족이 자기 안에서 죽어 없어지도록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운하용 짐배는 선체용 목재가 거의 필요 없을 정도로 구조가 무척 단순해서 200달러 정도만 내면 어렵지 않게 만든다고 한다.
한 번에 열대여섯 단의 나무 묶음이나 수천 장의 벽돌을 싣고 내려오고 ~~~~ 콩코드와 찰스타운을 오가는데 2~3일 가량 걸린다.
다다선원들과는 달리 강의 경치가 끊임없이 변해 단조로운 노동을 달래준다. 그들의 주택 자체가 옮겨 다니는 것이기에, 갖가지 세간을 싣고 마을에서 마을로 소리 없이 나아간다. 마치 여행객들은 덜컹거리는 아주 자그마한 배를 탄 셈이어서 위트와 유머를 한껏 즐길 수 없는 데 비해, 이들은 한결 쉽고 편하게 주민들에 대해 논평할 수 있다. 또한 메인 주의 제재업자와는 달리 날씨가 어떻게 바뀌든 몸 대부분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며, 옷이 약간 거치적거리기는 해도 머리와 발만 내놓은 채로 참으로 건강에 좋은 산들바람을 들이마신다.
고개를 돌리면 1마일쯤 떨어진 곳에서 그들이 악어처럼 강가를 따라 은밀히 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우정은 인생을 깊게 감싸주는 신비요 비밀이다] -수요일
우리가 해뜨기 전 이곳 바위 많은 강가에서 배를 띄울 때, 강가의 천재인 작은 알락해오라기 한 마리가 우리를 눈여겨보면서도 침착하게 강 가장자리를 따라 어슬렁거리며 먹을거리를 찾아 진창을 뒤지고, 방수코트 입은 조난선 구조원처럼 물결에 밀려온 달팽이나 새조개를 찾아 젖은 돌들 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드디어 그가 흐느적거리며 날아갔다. 오리나무 틈새로 보이는 25평방미터쯤 되는 깨끗한 모래밭이 그의 발을 유혹하기까지 그는 그렇게 꾸준히 날아갈 것이다. 우리가 기회를 틈타 살금살금 다가오므로, 그는 새로운 은둔처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땅이 끈적끈적하고 무를 때 땅 위를 걸었을 침울하고 망상하는 이런 날짐승한테서는 존경할만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그는 이렇게 한 다리로 서서 흐릿한 눈으로 햇빛과 비, 달과 별을 오랫동안 넉넉히 겪어봤음에 틀림없다! 괴어 있는 웅덩이와 갈대, 축축한 밤안개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이런 시간에 홀로 그렇게 활짝 열고 바라보는 그 눈, 무디고 누르스름하고 풀빛을 띤 그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은 꽤나 가치 있는 일이다. 나는 아직 내 영혼을 본 적이 없으나. 정년 밝은 풀빛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알락해오라기 여섯 마리가 강 얕은 물가에 모여 목과 몸통으로 할 모양을 지으면서 머리를 통째로 물속에 담그고 부리로 먹을거리를 찾아 진흙바닥을 찌르며 서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20여 년 전 베드퍼터에서 찰흙이 많이 나는 농장을 소유한 무어라는 사람이 로웰의 건립자들과 2년 내에 8백만 장의 벽돌을 공급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는 1년 만에 계약을 이행했고, 그때 이후로 벽돌이 두 마을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섬은 작은 대륙이라 상상력을 즐겁게 자극한다. p320
강줄기를 따라 흩어져 있는 작은 집들 대부분이 1마일 넘게 이어지는 골짝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기슭 가까이에서 노를 저을 때면 때때로 암탉이 꼬꼬댁하고 우는 소리나 가축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와 집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이날 오전에 쇼트 폭포와 그리피스 폭포 사이에 있는 숲이 울창한 한 섬을 지나쳐갔다.
우리가 여행할 당시만 해도 맨체스터는 2천 명 가량의 주민이 사는 마을이었다.
-인디언과 초기 정착민 사이 싸움의 흔적들 p332
구킨은 그가 어쩌면 민수기 23장 23절에 ‘야곱을 칠 마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꺾을 술법도 없다’고 말한 발람이 지녔던 그런 정신을 지녔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맨체스터는 두 번에 걸친 전쟁의 영웅이자 세 번째 전쟁에서도 살아남은 존 스타크가 살던 곳으로
잠시 후 운하용 짐 배 몇 척이 4분의 1마일쯤 간격을 두고 가벼운 실바람을 받으며 하나씩 훅세트 쪽 상류로 올라가 어느 한 점을 넘어 사라져갔다.
