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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심기도] 향심기도란 어떤 기도인가요? (1)
가끔씩 만나는 이 아무개 신부님은 다른 이 아무개 신부님과 저를 보면 “어이 향심이들 잘 지내나?”라고 하십니다. 이 아무개 신부님과 제가 향심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향심기도, 한 번쯤은 들어본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만 정작 향심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그리고 왜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알고 계시거나 향심기도를 하고 계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향심기도 전반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향심기도(Centering Prayer), 이름부터 생소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사람 이름 같기도 합니다만 향할 향(向) 마음 심(心), 즉 마음을 향하는 기도, 좀 더 구체적으로는 존재의 중심을 향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데 우리의 마음 깊은 곳(참 자아)에 현존하시기에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우리의 내면, 존재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향심기도의 시작은 1970년대 초 미국 메사추세츠 주 스펜스에 있는 성 요셉 수도원장이었던 토마스 키팅 신부와 윌리엄 메닝거, 바실 패닝턴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토마스 키팅 신부는 1971년에 로마에서 개최된 한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 회의에서 바오로 6세 교황은 성직자들에게 수도자와 평신도 모두의 삶에서 복음의 관상적 차원을 부흥시키도록 요청하셨습니다. 이러한 부흥의 중요성을 믿은 키팅 신부는 성 요셉 수도원의 수사들에게 동방의 명상 수련법만큼 현대인들에게 호소력 있고 접근하기 쉬운 그리스도교 관상 기도 방법을 계발하도록 요청하게 되었고, 같은 수도원의 윌리엄 메닝거 수사는 14세기의 익명의 고전 『무지의 구름』에서 그러한 기도 방법의 배경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책과 또 다른 관상 서적을 이용하여 단순한 침묵 기도 방법을 계발하고 그것을 ‘구름의 기도’라고 부르게 됩니다.
메닝거는 그 수도원에 피정하러 온 사제들에게 ‘구름의 기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많은 이들에게 환영받았고 소문이 퍼지자, 더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싶어 했으므로 키팅 신부는 스펜서의 평신도들에게 연수를 제공하게 됩니다. 같은 수도원의 바실 페닝턴 수사 역시 성 요셉 수도원 밖에서 피정에 온 사제와 수녀들에게 ‘구름의 기도’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토마스 머튼은 관상 기도란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믿음 -우리는 오직 이 믿음만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알 수 있다- 에만 온전히 초점을 맞추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한 피정에서 누군가가 토마스 머튼의 이와 같은 관상 기도 정의를 언급하면서 이 기도의 명칭을 향심기도로 바꾸자고 제안하였고 그때부터 이 기도를 향심기도라 불렀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990년대 후반에 왜관 베네딕토 수도원을 통해 구심기도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고, 2000년대 초반 재미교포인 엄무광(1940~2011, 바트리시오) 형제에 의해 전해지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2024년 1월 28일(나해)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가톨릭마산 8면, 윤행도 가롤로 신부(월영본당 주임)]
[향심기도] 향심기도란 어떤 기도인가요? (2)
“향심기도는 관상기도의 선물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는 침묵기도입니다. 관상기도를 통해 우리 안에 계시며, 숨결보다 가깝고 사고보다 가까우며 의식 그 자체보다 가까운 하느님 현존을 체험합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이면서 그 관계를 촉진시키는 훈련이기도 합니다.
