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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예수님의 제자들
우리가 예수님의 영을 우리의 심령에 받게 될 것이며 전에 없었던 바와 같이 기도의 남녀, 자비와 평화이신 예수님의 진정한 추종자가 되든지 그렇게 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혼돈 안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오늘은 예수님의 때이다.
- 진 바니에르(Jean Vanier)
그리스도교는 결핍을 구하지 않았으나 발견한다. 어려움을 발견을 했으나 노력 하지 않았다.
- 지. 케이. 케스데르톤
콜로라도주 보울더(Boulder)시에 있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책에서, 저자는 아버지를 아는 것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 사이에 연결점에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어떤 친구들은 마약에 중독되어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으므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집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음식과 숙소 등을 제공하는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육신에 대한 공급에 추가하여 그들은 영혼을 위한 어떤 양육을 제의하였다. 저녁에 성경으로부터 어떤 선택과목이 있었다. 대부분의 젊은 청년들은 영혼의 양식을 위하여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인 에디(Eddie)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었다. 그는 디트로이트 시의 거리에서 올라왔다. 그는 그의 양부모가 누구였는지를 몰랐다. 그는 가족이 없으며 주민증도 집도 없었다.
과업 도중에 에디는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는 전과 기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만남의 체험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은 공부에 방해가 되고 그들과 몸으로 싸우므로 교실 밖 현관에 데리고 나가 그곳에서 그를 땅에다 눕혀 놓고 위에서 눌렸다. 세 남자가 에디 위에 앉았다. 저자는 가르치기를 중단하기 않고 계속하면서도 그들이 파티오식(patio) 문 밖에서 에디를 카운슬링 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에디는 ‘나는 기도하고 싶다.’ 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이 남자는 주민증과 가족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는 당신을 오랫동안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원했습니다. 저가 오늘 저녁 아버지라고 불러도 될까요?
제임스 펙커(James Packer)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의 가장 단순한 정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마음을 계시하고 그의 제자(추종자)들을 아버지와의 자기 자신의 관계성 안으로 그들을 인도했다. 아버지에게로의 길은 제자로서 예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좋은 이유가 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따라야 할 가치가 충분한 진실로 최상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분의 주장은 사람으로서보다 더한 것으로 그의 존재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그분은 필수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과 연합을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곧,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 10:30) 그분은 우리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을 한 길 또는 다른 길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마 10:32-33). 그분은 우리들의 깊은 필요성을 만족시킬 수 있음을 주장하며 우리들의 애정과 의미에 대한 필요성을 포함한다(마 11:25-30). 자신을 그렇게 말씀하시는 가운데 예수님은 과대망상광, 나쁜 사람 또는 하나님인 어느 한편임을 계시했다. 더구나 그분의 삶의 질은 그가 역사의 무대를 가로질러서 걸었던 가장 건전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분의 주장은 그분의 말씀과 그의 삶에 의하여 입증 할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역에서도 그러하다. 특별히 개인적인 자유로운 그의 행위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이다. 어느 누가 그러한 분을 따르기로 원치 않겠는가?
왜 제자도인가?
개발국 교회들 또는 신흥 산업 국가에서 숲의 불처럼 성장하는 교회들은 이 사실에 대하여 서방국가들을 가르칠 것이 많이 있다.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관망하기를 ;
이제 대중들은 세계의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고 있다. 얼마나 견딜 수 없는 비극이 될 것인가 말이다. 만일 아시아, 남미 그리고 아프리 카에 살고 있는 수백만 명이 그것을 믿기로 인도되었다면 그리스도의 길에 서부터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유럽과 미국에서 오늘 그리 스도교를 볼 수 있는 수준일 것이다. 오늘 날 그리스도교 교회에 대한 가장 위험한 것은 너무나 낮은 메시지의 전달이다.(1)
그러한 유익한 숲의 불에 직면하여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길이 매력적이며 유쾌한 시골로 여행하였을 때, 왜, 우리가 제자도가 없이 기독교를 위하여 서방 포스트-크리스찬을 안정시킬 수 없는가? 하는 점을 계속 물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복잡한 사안 이다. 조건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설명하는데 사용된다. 또한 무슬림교도들과 무신론자들(atheist)을 계산에 넣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처럼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비-그리스도인인 야비한 용어를 사용한다. 근원적이지만 음모를 자아내는 제안이 일년동안 그리스도인이란 용어에 모라토리엄(moratorium)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성경적인 제자란 용어를 대체할 예정인 것이다. 그 이유를 제안하고자 한다.
