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봉 대종사 일대기[행장과 연보]
* 스님의 본적은 평안남도(平安南道) 양덕군(陽德郡)
쌍용면(雙龍面) 반성리(盤城里) 금성동(錦城洞)이며,
수안 이씨(遂安李氏) 병억(炳億)을 아버지로,
경주 김씨(慶州金氏)를 어머니로,
1888년 무자년(戊子年) 음력 5월 28일에
5남매 중 3남(三男)으로 태어나다.
* 스님의 법명(法名)은 학눌(學訥)이요,
법호(法號)는 효봉(曉峰)이며,
별호(別號)는 "엿장수 중 ", "절구통 수좌
", "판사(判事) 중 ", "무(無)라 노장 "이라 하고,
속명(俗名)은 이찬형(李燦亨)이다.
* 1925년(乙丑年) 음력 7월 8일. 금강산(金剛山)
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에서
석두 보택(石頭寶澤) 선사를 은사(恩師)로 사미계(沙彌戒)를 수지하다.
* 1932년(壬申年) 음력 4월 8일.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동선 (東宣)
화상을 계사(戒師)로 구족계(具足戒)를 수지하다.
* 1966년(丙午年) 10월 15일(음력 9월 2일) 오전 10시.
경남 밀양 재약산(載藥山)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에서 입적(入寂)하니,
스님의 세수(世壽)는 79세요,
스님의 법납(法臘)은 42년이다.
** 1888년(戊子年: 1세)
* 스님은 1888년 음력 5월 28일 해시(亥時).
평안남도 양덕군 쌍용면 반성리 금성동에서 황 해도(黃海道)
수안 이씨(遂安李氏) 병억(炳億)을 아버지로,
경주 김씨(慶州金氏)를 어머니로 5형제 중 3남(三男)으로 태어나다.
** 1900년(更子年: 13세)
* 스님은 화목한 대가족(大家族)이었던 부농(富農)에서
자라면서 어릴 때부터 남달리 영특해 신동(神童)이라
총애를 받으며 유년기(幼年期)를 보내다.
* 어린 시절부터 선비이신 할아버지께
한학(漢學)과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우다.
<* 스님의 나이 열세 살 때의 일이다. 어린 찬형은
정월 보름 날 평소 좋아하던 찰떡을 급 히 먹다가
관격(關格)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게 된다.
뜻밖에 귀여운 손자(孫子)가 죽어 가는 것을 지켜
본 할아버지는 몹시 애통해 하다 그만 홧김에 술을 마시고
그 길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별안간 할아버지와 손자가
동시에 변을 당하자 온 집안은 야단이 났다. 이웃 동네에
사는 삼촌이 신동이라며 늘 자랑하던 조카가 죽고,
집안의 어른까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급히 달려왔다.
귀여운 조카의 얼굴이나
한번 더 보고 매장을 하자며
우기는 바람에 다시 관을 열어 보니, 이게 어인 일인가!
숨을 거둔지 이미 20여 시간이 지났다는데도
몸에 따뜻한 온기가 돌고 있지 않은가?
이미 죽은 줄만 알았던 어린 찬형이 뜻밖에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에 온 집안 식구들이나 친척들은 너나 없이 할아버지가
손자 대신 돌아 가셨다고 하였다. 조손(祖孫)간에
서로 바꾼 목숨이라며 또 한번 야단법석이 났다.
희비쌍곡선이란 이걸 두고 하는 말일까?
* 스님은 출가 입산(出家入山)한 후에도 가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말씀하기를 그것은 필시
조손(祖孫)간에 서로 뒤바뀐 목숨이라며,
매년 이날(음. 1월 16일)을
기해 조부모(祖父 母)의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재적본사인 조계산 송광사에
조부 수안 이씨 이창근 영가(祖父 遂安 李氏 李昌根靈駕)와
조모 밀양유인 박씨 영가(祖母 密陽 朴氏 靈駕)의
제위답(祭位畓) 까지 마련하여
해마다 기제(忌祭)를 모셨다.>
** 1901년(辛丑年: 14세)
* 평양감사(平壤監司)가 개최한 권학백일장(勸學白日場)인
과거시험(科擧試驗)에 응시하여 장원급제(壯元及第)하다.
<* 그때 과거시험의 시제(試題)에
"出門에 見張子房하고 問今日事가 如何오? " 라는
글제가 나왔다고 회고하면서,
"子房子房 吾子房아 天地天地 誰天地냐… "라는
글을 지어 장원급제를 하였다 한다. 자방(子房)은
중국의 한(漢)나라를 창업한 3걸(三傑)중
한 사람인 장양(張良)의 자(字)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었다.>
** 1908년(戊申年: 21세)
* 신학문(新學文)을 수학하기 위하여 평양 소학교와 평양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일본(日本) 관선유학(官選留學) 시험에 합격하다.
<* 그 당시 일제식민지(日帝植民地)하에서
관선유학 시험이란 첫째는 출신가문(出身家門)을 보고,
둘째는 본인의 인물(人物)의 됨을 살펴보고,
셋째는 본인의 사상(思想) 등을
점검하고 선발하는 어려운 관문이었다.>
** 1913년(癸丑年: 26세)
* 일본 와세다 법과대학(早稻田 法科大學)을 졸업하고 귀국하다.
<*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 유학 길에 오른 지 5년 만에,
와세다 제 일고등학교와 와세다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 1914년(甲寅年: 27세)
* 평양 복심법원(覆審法院)에서
한국인 최초의 "판사(判事) 생활 "을 하다.
<*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서울과 함흥 등
지방법원(地方法院)에서 법조인(法曹人)
생활을 시작으로, 지금의 고등법원격인
평양복심법원에서 10여 년 동안
조선인 최초의 판사 생활을 하였다.>
** 1919년(己未年: 32세)
* 함흥의 지방법원에 근무할 때, 기미년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만세사건이 일어나다.
<* 서울 지방법원에 재직 당시 "사이토 총독 "의
저격사건이 발생하는 등 곳곳에서 조선독립
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나자, 일본 경찰들은
독립 투사들을 색출하고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였다.
이때 조선인(朝鮮人)으로 일제하의 판사 생활이란
한편 호화로운 것 같지만 서도, 민족의
독립투사들을 같은 동족인 조선인 판사에게
판결토록 하였기 때문에 내심으론
하루 하루가 고뇌에 찬 나날이었다.>
** 1923년(癸亥年: 36세)
* 10년 간 법관생활 중, 가장
고뇌에 찬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내리다.
<* 법관생활 10년 세월 중에 가장
고뇌에 찬 순간이 다가 왔다.
어쩔 수 없이 사형선고를 내린 것. 이 사형선고는
스님의 생애를 통해 가장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모든 사건의 정황으로
봐선 부득이하게 내린 사형선고였지만,
젊은 조선인 판사는 이때부터 심한 갈등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시대적인
불운만을 탓할 수도 민족적인
울분을 터트릴 수도 없었다.
3일이 지나도록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직장인 법원에도 떳떳이 출근할 수도 없었다.
그 당당하고 패기만만한
젊은 판사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돌이켜보면 이 사형선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형선고였다. 인간의 회의와 갈등
속에 꿈과 희망은 사라지고 절망과 좌절의
늪에 빠지고 있었다. 인간의 고뇌와 현실에
대한 모순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다니? 그것도 같은 동족으로써,
민족의 독립투사 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그 고뇌에
찬 세속의 집에서 뛰쳐나가고만 싶었다.>
* 3년 동안 팔도강산(八道江山)을 방랑하며
"엿장수 생활 "을 하다.
<* 젊은 판사는 마치 싯달타 태자가 왕국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유성출가(踰城出家)를 하 듯,
온 집안 식구들이 고이 잠든 사이 집을 나와
평양역에서 밤 열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서울 동대문시장에 들려 입고 있던 양복을 팔아
엿판 하나와 한복 두 벌을 구했다.
그리고 조실부모(早失父母)하여 오갈 때 없는 고아(孤兒)로써
스스로 엿장수임을 자처하며,
3년 간 정처 없이 팔도강산을 다니면서
방랑(放浪)하기 시작했다.>
** 1926년(乙丑年: 38세)
*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에 이르러
"금강산 도인(道人) "을 찾다.
