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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원 목사
오늘은 사순절 마지막 주간으로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 때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을 부르며 주님을 환영했기 때문에 교회는 이를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부활주일 이전의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이는 주님의 공 생애 기간에서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로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입니다.
이 시간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과연 어떤 고난이었는가 그리고 그 십자가의 고난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함께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삼중주(tri-angle) 고난입니다.
1. 영적인 고난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기도하는 겟세마네동산의 마지막 기도는 차라리 영적인 절규였습니다.
성경은 주님의 모습을 마26:39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것 같이 보일지는 몰라도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신앙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믿음생활은 결단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그 자체가 바로 결단입니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사명이 클수록 영적인 곤고함과 영적인 아픔과 영적인 고난이 크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이 클수록 기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평신도보다는 직분자가 사명이 큽니다. 그러기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영적인 곤고함과 영적인 고난을 겪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영적인 고난입니다.
오늘 성경은 본문에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던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사53:11에서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은 죄인 된 우리의 죄악을 인함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죄 사함과 영생을 얻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요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께서 몸찢고 피흘려 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엡2:8-9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된 근거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 은혜"가 무슨 은혜입니까? 무슨 은혜이기에 그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편에서는 독생자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아낌없이 주시는 은혜요, 예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철저히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주신 은혜요 바로 이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선교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그 곳에서는 노예시장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흑인모자(母子)가 경매에 붙여졌는데, 어린 아들은 필요없고 흑인엄마만 사겠다는 사람이 나서서 어머니만 팔리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 흑인 모자는 생이별을 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흑인엄마가 주인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애원을 합니다. "제발 내가 두 사람의 몫을 할테니 아들과 함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둥켜 안고 울고 있는 두 모자를 강제로 떼려고 하는데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주인이 칼을 들어 어린 아들을 향해 내려 찔렀습니다. 이 광경을 바로 옆에서 보고 있던 선교사님이 자신의 손으로 그 칼을 막았습니다. 그 칼은 선교사님의 손에 찍히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이 주인에게 다시 후한 값을 주고 두 모자를 샀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유롭게 살라고 했습니다. 선교사님은 주인에게 후한 값을 쳐주었지만 이 흑인모자는 선교사님에게 도대체 계산할 수도 없는 생명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흑인모자는 갈 데도 없고 가봤자 또 잡혀서 노예로 팔려갈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니 선교사님을 따라 선교사님을 도와 은혜를 갚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선교사님을 따라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흑인모자의 생명을 살려 주었을 뿐 아니라 자유를 준 이 선교사님... 그 은혜가 백골난망(白骨難忘)이라 흑인 모자는 선교사님의 손과 발이 되어 아프리카의 선교사역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흑인 모자도 인간인지라 때로는 화도 내고, 짜증도 부리고 원망하면서 불평합니다. 그 때 선교사님은 아무런 말 없이, 손을 내밀어 아들을 살리려 대신 칼을 맞았던 그 손의 흉터를 보여주면... 그 흑인은 잘못했노라고 용서를 빌었다는 것입니다.
2. 육신적인 고난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십자가를 질 것은 결단했다고 하는 것은 육신적인 고난도 감당하겠다는 결단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채찍에 맞고 가시면류관을 씌울 때 거울을 보고 씌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써야 더 어울릴까? 저렇게 써야 더 어울릴까? 마치 모자를 쓰듯이 멋을 내면서 쓴 가시면류관이 아닙니다. 가시에 찢겨 살이 찢기고 이마가 찢겨서 피가 얼굴을 흥건히 적실 정도의 고통이었습니다.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았습니다. 잠을 한 숨도 못 잤습니다. 먹을 것 하나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 길을 올라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한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이와 같은 인간적인 한계에 달하는 육신적인 고난이었습니다.
군중들은 어떻습니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호산나를 연호하면서 주님을 따랐던 그 수 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원수로 갚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그야말로 우리 인간이 견디기 힘든 한계점의 고난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신학적으로 참으로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박힘은 우리 인류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시기 위해서 입니다.