제자들과 길
사도행전에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주변에서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이 그들의 삶을 전적으로 전향한 점을 살펴 보고난 이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어진 것에 대한 지칭이 거의 없다. 관찰자들이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유대주의의 종파의 회원으로서 고려하지 않았을 때(행 11:26), 그들은 그리스도-사람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란 말을 만들어 냈다. 분명히 그들의 믿음과 그들의 삶의 패턴에 관하여 물었을 때 믿는 자들은 이런 방법으로 그들 자신들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이 안에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밖에 있음을 의미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대신 그들은 자신들을 제자들로 설명하므로 그들의 주님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알렸으며(행 6:1, 90:1, 13:52) 그리고 그 도(길)의 추종자(행 9:2, 19:9, 23, 22:4, 24:14)들로 지칭했다. 질문에 있는 용어들을 함께 취하여 보면, 누구의 제자인가? 그리고 무슨 목적지의 길(도)인가? 이다. 사람은 가까이 있을 수 있거나 또는 예수님의 먼 거리 추종자 그리고 그들의 주님에 대하여 아직도 직접적인 구경꾼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바로 거기’인 존재에 관하여 자랑하지 않고 옳은 길에서 ‘바로 그길’ 방향으로 가거나 또는 ‘막 시작 했다’에 관하여 실망하거나 할 수 있다. 제자에 대한 헬라어는 바로 진리와 통한다. 그 의미는 수련생, 생도, 도제 혹은 신봉자(adherent)를 말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이란 용어에 대하여 저자가 제안한 모라토리엄(사용 중지)의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나타내기를 원하는 우리들 중 어느 누군가가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라고 한다면 단순히 질문에 나는 예수님의 신봉자입니다 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용어가 신약성경에서 3번이나 사용된 사실에 비하여 제자란 말은 269번이나 사용된 것은 제자도의 화제를 강조하기에 충분한 이유이다.
그리스도인의 길의 핵심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따라, 오랜 전에 문둥이를 만지실 때처럼 오늘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모든 것을 껴않으며 정상적인 인류의 생명 주심의 관계성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동시대인이다. 그래서 제자로서의 실존은 교회를 다닌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며 올바른 믿음 또는 그리스도인 예배에 참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단 한 번의 생명적인 가르침을 따르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의미하나 지금 구루(guru)를 무덤에 매장하거나 혹은 그리스도인 원리에 의하여 사는 것이다. 제자도는 영향을 미치는 초대 그리스도인 제자들이 필연적으로 세상을 변화시켰을 때 그의 과거 실존(최소한 그보다) 보다 영향력이 있는 오늘에 현재의 실존하는 어떤 사람과 더불어 변화되는 관계성이다.
기독교신앙(christianity)은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제자도는 성장, 양육, 교육 친밀감의 심화, 나눔의 목표 그리고 인생 지도, 개인으로서 관계성의 모든 면모들을 의미한다.
하나님에게로 참여하기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 참석을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취부 한다. 비록 우리가 이 책의 후반에서 제안할 것이지만, 교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부분이지만, 첫 번째 과정은 전혀 다른 것이다. 필수적이며 기본적인 초대는 하나님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와 그의 자신의 관계성 안에서 우리를 포함하신 예수님에게 부착을 통하여 이것을 행하게 된다. 이것이 교회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우리들은 그들이 하나님에게 참여하기 전에 사람들을 그렇게 하도록 초대할 때 잘못된 궤도에 있게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집착됨이 없이 교회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대신에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따른 것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종자를 따른다는 것은 언제나 거의 실망하는 체험을 맛보게 된다. 불가피하게 이러한 모델들은 그들의 믿음의 신앙 고백과 삶 사이의 하자를 나타낼 때 또는 그리스도 지도자들의 삼중 테러들(섹스, 돈 혹은 권력)의 하나에 굴복할 때, 진흙 묻은 발을 가지게 됨을 증명한다. 모델들이 실패할 때, 그들의 추종자들은 그들과 함께 실패한다. 이 각성의 아픔은 참기 어려운 것이며 어떤 것들은 회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 보다 얼마나 건강한 것처럼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교제하시기를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인 그들이 따르는 것이 얼마나 잘하거나 부족하거나 관계없이 껴않는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관계는 우리의 영성의 종결이 아님을 의미한다. 예수님과의 관계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다. 예수님에게로 부착함으로 우리들은 예수님이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가졌던 그 생명으로 들어간다. 예수님의 열정이 아버지를 계시하셨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예수님을 배우고 그에게 부착되어 그래서 그에 의하여 교육되어 진 존재는 에디(Eddie)처럼, 가장 위대한 모든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곧, 아빠-아버지에 의하여 알고 또한 알게 되어 질 사람(남자, 여자)들의 고백과 하나님 자신의 가족 안에서 영원히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를 따르는 예수님의 초대의 생명적 중심이다. 그러나 그 초대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부르심이 될 것으로 판명되었다.