<* 3년 간의 엿장수 생활과 팔도강산의
방랑생활은 결국 자기 자신을 찾은 길이요,
구도행 각(求道行脚)이었다. 가는 곳마다 독립투사들을
색출하려는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가면서 갖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야만 했고, 인연 따라 맺어지는 많은
일화와 잊지 못할 사연들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하고많은 일화들이 인간의
삶에 대한 많은 체험을 할 수가 있었다.
인간이 가야할 길과 올바른 길을 나름대로 깨달을 수가 있었다.
하기에 기회 있을 때마다 인생의 올바른 길을 깨친
참다운 "진인(眞人) "을 만나기 위해
명산대찰(名山大刹) 등을 찾아 다녔다.>
* 금강산 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에서
석두 선사(石頭禪師)를 상봉하다.
<* 마침내 엿장수의 발길은 금강산에 이르게 되었다.
유점사에 찾아드니 큰 제가 들었는지, 스님들은
모두 법당에 올라가고 후원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엿장수는 그만 배가
고픈 김에 우선 허기부터 달래야만 했다.
앉은자리에서 순식간에 밥을 세 그릇이 나 비웠다하니,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 "이란 옛말이 실감이 났다.
어떤 스님이 엿장수가 이 깊은 산사(山寺)에 무엇 하려
왔느냐는 물었다. 금강산에 도인(道 人)스님이 있다고
하여 찾아 왔노라 대답하고, 이 절에 도인스님이
계시느냐고 재차 물었다. 그러자 금강산 도인이라면
신계사 보운암에 석두 선사가 계신다고 이야기해 주지 않은가!
엿장수 나그네는 그 길로 단숨에 외금강 신계사를 찾아갔다.
유점사에서 신계사까지는 80여 리가 족히 되었다.
신계사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어, 다음날 일찍
보운암을 찾아갔다. 보운암 큰방에는 스님들이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었다. 낯선 나그네가
엿판을 짊어지고 산사에 찾아온 것이 하도
신기했던지 한 스님이 엿장수에게 물었다.
"이 깊은 산골에 엿장수가 무엇 하려 왔소? "
"금강산 도인, 석두 스님을 찾아뵈려 왔습니다. "
"어디서 왔소? "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
"유점사에서 여기까지 몇 걸음에 왔소? "
" …… "
엿장수는 엿판을 질며 진 채,
곧장 큰방에 들어가 한 바퀴를 삥 돌고서,
"이렇게 왔습니다 " 하였다.
큰방에 있던 스님들이 한바탕 웃으며
"10년 공부한 수좌(首座)보다 낫네 " 라고 하였다.
이렇게 묻던 스님이 바로 석두 스님이었다.
이리하여 스승과 제자는 서로 만났다.
스승을 찾던 제자의 마음과 제자를
기다리던 스승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이다.
돌이켜 보니 지나간 모든 것이 다
몽중사(夢中事)였고, 전생사(前生事)였다.
엿장수 나그네는 3년이란 긴 방랑생활이 이로써
그만 멈추게 되었고, 비로소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었다.>
* 음력 7월 8일.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 보택(石頭寶澤) 선사를 은사(恩師)로
사미 계(沙彌戒)를 수지(受持)하다.
<* 스님은 화려한 세간(世間)의 판사라는
법복(法服)을 훌훌 벗어버리고, 출세간(出世間)의
부처님 법복(法服)을 갈아입고 오로지 철두철미한
수행 정진에 매진하게 되었다. 이때 스님 에게
은사스님이 준 불명(佛名)은 원명(元明)이요,
법호(法號)는 운봉(雲峰)이었다.
그러나 훗날(1938년), 스님은 조계산 송광사에 주석하면서
고봉(高峰)국사의 몽중법문(夢中 法門)으로 인해,
불명은 학눌(學訥), 법호를 효봉(曉峰)이라 개명하였다.>
** 1926년(丙寅年: 39세)
* 하안거(夏安居)에는 남방의 선지식(善知識),
용성(龍城) 대선사를 친견(親見)하기 위해서
경남 양산의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까지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하다.
* 동안거(冬安居)에는 북방의 선지식인 수월(水月)
대선사를 친견하기 위해, 만주(滿洲)땅
북간도(北間道)까지 운수행각을 하다.
<*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 머나먼
운수행각 끝에 다시 금강산에 돌아왔다.
천근만근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심신(心身)이 경쾌했다.
오직 진아(眞我)의 발견(發見)과 완성(完成)을 위 해
매진하기로 다짐하였다. 대장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하기 위한 뚜렷한 목표가 설정되었다.
그 간 눈 밝은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아뵙는 것도 오로지 견성성불(見性成佛) 만을 위함이었다.>
** 1927년(丁卯年: 40세)
* 금강산 신계사 미륵암(彌勒庵)에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다.
<* 스님에게는 "엿장수 중 "으로 늦게 출가 입산(出家入山)했기
때문에 "늦깎기 중 "이라는 별명(別名)이 생겼다.
예나 지금이나 늦깎기로써 여법히
수행 정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공부(工夫)는 스스로 자성자오(自性自悟)하고,
실참실오(實參實悟)해야 된다는 것을 절감하고
스님은 금강산으로 돌아와 용맹정진하기를 거듭 다짐하였다.>
** 1928년(戊辰年: 41세)
*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 용맹정진을 하다.
<* 피나는 용맹정진 끝에 견처(見處)가 있었다.
이를 은사스님에게 말씀드리자, 은사스님의 환한
미소와 점두로 "운봉(雲峰) "이라는 법호(法號)와
함께 다음과 같은 사좌전송(師佐傳頌) 을 받았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간에 서로 전수한 "전법게(傳法偈) "다.>
* 西來密旨
不傳受法 示雲峰元明禪師
春至百花爲誰開 東行不見西行利
白頭子就黑頭父 兩個泥牛戰入海
봄이 오니 온갖 꽃, 누굴 위해 피는고
동으로 가면 서로 가는 이익 보지 못하리
흰머리 아들이 검은머리 아버지께 나아가니
두 마리 진흙 소가 다투다 바다에 들어가네.
世尊應化 2555年(1928年) 戊辰 1月 15日
金剛山 神溪寺 普雲禪院 恩法道友 林石頭 說
** 1929년(乙巳年: 42세)
* 금강산 온정리(溫井里) 온천인근의 과수원에
"여여원(如如院)선원 "을 마련하고 장좌불와 용맹정진을 하다.
<* 스님은 가는 곳마다 장좌불와 용맹정진을 계속하였다
. 좌선 중에는 한번 앉으면 절구통 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절구통 수좌 "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던 스님에게 하루는 뜻 밖에 돌연변이가 일어났다.
좌선 중에는 결코 미동도 하지 않던 스님에게 하루는
이변이 생 긴 것이다. 어간에 앉아 창 밖을 향해 정진하던
스님이 갑자기 자리를 옮겨 돌아앉아 면벽 한 것.
뒷날 알게 된 일이지만, 평소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과수원 속에 있는 선원이라,
스님은 늘 창 밖을 향해 앉아 정진하였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출입금지 구역인 선원에 갓
결혼한 듯한 신혼부부가 나타나 이리저리 서성거리지
않은가! 의아한 생각에 다시 한번 처다 봐도 어쩐지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8년 전,
집에 두고 떠나온 장남 (長男)의 모습이 분명하였다.
스님은 그 순간 자신도 모른 새 그만 벽을 향해 돌아앉았다.
도심(道心)이 인정(人情)을 등진 것일까!
여여원 선원은 북간도(北間島) 용정(龍井)
사람인 일허(一虛) 김현(金玄)거사가 금강산을
참 배하려 왔다가 금강산 도인이라던
석두 선사를 친견한 후,
공부하는 선객을 위해 지은 토굴 이었다. 김현 거사의
이모님은 독립투사의 부인으로 불심이 장한 신도였다.
그는 여여원 뒤 편에 독립투사들이 은밀히
오갈 수 있는 은신처를 마련해 보살피면서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염원했던 숨은 독립투사였다.>
** 1930년(庚午年: 43세)
*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法起庵) 뒤에
무문관(無門關) 토굴을 마련하고
"3년결사(三年結社) " 에 들어가다.
