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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17)엘 칸나
34: 14
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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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4:23-24
23.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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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2월 5일 주일 미국 달라스 텍사스에 있었습니다. 북 미주 한국 목사님들의 셀 컨퍼런스를 인도한 후 달라스 몇 교회가 연합한 집회를 인도하는 마지막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 오후 미국인들에게 아주 특별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날 오후는 일년 중 가장 많은 미국인들 약 일억 3천 7백만 명을 텔레비전 앞으로 집중시키고 심지어 이라크 주둔중인 전시 체제하의 미군들조차 모든 일을 중단하고 시청하는 미식축구 파이널 수퍼볼 경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뉴스를 통해 보신 것처럼 이 날의 영웅은 이 날 결승 경기의 MVP인 하프 코리언 하프 블랙인 이제 막30살이 되는 하인스 워드(Hines Ward)였습니다. 그런데 이 날의 경기가 다른 해와 좀 달랐던 것은 미국 텔레비전들의 보도가 한 손에 반짝이는 롬바르디 컵과 또 다른 손에 아들 제이든을 안고 있는 모습을 방영했을 뿐 아니라 조금 늦은 밤부터는 하인스 워드의 라이프 스토리와 함께 그의 한국 어머니의 사진을 내보내며 그의 라이프 스토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미국인들의 반응을 계속해서 리플레이하고 있었습니다.
어려서 그는 한국 어머니가 싫었다고 합니다. 흑인 친구들은 코리언 어머니를 가진 그를 놀려댔습니다. 워드는 코리언 어머니의 차에 타는 자신의 모습을 누가 볼까봐 차에서 늘 납작 엎드리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차문을 열고 도망치듯 차에서 빠져 나오다가 차안에서 갑자기 오열을 하며 흐느끼는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순간적이나마 다른 어머니를 부러워한 자신을 뉘우치게 됩니다. 그리고 식당 접시닦이로, 호텔 청소부로, 편의점 종업원으로 한꺼번에 두개, 세 개의 직업을 갖고 일하면서 자신에게 언제나 따뜻한 밥을 먹이며 키워온 그 엄마의 사랑을 깨달아지면서 그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미국 미디아의 뉴스들은 이런 하인스 워드의 코리언 엄마의 사랑과 희생이 그를 이 날의 챔피언으로 만들었다고 소개하며, 그의 MVP선정 소감을 되풀이하여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오늘 내가 여기에 서게 된 이유입니다. 어머니, 당신이 진정한 챔피언입니다.” 그런데 이 소감과 함께 한 미국의 뉴스 앵커는 이런 특이한 코멘트를 남겼습니다. “하인스 워드는 하프 코리언이었지만, 그의 코리언 엄마의 사랑은 하프가 아닌 모든 것의 사랑이었다”고. 그런데 이런 어머니들의 사랑은 어머니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인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 또한 하프의 사랑이 아닌 모든 것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런 하나님의 이름의 하나가 ‘엘 칸나’-곧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오늘의 본문 출34:14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엘 칸나)임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신4:24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십니다. 그냥 질투하는 분이 아니라 불같이 질투하는 분이십니다. 도대체 이 질투라는 세속적인 단어로 표기된 하나님의 이름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질투-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요?
1.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질투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도대체 사랑하지 않는 대상을 인하여 어떻게 질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질투는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단어인 것은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를 인격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의 가장 절실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는 질투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니 그는 그 질투 때문에 죽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죄를 범한 인류를 사단에게 내어주시기 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셔서 우리와의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인류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의 마지막 고백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강하지도 않고 경건하지도 못한 죄인인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야 말로 그분의 사랑이 가진 가장 위대한 비밀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고 하십니다.
여러분, 브로드웨이의 최장기 뮤지칼의 하나인 ‘오페라의 유령’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단순한 눈과 귀로 이 뮤지칼을 감상하면 우리는 이 뮤지컬이 전형적인 크리스틴이라는 여주인공을 둘러싸고 크리스틴의 어렸을 때부터의 사랑, 자작 라울과 가면 마스크를 쓴 유령사이의 삼각관계에서 벌어지는 애절한 사랑의 드라마로만 이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평론가는 이 작품이 이토록 롱런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더 중요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이 유령에게서 바로 ‘내안에 유령’ 곧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뮤지칼의 절정은 유령의 마스크가 벗겨지고 그의 흉악한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크리스틴은 이런 상처뿐인 유령의 얼굴에 키스를 해주고 그 순간 유령은 크리스틴을 놓아줄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임을 아시나요? 그는 가면으로 숨겨놓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부끄럼을 아시고도 지하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곁에 다가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누구도 내 곁에 다가오기를 꺼려한 내 상처에 입을 맞추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질투하며 사랑하신다고 고백하십니다. 그의 이름이 바로 엘 칸나-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하나님은 사랑을 나누지 않으십니다.