제자도에 부르심
복음서는 이처럼 놀라운 개인들(사람들) 주위에 동심원을 그려 내었다. 각 원들은 점진적으로 그의 부르심의 보다 깊은 응답을 나타낸다. 가장 큰 원은 그분이 가르치심과 그의 기적과 이적을 관찰하고 듣기를 좋아했던 군중들을 나타낸다. 그들의 대부분은 적거나 거의 변화 없이 앞으로의 삶을 수행했다. 다음 보다 작은 원은 70 명의 제자들에 의하여 채워졌는데, 그분을 대신해서 짧은 기간 동안 약속된 자들이다. 그리고 12명이 있었다. 이것에 대하여 마가는 예수님이 산에 오르셔서 그가 원하시는 자들을 그에게 부르시자 그들이 나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열두 명을(그들을 사도로 임명하고) 그들이 그와 함께 있어야 하고 그가 그들을 설교하려 보내고 마귀를 몰아내는 권세를 가지도록 약속하셨다(막 3:13-15).
12명 중에 특별히 내적 원(베드로, 야고보, 요한으로 구성된) 안에 있는 세 사람은 야히로의 딸을 고치는 곳에, 변화 산에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3:13-15).
이 동심원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가깝게 다가 갈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의 무대를 가로질러 걸었던 가장 중요한 인물에게 가까이 하는 도전보다 제자도에는 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곧, 부르심이다.
마가의 힘찬 요약이 도움을 준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백성들을 자유하게 하며 능력을 주는 그 분의 지속적인 사역에 참여하여 예수님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으며 그리고 함께 보내심을 받은 자신들임을 아는 사람들이다. 선교와 우정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 제자도(앞으로는 행동, 뒤로는 심사숙고, 그리고 관계로는 안식)의 요건이다. 두 가지가 예수님에 대한 제자도의 범위(차원)이다. 그러나 두 가지 규모 - 그와 함께 있는 것과 보내심을 받는 것- 예수님의 주도권에 달려 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친밀함에 대한 지원자로서 열정적인 자들이지만 위험한 모험가들은 아니다. 1세기에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지원자들 몇 명을 거절하였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 자신을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 제자도의 삶을 지속하고자 우리들로 행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이지 우리들의 좋은 의향이 아닌 것이다. 복음서에서 열두 명의 부르심은 매 세기마다 제자를 위한 모델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부르심을 받다
19세기의 교권주의는 모든 사람에 대한 부르심을 우리들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왜냐하면 교역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교회에서 제도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본질적인 논의는 이처럼 진행되었다. 마가복음 3장 13-15절에 근거한 12명은 특별한 사람들이며 한 번에 모두의 부르심은 1세기에는 12명의 특별한 사람에 대하여 이슈화된 부르심이며 매 계속되는 세대에는 몇 사람을 부르셨다. 첫 세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직업이나 가정을 떠나지 않았으나 이 경이로운 랍비(Rabbi)의 영향에 감사하며 수행하였다. 같은 방법으로 오늘 날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대 제자들같이 동일한 헌신에 부르심을 받지는 않았으나 가정의 체험이나 직업 생활의 정상적인 규범 안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라보기 위하여 다만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열두 명과 같이 실제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승려나 수녀, 또는 선교지역에서 희생적으로 섬길 지원자로서 참여하여야한다
위대한 개혁주의자인 죤 칼빈(John Calvin)은 약간의 특별한 그리스도인이 받게 되고 선교 또는 목회를 시작하게 되는 사전 자격의 비밀한 부르심의 아이디어를 불행하게도 유행 시켰다 대부분의 종파(교단)에서는 성직수임 전에 그러한 부르심의 증거를 아직도 요구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영예를 취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히 5:4) 만이라고 말하여진 구약성경의 성직의 모델로부터 나온 논의는 칼빈의 비밀의 부르심, 각 목회는 하나님 앞에 양심이며 그래서 증거로서 교회가 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2) 이러한 특별한 부르심이 없이는 칼빈은 계속해서 우리의 목회는 하나님에 의하여 승인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모든 믿는 자들의 사제직을 옹호하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조차 두 단계 그리스도교를 부주의하게도 촉진 시켰다. 계층 1은 보편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선택한 보통 사람이다. 계층 2는 교회나 선교 현장에서 규정된 섬김(봉사)으로 부르심을 받은 특별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2 계층의 영성이 없다. 여러 차례 바울의 서신은 그들의 삶에서 전체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하여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소명을 기술한 언어로서 부르심(소명)으로 사용하였다. 모든 사람이 소명을 받았고 사람들이 받은 소명의 가치의 길을 걷기 위하여 권면을 받았다(엡 4:1). 질문은 그들이 소명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라는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들을 귀를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 라는 점이다.