우리는 벗과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고 나서도, 슬기롭고 다정한 말보다는 자신에게 기억나는 쌀쌀한 낯빛이나 생각 없이 한 행동을 거듭거듭 되새겨보곤 한다.
내가 겪은 바에 따르면, 좋은 벗과 대화를 나누더라도 개개인을 이야깃거리로 삼게 되면 으레 메마르고 하찮은 사실이나 이야기하게 된다. 개개인의 인격을 들어 말하기 시작하면, 그 즉시 우주가 파산한 것처럼 여겨진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헐뜯기로 기울기 쉽고,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이야기의 테두리는 더욱더 좁아진다.
- 벗이란 넓은 바다에 떠다니는 아름답고 자그마한 야자수 섬과 같다p343
누구에게나 우정은 지나고 나면 덧없는 것으로, 지난 여름철에 먼 하늘을 밝히던 번개처럼 희미하게 생각나기 마련이다. 이처럼 우정은 아름답지만 획 지나고 마는 여름철의 구름과 같다. 하지만 가뭄이 오래가더라도 대기 중에는 늘 수증기가 남아 있는 법이고, 봄 소나기까지 있지 않은가. 그 흔적은 정녕 사라지지 않기에, 그것이 이따금 우리 주위를 감돈다. 해와 달처럼 오래되고 친숙한 것이지만 언제나 같은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법칙이 있어 다시 찾아올 것이 분명하기에 식물이 자라나듯 수많은 모습으로 움터온다. 그 본질을 경험하기란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것은 맑고 고요한 날에 반짝이는 양털구름처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시각을 속이는 일 없이 마법에 의해서인 듯 조용히 몰려온다. 벗이란 뱃사람들을 교묘히 피해 태평양 넓은 바다에 떠다니는 아름답고 자그마한 야자수 섬과 같다. 그는 적도 근처에서 부는 강풍, 산호초와 같은 많은 위험과 맞서고 나서야 항구적인 무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세찬 비바람을 뚫고, 더욱이 대서양 성난 물결까지 헤치고 나가 금욕하는 사람이 틀어박힌 바닷가에까지 이르려 하겠는가? 그러니 여전히 이렇게 희미한 전통에 매달려 상상해볼 밖에.
우리가 거짓된 사람만 대한다면, 결국에는 진실을 말하는 법도 잊고 만다.
아무튼 우정은 완전히 대등한 사이에서 생겨난다. 친구 사이가 되기 위해서는 의무나 이득이 대등하다는 외적인 표시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귀족은 자신이 부리는 하인을 친구로 사귈 수 없고, 왕은 신하를 친구로 사귈 수 없다. 양 당사자가 모든 점에서 대등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정과 관련되어 있거나 영향을 미치는 모든 면에서 그러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쪽의 사랑은 또 다른 쪽의 사랑과 빈틈없이 균형이 맞아야 하고, 또 그것에 의해 나타나야 한다. 개개인은 신의 감로를 담은 그릇일 뿐이고, 유체정역학의 역설이 사랑의 법칙에 대한 상징이다.
나는 어떤 벗이 값싸게 오래 얼굴을 익혔을 경우에나 허물이 덮어질 그런 버릇없는 행동을 했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조차 없이 여전히 다정한 어조로 내게 말을 걸어왔을 때, 이제까지 벗과 맺은 관계에서 가장 쓰라린 업신여김을 느꼈다. 당신의 벗이 당신의 나약함을 너그러이 대하는 법을 배워 결국 사랑의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세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우리는 벗을 꽤나 허물없이 대해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욕되게 할 때가 드물지 않다. 그럴 때는 차라리 종교적 고독과 침묵으로 물러남으로써 고결하게 사귈 마음가짐을 갖추는 편이 낫다. 벗과의 사귐에서 침묵은 아주 향기로운 밤으로, 그 안에서 진심이 되돌아오고, 더 깊숙이 뿌리를 내린다.