향심기도는 다른 기도를 대체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기도에 깊은 의미를 더하며 능동적 기도 -소리기도, 정신기도, 정감적기도- 에서 하느님 안에서 쉬는 수용적 기도로 옮아가게 도와주지요. 향심기도는, 기도가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라는 것과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대화를 넘어서 그분과의 친교로 나아가는 움직임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향심기도의 원천은, 관상기도로 이끄는 모든 방법에서와 마찬가지로 내주하시는 삼위일체, 즉 성부, 성자, 성령이십니다. 향심기도의 초점은 우리와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것이며, 향심기도의 효과는 공동체적입니다. 곧 이 기도는 믿음의 공동체를 건설하고 그 구성원들을 상호 우정과 사랑 안에 결속시키는 데 이바지합니다.”(한국관상지원단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향심기도가 어떤 기도이고 어떻게 하는 기도인가를 말씀드리기 전에 왜 향심기도, 즉 관상기도를 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발달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세 가지 기본적인 욕구가 생겨난다고 합니다. 0~2세쯤에 형성되는 안전과 생존의 욕구, 2~4세쯤에 형성되는 애정과 존중의 욕구와 힘과 통제의 욕구가 그것인데, 이 세 가지 욕구는 인간으로 하여금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원천으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 가지 욕구가 무의식(비의식)에 자리를 잡아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하는, 모든 에너지의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감이나 만족감을 느끼고 반대로 욕구가 좌절되면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분노, 슬픔 등의 부정적인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라면서 욕구의 좌절을 경험하게 되고 그때마다 보상심리가 작용하여 욕구를 충족시켜 줄 그 무엇을 찾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참자아와 반대되는 거짓 자아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아 일생 동안 우리의 삶을 좌우하게 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물건을 살 때 필요한 만큼만 사지 않고 항상 여유로 한두 개를 더 삽니다. 일곱 남매 중 여섯째로 자라면서 형들이 제 것을 가져갔던 기억 때문에 제 것을 여유 있게 마련하고자 하는 욕구(안전과 생존) 때문입니다.
제가 부제였을 때 강론 실습 시간에 담임 신부님이 어떤 모습의 사제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각자의 각오, 즉 ‘사목강령’을 적게 하여 동료들 앞에서 발표를 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발표한 ‘사목강령’에는 무려 32가지의 결심이 들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한가위나 설 명절 때 사목위원들께 제 돈으로 선물을 해드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심대로 사제로 서품된 후 제법 오랫동안 본당 사목위원님들께 명절 선물을 드렸었는데 향심기도를 하게 되면서 그렇게 하는 ‘숨은 동기’를 찾아보았더니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 듣기 위함이었습니다(애정과 존중의 욕구).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칭찬받은 기억이 없어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받고자 무의식적으로 어떤 행동들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 짓’을 그만두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거나 봉사라 하더라도 그 동기가 순수하지(정화되지) 못하면 그 일을 통해 영적으로 진보하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하게 됩니다. ‘숨은 동기’란 세 가지 욕구가 좌절되거나 완전히 충족되지 못함으로 인해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써 우리의 의식이나 행동을 유발시키는 감추어진 동기를 말합니다. [2024년 2월 25일(나해) 사순 제2주일 가톨릭마산 8면, 윤행도 가롤로 신부(월영본당 주임)]
[향심기도] 향심기도란 어떤 기도인가요? (3)
힘과 통제의 욕구에 대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1~20년 전만 해도 시나 도 경계를 넘어갈 때 경찰 검문소가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신분증을 요구했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운전면허증 제시를 요구하는 경찰관에게 “당신은 경찰관으로서 저에게 신분증을 요구할 수는 있지만 제가 현행범도 아니고 당신에게 영장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며 운전면허증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그런 권리가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러면 경찰관이 ‘이놈 봐라!’는 표정을 지으며 차적조회를 하거나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시간을 끌며 이것저것 조사를 합니다. 그렇게 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저를 보내며 형식적인 인사를 합니다. 그러면 저는 경찰관을 불러 세우고는 “이보세요.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어,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게 했으면 정중하게 사과를 해야지 그게 뭡니까?”라며 따집니다. 경찰관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안녕히 가입시더.”라고 말하며 거수경례까지 합니다.
언젠가 제가 자주 가는 피정집 수녀님들을 모시고 남해-창선대교를 건너가다가 검문을 받게 되었는데, 제가 여느 때처럼 하는 것을 보고는 수녀님들이 그냥 면허증 보여주면 금방 끝날 텐데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경찰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인데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위세 부리는 모습이 꼴사나워 그렇게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집으로 돌아와 ‘숨은 동기’를 살펴보았더니 힘과 통제의 욕구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별명이 갈비였을 정도로 체구도 작고 약해서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이나 시달림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힘을 길러 언젠가는 다른 아이들을 눌러 이길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사제로 서품되고 나니 제 뒤에는 가톨릭교회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어 그것을 믿고 권력기관인 경찰에게 대들었던 것입니다.