이러한 제자로서의 일반적이며 우주적인 소명 안에서 각 사람은 (사람마다) 그들의 선물(은사)에 적절한 특별한 방법 안에서 하나님을 봉사하기 위하여 예수님에 의하여 인도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목회 사역에 소명을 받은 자들의 특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집을 짓는 사람들의 부르심에도 부합되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이 사실을 침투하는 투명성으로 이해했다. 그의 가르침이 중세 수도원 제도에서 과도한 반응으로 자주 치부되었지만 루터는 신약성경에는 두 계층의 시스템이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수도사 서원은 특별한 소명, 사명, 월등한 그리스도인들이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계명을 성취하는 동안 완전의 권고(의견)를 조망하는 것에 초대되었다는 거짓 가정 위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이 각인에게 일반적인 임무로 다가 왔으므로 특별한 종교적인 사명은 없다.(주3)
차기 세대는 명백한 선례가 있는 복음서에서 열두 명을 부르심을 믿는 즉각적이며 특별한 소명의 교리를 형성하였던 칼빈을 따르기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부르심은 말하자면, 칼빈은 “말씀의 사역은 특별한 방법으로 이러한 사례에 의하여 모든 다른 일을 옆에 두고 인도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약속한 바 있는 교회에 조건 없이 헌신하여야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열두 명의 부르심이 왜 첫 번째 기록에 있어야 하는 가에 대하여 칼빈과 그의 추종자들은 잘못 이해하였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그 시대와 오늘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해설하기 위하여 근본적인 제자들의 부르심을 기록했다. 특별히 교회 지도자나 사제들의 부르심을 정통화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우리를 붙잡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포함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제자가 되는 것을 포함한다. 첫 열두 사도의 체험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다. 디트리크 본훼퍼(Dietrich Bonhoeffer)는 제자의 특별한 범주를 적용하여 예수님의 어려운 말씀을 우리들이 해석하기를 거절한 몇 명 안 되는 저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 그 분은 그가 와서 죽기를 요구한다. 그것 은 처음 제자들이 집을 떠나 그를 따르기 위하여 애썼던 것과 같은 죽음이 되거나 혹은 루터처럼 승려를 떠나 세상으로 들어간 죽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죽음이다. 그 분의 부르심은 옛 사람의 죽음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죽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 므로 예수님과 그 분의 부르심은 우리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인 우리 의 죽음인 것이다. (주5)
동일한 방법으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추종자(제자들)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의 우주적인 부르심을 서술하였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롬 1:6)고 말했다. 바울의 저서 가운데 다른 어느 곳에서나 부르심은 구원과 일치하는 것이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자기 자신의 독특한 소명을 기술하였을 때, 그는 조심스럽게(모든 진정한 제자들에게는 보편적인 체험인)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부르심을 구별하였다. 바울 자신의 부르심으로부터 독특한 모든 사도직에 위임을 받았다. 결정적인 중요성은 바울이(교회 지도자로서 즉각적이며 특별한 부르심) 비밀을 위한 모델로서 자기 자신의 부르심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명 중의 사명
단도직입적으로 이것은 이류급 제자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들 앞에는 두 가지 옵션이 있지 않다. 즉, 풀타임(사역자로 부르심을 입은 교역자)제 파트타임(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은 평신도)제이다. 모두가 예수님과 함께 있기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와 함께 보내심을 받았다. 나사렛 예수의 청문 범위 안에서 모든 것들은 예수님을 출발점(기점)으로 하여 완전한 포기에로 소환되었다. 그리고 충만으로 넘쳐흐르는 생명으로 초대되었다.
