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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16
하나님이 비를 지면에 내리시는 날까지 / 김영준 목사
요즘은 긴 내복을 별로 입지 않지만 옛날에는 겨울이 오면 긴팔 속내의 상하의를 입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실내에서도 추웠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실내 난방이 잘돼있기 때문에 긴 내복을 입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내복의 시대가 끝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가격이 저렴한 난방의 시대가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난방비, 석유, 가스, 전기 가격이 이대로 머문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만약 난방비가 비싸지는 날이 오면 다시 집안에서 긴 내복과 스웨터를 입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한 벌씩은 내복을 준비해 놓아야 됩니다. 폼은 나지 않지만 추울 때는 할 수 없지요.
내복은 내핍을 뜻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내핍의 시대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의 자산 가치가 반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을 봅니다. 엘리자베스 2세도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여성 중의 한 사람인데 최근 몇 개월 동안 37%가 줄었다고 합니다. 러시아에서는 자산가치가 75%가 줄어든 재벌이 수두룩하다고 합니다. 세계 유수한 기업들이 감원, 감산을 단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로스 차일드라는 사람은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 때 그때가 주식을 사야 될 시기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신문 일면에 주가 폭락 기사가 실리고 중개인들이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그날이 되면 주가가 바닥을 친 것이다.’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얘기인데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입니다. 이것은 여윳돈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이론일 뿐입니다. 그게 아니고 일평생 모든 돈을 안전한 곳에 투자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흉내 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TV에서 가끔 ‘어린이들은 흉내 내지 마시오.’ 그런 자막이 뜰 때가 있는 것처럼 이런 섣부른 이론은 사람들이 함부로 흉내 냈다가는 큰일 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이 제대로 검증이 됐는지는 아무도 보장을 해 줄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동안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고 믿었던 수많은 금융원리들이 최근 금융위기를 통하여 틀렸음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런 원리를 주장하면서 상품을 팔던 사람들은 직장을 잃었던가 아니면 사람들의 원망을 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가 바닥을 쳤다느니 조금 참으면 좋아질 거라느니 이런 식의 예측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거짓 선지자들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낙천주의를 위한 낙천주의가 있고 진리와 사실에 근거한 낙천주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익숙한 낙천주의는 낙천주의 그 자체를 위한 낙천주의입니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이런 말, 그걸 어떻게 보장하려고 합니까.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합니까. 또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너희가 있기 때문에 아빠가 힘들단다. 아빠가 힘든 이유가 바로 너희 때문이다. 장차 힘이 될 수는 있겠지만 미안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낙천주의를 위한 낙천주의지요. 근거가 없을 때가 많아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낙천을 위한 낙천주의는 아니고 때로는 하나님 말씀 중에 정말로 절망적인 그런 말씀으로 들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세상에 기근과 전쟁과 또 지진의 소문을 들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재난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런 말씀도 하셨고 또 ‘나를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이것보다 더 비타협적인 말씀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무시하고 ‘아, 괜찮습니다. 결국 다 구원받게 될 겁니다.’ 이런 식의 말을 했다간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요,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는 것이요, 남의 영혼을 위험하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피해가 되는 실수를 하는 경우도 있고 남들에게 피해가 되는 실수를 할 때도 있는데 법적으로도 남에게 피해가 되는 실수는 과실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남의 영혼과 남의 신앙에 피해가 되는 실수를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어린아이를 실족하게 하는 자는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차라리 낫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라도 신앙적으로 실족하게 하면 그 죄의 벌이 그만큼 무섭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간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에 위반이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것을 멸시하고 그리고 내 주장을 펴고 하나님의 말씀은 아닌 것처럼 이렇게 해서 누가 내 말을 믿고 영적으로 손해를 입게 되면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실족하게 하는 아주 중대한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아무나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 남을 가르치는 자는 적으라,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섣불리 가르치다가 그 사람의 영혼을 실족하게 되면 회복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단과 사이비 종교의 위험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단에 한번 빠졌던 사람은 거기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차라리 공산주의라든가 이런 사상에 빠졌다가 실망하고 생각을 바꾸는 것이 더 낫습니다. 더 쉽습니다. 그러나 이단에 한번 빠진 사람은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그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극히 힘들고 빠져나온 다음에도 더 이상 교회라든가 신앙을 신뢰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신앙을 얻기가 아주 힘든 것을 보면서 사람을 영적으로 실족하고 또 방황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에게 가장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된다고 하는데 사람이 안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불신이지만 하나님이 안된다고 하시는데 사람이 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그건 오만함입니다. 하나님이 안된다고 하는데 사람이 될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건 남들을 실족시키는 것이요, 영적인 오만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하나님이 꼭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곳을 말합니다.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엘리야를 인도하시는 데서 그러한 패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뭄이 임했습니다. 삼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그 사실을 예언적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자신이 이 가뭄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엘리야가 그것을 선포하고 예언했다고 해서 본인은 그 기근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남들은 굶을 때 자신은 호의호식하는 것이 아니고 이 기근이 임하였더니 엘리야부터 형편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 거기에서 아침과 저녁에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물어다 주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아주 기특한 까마귀이지요. 떡만 물어다 주는 것이 아니고 고기까지 물어다 주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까마귀가 물어다 줄 떡과 고기가 떨어지고 또 시냇물이 말라버리게 됐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뭐라고 명하시느냐면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가서 머물라’ 그러