<* 제방의 선지식을 친견해 봐도, 대중처소인 선원에서
대중들과 함께 정진해 봐도,
스님의 마음은 결코 시원치가 않았다.
이 일은 부처님이나 보살이라 해도 결코 나를
대신할 수가 없고, 설혹
스승이나 부모형제라 할지라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사 절친한 도반이나
눈밝은 선지식이라 해도 나를 대신해줄 수 없었다.
하기에 재출가(再出家)하는 마음으로
재 발심(再發心)하여
용맹정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님은 은사스님께 이 같은 간절한 뜻을 말씀드리고,
"3년결사(三年結社) "에 들어가기를 다짐 하였다.
신계사 법기암 뒤 양지바른 곳에 토굴터를 잡았다.
아담한 통나무 단칸방을 마련하 였다. 함석지붕으로
풍우를 피하도록 하고, 하루 한끼 공양으로
바리때만 드나들 수 있는 창 구와 방 한쪽
구석에 대소변을 볼 수 있는 구멍만을 내놓았다.
토굴에 들어 간 후, 그 출입 문마저
흙으로 발라 버리도록 했다.
그야말로 사방이 꼭 막힌
"무문관(無門關) " 토굴이었다.
깨닫기 전에는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 나오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로 무문관 토굴에 들어간 것.
입은 옷에 좌복 3개뿐, 가지고 들어간
살림살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삶마저 저버린
필사적인 용맹정진이 시작되었다. 마치
싯달타 태자가 6년 고행 중 보리수 나무 밑
금강보좌(金剛寶座)에서 맹세했던 것처럼,
스님도 금강과 같은 결심으로
대용맹심을 발한 것이다.
그때 은사이신 석두 스님께서는 신계사
법기암에 전답(田畓) 30두락을 사들여 놓고,
그 당시 법기암 암주(庵主)였던 임대원(林大願)
비구니스님에게 부탁하여 3년 결사기간
동안 스님의 하루한끼 공양을
극진히 시봉토록 주선하였다니,
제자를 위한 스승의 그
큰 은혜를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으랴!>
** 1931년(辛未年: 44세)
* 일일일식(一日一食) 장좌불와 용맹정진을 계속하다.
<* 깨닫기 전에는 죽은 한이 있더라도 결코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피나는 정진이 계속되었다. 사시공양으로 하루 한끼만
먹고 자리에 눕지 않은 1일1식
장좌 불와 용맹정진이었다.
오로지 장부의 일대사인연인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타파키 위한 일념 뿐. 하루 하루가 지나고,
달이 바뀌며 춘하추동 사계절이 변하여 갔다.
춥고 더운 것도 잊는 지 이미 오래었다. 다만 하루한때
사시공양이 들어오는 창구가
밝아지면 날이 새였나 싶었 고,
어두워지면 밤이 되었나 여겼다.
이렇게 또 해가 바뀌고 봄이 오고 여름이 왔다.
온 산천에 단비가 포근히 내린 어느 여름 날 아침!
마침내 토굴 벽이 무너졌다.
이젠 그만 나가도 되겠다는
확신으로 토굴 벽을 스스로 무너뜨린 것.
천근 만근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심신이 가벼워졌다.
온갖 것들이 싱그럽게 빛나고 있었다.
1년 반 동안 자란 텁수룩한 머리와 바싹
여인 몸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걷은 걸음걸이라 어린애 마냥 비틀거렸다.
그러나 안색만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조용한 폭풍과 같은 사자후(獅子吼)가 터져 나왔다.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이였다.
이렇게 스님은 법희선열(法喜禪悅) 속에
밝은 빛으로 다시 태어났다.>
* "오도송(悟道頌) "을 읊다.
海底燕巢鹿抱卵 火中蛛室魚煎茶
此家消息誰能識 白雲西飛月東走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 겨울 안거는 만공(滿空) 선사를 조실(祖室)로 모시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입승(立繩)소임을 보며 지내다.
<* 그 당시 남방의 선지식으로는 용성(龍城) 선사와
해월(海月) 선사를, 북방의 선지식으론 수월(水月) 선사를
존경하였으며, 중앙의 선지식으로는 덕숭산 수덕사의
만공(滿空) 선사와 오대산 상원사의
한암(漢岩) 선사 등을 존경하였다.
스님은 제방의 선지식을 두루 참방하고
그 회상에서 안거하며 줄곧
오후불식과 장좌불와로 수행정진하면서
탁마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 1932년(壬申年: 45세)
* 4월 8일,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여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 화상을 계사로
구족계 (具足戒)를 수지하다.
** 1933년(癸酉年: 46세)
* 여름 안거는 금강산
온정리에 있는 여여원 선원에서 지내다.
* 겨울 안거는 내금강 마하연(摩訶衍)
선원에서 만공 선사를 모시고 지내다.
<* 스님은 7일간 용맹정진 중, 화두삼매에 들어 그만
시간을 망각하고서 시간을 묻자 이에 만공 선사께서
다음 게송으로 스님의 정진을 찬탄하였다.>
* 七日精進中 雲峰和尙 時間忘却 問時次忽出詩
七日精進衆 佛唱三昧中
忽惺無我佛 萬事意自在
佛紀2960年 癸酉 9월 19日
鏡虛門人 滿空 漏
<* 금강산 유점사와 마하연
선원에서 안거하고 있을 때,
평양 복심법원 시절 동료였던
일인 (日人) 판사를 우연히 만났다.
정말 뜻밖의 만남이라 스님은 자신의 과거 신상에 대한
일을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러나 일인(日人) 판사는 스님이 조실부모한
"엿장수 "가 아니라, 조선인
최초의 판사인 아무개 판사였다는
사실을 유점사 주지스님에게 발설하고 말았다.
그 후 스님에겐
"판사 중 "이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고,
그만 스님의 과거 전력(前歷)이 드러나고 말았다.>
** 1934년(甲戌年: 47세)
* 하안거에는 금강산 온정리
여여원 선원에서 지내다.
* 동안거에는 금강산 신계사 미륵암에서 지내다.
<* 조실부모한 엿장수가 아니라 조선인 판사였다는
과거 전력이 밝혀지자, 스님은 금강산도
이젠 떠날 인연이 다 되었나 싶었다.
이 때 유점사에는 산판 관계로 소송이 벌어졌다.
그러 자 유점사 주지스님은 산판
소송관련 서류를 갖고 와
소송진행을 스님께 묻고 의뢰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의 과거전력에 대한
풍문은 온 산중에 알려지고,
제방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 1935년(乙亥年: 48세)
* 금강산을 떠나 남방으로 운수행각을 떠나다.
* 하안거에는 설악산(雪嶽山) 봉정암(峰頂庵)에서
동산(東山) 스님, 청담(靑潭) 스님과 함께 지내다.
* 동안거에는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
청량선원에서 한암(漢岩) 조실 스님을 모시고 지내다.
** 1936년(丙子年: 49세)
* 오대산 월정사의 상원사 선원에서 한암 선사로부터
다음 게송과 함께 "포운(泡雲) "
이란 법호와 인가(印可)를 받다.
* 一句子
以泡雲號之 贈元明禪師仍示以一偈
茫茫大海水中泡 寂寂深山峰頂雲
此時吾家無盡寶 灑然今日持贈君
世尊 應化 2936年 丙子 10月 11日
蓬萊 釋漢岩 書于 五臺山 上院 室中
* 여름 안거는 태백산(太白山) 정선(旌善)
정암사(淨岩寺)에서 범어사의 동산(東山) 스님과
수덕사의 혜암(惠菴) 스님과 함께 지내다.
<* 이 때 정암사 도량 중심으로 흐르는 계곡 물을
미리 잘 관리토록 하여 병자년
대홍수인 병자수파(丙子水敗)를 면했다 한다.>
* 겨울 안거는 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의
정혜사(定慧寺)선원에서
만공(滿空) 선사를 모시고 지내다.
** 1937년(丁丑年: 50세)
* 덕숭산 정혜사 선원에서 만공 선사로부터
다음 게송과 함께 "선옹(船翁) " 이라는
법호와 인가를 받다.