‘숨은 동기’를 찾아내고 난 뒤부터는 경찰관이 요구하기 전에 먼저 운전면허증을 보여드리고 수고하신다는 인사까지 건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안전과 생존의 욕구, 애정과 존중의 욕구, 힘과 통제의 욕구는 우리의 내면(무의식)에 자리 잡고 앉아 한평생 동안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 가치관 등을 통제하고 조정(지배)하는데 문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이 자신의 감정을 건드려 기분이 좋지 않거나 좋았을 때, 사실은 그의 말이나 행동이 자신의 무의식에 있는 세 가지 욕구 중 하나를 의식 속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인데, 그렇기에 감정 변화의 원인이 본인에게 있음에도, 우리는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립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영적으로 점점 퇴보하게 됩니다.
우리가 미사 중 참회 예절 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하는 의미도 바로 그런 의미, 감정 변화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을 변화시키고 말과 행동을 지배하는 세 가지 욕구는 무의식 속에 있기에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치유자이신 성령만이 그것을 치유하실 수 있는데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가 관상기도를 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관상기도 중에 일어나는 은총 중의 하나가 내적(무의식) 치유입니다. [2024년 3월 24일(나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톨릭마산 8면, 윤행도 가롤로 신부(월영본당 주임)]
[향심기도] 향심기도란 어떤 기도인가요? (4)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6)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치(설거지) 상으로는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잔의 속뿐만 아니라 겉까지도 깨끗이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잔 속, 즉 우리의 내면(무의식)을 정화하면 잔의 겉, 즉 행동이나 말은 저절로 깨끗해진다는 뜻으로 뒤집어 생각하면 내면을 정화하지 않으면 행동이나 말은 고쳐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 5,39-40)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
성격이 매우 급하고 직선적이며 억울한 일을 당하면 결코 참을 수 없는 저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성인들이나 하실 수 있는 그런 말씀으로 들려왔고 예수님이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려니 하였습니다.
그런데 향심기도를 하기 시작한 지 일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면서부터 저도 모르게 조금씩 변화되고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친구나 친척 중 누군가가 저에게 하대 말을 했을 때 기도하기 전에는 “이 양반(놈) 봐라!”라는 생각과 함께 불쾌한 감정이 불쑥 올라왔었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웃으며 대답합니다. 교우님들 중 저에게 반감을 보이고 미사에 나오지 않거나 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때, 찾아가서 용서를 청하거나 전화로 사과드리기도 하고 그분들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됩니다.
관상기도를 통해 내면의 정화가 일어나면 켜켜이 쌓여 있던 우리의 거짓자아가 치유되면서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참자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잃어버리고 있던 본래의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저를 아는 분들은 저의 눈빛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고 계실 것입니다. 평소에도 날카롭고 강렬한 편이지만 열을 받았을 때는 그야말로 레이저 빛이 뿜어져 나오는, 언젠가 교구청 앞 건널목에서 시비가 붙었던 그 사람이 “저 새끼 눈깔 봐라!”라고 했던 그런 눈빛인데 이번에 부임한 월영본당 교우님이 “참 인자해 보입니다.”라고 하십니다. 지난 22년간의 향심기도가 저의 눈빛마저 변화시킨 것이지요.
저의 내면이 정화되면 제 말이나 행동뿐만 아니라 모습까지도 변화되어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본래의 모습, 참 좋은 모습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저를 조금씩 조금씩 좋은 모습으로,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근원적인 힘은 관상기도(향심기도)입니다.
어떤 곳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하고 말합니다.
이때 ‘기도’에 사용된 단어가 아람어 ‘shela’(샬루)인데, ‘자신을 열어 놓는 것’ ‘하느님의 현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는 뜻으로 오늘날 우리가 관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관상기도는 예수님 시대 때부터 보편적으로 행해졌지만 15~17세기를 거치면서 신학의 발전과 문예부흥, 인간 이성의 강조 등등 여러 가지 시대적, 교회 내적 상황과 맞물려 정신 기도는 생각을 주로 하는 추리적 묵상, 의지의 행위를 중점적으로 하는 정감적 기도, 하느님에게서 주입된 은총이 우세한 관상으로 구분됩니다. 추리적 묵상과 정감적 기도와 관상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기도 속에서 발견되는 다른 행위가 아니라, 각각 다른 목표와 방법과 목적을 갖는 별개의 기도 형태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의 과정이 완전히 분리된 개별 단위로 나눠지면서 관상이 극소수에게 제한된 비상한 은총이라는 잘못된 개념이 퍼져나갔고, 그로 인해 관상은 대중(일반 신자들)을 떠나 봉쇄수도원으로 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2024년 4월 28일(나해) 부활 제5주일 가톨릭마산 8면, 윤행도 가롤로 신부(월영본당 주임)]
[향심기도] 향심기도란 어떤 기도인가요? (5)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관상기도가 봉쇄수도원 안으로 숨어 버린 것이 동서양 교회의 분열이나 루터의 종교 분열보다 더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땅에 2천만 명(개신교와 가톨릭을 합쳐)에 육박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가치가 사회 곳곳에 전해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관상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관상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고 묻는 사람들에게 내놓은 대답이 향심기도라고 보시면 되는데, 그렇다고 향심기도가 전통적(주부적) 의미의 관상기도라는 말은 아닙니다. 향심기도는 관상기도로 들어가는 입문의 기도이며 넓은 의미에서 관상기도입니다.