우정은 서로를 이해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당신은 내가 자신보다 뒤떨어지는 벗이기를 바라서 나를 알고 싶어 하는가? 게다가 어떤 사람이 내게 각별한 감정을 품었다고 생각할 권리가 내게 있는가 말이다. 우정은 계속해서 증명을 필요로 하는 기적이다. 우정은 감동을 주는 무언의 행동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가 상상하는 만큼, 심지어 네가 믿는 그대로 너와 관계를 맺을 것이다. 나는 네게 진실을, 즉 나의 모든 부를 바칠 것이라고. 그리고 벗은 말없이 자신의 본성과 삶으로 그 행동을 받아들이면서, 마찬가지의 거룩한 정중함으로 나를 대한다. 나의 벗은 나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남김없이 잘 안다. 그는 사랑의 증표를 바라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관계의 특징으로 사랑인지 아닌지 가릴 수 있다. 그가 찾아올 때 지나치게 그의 체면을 살펴줄 필요는 없다. 내가 오라고 청할 때까지 기다리지는 말아다오. 하지만 내게로 올 때는 내가 당신을 기꺼이 맞이하는지 살펴다오. 찾아와달라고 하면 그 때문에 당신이 곤욕을 치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벗이 있는 곳에는 갖가지 부와 마음을 끄는 물건이 있고, 그와 나 사이에는 어떤 걸림돌도 있을 수 없다. 어떤 경우라도 내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은 없게 해다오. 우리의 사귐이 우리보다 온전히 높은 곳에 있어 우리를 그리로 끌어올리게 해다오.
우정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뜻이다. 우정은 언어 위에 있는 지성이다. 사람들은 벗과는 혀가 풀릴 때까지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생각을 머뭇거리지 않고 다 털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체로 내가 겪은 바에 따르면, 우정은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서로를 아는데 불과한 사이라면 서로 오 갈 때마다 미리 준비된 말이 있지만, 호흡이 바로 생각이자 뜻인 벗이 변변찮은 말을 어떻게 입 밖에 내야 한단 말인가? 당신이 여행을 떠나는 벗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간다고 상상해보자. 당신은 그와 악수 나누는 일 말고 다른 어떤 외적인 표정을 알고 있는가? 그를 위해 어떤 수다를 준비해 놓았단 말인가? 어떤 아첨을 그의 주머니에 넣어줄 것인가? 그를 통해 특별히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라도 있단 말인가? 아니면 당신도 가끔 깜빡 잊은 적이 있다는 듯, 전에 미처 하지 못했던 어떤 말을 그에게 할 터인가? 그렇지 않다. 그의 손을 잡고 ‘안녕’ 하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당신이 자주 잊어먹고 하지 못하던 인사로 충분하다. 이 점에서는 관습이 우위에 있다.
사랑의 폭력은 증오의 그것만큼이나 무섭다. 사람이 계속 이어지려면 조용하고 한결같아야 한다.
사람이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성문을 여는 것에 못지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 가장 좋은 사이는 침묵 깊은 곳에 있는 사이이다
우정에서 단 한 가지 위험은 언젠가는 끝이 날지 모른다는 점이다. 우정은 토박이식물인데도 무척 민감하다. 자신의 자아마저도 잘 깨닫지 못하는 그런 조그마한 비열함에도 상처를 입는다.
[배에서 내려 땅을 거닐다] -목요일
강 서쪽으로는 운칸누누크 산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배로 여행할 수 없었다. 이 빗속에서 몇 시간만 더 가면 마지막 갑문에 이를 터이나, 우리의 배는 너무 무거워 이 비로 무수히 생겨났을 기다란 여울들을 헤쳐 나가는 일이 불가능했다.
독버섯과 방황하는 개구리, 가문비나무에 꽃 줄처럼 걸려 있는 이끼와 나뭇잎 밑으로 조용히 날아가는 개똥지빠귀를 보고 걸으면서, 젖은 진흙과 소나무의 향기 보이지 않는 폭포의 울림소리에 격려를 받았다.
- 야생 자원에는 인간이 가꾼 품위보다 더 훌륭한 품위가 들어 있다.