* 西來家風
爲 船翁法子
無偏正道理 今付船翁子
駕無底船 隨流得妙也
佛紀 2964年 丁丑 陰 正月 日
湖西 德崇山 金仙洞 小林草堂
滿空月面 漏
* 승보종찰(僧寶宗刹)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를 참배하다.
<* 그 당시 제방선원에서 추앙 받던 선지식이었던
만공 선사와 한암 선사에게 두루 인가를 받고 난 후,
운수행각의 발길은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스님은 마침내 불일 보조국사(佛日 普照國師)의
근본도량인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렀다.
처음 온 곳인데도 모든 것이 낯설지가 않았다.
전생에 많이 살던
도량인양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스님을 반기는 것만 같았다.
마치 옛 고향에 찾아 온 것처럼 신심(身心)이
무척 안온했다고 스님은 그 때를 가끔 회고하였다.>
* 동방제일도량(東方第一道場)인
송광사 삼일암(三日庵) 선원에 주석하다.
<* 드디어 승보도량인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러
운수행각의 발길은 멈추게 되었다.
이로부터 10여 년 간
스님은 송광사 삼일암 선원에 주석하면서
운수납자들을 제접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불일 보조국사의 목우가풍(牧牛家風)과
정혜쌍수(定慧雙修), 조계선풍(曹溪禪風)을
오늘날에 계승하고 재현하려는 원력을 세웠다.
이는 이 시대에 필요한
현전승보(現前僧寶)를 양성하고
제2의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전개하여
침체된 한국불교의 중흥(中興)과
선풍 진작(禪風振作)을 위한 원력이었다.
조계산 송광사를 옛날의
해동제일도량답게 장엄하고,
16 국사를 배출한 승보도량답게 중흥키 위한
염원으로 운수행각의 길을
멈추고 송광사에 주석 (住錫)하였다.>
* 송광사 삼일암 선원 회주(會主)인
조실(祖室) 화상에 추대되다.
<* 스님이 송광사 삼일암에 안거하고 있을 때,
남원골에 산다는 한 처사가 찾아 와서
제자 되기를 간청하였다.
음력 4월 8일. 부처님 오신날인 불탄절(佛誕節)을
맞아 제자를 삼으니, 그가 곧 수련(秀蓮)이란
법명으로 수계 득도한 맏상좌인
구산(九山) 스님이었다.>
* 승보종찰 송광사에서
대종사(大宗師) 법계(法階)를 품수하다.
** 1938년(戊寅年: 51세)
* 보조국사 제16세 법손(法孫)인
고봉국사(高峰國師)로부터
몽중수기(夢中受記)를 받다.
<* 송광사 삼일암에
주석한지도 벌써 한해가 지났다.
스님은 불일 보조국사의 사상을 흠모 하면서
스님의 사상과 수행가풍을 새롭게 정립하고
조계선풍을 진작하기 위한
원력으로 지 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너무도 신기한 꿈을 꾸었다.
보조국사 제16세 법손인 고봉국사께서
꿈에 나타나 몽중법문과 게송을
새로운 법호(法號)와 함께 스님에게 전해주지 않은가!
그때까지만 해도 금강산에서 은사스님이 주신
운봉 원명(雲峰元明)이란
법명과 법호를 사용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뜻밖에 고봉국사께서 효봉학눌(曉峰學訥)이란
이름과 함께 다음 게송을 일러 주신 것이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고 법문이었기에 스님은
꿈을 깨자마자 바로 그 게송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스님은 보조국사를 비롯 16국사의
법은(法恩)이 지중함을 절감하고 법명과 법호를
이내 효봉 학눌이라 개명하고,
송광사 승보도량의 전통인 목우가풍과
조계선풍을 크게 진작 하리라 다시 한번 다짐하였다.>
* 示 三日庵 曉峰法子
煩惱盡時生死絶 微細流注永斷滅
圓覺大智常獨存 卽現百億化身佛
佛紀 2965年(1938年) 4月 28日 曉
普照國師 第十六世 法孫 高峰 說
夢裡聞說 覺後記得
** 1941년(辛巳年: 54세)
* 금강산 여여원 선원 이사장(理事長)에 취임하다.
<* 금강산 온정리에 있는
여여원 선원의 설립공덕주인
일허 김현 거사의 청으로 재단법인
여여원 재단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시자로 일청(一淸) 스님 등이 시봉하였다.>
* 송광사 삼일암 선원에서 은사
석두 스님을 모시고 안거하다.
<* 금강산에서 은사스님과 해어진 후,
스님은 오랜만에
은사스님을 송광사 삼일암
선원에서 모시고 살았다. 그 후,
석두 선사는 송광사 부도전에
4부대중(四部大衆)을 위한
보살선원을 개설하고 안거타가
조국의 해방을 맞이하였다.>
** 1944년(甲申年: 57세)
* 금강산 신계사와 여여원 선원을 참배하다.
<* 스님은 마음의 고향인 금강산을 다시 한번 참배하였다.
그런 이듬해엔 일제치하로부터 조국이 해방되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38선으로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사변으로 인해 꿈에 그리던
금강산을 다시 찾지 못하였다.>
** 1945년(乙酉年: 58세)
* 8월 15일! 드디어 36년 간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조국이 해방되다.
<* 스님에 있어서 조국의 해방은 남달랐다.
스님의 출가동기가 말해 주듯, 그토록 고대하고
갈망하던 조국의 광복이 찾아 온 것. 그러나 조국이
해방되었다지만 사회 각계각층엔
일제 치하에서 변질된 것이 너무도 많았다.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조선불교 교단 역시 크게
변모 되어 한국불교는 이미 대처승화(帶妻僧化)되고
세속화(世俗化)되여 있었다.
하니 불교교단의 정화불사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있어 정화작업을
해야할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우선 한국불교 정화운동을 위한 일이 시급했다.
당시 조선불교 교단에서는 한국불교의 유구한
전 통을 되살리고 여법히 수행정진 할 수 있는
총림 도량을 가야산 해인사에
건립하기로 결정 하였다.>
** 1946년(丙戌年: 59세)
* 동안거를 기해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가야총림(伽倻叢林)이 설립되고,
초대 방장화상 (方丈和尙)에 취임하다.
委 囑 狀
李 曉 峰
朝鮮佛敎 伽倻叢林 祖室和尙을 委囑함
佛紀 2973年(1946年) 11月 6日
朝鮮佛敎 校正 朴 漢 永 印
<* 음력 10월 15일. 드디어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한
대작불사로 가야산 해인사에 종합수도 원인
가야총림이 개설되었다. 스님은 가야총림의
조실스님인 초대 방장화상으로 추대되었다.
스님은 종단정화와 도제양성이라는
큰 꿈을 안고 10여 년 동안 안주했던
조계산 송광사를 떠나,
가야산 해인사로 이석(移錫)하게 되었다.
이때 시자로 원명(元明),
명성(明星) 스님 등이 시봉하였다.>
* 조계산 송광사를 떠나는
심경으로 다음 게송을 읊다.
我來松廣今十年 國老懷中安食眠
曹溪一別緣何事 欲作人天大福田
<* 한국불교의 내일을 기약하고 선풍진작과
도제양성을 위해 10여 년 동안
머물던 조계산 송광사를
떠나는 법문을 하면서 스님은 법상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런 후, 스님은 6.25동란과 비구 대처간의
종단분규로 인해 그토록 그리던 금강산과
송광사를 다시 한번 찾지 못하고 입적하고 말았다.>
** 1947년(丁亥年: 60세)
* 계정혜 삼학(戒定慧三學)을 근수하기 위해
습의산림(習儀山林)을 실수하고
구족계를 중수 (重受)하다.
<*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선양하고 조계선풍을
널리 고취하며 여법히 수행정진하기 위해선
오로지 계정혜 삼학을 근수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해인사 가야총림의
대중이 50일간 습의산림을 실시하고,
음력 3월 29일에
상월화상(霜月和尙)을 계사로
구족계를 중수하였다. 이 때 함께 정진했던
총림 대중스님들이 훗날
한국불교 정화불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근세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주역들이 되었다.