향심기도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예전부터 가톨릭교회 안에 있어 왔던 기도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6) 향심기도는 이 말씀에 근거한 기도이며, 향심기도 때 사용하는 거룩한 단어는 14세기 영국의 영성 서적 「무지의 구름」에서 따왔고, 요한 카시안,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성요한, 리지외의 데레사, 토마스 머튼과 같은 크리스챤 관상 전통에 크게 기여한 저자들에 의해서도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향심기도의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 향심기도 방법의 네 가지 지침
I. 우리 안의 하느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한다는 지향의 상징으로서 거룩한 단어를 선택한다.
1. 거룩한 단어는 우리 안의 하느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한다는 지향을 표현한다.
2. 거룩한 단어의 선택은, 우리에게 적합한 단어를 주십사 성령께 영감을 청하는 짧은기도 중에 이루어진다.
예) 하느님, 예수, 아빠, 아버지, 어머니, 마리아, 아멘 등.
또 다른 예) 사랑, 경청, 평화, 자비, 놓아버림, 침묵, 고요, 믿음, 신뢰 등.
3. 어떤 사람에게는 거룩한 단어 대신에 신적 현존을 향한 단순한 내적 응시나 자신의 숨결에 주목하는 것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 거룩한 단어에 적용되는 것과 같은 지침이 이러한 상징들에게도 적용된다.
4. 거룩한 단어가 거룩한 이유는 그 단어 자체가 지니는 의미 때문이 아니라, 우리 지향과 동의의 표현으로서 우리가 그 단어에 부여하는 의미 때문이다.
5. 일단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고 나면, 기도 중에는 그것을 바꾸지 않는다. 그것은 또다시 사고하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Ⅱ. 편안히 앉아 눈을 감고,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우리 안의 하느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한다는 상징으로서 고요히 거룩한 단어를 떠올린다.
1. ‘편안히 앉는다.’는 말은 기도 시간 동안 잠이 오게 만들지 않을 정도로 비교적 편안히 앉는다는 뜻이다.
2. 어떤 자세로 앉든지 등은 바르게 편다.
3. 우리는 눈을 감는다. 이는 우리 주변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 떠나가도록 놔둔다는 상징이다.
4. 솜털 위에 깃털을 내려놓듯이 거룩한 단어를 부드럽게 내면으로 불러들인다.
5. 잠이 들었다면 깨는 대로 기도를 계속한다.
Ⅲ. 생각에 빠져들었다면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간다.
1. ‘생각’이란 모든 지각 활동을 일컫는 포괄적 용어이다. 여기에는 신체 감각, 감각적 지각, 느낌, 영상, 기억, 계획, 성찰, 개념, 비평, 영적 체험 등이 포함된다.
2. 생각이란 향심기도의 불가피하고도 필수적인, 그리고 정상적인 부분이다.
3.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간다’는 말은 최소한의 노력을 가리킨다. 이것이 향심기도 동안 우리 편에서 시작하게 되는 유일한 활동이다.
4. 향심기도가 진행되는 동안 거룩한 단어는 희미해지거나 사라질 수도 있다.
Ⅳ. 기도 시간이 끝나면 2, 3분간 눈을 감고 침묵 중에 머문다.
1. 이 추가시간 2, 3분은 우리가 침묵의 분위기를 일상 속으로 가져갈 수 있게 해 준다.
2. 만일 이 기도가 그룹으로 행해질 경우에는, 리더가 ‘주님의 기도’와 같은 기도를 천천히 암송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경청한다.