해가 떴다가 지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페미그와세트 강을 따라 굽이치는 길- 여행의 수레바퀴들이 먼지를 일으키는 길이라기보다는 수달과 담비가 걷는 오솔길이자 비버가 질질 덫을 끌고 갈 것 같은 축축한 숲길을 걸었다. 이곳에서는 마을이 그저 땅을 한데 이어주는 섶의 구실만 했다. 우리 머리 위에서는 야생 비둘기가 죽은 소나무 가지 위에서 울새 크기로 몸을 오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맑은 날과 흐린 날 며칠간에 걸쳐 고향의 강이 지류로 흐르는 강을 따라 올라와, 그것이 마침내 메리맥 강에서 페미그와세트 강으로 변해 우리 옆에서 튀어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p410
우리가 일주일 후에 훅세트로 되돌아왔을 때는 텐트와 버펄로 가죽을 말리려고 잠시 광을 빌려 썼던 수박밭의 농부가 아낙네들과 아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흡 열매를 따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수박밭에서 바닥짐용으로 가장 커다란 수박 한 통을 샀다.
우리의 배는 운칸누누크 산 아래 은닉처에서 아무 탈 없이 잔잔한 바람과 물살에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정오경부터 귀향길에 나서 마음 편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강이 구부러지면서 시야를 가릴 때는 직선 유역의 마지막 자취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우리는 산들바람과 노의 도움을 받아 이내 아모스키그 폭포와 피스타쿼아그 강에 이르렀고, 상류 쪽을 바라보고 앉아 빠르게 내려가면서 수많은 아름다운 강둑과 작은 섬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후의 해마저 멀리까지 나아가고, 여유롭고 신선한 바람이 강 위로 불어와 잔물결이 길게 뻗어나가며 반짝였다.
- 우리는 실제 사실보다 더 뛰어난 이야기를 하지는 못한다.
내 어머니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네 번째 노파는 콜롬버스에게 젖을 먹였고, 아홉 번째 노파는 후일 왕위에 오르는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를 품에 안고 키웠으며, 열아홉 번째 노파가 성모 마리아이고, 스룸 네 번째 노파가 쿠메이의 무녀이며, 서름 번째 노파는 트로이 전쟁이 벌어질 당시 살아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헬렌이고...
우리는 실제 사실보다 더 뛰어난 이야기를 하지는 못한다. 일부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어떤 경우에도 순전히 이야기를 꾸며내지는 못한다. 소설이라도 참다운 작품을 쓰려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설명하기 위한 여유로움과 자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상식은 겉에 나타난 가벼운 뜻만 취하므로, 실체를 참답게 일러주는 보고는 정말 보기 드문 시편들이다.
나는 괴테의 작품을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작가로서의 그의 뛰어난 면모는 사물을 자신에게 나타낸 대로, 느낀 대로 정확히 그려내고 만족스러워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괴테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근처에서 나고 자란 농부들마저 내가 들려주는 찬사를 직접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를 바라보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있는 그대로 또렷하게 그려내면서, “나는 어떤 것도, 수백 년 동안이나 담벼락을 장식해온 담쟁이덩굴조차 덧붙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p423
열등한 정신이라도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퍽 값진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으로 가난한 이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만 하소연하듯 적는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이들은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고 자신이 그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는지 적는다.
무엇보다도 괴테는 모든 이에게 애정 어린 선의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암상스런 말은 물론이거니와, 경솔한 말조차 단 한 번도 적은 적이 없다.
- 자연법칙이 깨뜨리는 예술규칙
괴테는 브레너에서 베로나로 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아디제 강은 더욱 잔잔히 흘러 곳곳에 넓은 모래밭을 만들어놓았다. 강 근처 땅과 언덕에는 포도나무, 옥수수, 뽕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모과나무, 호두나무와 같은 많은 나무들이 어찌나 빽빽이 들어차 있는지, 서로 숨통을 조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
[여름에 잠들어 가을에 깨어나다] -금요일
새벽녘에 찾아낸 보트는 우리가 놓아둔 그곳 가을 강가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양 온통 이슬에 젖은 채 차갑게 누워 있었다.
5시가 되기 전에 안개 속으로 배를 밀어 넣고 배 안으로 뛰어 들어가 한 번 노를 젓자 눈앞에서 강가가 사라졌다. 우리는 바위들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 따라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내 소우헤건 강어귀와 메리맥 마을을 지나쳐갔다.
우리는 첫 가을바람의 한숨소리를 들었고, 강물조차 잿빛이 짙어져 있었다.
- 시인은 장애물이 클수록 더욱더 큰 힘을 낸다.