그때 구산(九山) 스님은 원주와 도감
소임을 번갈아 맡아보고,
일각(一覺) 스님이 입실(入室)했으며,
시자로 원명, 보성(菩成) 스님 등이 시봉하였다.>
** 1950년(庚寅年: 63세)
*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사변으로 인해
가야총림이 해산되다.
<* 6월 25일! 가야산 해인사에 가야총림이
설립된 지 5년이 되던 해, 조국 광복의 기쁨 속 에
한국불교의 중흥을 꿈꾸며 설립된 가야총림이
해산되다니 실로 기막힐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어찌하랴!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지고 동족상잔의 6.25 참극으로 인해
전 국토가 전운(戰雲)에 휩싸이고 말았으니,
수행 정진하던 산사(山寺)인들
어찌 조용할 수가 있겠는가?
하기에 가야총림 대중들도 각기 인연 따라
흩어지고 스님 역시 피난길에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겨울 안거를 부산 동래 금정산(金井山)
금정사(金井寺)에서 맞이하다.
<* 피난길에 오른 스님은 제자들과 함께
부산 동래구 온천동에 있는 금정산 금정사
선원에 이르러 가까스로 행장을 풀었다.
대구 팔공산 지역과
낙동강 전투는 극히 심하였지만,
부산 지방은 아직 참혹한
전운이 미치지 않았기에
그나마 겨울 안거를 할 수가 있었다.
이 때 구산 스님은 은사스님을 금정사에 계시도록
주선해 드리고, 진주 응석사(凝石寺) 선원 에서
금오(金烏) 선사를 모시고 겨울철에
용맹정진을 할 작심으로 스승 곁을 떠났다.>
** 1951년(辛卯年: 64세)
*동안거 해제일을 맞아 제자인
구산 스님에게 "전법게(傳法偈) "를 전하다.
<* 음력 정월 보름!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했던가!
혹독한 추위를 견뎌 낸 이른봄
매화는 코를 찌르는 향취를 내고,
밤이 깊으면 먼동이 트인다고 했다.
천신만고 끝에 맞이한 조국의 해방이었지만,
다시 동족상잔의 참화에
휩싸인 현실에서 뼈를 깎는
듯한 정진 끝에 구산 스님은
큰 깨달음을 얻게 된 것.
한없는 선열 속에 다음
게송을 은사스님께 바쳤다.
大地色相本來空 以手指空豈有情
枯木立岩無寒暑 春來花發秋成實
이에 은사스님의 환희에 찬 미소와
점두(點頭)로 구산 스님은
다음의 전법게를 받았다.>
裁得一株梅 古風花已開
汝見應結實 還我種子來
한 그루 매화를 심었더니
옛 바람에 꽃이 피었구나
그대 열매를 보았으리니
내게 그 종자를 가져오너라.
<* 이 전법게는 스님께서 손수 쓰신
불보함(佛譜函)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석가세존(釋迦 世尊)후, 면면히 계승되어온
제78대(曉峰學訥)와 제79대(九山秀蓮)
법손(法孫)에 해당된다.
이로써 불조심인(佛祖心印)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오늘날까지 계계승승 전래한 것이다.>
* 경남 통영 미륵산(彌勒山) 용화사(龍華寺)
도솔암(兜率庵)에서 여름 안거를 맞이하다.
<* 산사(山寺)에 살던
사람이 어찌하다 도심 속에
살다보면 무척 산사가 그리워진다.
스님 역시 문도와 제자들의
주선으로 한려수로(閑麗水路)의
중심인 경남 통영의 미륵산 용화사로 이주하였다.
이곳은 6.25사변으로 인하여 크게
전화를 입지 않은 곳이라
승속(僧俗)을 막론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비좁은 용화사 도솔암
선원이었지만 제방에서 많은
스님 들이 운집하여 신고를 같이하며 함께
정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시자로
활연(豁然) 스님 등이 시봉하였다.>
** 1952년(壬辰年: 65세)
* 미륵산 상봉아래 "효봉대(曉峰臺) " 란
토굴을 짓고 안거하다.
<* 도솔암 선원은 많은 스님들이
운집하여 정진함으로 장소가
비좁은 탓에 스님은 용화사 뒤,
미륵산 상봉아래에
아담한 터를 잡아 삼간
토굴을 짓고서 안거하였다.
이때 일관(一觀) 스님이
출가득도하고 시봉하였다.>
** 1954년(甲午年: 67세)
* 통영 미륵산에 미래사(彌來寺)가 창건되고,
양지토굴에서 안거하다.
<* 그 당시 미륵산 용화사에는
대처승들이 살고 있었기에
용화사 암자인 도솔암이나
용화 사 뒤 토굴에서
살기란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하여 용화사 뒷산 넘어,
편백나무 숲 속에 절 터를 새로 잡아
미래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제자인 구산 스님 등 문도들의 주선으로
은사 스님인 석두(石頭)
선사를 모시고 안거하기 위해
미륵산에 걸맞은 미래사를 창건한 것이다.
어느 날 일월광명이 환히
밝은 것처럼 방광(放光)이
충천하는 곳을 찾아가 보니,
다도해의 섬들이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한눈에 펼쳐지는 곳이었다.
스님은 그곳에 조촐한 삼간
토굴 을 짖고 안거하게 되었으니,
훗날 스님이 좌선하던 곳이라 하여
"효봉대(曉峰臺) " 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미래사의 좌우 청룡과
백호 산자락 아래 음지와
양지토굴을 마련하고,
은사 석두 선사를 모시고
문도들과 함께 주석하였다. >
* 음력 4월 24일. 은사 석두(石頭)
선사께서 입적하다.
<* 스님은 은사스님과의 지중한
법연(法緣)을 생각하고
이곳 미래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오랫동안 살고 싶었지만, 은사스님께서는
세연(世緣)이 다해 그만 입적하셨다.>
*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
정화불사(淨化佛事)가 일어나다.
<* 음력 8월 17일.
"불법엔 대처승(帶妻僧)은 없다 " 란
기치아래 종단 정화운동이 일어났다.
스님은 제자인 구산 스님과 함께 상경하여
이듬해 9월까지 서울 종로구
안국동 소재 선학원
(禪學院)에 주석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정화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큰집이 무너지려 하니
여럿의 힘으로
붙들어라(大廈將崩 衆力扶持) "라는
유시를 내리고,
화합적인 승가정신에 입각하여
종단정화불사를 주도하였다.
이때 시자로 법정(法頂) 스님이
통영 미래사에서
수계득도하고, 서울 선학원에는
조명(照明) 스님 등이 시봉하였다.>
** 1955년(乙未年: 68세)
* 종단 정화불사가 일단락 되어가자,
다시 미래사 토굴에서 안거하다.
<* 비구 대처간의 종단분규와
정화불사가 일단 마무리되어지자,
종단 정화불사는 모든 종도 들이 여법히
수행 정진하는 것만이 진정한 화합승가를 이루는
올바른 길이라고 역설하면서 서울을 떠나 다시
미륵산 미래사 토굴로 내려 오셨다.
스님은 금강산에서부터 15여 년 동안 줄곧
오후불식과 장좌불와 등
수행자다운 모습을 잃지 않고
초지일관 변함이 없었다. 또한 여름철과
겨울철 안거의 결제와 해제를 철저히 준수하면서
후학들에게 수행의 규범을 몸소 실천해 보였다.>
** 1956년(丙申年: 69세)
* 여름 안거는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육조정상탑전(六祖頂上塔殿)에서 안거하다.
<* 스님은 육조 혜능대사의 사상과 조계선풍을
선양하고, 보조국사의 목우가풍을 고취하기 위해
"정진제일 효봉선사(精進第一曉峰禪師) "란
별칭을 들을 만큼 철저한
수행정신으로 일관 한 삶이었다.
가는 곳마다 육조 혜능대사의 영정(影幀)과
불일 보조국사의 진영(眞影)을 모 시고 다니면서
조석으로 예배드리고 그분들의
사상을 실천하며 몸소 생활 속에 구현하였다.
또 한편으론 대한불교 조계 종단의 원만한
정화불사를 염원하면서, 육조 혜능 대사의
정골 사리가 안치된 지리산 쌍계사
탑전 선원에서 조용히 안거하였다.
이때 시자로 법정 스님이 시봉하였다.>
* 11월. 네팔에서 개최된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 " 에 참석하다.