영어로 사명이란 말은 제자로서 사명중의 사명이라고 말하는 가운데 우리 브리티쉬 콜럼비아 대학(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서 한 젊은 박사(학생)가 그리스도에게 자기의 생명을 바치기로 그의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재치와 두뇌가 명석하여 인도에서 멋진 경력을 가질 계획이었다. 그가 기도를 마쳤을 때 저자는 그에게 돌아서서 사전에 중재하지 않았던 말을 하기를 ‘당신은 인도의 수상이 되기보다 더 큰 사명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응답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내 인생의 포부는 인도의 수상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것을 하든지 안하든지 간에 당신은 이제 가정생활에서 정치로부터 모든 것을 포용하는 위대한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라고 계속 이야기 했다.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부르심을 받았어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경을 함께 놓고 회합하는데 여러 주가 소요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후속 조치는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부르심을 받은 주체뿐만 아니라 부르심을 입은 백성으로 살기 위하여 내면에서 의미하는 것에 대한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
내면적 제자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무엇과 같은가? 저자는 한번 한 학생이 여러 날 동안 내면에 무엇과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가? 라는 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그의 말 가운데서, 결론이 나기를 요구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지는가? 라는 가장 보편적인 질문과 관련이 있다. 이 질문에 많은 대답들이 주어졌는데, 그들 중에 약간은 매력적이긴 하지만 매우 위험스러운 갈등이 있다.
예수님 닮기
그러한 대답의 하나는 사람이 예수님을 닮는 것에 의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토마스 아큄퍼스(Thomas a^ Kempis's)의 고전 ‘그리스도를 닮아서(The imitating of Christ)'는 이 방법을 추천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큄퍼스는 말하기를 ’우리의 자주적인 최고한 공부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평범하게 이해하고 그들의 구원이 그의 생명에 순응하도록 훈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중 서적이 모든 국면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준다.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좋은 질문이다. 그러나 완전히 기운 빠지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에서 모방의 아이디어는 제자도에서 암시적인 것이다 우리가 따르는 사람처럼 되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자가 그 선생보다 크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니라.’(눅 6:40) 어린이는 부모에게 자신을 자기노출로 곤경에 처하게 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부모를 피할 수 없게 닮는다. 제자와 같이 부모는 문자적으로 모방 과정을 밞는다. 수련생은 선생처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역사를 아름답게 꾸며 온 단지 흠 없는 사람을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상이다. 독특한 제자로서 예수님의 부르심은 나를 ‘닮으라’ 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 이다.
예수님이 그의 생애를 음미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 누가 나를 죄 책 잡겠는가? 하신 것처럼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시점이다. 예수님의 완전한 생활(생애)를 모방하기 위한 갈등은 최고로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되는 불가능한 이상을 향하여 굶주린 자로서 사역의 형태 또는 의의-성취 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자 피.티. 포르쉬뜨(P. T. Forshth)는 예수님은 우리의 최고의 구원자이거나 우리의 최고의 부담이시다 라고 말했는데 그가 옳다. 본보기로서 만일 우리가 그를 닮기를 요구한다면 그는 후자일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그분이 우리를 통하여 그의 자신의 생명을 살려고 하는 가능성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계발하기 전에 우리들은 한 가지 더 잘못된 이해를 바라보아야 될 것이다.