상류 쪽에서 꾸준히 바람이 불어왔으므로, 우리는 돛을 활짝 펼치고서 오전 내내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이른 아침부터 정오까지 줄곧 강을 따라 내려갔다.
붙박이인 기슭은 우리를 한 번도 외면한 적 없이 여전히 생겨난 그대로 비탈져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기슭을 못 본 체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매우 드문 소질을 타고난 사람이 소질에 어긋나는 세상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일이야말로 ㅈ어말로 귀한 것을 허투루 쓰는 낭비이다.
시인은 뛰어난 뱃사람처럼 빠르게 바뀌는 바람도 타고 갈 수 있고, 장애물이 클수록 더욱 더 큰 힘을 낸다.
돌풍이 부는 이렇게 으스스한 날씨에 강기슭에서 윙윙거리는 참나무와 소나무에서 우리는 그리스보다 북쪽에 있는 나라들과 에게 해보다 쌀쌀한 바다를 떠올렸다.
- 나는 메리맥 강기슭을 소유한 지주이다
우리가 바람보다 빠르게 나아감에 따라 배꼬리 밑에서 강물이 용솟음치는 동안, 마음속에서는 가을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우리 곁을 스치는 강가보다는 한 해의 흐름을 얼마쯤 가늠해보면서 늘 계절이 일깨우는 흥미로운 연상과 느낌을 살펴보는 데 골몰했다.
이렇게 공기가 깨끗한 곳에서 보면 농부가 쟁기질하고 농작물을 거둬들이는 일이 무척 아름답게 보이지만, 농부 자신은 그런 아름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이 강기슭 땅을 1에이커도 갖지 않았기에 강기슭 전체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 우리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이 세상의 값어치를 제대로 아는 이는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일 것이다. 가난한 부자! 그에게 속한 ㄱ서은 무엇이든 그가 사들인 것이다. 내게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나는 메리맥 강기슭을 소유한 최대 지주이다. p453
나는 내 생각이 바뀌었음을 느낄 때면 내가 알던 바위들을 찾아가 그 위에 앉아 그곳 이끼를 살펴보고 아직 예전 그대로인지 보고 싶어진다.
뉴햄프셔 주 경계를 지나 두 개의 강둑에 높다랗게 가지런히 뻗은 말굽계곡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가을의 꽃들 -쑥부쟁이, 미역취, 서양톱풀, 블루걸스, 그리고 수수한 길가 꽃들과 여전히 망설이는 초롱꽃들과 버지니안렉시아를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강둑으로 올라갔다.
겨울이 오길 기다리는 늦게 피어나는 꽃들도 나름대로 어떤 중요성을 지녔다. 10월 말이나 11월에 꽃이 피는, 원혼의 머리카락이나 작은 장식 리본을 닮은 각진 가지와 꽃잎을 제멋대로 매단 조롱나무의 모습에는 뭔가 마녀 같은 분위기가 있다. 다른 나무들이 꽃은 물론 잎마저 떨어뜨리는 이런 파격적인 시기에 꽃을 피우는 것 역시 마녀의 솜씨처럼 보인다. 사람이 만든 정원에서는 전혀 꽃을 피우지 않는 것이 틀림없다. 초롱나무가 자라는 언덕에는 온전한 요정의 나라가 있다.
- 여행자는 하늘에서 늘 새로운 것을 발견 한다
우리는 한 손으로는 귀향을 축하하기 위해 사놓은 농가에서 만든 작은 애플파이를 반쪽씩 들고서, 또 한 손으로는 그것을 쌌던 신문조각을 들고서 여러 맛이 나는 파이를 게걸스럽게 먹고, 배를 띄운 이후 일어났던 사건 소식들을 읽으면서 돛을 세우고 세찬 바람을 받으며 빠르게 킹스보로와 첼름스퍼드를 지나쳐 갔다.
동쪽으로 35마일을 더 가면 바다에 닿는 미들섹스 바로 위 크게 굽어지는 곳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바람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콩코드 강의 자연은 가을이라는 자신의 시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자신이 겪은 일보다 더 아름다운 일을 상상해낼 수 없다.
오후 느지막이 첫날 텐트를 쳤던 꽃 피는 향기로운 언덕들에 둘러싸인 부드러운 강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며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들판 가까이로 다가가자, 남서쪽 지평선에서 고향의 하늘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숲이 우거진 언덕 가장자리로 막 해가 지고 있었다.