<* 한국불교의 정화불사와 유구한 전통을
세계의 불교도들에게 알리고 또한 그 당위성을 널리
천명하기 위해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개최된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동행한 동산(東山) 스님, 청담(靑潭) 스님과 네팔,
인도(印度) 등 부처님 성지를 순례하던 도중,
귀국 길에 안내자가 그만 행방불명이 된 탓으로
불적지(佛跡地)를 어렵게 순방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그러나 이때 언어의 장벽을 절감했던 스님들은 귀국 후,
젊은 승려들에게 현대교육과
영어공부를 하도록 주장하고
종비생(宗費生)을 양성하였다.>
* 대한불교 조계종 "종회의장(宗會議長) "에 추대되다.
** 1957년(丁酉年: 70세)
* 1월.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總務院長) "에 추대되다.
<* 서울 조계사 경내에 총무원 청사로
"정화기념회관(淨化紀念會館) "을 건립하고
한국불교의 전통성을 천명하였다.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잔치에
청와대로 초대된 자리에
"생불생 (生不生) 사불사(死不死)라!
본래 생사(生死)가 없는데 어디에
생일(生日)이 있습니까? 라고 하여
이대통령을 크게 감동케 하였다.>
** 1958년(戊戌年: 71세)
* 대한불교 조계종 제3대 종정(宗正)에 추대되다.
<*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 정화불사 이후
제1대 종정에는 설석우(薛石牛) 스님, 제2대 종정 엔
하동산(河東山) 스님이 추대되었으며
제3대 종정엔 이효봉(李曉峰) 스님이 추대되었다.>
* 여름 안거는 경기도 양주(楊州) 흥국사(興國寺)에
종정실(宗正室)을 마련하고 주석하다.
* 겨울 안거는 대구 팔공산(八公山)
동화사(桐華寺) 금당선원(金堂禪院)에서 주석하다.
<* 이때 동화사에서 시자로
법흥(法興) 스님이 수계 득도하였다.>
** 1960년(更子年: 73세)
* 여름 안거 결제부터 3년 간
미륵산 미래사 토굴에서 주석하다.
** 1962년(壬寅年: 75세)
* 4월 11일. 통합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 초대 종정 "에 추대되다.
<* 드디어 비구. 대처간의 오랜 분규가 종결되고
새로운 통합종단이 탄생되었다. 사찰관리 법에 의해
새로운 종단등록을 마치고 대한불교
조계종의 초대 종정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조계종 전국신도회 총재(總裁)에 추대되었다.
이때 통합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무원장 에는
송광사 출신이었던
임기산(林綺山) 스님이 취임하였다.>
** 1963년(癸卯年: 76세)
* 10월. 대구 팔공산 동화사가 종정 주석사찰로
선정되어 금당선원으로 이석하다.
<*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本寺)인
동화사가 종정스님의 주석사찰로 선정되고
스님 의 제자인 구산 스님이
동화사 주지에 취임하였다.
그리하여 통영 미래사 효봉대에 계신 종정스님을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으로 모셔와 조실스님으로
추대하고 금당선원의 미소실(微 笑室)에 모셨다.
그 후 1966년 5월 13일, 밀양 표충사로
이주할 때까지 구산 스님은 극진한 효순심으로
은사스님을 시봉하였다. 스님은 노환(老患)으로
인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자 곁에 계봉(溪峰)
노스님을 비롯하여 시자로 현호(玄虎),
달진(達眞), 지진(智眞) 등 손상좌(孫上佐) 와
청신녀 정보경화(鄭寶鏡華) 등이 시중을 들였다.>
* 말년엔 "무(無)라 노장(老長) "이란 별명이 생기다.
<* 스님에게 "무라 노장 "이란 별명이 생겼다.
항상 화두일념인
일행삼매(一行三昧)중에 자나 깨나 늘
"무 "라! "무 "라! 하면서
선정 속에 살고 계셨기 때문.
누가 무슨 이야기를 묻더라도 항상
"무라, 무라! " 하였다.
스님은 간혹 "무라, 무라! " 하면서
손을 흔들며 춤을 추기도 하고 "무라, 무라! " 하면서
노래를 부르듯 흥겨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봉하던
시자가 노스님께 조용히 여쭈었다.
"노스님! 노스님께서 "무라,
무라! "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
"조주(趙州) 스님한테 가서 물어보아라. "
"노스님!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조주 스님도 몰랐는데 내가 알 턱이 있나? "
"노스님! 무슨 말씀인지 더욱 모르겠습니다. "
"너, "이뭣고 노장 " 아니? "
"잘 모르겠는데요. "
"옛날에 "이뭣고 노장 "이란 스님이 있었다.
그 노장이 바로 조선시대 유명한
서산대사(西山 大師)의 제자로
편양언기(鞭羊彦機) 선사인데, 한평생을 "이뭣고,
이뭣고! " 했었지. 그 누가 무어라 하고 묻던 간에 항상
"이뭣고, 이뭣고! " 했거든. 그래서 이뭣고 노장이란
별명이 생 기게 된 거야. 그 노장이
"이뭣고, 이뭣고! " 한 뜻을 네가 분명히 알 때
내가 "무라, 무라! "
한 뜻을 알 수 있어. 알겠느냐? "
" …… "
이렇게 스님은 노년에 이르러
"무라, 무라! " 하면서
일상삼매(一相三昧) 중에
마치 어린 아이 처럼
천진난만하게 소요자재 했다.
누구든 이 "무라, 무라! " 한 뜻을
분명히 알 때에,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알 때에 조주 스님을 알 수 있으며,
조주 스님을 알 때에 부처님 법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씀하였다.>
** 1966년(丙午年: 79세)
* 5월 14일. 경남 밀양 재약산(載藥山)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으로 이석하다.
<* 3월에는 구산 스님이 대구 동화사 주지직을
사임하고 금당선원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다
. 5월에는 은사스님을 모시고
밀양 표충사 서래각으로 이석!
그때 표충사 주지에 석정(石鼎) 스님이 취임하고,
총무에는 원명(元明) 스님이 소임을 맡았다.>
* 제자 구산 스님에게 승보종찰
송광사를 중창하길 부촉하다.
<* 동족상잔인 6.25사변으로 인해 북녘 땅
출가본사(出家本寺)인 금강산 신계사에도 가지 못하고,
또 대처 비구 종단분규로 인하여
재적본사(在籍本寺)인 조계산 송광사에도 가지
못 함을 스님은 가끔 스스로 자탄하였다.
그러면서도 제자인 구산 스님에게
불법승 삼보(三寶) 가운데
승보(僧寶)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승보종찰인 조계산 송광사를
중창하여 대진선풍
(大振禪風)하길 간곡히 당부하였다.>
* "병상(病床)의 효봉 스님 " 이란
조선일보의 기사를 읽고 뜻밖의 편지가 오다.
<* 9월 29일. 조선일보 신문에
"병상의 효봉 스님 "이란 기사를 읽고
보냈다는 뜻밖에 편지가 표충사로 날아왔다.
"표충사 석봉(石峰) 스님 존하 " 란 한 통의 편지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스님의 출가 전
가족관계와 함께 많은 사연들이 담겨져 있었다.
이는 실로 충격적인 편지였다.
왜냐면 스님은 출가 이후,
스님 스스로 과거에 대한 사실을
좀체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지금까지 본적은
"평양부(平壤府) 진향리(眞香里) 54번지 "요,
스님의 본명은 "이원명 (李元明) "이라 하였다.
그리고 스님의 출가전 이야기들은 다
전생사(前生事)요, 몽중사(夢中 事)라며 입밖에 담지 않았다.
하기에 스님의 별명들이 말해주듯 스님은 일찍이
조실부모한 고아로써 줄곧 "엿장수 중 "이라 했으며
"절구통 수좌 "니, "판사 중 "이니,
"무라 노장 "이니 하는 별명들이 생겼다.
스님은 일찍이 한국인 초대 판사로써, 송광사
삼일암 선원의 조실 스님으로써, 해인사 가야
총림의 방장스님으로써,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정으로써 근세 한국불교
중흥에 있어서 많은 공적을 남겼지만,
주위에 사람들은 스님을
그런 존칭보다도 더욱 친근하게
"엿장수 중 " 이니, "판사 중 " 이니,
"무라 노장 " 이란 별명으로 통칭해 왔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스님의 출가전의
내력을 자상히 알 수 있는
뜻밖의 편지 한 통이 날아든 것.