니까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먹는 일도 힘든 일인데 그 다음에는 더 힘든 일을 시키셨어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더니 힘든 곳에서 더 힘든 곳으로 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럴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반드시 더 좋은 곳, 더 편안한 곳으로 갈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만 기근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더니 이 그릿 시냇가에서 더 힘든 사르밧으로 가서, 그것도 돈 많은 과부라면 이해하겠는데 본인도 먹을 것이 없는 아주 가난한 과부의 집에 신세를 지고 살게 하신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시는 날까지 도리가 없습니다. 엘리야가 불평해도 도리가 없습니다. 내핍의 시절은 언제까지 지속되느냐? 하나님이 지면에 비를 내리시는 날까지 지속됩니다. 그때가 언제냐? 아무도 몰라요. 엘리야도 몰라요. 때가 되면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당연히 진리라고 생각하고 의심치 않았던 세상의 원리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중단 없는 발전입니다. 중단 없는 전진. 성장하지 않는 것은 병든 것이다. 그래서 좀 더 많이, 좀 더 빨리, 좀 더 크게, 좀 더 편안하게, 이런 것을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고 우리의 권리로 여기고 이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국민소득이 늘게 해주겠다, 또 국가의 경제 순위가 더 올라가게 해 주겠다, 이런 식으로 공약을 내걸고 국민들은 그것을 바라고 그렇게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이러한 원리가 모든 곳에 손을 뻗쳐서 신학교마다 교회성장학을 가르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당연히 성장해야 되고 성장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고 더 많이, 더 크고 더 좋은 것, 우리교회의 목적은 교인 만 명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치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믿음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발전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우리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더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환경이 오염되고 기후가 바뀌고 자원이 고갈되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되고. 중국 사람들이 마이카 시대가 되면 전 세계의 모든 석유를 가져다 써도 부족하게 된다고 합니다. 한 번 상상을 해 보세요. 중국의 그 많은 사람들이 전부 다 자동차를 한 대씩 몰고 다니면 전 세계의 석유를 다 갖다 써도 모자라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아마 중국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항의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신들은 그런 혜택을 누렸으면서 이제 우리가 그것을 가지려고 하니까 왜 브레이크를 거느냐. 그들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는 그동안 막연한 이론으로만 생각했던 것이 실질적으로 우리의 지갑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그 여파가 우리의 주머니 사정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조금씩 실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자가 더 부자가 되는 게 아니고 부자도 가난해 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는 그런 시대가 됐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내가 만회할 거다, 만회할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만 그런 기회가 과연 올지 그것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발전이 필요합니다. 성장도 필요하고 당연히 진보가 필요하지요. 그러나 탐욕과는 다른 것입니다. 발전과 탐욕은 다른 것입니다. 구별하기 힘들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이 미국발 금융위기는 탐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일단 사람들이 자기 능력이 되지 않는데 억지로 빚을 내서 집을 산 데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버는 만큼 써야 되는데 능력이 되지 않는데 능력에 벗어나는 집을 갖고 싶으니까 빚을 얻어다가 집을 샀어요. 그리고 은행은 신이 나서 돈을 빌려줬습니다.
집값이 올라갈 때는 그래도 괜찮아요. 그런데 문제는 누가 집값이 영원히 올라갈 것이라고 장담했냐는 것입니다. 집값이 어떻게 항상 올라갈 수 있습니까. 떨어질 수 있는 것이지요. 미래를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야고보서 4장 13절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이게 열쇠입니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세상 사람들 , 자랑하는 것 많지요. 어느 나라가 가장 높은 건물을 짓느니, 가장 큰 오일 탱크를 만드니, 이런 식으로 자랑하는 것이 다 허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짓고 나면 소유주가 바뀌지 않습니까. 다 짓고 나서 소유주가 바뀌는 것을 얼마나 많이 봐 왔습니까.
이것은 제 개인적인 생각일수도 있지만 요즘에는 자기가 노력해서 부를 창출하는 사람도 있지만 남의 성공에 편승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의 성공에 편승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팔고 사는 것을 통해서 차익을 남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것이 주식이든 땅이든 채권이든 건물이든 자기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팔고 사는 것을 통해서 차익을 남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이렇게 해서 형성되는 부는 거품과 같습니다. 내가 무엇을 만들어서 생산해서 가치를 만들게 되면 그건 거기에 대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차익에서 비롯된 돈이라는 것은 거품과 같아서 easy come easy go - 쉽게 오는 것은 쉽게 가게 돼 있어요. 돈을 쉽게 벌려고 생각하니까 쉽게 떠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엘리야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배우고 또 믿음의 사람의 본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그릿 시냇가에 가라 하니까 거기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먹고, 사르밧에 가서 과부의 도움을 받으라고 하니까 남자의 자존심을 꾹 참고 가난한 과부에게 신세를 지는 믿음의 사람을 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부에 처할 줄도 알고 가난에 처할 줄도 안다고 했는데 이제는 우리도 가난에 처할 줄을 배워야 되는 시대입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부에만 익숙해지려고 합니까. 아마 여러분 중에는 나는 교회에 위로의 말씀을 들으러 왔는데 도대체 위로라는 것은 찾아볼 수가 없고 굶어 죽으라는 얘기냐, 그건 이방인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위로가 되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언제까지 엘리야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까. ‘나 여호와가 지면에 비를 내릴 때까지’ 그게 위로의 말이에요. 하나님이 다시 비를 내리시는 날이 온다는 얘기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다시 비를 지면에 내리시는 날이 옵니다. 언제인지는 말씀하지 않아요. 언제인지를 섣불리 그것을 추측하려고 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도 그걸 몰랐어요. 그때가 되면 알려주실 것입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기다리고 그때가 되면 하나님이 다시 지면에 비를 내리셔서 땅이 싹을 내고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