성경은 오늘 본문 4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는 "실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실로"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진실로", "사실은", "진짜로는"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사실이라는 것입니까? 무엇이 진짜라고 하는 것입니까? 무엇이 진실이라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잘못 알고 있거나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틀린, 잘못된 생각으로 십자가를 바라 보기 때문에 그 이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죄가 있어서 자신의 죄의 값을 치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오늘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너무 잘못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스스로 받을만한 당연한 하나님의 저주로 치부해 버리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로 그렇게 이해하고 바고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의 죄와 질고와 슬픔 때문에 우리 주님은 질고를, 고난을, 슬픔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당했다는 것입니다. 당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고 따지고 핍박하면서 인생의 죄의 짐,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끌다가 이내 지옥으로 떨어져 가야만 하는 인생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의 질고, 그의 슬픔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것이 아닙니다. 그 질고는 분명 저와 여러분의 것이었습니다. 그 슬픔은 분명 저와 여러분의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질고(疾苦)"는 [호리]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질병, 근심, 재난"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슬픔"은 [마크오-브]라는 단어입니다. "슬픔, 고통, 괴로움"을 뜻하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당해야 하는 이 질병, 근심, 재난을 우리 주님께서 대신 지셨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인생을 사는 동안 당해야 하는 "슬픔, 고통, 괴로움"을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당해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3. 정신적인 고난이었습니다
사실 육신적인 고난보다 더 이기기 힘든 고난이 정신적인 고난입니다. 육신적인 것이야말로 때울 수라도 있다고 하지만 정신적인 고난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에서도 사람들이 정신적인 고난을 견디지 못해서 얼마나 어려운 길로 가고 있습니까? 얼마나 엉뚱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얼마나 몸부림을 칩니까?
우리의 삶을 멍들게 하는 것은 정신적인 고난과 고통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참으로 정신적인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람이 배신당하는 것처럼 견디기 힘든 고통은 없습니다. 사람은 믿음관계가 깨어지게 되면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맙니다. 우리 사회의 뿌리는 믿음관계, 신뢰에 있습니다. 한 가정도, 부부관계도, 부모와 자녀관계도, 스승과 제자관계도 모두가 다 신뢰관계입니다.
국가 경제도 그렇습니다. 서로 신뢰관계 속에서 무역이 이루어집니다. 회사간에도 신뢰관계입니다.
개인간에도 모든 것이 신뢰입니다. 친구간에고 신뢰입니다. 이 신뢰가 금이 가고 깨지게 되면 모든 것이 허물어 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가장 믿고 사랑했던 가룟유다에게서 배신을 당했습니다. 배신의 아픔은 배신을 당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여러분! 한 집단에서 돈궤를 맡긴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그를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돈궤를 그에게 맡겼습니다. 그만큼 유다를 신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온 것은 처절한 배신이었습니다.
모두가 다 주님을 배신하고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찰떡같이 굳은 약속을 했던 베드로도 주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아니! 성경을 보니까 주님은 저주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신학박사가 되어야 이해되어지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남녀노유 빈부귀천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도저히 해결할 수도 없고 해결되지도 않는 우리 인생의 죄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친히 감당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울어도 못하고 참아도 못하고 애써도 안되는 우리의 인생의 십자가를 대신 감당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 11:28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 오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오직 주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알게 모르게 지은 죄의 짐에서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지옥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눈물의 짐에서, 염려의 짐, 질병의 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성경은 행4:23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할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이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는 우리를 살립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입니다. 치료의 길입니다. 축복이 길입니다. 은혜의 길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나아올 수 없느니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고후8:9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축복의 길이 되시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가난과 저주를 물리쳐 주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동행하면 모든 일에 모든 것이 넉넉하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십자가 고난의 의미는 우리에게는 승리요, 자유요, 치료요, 해방이요 축복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그 믿음을 따라 날마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