● 몇 가지 유의할 사항
1. 이 기도의 최소 시간은 20분이다. 하루에 두 번, 한 번은 아침에 또 한 번은 오후나 이른 저녁에 행할 것을 권한다. 실천해 감에 따라 기도 시간이 30분 혹은 그 이상 연장될 수도 있다.
2. 기도 시간의 종료는 타이머로 알릴 수 있는데, 그것은 똑딱거리지 않는 것 혹은 알람 소리가 크지 않은 것으로 사용한다.
3. 기도 중에 생길 수 있는 신체 증상
a. 신체 여러 부위에서 가벼운 통증이나 가려움, 씰룩거림이 감지되거나 혹은 막연한 불안감이 감지되기도 한다. 이것들은 대개 신체의 정서적 응어리들이 풀리는 데서 기인한다.
b. 손발이 무겁게 느껴지거나 가볍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것은 대개 영적 주의력의 차원이 깊어진 데서 기인한다.
c. 어떠한 경우든 개의치 않고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되돌아간다.
4. 기도의 주된 열매는 기도 중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체험된다.
5. 향심기도는 우리를 하느님의 첫 번째 언어인 침묵에 친숙해지게 만든다. [2024년 5월 26일(나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가톨릭마산 8면, 윤행도 가롤로 신부(월영본당 주임)]
[향심기도] 향심기도란 어떤 기도인가요? (6)
향심기도 시간이 최소 20분인 이유는 우리가 내면 깊숙이 침잠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20분이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거나 약을 먹을 때 하루에 한 번 먹는 것보다 두 번이나 세 번 먹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좋듯이 하루에 한 번 기도하는 것보다 두 번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침에 한 기도를 통해 영적 저수조에 담긴 내적 평화는 오전의 일상을 통해 다 빠져나가기에 오후나 이른 저녁에 한 번 더 하는 것입니다.
오후나 이른 저녁에 기도 시간을 낼 수 없을 때는 아침기도 시간에 40분을 할 수 있습니다만
가끔씩 예외적인 경우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가 깊어지면서 기도 시간을 늘리는 것은 적극 권장합니다만 이런저런 이유로 기도 시간을 줄이는 것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휴대폰을 무음으로 하고 타이머를 맞춰 놓거나 구글 play스토어에서 centering prayer 앱을 설치해서 사용하시면 편리합니다. 올해 말쯤 우리말로 된 향심기도 앱이 보급될 예정입니다.
향심기도를 시작하게 되면 신체적, 심리적으로 방어기제가 약해지면서(이완되면서)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이나 가려움, 무엇인가에 무겁게 짓눌리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눈물이 흐르기도 합니다. 어떤 현상이 일어나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생각으로 간주하고 거룩한 단어로 부드럽게 돌아가면 됩니다. 시간이 좀 지나고 기도가 진행되면서 그런 현상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입니다.
향심기도를 계속하게 되면 영적언어를 말하게 된다거나 치유의 은사를 받는 등의 특별한 은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씩 기도 중에 흔히 영적체험이라고 말하는 감각적 위로가 주어지기도 합니다만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만 제한적으로 주어집니다.
향심기도의 은총(열매)은 삶의 변화입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에 사랑을 담아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아니 세상이 변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게 됩니다.
관상기도의 은총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예수님 가르침의 진수라고 하는) 참된 행복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024년 6월 23일(나해) 연중 제12주일 가톨릭마산 8면, 윤행도 가롤로 신부(월영본당 주임)]
[향심기도] 향심기도란 어떤 기도인가요? (7)
현대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침묵일 것입니다.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에 침묵(입으로 말하지 않는 외적 침묵뿐만 아니라 생각조차 멈추어서는 내적 침묵까지)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1분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집에서나 거리에서나 찻집에서나 잠시의 시간만 나면 휴대폰을 꺼내 듭니다. 현대인들에게 침묵은 너무나도 낯선 외국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침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첫 번째 언어가 침묵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하느님은 절대신비, 궁극신비이시기에 우리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하느님께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침묵 가운데 가만히 멈추어 서서 하느님께로 우리 자신을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준비된 만큼 알아들을 수 있는 만큼 당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침묵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우리나라 개신교의 가장 큰 맹점은 침묵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젠가 향심기도 피정에 서울에서 목회하시는 중년의 목사님 세 분이 오셨는데 침묵하는 것을 너무 어려워하셔서 침묵의 의미를 설명해 드렸더니 침묵에 그런 의미가 있었느냐며 깜짝 놀라시더군요.