이는 정말 상상 밖의 일이었다.
* 훗날 스님의 생애를 살펴보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사료되어,
그 편지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편지 앞면>
* 除禮하옵고
生面不知의 사람으로부터 書信을
받게되어 의아하게 生覺하실 것입니다.
多忙中이라 思慮하와 要件만 말씀드리고저 합니다.
九月 二十九日字 朝鮮日報에 보도된 "病床의 曉峰스님 "을
읽고 小生의 祖父님과 一致하는 点 이 있어 아뢰오니
다음 事實을 參考하셔서 確認해 주시면 大幸이겠습니다.
一. 曉峰스님께서 四十三年前에 두고 떠났다는
두 아들의 姓名이 李永發(長男), 李永實(次男) 이 아닌지요?
二. 小生의 本貫이 黃海道 遂安(稀本)입니다.
三. 李炳億氏는 小生의 曾祖父이시며, 曉峰스님이
李炳億氏의 五男妹中의 三男이라 하셨는데
혹 五兄弟中의 三男이 아닌지요?
四. 曉峰스님의 俗名이 "李燦亨 " 氏가 아닌지요?
五. 李永發氏는 (尙今在日中) 小生의 父親이며
어렸을 때 記事內容과 같은
祖父님의 말을 자 주 들었습니다.
六. 平壤覆審法院에 계셨다는 말도 一致합니다.
七. 祖母님은 二年前에 別世하셨는데, 今年 八十一歲가
되며 이름은 "朴賢 "입니다.
以上 參考로 말씀드리오며 事實이기를 仰望하는 小生의
마음 초조하오니 힘써 도와 주시 면 감사합니다.
一九六六年 十月 四日
서울에서 小生 李仁穆
表忠寺 石峰스님 尊下
<편지 후면>
(遂安李氏)
李 炳億 - 1
- 2
- 3 李燦亨 _ _ 李永發(57歲) _ _
李仁穆(本人: 36歲)
(曉峰스님?) _ 李善穆
_ 李永實
_ 女息(姓名未詳)
- 4
- 5
<* 이상과 같은 편지내용이었다. 편지 뒷면에는
가족의 관계를 상세히 알 수 있는
가계표 (家系表)까지 첨부하여 있었다.
이 뜻밖의 한 통의 편지로써 스님의 출가전
일들에 대해서 추측만 난무했던 사실들이
분명히 밝혀지게 된 것이다.
뒷날 친지들에 의해 알게된 일이지만 스님의 형제들의
이름은 준형(遵亨: 장남), 만형(萬亨: 차남),
춘형(春亨: 4남), 여동생은 탄실(誕實)이었고
5남매(五男妹)중 3남(三男)이었다.>
* 출가 입산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혈육인 장손(長孫)과 상봉하다.
<* 그 당시 조선일보를 보고서 편지를
발송한 날이 10월 4일이요,
이 편지가 밀양 표충사에 도착한 날이 10월 10일이니,
스님이 입적하기 5일전의 일이었다.
이 뜻밖의 편지를 받아 본 구산 스님은 편지내용들을
확인하기 위해 보성 스님을 급히 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이틀 후, 10월 12일 밤. 스님과 꼭 닮은
장남 이영발 거사의 사진을 들고 스님의 장손이라며
이인목 (李仁穆)거사와 그 가족들이 표충사에 찾아 왔다.
생면부지의 손자와 손부(孫婦),
증손(曾孫) 까지 데리고 와 할아버지를 찾아뵙게 된 것.
스님은 출가 입산 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혈육 간의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지게 된 셈이었다. 할아버지와
손자간의 뜻밖의 상봉으로 긴장된 하루 밤을 보낸
이들은 일본에 체류중인 아버지에게 급히
연락을 취한다고 10월 13일 아침 일찍 상경하였다.
스님의 장손 가족들이 왔다 간 후,
더욱 기막힌 사연들이 가슴 아프게 하였다.
스님은 출가 이후 전남 순천(順天) 송광사에 살았고,
장남인 이영발(李永發: 覺幻)
거사는 남북전쟁인 6.25사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곧 바로 월남하여
송광사와는 지척인
전남 광주(光州) 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광주와 송광사와는 지척인데도 그
오랜 세월동안 서로 모르고 살았 다니,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이란 말인가?
그리고 모친께서는 2년 전 광주에서 한 많은
생을 마치고 별세하였다니,
이 어찌 한편의 비극이 아니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스님은 입산 후, 평생을 두고
스님의 본적과 성명, 가족관계 등 세속적 인 것에
대해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세속을 저버린
승려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써
어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이런 스님에게 출가 전 본적과 성명, 가족관계들이
상세히 밝혀졌으니 어찌 놀라지 않았겠는가!
스님도 깜짝 놀랬고, 제자들도 모두 놀랬다.
이는 한 막의 비극인 동시에 엄연한 현실이었다.
6.25사변으로 인한 민족분단의 역사와 함께
남북 이산가족의 한 맺힌 희비쌍곡선이었다.
지난 날 금강산 온정리 과수원 밭 여여원 선원에서
우연히 신혼여행 온 듯한 아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정진하던 자리를 옮겨 면벽하던 때는 도심(道心)이
인정(人情)을 등진 듯하더니만, 오늘 밀양 표충사
서래각에서 뜻밖의 장손과의 상봉은
도심과 인정이 하나임을 보여줌인가?
손자와의 극적인 상봉이 있고 난 후,
스님의 안색은 상기된 모습이었지만 더욱 밝아 보였다.
하지만 세연(世緣)이 다한 듯한
예감을 곁에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 시자의 간청에 의해 임종게(臨終偈)를 읊다.
<* 할아버지 스님 곁에서 하룻밤을 보낸
장손들은 조부님의 상봉소식과 조부님이
생존해 계신다는 사실을 일본에 체류중인
아버지에게 급히 연락해야 한다면서 아침 일찍 떠났다.
하지만 꿈과 같은 혈육의 상봉으로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심경인양 스님은 더욱 자주자주
"무라, 무라! "를 되새기곤 하였다.
이를 곁에서 지켜본
시자가 노스님께 조용히 여쭈었다.>
"노스님! 가시기 전에 한 말씀 안 하시렵니까? "
"난 그런 군더더기 소리 안 하련다. "
"왜요? 노스님! 그래도 한 말씀 하셔야죠? "
"지금껏 한 말들도 다 그런 소린데... "
" …… "
<* 스님은 손에 들고 있던 단주를 굴리면서 한참이나
"무라! 무라! 무라... " 하더니, 조용히 게송을 읊었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어린애 마냥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하지만 이것이
스님 의 열반송(涅槃頌)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吾說一切法 都是早騈拇
若問今日事 月印於千江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
* 10월 15일(음력 9월 2일) 새벽 3시.
문득 제자인 구산 스님을 찾다.
<* 새벽 3시. 도량석 목탁소리가 재약산 골짜기에
은은히 울러 퍼지고 있었다.
이때 스님은 시자실에 있던 시자를 찾았다.>
"거기 누구 없느냐? "
"예, 노스님! 여기 호랑이 있습니다. "
"응, 그래. 너희 스승 모시고 오너라. "
"예, 노스님! 스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
<* 평소 스님은 손상좌인 시자를 애칭으로
"호랑이 "라고 즐겨 불렸다. 이때 시자는 노스님의 옆방
시자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노스님의
행장과 연보를 정리하고 있었다.
왜냐면 전날에 잠시 출타하였다가 향곡(香谷)스님 회상인
월내 묘관음사(妙觀音寺)에 들렸는데, 노스님께서
입적하는 생생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하도 기이하고
생생한 꿈이었기에 급히 표충사로 달려와 은사인
구산 스님께 지난밤 꿈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시자실에서 노스님의 일대기를 정리하고 있던 참이었다.