-침묵을 통해서만 계시, 통찰,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지금까지 침묵을 깨우려 애써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영어로는 침묵을 깨울 수 없다. 인간은 6천 년 동안 저마다 자신의 사랑을 다해 침묵을 옮겨보았으나, 침묵은 아직도 알 수 없는 신비로 남아 있다. 한동안은 침묵을 움켜잡아 그녀와 진탕 이야기할 날이 오리라 생각하면서 대담하게 달려갈지 모르나, 그런 이도 결국에는 침묵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가 처음에 얼마나 용감하게 그 길에 나섰는지에 온통 주의를 기울인다, 하지만 그가 마침내 침묵에 빠졌을 때는 이야기하지 않은 것에 ㄱㅇㄴ주어 이야기한 것은 정말 너무 하잘것없는 것이어서, 그가 사라진 거리 겉면에 생긴 거품에 불과해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저 중국 벼랑제비들처럼 우리의 둥지를 거품으로 덮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니, 어느 날 그 거품이 바닷가에 사는 생명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p502
우리는 이날 바람과 노의 힘만으로 50마일을 달려왔고, 저녁이 깊어진 지금 우리의 배는 고향 항구의 애기부들들을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 배의 용골은 콩코드 진흙을 알아보았는데, 이곳에 누워 있는 창포에는 우리 배의 용골 윤곽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우리가 떠난 이후로 아직 몸을 일으켜 세운 창포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즐거이 강가로 뛰어내린 다음 배를 끌어올려 야생사과나무에 붙들어 맸다. 그 나무줄기에는 녹이 슬고 닳다가 봄철에 큰물이 질 때 결국 쓸려 나간 우리 배의 사슬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 [Review]
콩코드 토박이인 소로우는 1839년 스물세 살 때 형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콩코드 캉을 따라 일주일간을 여행했다. 이 책[소로우의 강: 강에서 보낸 철학과 사색의 시간]은 그 후 십년이 지난 1849년 에 출판된 것으로 소로에게는 처녀작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요 문인인 소로우는 하버드 대학을 다닐 때 동향인 ‘에머슨[Emerson, Ralph Waldo:철학자. 시인]’을 만나서 당시 보스톤과 콩코드를 중심으로 번창한 초월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 책에는 물질주의와 합리주의를 초월하여 오직 내면의 영적 상태에 집중하는 소로우만의 독특한 자연에 대한 관찰과 그의 철학적 사상이 들어있다. 시인과 천문학자와 종교와 우정 그리고 지명과 얽힌 개척시대의 다양한 이야기들도 있다. 때로는 독자도 그 강을 따라 내려간다는 착각이 들만큼 풍경의 사실적인 묘사에 빠져 들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런 풍광조차 남아 있지 않을 먼 옛날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이 출판될 당시 소로우는 왕성한 문필작업에 몰두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월든’은 2년(1845~1847년) 동안의 월든 호숫가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책으로 1854년 에 출판되었고, 1846~1856 십년간에 걸 처 미국 메인주에 있는 벵고어에서 페놉스코트 강을 거슬러 올라 캐나다의 국경까지 다녀오는 여행을 3차에 걸쳐 여행하고 기록한 ‘메인 숲’도 오늘날까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책이다.
소로우의 문체는 서정적이면서 동시에 비유적이다. 혼자 조용히 생각하기를 즐기는 여행자이자 사람들에게 인생과 세상의 의미를 전하고자 하는 설교자이기도 했다.
“나는 콩코드 강둑 위에 서서 모든 진보의 상징인 강물의 흐름을 바라보며, 우주의 시간과 모든 피조물이 따르는 같은 법칙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다. 강바닥의 물풀들은 물결의 바람에 흔들리며 부드럽게 하류로 몸을 굽힌 채 아직도 씨앗이 가라앉은 곳에서 자라지만, 머지않아 그들도 죽어 물결처럼 떠내려 갈 것이다. 자신의 처리를 개선하려는 바람도 없이 그저 빛나는 조약돌들, 나뭇조각들과 잡풀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성실히 이행하며 떠내려 오는 통나무들과 나무줄기들은 나에게 아주 묘한 흥미를 일으켰다. 드디어 나는 이 강이 나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든 그 물결의 가슴팍위에 띄워 보낼 결심을 했다.”<본문>
신앙에 있어서는 초월주의의 영향을 받아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범신론자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엄격한 종교적 교리에 따라 도덕, 주일성수, 금욕주의적 칼뱅주의를 주창하는 청교도적 신앙인들에 대해서 약간은 냉소적인 입장이었다.