향심기도를 하게 되면 침묵에 친숙해지고 침묵에 맛 들이게 되며 침묵의 효과를 일상생활로 가져오게 됩니다.
육신의 건강은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통해서 얻어지지만, 영적인 건강은 침묵 속에 가만히 머무름을 통해 주어집니다. 사람은 육과 영으로 구성된 존재이기에 육의 건강뿐만 아니라 영의 건강도 중요합니다. 육과 영이 건강의 균형을 이룰 때 온전히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향심기도를 시작한 지 이삼 년쯤 지나면 이 기도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저도 기도를 시작한 지 삼 년쯤 되었을 때 ‘도대체 이 기도를 언제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문득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사십여 년 동안 매일 같이 밥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는데 한 번도 이 밥을 언제까지 먹어야 하는지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아! 그렇구나. 때가 되면 밥을 먹듯이 그렇게 향심기도를 하면 되겠구나.’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이십여 년을 매일 밥을 먹듯이 하루에 두 번이나 세 번 향심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향심기도를 시작한 지 십 년쯤 되었을 때 저 자신을 살펴봐도 별로 변화된 것이 없다는 생각에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매우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즈음에 강원도 삼척에 있는 대금굴을 찾 되었는데 동굴을 안내하시는 분의 설명을 듣고는 그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습니다. [2024년 7월 28일(나해)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가톨릭마산 8면, 윤행도 가롤로 신부(월영본당 주임)]
[향심기도] 향심기도란 어떤 기도인가요? (8)
동굴 천정에서 자라는 종유석은 100년에 1mm씩 자란다고 합니다. 1년에 겨우 0.01mm씩 자란다는 것인데 사람의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조금씩 자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나의 영적 성장도 저와 같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성장이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더디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라는 속도가 아니라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도 저의 성장 속도가 아니라 멈추지 않고 계속 성장하고 있음을 보실 것입니다. 그렇게 용기를 얻고 나니 일 년, 이 년, 십 년, 이십 년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매일 같이 향심기도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향심기도의 열매(선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올해 초 월영본당에 부임해서 두 차례에 걸쳐 향심기도 소개 강의를 했는데 140명 정도 참석하셨고 매주 토요일 오전과 저녁 두 차례 하는 기도 모임에는 60명 정도 나오고 계십니다. 기도 모임에 나오시는 분 중 많은 분이 향심기도를 하게 되면 뭐가 달라지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동안의 제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급하고 직선적인 성격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한 곳에 가만히 있지를 못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 심부름을 하거나 어디를 가더라도 뛰어가야만 직성이 풀렸습니다. 그런 저에게 20분간의 향심기도 시간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고 나서 제법 오랫동안 20분간의 시간이 마치 2시간처럼 느껴졌는데 한 번은 분명히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은데 알람이 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알람 시작 버튼을 누르지 않았거나 알람이 고장이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살며시 눈을 떠서 알람을 보았더니 알람은 이상 없이 작동하고 있었고 겨우 8분이 지났을 뿐이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지금은 한 번 기도를 시작하면 한 시간을 앉아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단체 연피정 봉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매일 저녁에 성체를 현시해 놓고 한 시간의 성체조배를 했었습니다. 제가 제일 앞자리에 앉아 조배를 했었는데 피정을 마치고 피정자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한 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우연히 성체조배 시간 동안 뒤에서 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조배하는 동안(약 50분간) 제가 미동도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졸거나 가만히 앉아 있어도 약간의 움직임이 있을 것인데 어떻게 미동도 없이 앉아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아! 이제 내 몸이 내 마음을 알아듣기 시작했구나. 기도를 시작하니 몸도 숨 쉬는 것 외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고요히 침묵 속에 있구나.’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것은 마치 야생마를 잡아 사람이 탈 수 있는 말로 길들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의 몸,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은 침묵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떻게든 움직이게 되어 있고 그것이 살아 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깊어지면 몸과 마음의 통교가 이루어져 몸이 마음을 알아듣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하면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깊은 침묵 속에 잠기는 것이지요. [2024년 8월 25일(나해) 연중 제21주일 가톨릭마산 8면, 윤행도 가롤로 신부(월영본당 주임)]
[향심기도] 향심기도란 어떤 기도인가요? (9)
향심기도를 시작하고부터 자연환경에 관한 관심도 깊어지게 시작했는데 일상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바깥에서도 물티슈나 티슈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신 손수건을 사용합니다. 지난 2022년 초 백신후유증으로 2주일을 입원해 있는 동안 티슈는 한 장도 사용하지 않았고 침대에 붙어 있는 간이 탁자를 닦기 위해 물티슈 한 장만 사용했었습니다.