예수님을 순종하기
어떤 사람은 제자란 주인을 닮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인이 요구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체험과 윤리 두 가지이다. 그러나 사람은 제자도의 핵심으로 이것을 촉진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했는지에 대하여 궁금해 한다. 산상수훈(마 5-7장)의 설교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살기를 요청한다.
(1) 특별한 의(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의 의를 초월하는 것-마 5:20)
(2) 백성을 위한 특별한 존경(증오를 포기하는 것- 마: 5:21-26)
(3) 특별한 성적 정절(마음에 들어오는 관능적 욕구를 허락하지 않음 : 마 5:27-30)
(4) 특별한 언약에 대한 충성(이혼하지 않음 - 마 5:31-32)
(5) 특별한 성실(우리의 말에 책임을 지며 맹세를 하지 않음- 마5:33-37)
(6) 특별히 관대함(당신의 의무를 행하는 것 이상과 보복(retaliation)을 하지 않 음 (마 5:38-42)
(7) 특별한 호의 (적과 고소자들을 환영하고 사랑함 - 마 5:43-48
(8) 특별한 관용(비밀히 자선을 베품 마 6:1-4)
이것을 읽은 다음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에 대한 미흡함을 결론 내리게 된다. 예수님의 계명대로 구성되고 말씀대로의 복종하는 사회는 일시적인 죽음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온유한 자가 적어도 우리와 같은 지구에서 땅을 상속을 받지 못한다. 그것은 지나친 말이다. 그러나 경건보다 진리에 더 가까운 사람은 산상 설교에 의한 단순한 삶에 관하여 의견을 말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미래의 어떤 이상적인 왕국(천국)시대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견해에서 도피처를 만들어 예수님의 근본적인 윤리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예수님은 다음의 말씀으로 산상수훈을 결론을 내린다. 곧,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예수님의 윤리는 완전한 변화를 요구한다. 온전한 이 같은 삶에서 결코 완전해 질수 없으므로 우리들은 적어도 완전한 존재(실존)를 시작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마 5;48). 정말로 우리가 예수님과 변화된 관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고서는 우리는 시작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요점이다. 예수님과 관계없는 예수님의 계명은 단순히 불가능한 짐만 될 것이다.
사람은 제자가 되지 않고서도 질투심으로 예수님을 모방할 수 있고 그의 계명을 복종하기를 시도할 수 있다. 두 방탕한 형제들의 우화에서 형처럼 사람은 아버지에 대하여 자기 의를 말할 수 있다. 보세요, 나는 아버지를 위하여 결코 명령에 불복종하지 않았어요(눅 15:29). 그 선한 사람의 최대의 비극은 열심히 일했고 아버지의 명령대로 살았으나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준-그리스도인 형이 우리에게 보여준 사례에서 닮음과 복종보다 제자도에 더 많은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속함의 관계성 안에는 아는 것과 알려진 존재가 있다. 사람의 삶의 종말에 와서 ‘내가 결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 7:23)라는 이러한 통렬한 만유의 하나님의 말씀에 직면되어지는 것보다 더 나쁜 비극을 생각할 수 없다.
예수님을 체험하기
우리들은 지금 사건의 핵심에 와있다. 제자도란 그의 체험을 맛본 가운데서 예수님과 관계성이며 그분을 우리들의 것과 공유하기를 허락하는 것이다. 그분의 생명이 우리를 형성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 안에서 사시기 때문에 산다. 제자 때문에 이것은 성육신, 변모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맛보심을 포함한다.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서 사신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수태로부터 부활에로 완전한 인간 체험을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의 육체적 삶(일, 휴식, 가족 그리고 수면)의 실제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신다. 그리스도 영성은 이 세상에서 투명성을 인식하고 삶의 신성함-세속적 분할을 거절한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살고 그분은 우리의 삶의 종교적 주변 보다 바로 중심에서 우리 안에 사신다. 예수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들의 제안에 비가역적으로 위치하신다. 그래서 우리들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나그네, 갇힌 자(마 25:31-46)에 대하여 마음을 열 때 우리가 그분을 실재로 섬기는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이것은 제자도의 외적 차원의 내적 영성이다. 제자들은 그와 함께 부르심을 받았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보내심은 성육신으로 구체화되었다. 예수님이 삼위일체의 모든 근원으로서 육신을 입으시고 구체화되시어 땅에 보내심 같이 그는 삶과 영적 제물로서 우리들의 모든 삶을 나타내기 위하여 보내는 것이다(롬 12:1-2). 마치 예수님이 자신의 권능과 적어도 마지막이며 잃은 자로서 인식(identify)하기 위한 자신을 비우심 같이 적어도 그리스도인 제자들은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처럼(빌 2:1-11) 자신을 비우는 체험을 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동정하실 때 그는 내려가시고, 신격으로서 그분은 죄 없으신 존재로서 인류와 죄인들과 동등함을 취하셨다. 그러나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인식할 때 아버지께서 내려가실 곳이 없으시다. 우리들은 이미 인간이며 죄인들이다. 몬트리얼 도시 안에 사는 한 친구와 함께 일을 하는데 거기서 우리들은 가난한 자들을 동정하려고 노력하였다. 저자의 친구는 차이를 웅변적으로 표현하였다.