“언젠가 나는 뉴햄프셔 주에 있는 어느 고개를 넘어가다가 어느 교회당 마구간으로 불쌍한 짐승을 몰고 가는 성직자에게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안식일에 교회당이 아닌 어느 산의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다.”<본문>
이 책에서 소로우는 그의 말처럼 강을 따라 가며 일어난 일들만 하소연하듯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일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고 자신이 그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보았는지를 연달아 적어놓았다. 강기슭이 한 결 같이 비탈져 있는 모습을 보고 소로우의 생각은 어느새 그것을 시인의 타고난 소질로 비유하며 일리아스를 쓴 [호메로스]와 고대 켈트족의 전설적인 시인 [오시언]의 글로 이어진다.
“여기저기 놓인 원뿔꼴 돌탑 위에서 발끈한 왕들이 방패를 앞에 놓고 떠도는 별을 길안내 삼아 서쪽으로 가는 찬란한 반짝임을 본다. “<본문>
이 여행 후 3년이 지난 1842년 소로우에게는 친구요 정신적인 지주와 같았던 형(존. 소로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 책 속에서도 인생의 허무에 대한 감정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결국 삶의 실상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몸소 하는 일들이란 아주 하찮은 것들이다. 나는 이 메뚜기의 노랫소리를 듣기 위해 모든 일을 뒤로 미룰 수 있다. 내가 겪은 일 중에서 가장 찬란히 빛나는 것들은 내가 무엇을 했거나 하고자 작정한 일이 아니라, 내가 간직한 어느 한순간의 생각, 비전, 꿈이다. 나는 하나의 참된 비전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의 온갖 부, 온갖 영웅들의 온갖 행위까지도 기꺼이 치르겠다.”<본문>
왕성한 활동을 하던 소로우는 1862년(44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소로우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여동생 소피아에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동생의 낭독을 듣다가 소로우는 "이제야 멋진 항해가 시작되는군"이라고 중얼거린 뒤 잠시 후 숨을 거뒀다고 한다.
"나는 지금까지 침묵을 깨우려 애써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영어로는 침묵을 깨울 수 없다. 인간은 6천 년 동안 저마다 자신의 사랑을 다해 침묵을 옮겨보았으나, 침묵은 아직도 알 수 없는 신비로 남아 있다. 한동안은 침묵을 움켜잡아 그녀와 진탕 이야기할 날이 오리라 생각하면서 대담하게 달려갈지 모르나, 그런 이도 결국에는 침묵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가 처음에 얼마나 용감하게 그 길에 나섰는지에 온통 주의를 기울인다, 하지만 그가 마침내 침묵에 빠졌을 때는 이야기하지 않은 것에 견주어 이야기한 것은 정말 너무 하잘것없는 것이어서, 그가 사라진 거리 겉면에 생긴 거품에 불과해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저 중국 벼랑제비들처럼 우리의 둥지를 거품으로 덮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니, 어느 날 그 거품이 바닷가에 사는 생명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본문 마지막 대목
우리는 모두 소로우처럼 정신적으로 내면의 완벽을 추구하는 초월주의자는 아닐지라도 조금은 초월주의에 자신을 맡기고 싶다. 그것은 삶이 생존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누구나 가을이 되면 여행을 하고 싶고 숲길을 걷고 싶어진다. 독자는 이 책 한권으로 소로우가 콩코드 강을 여행하며 품었던 자연의 무한한 소유를 함께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공기가 깨끗한 곳에서 보면 농부가 쟁기질하고 농작물을 거둬들이는 일이 무척 아름답게 보이지만, 농부 자신은 그런 아름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이 강기슭 땅을 1에이커도 갖지 않았기에 강기슭 전체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 우리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이 세상의 값어치를 제대로 아는 이는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일 것이다. 가난한 부자! 그에게 속한 것은 무엇이든 그가 사들인 것이다. 내게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나는 메리맥 강기슭을 소유한 최대 지주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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