지난 2017년 안식년 동안 머물렀던 아파트가 14층이었는데 무거운 짐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걸어 다녔고, 지금도 웬만한 건물이나 거리는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고속도로에서는 시속 80km로 운전하고 다니는데 시속 100km로 다닐 때와 비교하면 가득 주유했을 때 약 100km를 더 갈 수 있습니다.
밤에 잠자기 전 정수기나 컴퓨터 등 모든 전원을 완전히 차단하고 정장 외에 어떤 옷도 다려입지 않습니다. 장백의나 약식제의, 성작수건도 다리지 않고 성작수건의 경우 한 장으로 사나흘은 사용합니다. 세면 수건도 한 장으로 일주일을 사용합니다. 화장실의 경우 서너 번의 소변을 본 후 한 번만 물을 내립니다. 세수나 샤워할 때 비누나 샴푸는 전혀 쓰지 않고 손에 이물질이 묻어 잘 지워지지 않을 때만 비누를 사용합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떨어지지 않는 한 새 옷은 입지 않기로 결심하고 충실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여건상 이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관상기도의 열매는 성령 칠은의 아홉 가지 열매와 연결됩니다. 우리가 관상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깊어지고 있다면 이 열매들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열매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관계의 깊이나 진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 여겨도 좋습니다.
성령 칠은의 아홉 가지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사랑 :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아가페적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하며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게 자기가 생각하는 사랑을 강요합니다. 본인의 특성이나 의견을 무시한 채 시대적 흐름이나 부모의 판단만으로 자녀의 진로를 정한다거나 개나 고양이의 본능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대로만 키우는 모습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2024년 9월 22일(나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가톨릭마산 8면, 윤행도 가롤로 신부(월영본당 주임)]
[향심기도] 향심기도란 어떤 기도인가요? (10)
관상기도를 통해 무의식의 정화가 일어나면 그러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넘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타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인간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사랑이기에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것 자체가 곧 보상입니다.(사랑은 사랑이 보상입니다) 그러므로 아가페적 사랑을 실천하고도 보상은커녕 누군가가 알아주지도 않고 칭찬의 말조차 없어도 결코 실망하지 않습니다.
기쁨 : 기뻐해야 할 일이 없어도 샘솟는 기쁨으로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느끼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뻐해야 할 일, 이를테면 잃었던 건강을 되찾았거나 누구에게 칭찬을 들었거나 시험에 합격했을 때 기뻐하지만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은 하느님 현존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기쁨의 삶을 살아갑니다.
성체조배를 열심히 하시는 어느 자매님이 하루는 성체조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지나가던 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 초면에 죄송합니다만 좋은 일이 있으세요?”라고 묻더랍니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아주머니 얼굴이 너무 밝고 편안해 보여서 무슨 좋은 일이 있나 싶어서 물어보았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 자매님이 성체조배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다가 왔기에 그 기쁨이 만면에 드러난 것이지요.
평화 : 세상 풍파 속에서도 유지되는 평화로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힘(무력)이나 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평화로 그것이 없으면 평화는 깨어집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로 주어지는 평화는 세상의 그 무엇에 의존해서 얻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세상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 인해 주어지는 평화이기에 재물이나 다른 사람과의 갈등과 같은, 그 어떤 것도 그 평화를 깨트리지 못합니다.
인내 :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고 하느님이 주시는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4-15)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 특히 힘이 있거나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일을 처리하며 모든 것의 중심이 자신인 양 여깁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되 그 일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이 허락하실 때까지 묵묵히 참고 기다립니다. [2024년 10월 27일(나해) 연중 제30주일 가톨릭마산 8면, 윤행도 가롤로 신부(월영본당 주임)]
[향심기도] 향심기도란 어떤 기도인가요? (11)
친절 : 이웃의 어려움을 알고 따뜻하고 우호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요즘같이 세상이 각박해지고 개인주의가 심화하는 사회에서 잘 모르는 사람이나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기란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그 사람이 비록 일면식도 없거나 자칫 그 사람을 돕다가 자신이 피해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에게 친절(도움)을 베풉니다.