시자는 노스님을 편한 자세로 앉도록 부축해 드리고,
건너 방에 계시던 은사 구산 스님께 노스님께서
찾으신다고 말씀드렸다. 이내 계봉(溪峰)
노스님과 은사스님, 그리고 시봉들이 다 모여
노스님께 문안 인사를 드렸다. 곁에서 보기에도
노스님께선 이미 세연(世緣)이 다 한 듯 싶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노스님께서 조용히 말문을 여셨다.>
"나, 오늘 갈란다. "
"예? 스님!
언제쯤요? "
"오전에 가지! "
" …… "
<* 스승과 제자인 구산 스님간에 짤막한 문답이 오고갔다.
형언할 수 없는 침묵이 무겁게 흐르고 있었다.
싸늘한 새벽공기가 무거운 정적과 함께 옷깃을 여미게 했다.
숨소리조차도 멈추어 버린 고요함 그 자체였다.
적정삼매(寂靜三昧) 속에
잠겨 있는 듯한 은사스님께 제자 는 가끔 여쭈었다.>
"스님! 화두(話頭) 들리십니까? "
"응, 응... "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던 스님의 모습.
내내 곁을 지키고 있던 제자는 조용히 다시 묻는다.
"스님! 지금도 성성(惺惺) 하십니까? "
"무라, 무라, 무라! "
" …… "
<*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하는
스승과 제자와의 대화만이 오고갔다.
이 엄연한 꿈과 현실! 어떤 것이 꿈이고 어떤 것이
현실인지? 지난밤 꿈에 생생히 지켜봤던 노스님의
임종 장면이 엄연한 현실로 재현되고 있었다.
꿈과 현실이 하나되어 생생하게 눈 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스님이 계시던 서래각엔 새벽부터
정적만이 계속 엄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표충사 종무소엔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
효봉 대종사의 임종 소식을 알리기 위한
문도들의 발걸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 10월 15일(음. 9월 2일) 오전 10시 정각! 입적(入寂)하다.
<* 새벽 3시부터 줄곧 가부좌하신체 앉아 계시던
스님의 자세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 다.
스님의 고개가 약간 옆으로 기울러졌다. 바로 그 순간!
가부좌하신체 정진하던 자세로 그만 입적하신 것이다.
마치 생전에 눈을 지그시 감고 고요히
선정삼매(禪定三昧) 속에 정진하고 있는
듯한 스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둥 둥 두~웅…….
108번 열반종소리가 표충사 도량에 울려 퍼졌다.
효봉 스님의 입적 소식이 108번의 열반종소리와 함께
재약산 골짜기를 넘고 넘어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 때마침 이 날은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추계재향일(秋季祭享日)! 구국성사인 사명대사의
진영을 모신 밀양 표충사에서는 매년 봄가을로
밀양군의 군관민과 종립학교
학생들이 함께 추모법회를 거행하는 날이었다.
오전 10시 정각, 108번의 열반종 소리가 도량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도량에 운집했던 많은
사람들은 사명대사의 재향 법요식이 시작되는
종소리인줄로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
효봉 스님의 입적을 알리는 열반종이라고 하니,
법당 앞 광장에 모인 사부대중은 먼저
효봉 스님 입적에 대한 묵념부터 올렸다.
이렇게 스님은 가신 것이다.
본래 오심 없이 왔다가 가심 없이 가신 것이다.
파란만장한 80생애를 우리 민족의
질곡의 역사와 함께 살다가 가신 것이다.
청산유수(靑山 流水)와 청풍명월(淸風明月)처럼
그렇게 살다 가신 것이다.
집착 없이 살다 자취 없이 가심 이 스님의 생애(生涯)였고,
동체대비(同體大悲)로 인연 따라
소요자재하게 살다 가심이 스님 의 행장(行狀)이었다.
스님의 생애와 행적이 모든 종도(宗徒)들의 귀의처가 되고,
모든 불자(佛子)들의 귀감이 되 어
영원히 상주불멸(常住不滅)하리라.
지금도 스님의 당당하고 천진난만한
자용(慈容)이 눈에 선하고,
스님의 입적을 알리는 밀양 표충사의
열반종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이때 스님의 세수(世壽)는 79세요,
법납(法臘)은 42년이었다.>
* 10월 21일(음력 9월 8일).
서울 조계사 총무원에서 종단장(宗團葬)을 봉행하다.
<* 스님께서 입적한 후, 문도들은 산사(山寺)에서
조용히 입적하신 스님이기 때문에 영결식 (永訣式) 역시
산사에서 조촐하게 거행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였다.
그러나 총무원 임원스 님들은 한사코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스님의 영결식이기 때문에 서울 조계사
총무원에서 성 대히 거행해야 한다고 서로 주장하였다.
결국 이틀 후, 서울 조계사로
운구하여 7일 종단장 으로 거행하게 되었다.
조계사의 법당 앞 광장을 전국에서 운집한
사부대중으로 꽉 메운 가 운데 장엄한 영결식을 봉행하였다.
영결식이 끝난 후, 장례행렬 역시 서울 종로 네거리를
길게 누비는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다비식(茶毘式)은
서울 수유리 도봉산 화계사(華溪寺)
뒷산의 다비장에서 사부대중의 애도 속에 엄숙히 봉행하였다.
다비식을 밤 새워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오색광명(五色光明)이 밤하늘을 찬란히 수놓으며
방광(放光)하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스님의 거룩한 생애와 법력(法力)에
다시 한번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종단의 원로스님과 문도들이 함께
습골(拾骨)하여 사리(舍利)를 수습하니, 오색 영롱한
쇄신사리(碎身舍利) 55과(顆)와 전신사리(全身舍利)가
한 되(一升) 가량 출현하였다.
조계사 법당에선 스님의 사리 친견법회 등을 개최하고
스님의 거룩한 생애와 사상이 모든 언론매체를 통해
사회 각계각층에 널리 알려지게 되자,
당시 침체된 한국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재도약의 활력소가 되었다.>
* 스님의 인연터 마다 사리탑(舍利塔)과
행적비(行蹟碑)를 건립하다.
<* 밀양 표충사에서
스님의 49재 법요식을 봉행한 후,
표충사 서래각 뒤편 산록에
자연거석 (自然巨石)을 옮겨 와
스님의 사리탑으로 천진보탑(天眞寶塔)을 건립하였다.
이듬해인 1967년(丁未年) 4월 15일!
하안거를 기해 스님의
부촉과 유훈에 따라
구산 스님을 비롯하여 많은 문도들이
승보종찰 송광사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송광사의 주지였던 취봉(翠峰)
스님의 간곡한 청원으로
구산 스님은 취봉 스님과 뜻을 같이하여 송광사를
옛 동방제일도량인 승보종찰답게
중창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 후, 스님의 유훈과 가풍을 계승하리라는 문도들의
간절한 발원으로 스님의 승적 본사인
조계산 송광사를 비롯해
미륵산 용화사와 미래사에
각각 스님의 사리탑을 세우고 행적비를 건립하였다.
* 스님의 유촉에 따라 승보도량 조계산
송광사에 조계총림(曹溪叢林)을 설립하다.
<* 1969년(己酉年) 4월 15일! 마침내
하안거 결제일을 맞이하여
승보종찰인 송광사에
종합수도원인 조계총림이 설립되었다.
가야산 해인사에 설립된
대한불교 조계종 제1총림인
해인총림(海印叢林)에 이어 제2총림으로
조계총림이 설립된 것이다.
전국 수좌 모임인 선림회(禪林會)의
노력으로 중앙종회의 의결을 거쳐,
조계총림 설립위원장에는 청담(靑潭) 선사가 추대되고,
초대 방장화상에는 구산(九山) 선사가 추대되었다.
이는 이 시대에 걸맞은 당당한
현전승보(現前僧寶)를 양성하고
조계선풍(曹溪禪風)을 크게 진작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스님이 생전에 제자들에게 늘 부촉하던
승보도량 송광사를 중창하고,
한국불교를 크게 중흥하여
불일 보조국사의 목우가풍을 드높이 선양하라는
스님의 유훈을 결코
저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佛紀 2539年(1995년) 乙亥年 8월 일
曉峰法語集를 增刊하면서
송광사 조계총림 서울분원 法蓮寺 白雲山房에서
後孫 迷衲 玄虎는 노스님께 九拜하옵고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