오페라의 유령과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유령은 사랑하는 여인곁을 울면서 떠나갔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질투 때문이십니다. 저는 엄밀하게 말하면 질투는 성경적이지만 시기는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물론 성경에도 이 두 단어가 비숫한 의미로 혼용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전13:4)고 가르칩니다. 맞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질투합니다. 시기는 자기 권리가 없는 대상을 부러워하거나 험담하거나 파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기는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질투는 본래부터 자기가 가진 당연한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질투의 감정을 잘못 표현하는 과정에서 질투는 추한 모습으로 변질될 수 있지만 질투의 동기는 정당한 것입니다. 아내가 자기의 배우자를 지키기 위하여 질투하는 감정 그 자체를 우리가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질투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질투는 언제나 언약 사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본문 신4:23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왜 우상을 만들지 않을 것을 언약하게 하셨습니까? 사랑을 나누지 않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부부의 결혼 언약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 남자만을 유일한 남편으로 이 여자만을 유일한 아내로 사랑을 나누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약속 아닙니까? 그래서 일단 결혼의 약속이 성립하면 남편은 내 남편이고 아내도 내 아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부부에게는 질투할 권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주인이 되셨고 따라서 그분 외에 누구와도 우리는 사랑을 나누어서는 안됩니다. 만일 그분보다 더 사랑하고 더 아끼고 더 집착하는 무엇이 생긴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상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을 가르쳐 성경은 영적 음행 혹은 영적 간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야고보 4:4을 기억하십니까? “간음한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그 다음 5절을 읽어보십시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의미상으로 질투의 뜻)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만한 것이 돈이 되었다면, 명예가 되었다면, 취미가 되었다면, 권력이 되었다면 기억하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그 순간부터 우리가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가 시작된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의 이름이 엘 칸나-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관리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니지먼트(management)를 많이 강조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퇴보와 몰락은 결국 매니지먼트의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관리해야 할 것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관계의 관리요, 사랑의 관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상의 가장 단순한 정의는 하나님과 나사이에 끼어드는 모든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 더 사랑하지 못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바라보는 일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그 모든 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마치 부부사이에 그 누구도 끼어들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나 사이에도 아무것도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매니지먼트인 것입니다. 부부가 사랑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바쁘게만 살다보면 어느 날 부부사이에 건너뛰기 어려운 정신적 심리적 거리가 생긴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런 실패를 경험해온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불러 온 클래식 가요가 있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해 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갈매기도 내 마음같이 목메어 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의 승리로운 삶의 열가지 규칙을 십계명으로 주시면서 제1 계명으로 주신 것이 “너는 나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 출34:14 이하의 말씀은 사실상 이 제1계명을 다시 풀어서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의 관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런 것처럼 이 영적인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도 신실하게 관리되지 않는다면 소위 틈새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 혹은“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7)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요즈음 하나님과 함께하는 경건의 시간(QT)을 신실하게 갖고 계십니까? 규칙적으로 그의 음성을 듣고 기도하며 살고 계십니까?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말씀을 따라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살고 계신지요? 그분의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하고 계십니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는 말씀대로 목장모임에 참여하여 서로의 믿음을 북돋아 주고 계신지요?
저는 오늘의 말씀을 하인즈 워드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봇물처럼 모든 매스콤에 쏟아져 나오는 그의 이야기를 읽고 들으면서도 한가지 궁금한 것이 없으셨습니까? 그의 아버지 이야기 말입니다. 모든 언론이 하인즈의 어머니 김영희에게 초점을 맞추어 보도하면서도 주한 미군이었던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말입니다. 좀 더 사실을 말하자면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고 쓸 말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내를 버렸고 아들을 버렸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의 인생에 투자한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머니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한 사람은 사랑의 관리를 포기했고, 또 한 사람은 사랑의 관리에 헌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웅은 어머니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아들 사랑을 희생과 눈물로 관리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 보상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녀가 챔피온이 되고 MVP가 된 것입니다. 그녀는 많이 울었지만 이제 아들과 함께 웃는 자가 되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 것입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의 인생 속에 겸손을 심었습니다. 희생을 심었습니다. 사랑을 심었습니다. 정직을 심었습니다. 땀 흘리는 노력을 심었습니다. 철저하게 사랑을 관리했고 이제 챔피온 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의 꿈은 어머니에게 좋은 옷을 입혀 드리고 호강시켜 드리는 것뿐입니다.” 이 기사를 읽고 있을 하인스의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럴 줄 알았더면 나도 내 사랑을 관리했어야 하는 건데--”
혹시 그 어느날 우리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앞에 서서 우리가 비슷한 참회의 고백을 하지 않을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럴줄 알았더면 나도 하나님 사랑을 좀더 신실하게 관리했어야 하는 건데--”, “그 분과의 사랑의 언약에 좀 더 신실하게 응답했어야 하는 건데--”라고 말입니다. 다행스럽게 아직 기회는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남아있는 우리의 인생속에 엘 칸나의 이름으로 다가 오십니다. “난 아직도 너의 사랑을 기대하고 있어. 내 이름은 엘 칸나-나는 너를 질투하며 사랑하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