선행 : 주님께서 주신 재산, 시간, 재능을 관대하게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랑과 직결되는 열매로써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재산이나 시간, 재능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주님이 주인이심을 깨달았을 때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선행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물질적인 것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며 혼자 계시는 어르신을 찾아가 말벗이 되어 드린다거나 자신이 지닌 재능을 아무런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면 됩니다.
진실 : 거짓 없이 신뢰할 수 있고 착수한 일을 끝까지 완수하는 충실성을 의미합니다.
작은 일에도 거짓 없이 진실로 임하고 자신의 사소한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한번 시작한 일을 끝까지, 비록 도중에 어려움이 닥치거나 자신에게 손해가 돌아올 상황이 생기더라도 중단하지 않고 완수하는 것입니다. 성실성과 비슷한 의미로써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특히 필요한 열매이며, ‘한결같음’과 연결되는 열매입니다.
온유 : 자제된 힘, 약자에 대해서도 부드럽게 대하는 힘이며, 다른 사람을 자기 뜻대로 조정하려들지 않는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해 드린 인간의 기본적인 세 가지 욕구(안전과 생존, 애정과 존중, 힘과 통제)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힘과 통제의 욕구는 가장 강하며 가장 마지막까지 영향을 미치는 욕구인데, 이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온유함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본당)에서 주임신부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전제군주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자주 걸려 넘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사 때마다 온유함을 청하며 기도하고 교우님들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 한마디도 명령형이 아닌 청유형을 사용하려고 마음을 모읍니다.
절제 : 육정을 눌러 주님의 주권 하에 복종시키는 힘과 권위입니다.
사람이 지닌 에너지 중 가장 강한 것이 성적인 에너지입니다. 성적인 에너지는 이성과의 사랑에 빠지게 하고 후손을 이어가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지요. 하지만 그 에너지를 오로지 성적인 행위나 쾌락에만 사용하게 되면 성을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 아니라 사람을 속박하고 억압하며 수단이나 도구로 전락시켜 버리게 됩니다. 성이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복음 3덕 중 하나인 정결의 덕으로 성화되어야만 합니다. [2024년 11월 24일(나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가톨릭마산 8면, 윤행도 가롤로 신부(월영본당 주임)]
[향심기도] 향심기도란 어떤 기도인가요? (12)
정결의 덕이란 선천적으로 주어진 여성성과 남성성을 통합하여 여성을 여성으로, 남성을 남성으로 보지 않고 똑같은 사람으로 바라보며, 성적인 에너지를 성행위나 쾌락의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향심기도(관상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와 향심기도의 방법, 주의할 점, 향심기도의 열매 등에 대해 저의 경험과 함께 말씀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향심기도의 효과를 매일의 삶으로 확장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습관을 기릅니다.
자신의 과거, 한계, 죄 등을 포함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진정한 동정심을 가져야 합니다. 실수할 것을 기대하고 그 실수를 통해 배우십시오. 경험으로 배우는 것은 지혜를 얻는 길입니다.
2. 활동 중에 할 수 있는 기도어(능동적 기도어)를 선정해서 바치십시오.
예를 들면 “주님, 오시어 저를 도와주소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등등.
이러한 기도문을 누구를 기다리거나 운전할 때나 버스를 타고 갈 때, 집에서 설거지나 청소를 할 때 등 우리의 정신집중을 크게 요하지 않는 일을 할 때 늘 입에 올리며 기도하게 되면 어느새 이 기도가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머물러 있게 되어 우리의 감정을 거슬리게 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이 기도가 우리의 감정이 분출되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3.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로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경청하십시오.
하루에 15분 이상 성경이나 영적 독서를 함으로써 그 말씀이 자신의 마음에 머물고 삶으로 드러나게 하십시오.
4. 성체를 정기적으로 받아 모십시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의 신비, 즉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례하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인 변형의 원천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향심기도(관상기도)를 하루에 20분씩 두 번 매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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