우리를 위한 신원 확인은 다른 계층으로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그러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에 인준하는 것 이상이다. - - - 그분의 얼 굴을 응시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이 변화할 것이다. (고후 3:18)- - 우리가 어떤 계층의 사람들을 신원 확인하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동 안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피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우리들의 신원 확인은 동정을 덜 하는 것이며 생색을 내는 태도를 더하며 자기-축하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신원 확인이 아니라 겸손(자기 비하)이다. 우리 안에서와 우리를 통하여 사역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의 자랑 은 그의 겸손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성육신은 제자도의 첫 번째 패턴이다. 둘째는 변형이다. 그의 변형(눅 9:28-36)에서 예수님은 아름다움으로 자라난 바로 그 존재(실존)보다 그러한 방법 안에서 아버지와 교제하심이다. 이것 역시 예수님과 상대적인 조화의 패턴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므로 내면에서 밖으로 가끔 우리가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지 못한 가운데 우리 개인의 변형(변모)을 체험한다(롬 12:1-2, 고후 3:18). 이것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온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들을 통하거나 투명지를 통하여 빛이 지나감 같이 그 분의 영광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어떤 사람이 색상 투명지를 볼 때 보여 진 것보다 약간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스크나 허영 없이 살 때 그래서 그리스도의 빛에 붙잡혀 살 때, 사람들은 우리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어떤 이미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참조하였다. 곧,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을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이니라.’ 예수님의 제자는 그/그녀가 시내산에서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임재(출 34:29-35)로 일시적으로 그의 얼굴이 빛났던 것보다 변화 산에서 예수님과 같이 빛날 것이다. 성육신(첫 번째 패턴)은 변모를 수반한다.(두 번째 패턴) 그러나 이것들은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 주님의 생명 안에서 인도되었다.(세 번째 패턴)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포기하셨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죄들을 자기 자신 안에 지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므로 우리들은 그분의 몸을 위하여 그분의 고난을 인식한다. 물론 그분의 고난의 남은 것을 채워야한다(골 1:24). 십자가를 지는 것(마 16:24)은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생명의 체험이다. 그것은 순교도 자살도 아닌 것이다. 도리어 예수님과 그분의 관심의 인식으로서 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실체가 발견되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고후 12:9-10도 참조하라). 개인 십자가 위에서 살므로 제자들은 세상의 성공의 정의를 바꾸어 놓았다(빌 3:10).
토마스 아킴퍼스(Thomas a^Kempis)는 제자들의 삶 가운데에서 십자가를 깊게 반영하였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천국)의 많은 사랑을 가졌으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매 우 적다. 그는 위로를 받으려는 많은 사람을 가졌으나 고난을 원하는 사람 은 거의 없으며 그는 식사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발견했으나 금욕(절재) 를 바라는 사람이 거의 없다. 모든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기쁨을 갈망하나 그분을 위한 고통을 감당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빵을 나눔 에는 예수님을 따르나 그분의 수난의 잔을 마시기에는 거의 없으며 많은 사 람들이 그분의 기적을 경탄하나 십자가의 재확인을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 다.
십자가는 죽은 다음 부활, 승천 그리고 보좌에 앉음이 뒤따랐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므로 그분의 통치를 체험하고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사역하기를 허용한다(엡 1:19-21).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음을 보여주었으며 우리 자신의 부활을 기대하며 그래서 오는 세대에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일들의 새롭게 하심을 기다린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의 영광의 상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자신의 개인에게 무엇을 하실 것인가의 권능의 심벌(상징)이며 그분이 모든 일을 새롭게 하시므로 그분의 부활의 능력에 의한 감정의 상처이다. 그리스도를 찬양(세상의 필요에 의하여서가 아니라)하는 이러한 비전은 그리스도인 목회와 선교의 기본적인 근본이다(사 6, 행 7:56, 26:19).
제자들이 얼싸 않으려고 소환하는 것은 무슨 혁명적인 생활인가! 호킹 박사는 전에 하버드대학의 철학 교수였다. 포부가 큰 윤리학 선생이었을 때, 한 학생이 교수님에게 사람이 그의 이웃을 사랑해야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를 그렇게 하도록 돕는 것이 아닐 것이다. 라고 질문하였다. 잇따른 질문은 보다 예리한 추력을 가지고 있었다. 호킹 박사는 ‘이해 할 수 있다’는 입장을 수용했다. 그 학생은 계속해서 예수님이나 니체(Nietzsche)는 세상을 어떻게 뒤엎어 놓을 수 있었는가요 그러나 대학교수가 어떻게 세상을 뒤엎어놓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호킹 박사는 학생이 근본적으로는 옳다고 동의했다. 동기의 요구로 혁명을 일으켜서 세상을 뒤바꿔 놓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정당한 사업이다. 이 장에서 우리가 배웠던 것은 혁명적 요구는 표준, 사례, 또는 규범에 의하여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애정의 배타적인 능력, 살아계신 예수님의 현현으로 우리들의 정상적인 존재의 범람에 의한 것이다. 다만 내가 예수님의 제자이며 추종자들의 추종자가 아니다. 라거나 혹은 그리스도인 원리를 붙잡는 것을 확신할 때, 내가 토마스 아킴퍼스(예수님을 닮아서)의 도전을 내가 듣는 것이 안전하다.
믿을 수 없는 호의, 그 뜻으로 예수님이 우리들의 삶의 문에 서 계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요구하시기보다 초대하신다. 어떤 제한 아래에서 우리들은 우리의 삶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우리들은 모든 다른 사명을 초월하고 사명은 약속된 자유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우리의 심령 그리고 우리의 의지에 혁명적인 요구를 한다. 문에 계신 이 신사 분을 무시하는 것 또한 결정할 수 있다. 온전하신 신사 분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주의 창조자와 함께 조화 없는 인생을 비싼 값을 치르게 될 것이며 정말로 우리들의 십자가로 가는 초대보다 더 값나간다고 할지라도 키엘케골(Kierkegaard)은 천국에 가는 것보다 지옥에 가는 것이 더 값이 나간다고 말했다. 좁고도 좁은 것이 파멸의 길이다(주8).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므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제자들에게 첫 번째 수확은 단순히 예수님과 같이 있다는 것과 그와 함께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보다 높은 것을 위하여 낮은 것과 바꾸며(마 16:25), 하늘의 보화(마 19:21), 예수님과 리더쉽을 공유하고(마 19:278-30) 그리고 영원한 생명(막 10:28-31)은 예수님과 존재의 유익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제자는 자신의 소망을 가진다. 곧,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알리는 것이다.
본 훼퍼는 이것을 값비싼 은혜라고 부르고 그리스도교의 값싼 은혜와 비교하였다.
값싼 은혜란 제자도가 없는 은혜이다. 십자가 없는 은혜는 사는 것과 성육 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이며 값비싼 은혜는 밭에 숨겨진 보화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가서 그가 가진 모 든 것을 팔아서 그것을 사거나 상인이 그의 모든 물품들을 팔아서 사기 위 한 좋은 가격의 진주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적 규범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를 비틀거리게 하여 눈을 뽑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자 들이 그의 집을 떠나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이다.
그러한 은혜는 값비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로 따르라고 부리심이며 그 것은 은혜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로 예수님(그리스도)을 따르라고 하 는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값비싼 것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전 생 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것은 은혜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오직 진정한 생 명을 사람에게 주기 때문이다(주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