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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5: 32.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33. 어디서 배부를 만큼 34. 무엇이 있느냐?
4. 사천 명을 먹이시다 ( 15: 32-39. 막 8: 1-10 )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
마 15: 32.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는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
무리들은 이미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심취해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사흘 동안이나 그 광야에 거할 수 있었는지 놀랍다. 먹을 것은 다 떨어지고 육신의 힘도 다 떨어졌을 것이다. 그냥 해산하면 길에서 기진할 자들이 있을 정도이었다.
이때 예수께서 그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는 단순히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을 위해 이 두 번째 떡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사흘이나 있었던 무리들을 위해 행하셨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단지 사람의 영적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고, 또한 육신적 문제, 즉 떡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셨다.
주님은 우리에 대해서도 그러하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의 섭리 가운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 그는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신도 돌보시고 기르시는 목자이시다.
1]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5천 명을 먹일 때는 제자들이 나아와 무리들의 먹을 것에 대해 언급하였다.
반(反)해서 여기서는 예수가 먼저 나서서 그들을 먹이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다.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이적의 동기를 보여준다.
예수는 무리들에 대해 뜨거운 동정심으로 인해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자 하셨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는 뜻의 헬라어 '스프랑크니조마이'(*)는 '내장', '심장'이란 뜻의 '스프랑크논'(*)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은 피부 깊숙이서부터 표출된 깊은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나타내 준다. 예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인간 구원과 인생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원인이 된다.
* 마 14: 14 -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 눅 7: 13 -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3] 그들이 나와 함께 있는지
'함께 있다'는 헬라어 '프로스메노'(*)는 '함께 머물다', '집착하다' 등의 의미이다.
행 11: 23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낸 바나바가 안디옥 교인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고하는 말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갈릴리호숫가에 밀집해 있는 무리들은 예수를 영혼의 질병을 구원하는 참 메시야로 알지 못하였다. 굶주림과 병에서 놓여나게 하는 구원자로 인식하였더라도 예수에 대한 기대와 신뢰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의미한다.
4]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예수의 병 고치는 사역이 병자들에게 계속 진행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무리들이 가져왔던 음식이 모두 바닥났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보통 두터운 겉옷을 걸치고 다니면서 싸늘한 밤 기후에도 길가에서 노숙(露宿)할 만큼 먼 여행에 익숙해 있었다.
5]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헬라어 성경에서 쓰인 '메포테'(*)는 '혹시 ... 하지나 않을까'라는 뜻으로, 조건문을 이끄는 종속 접속사이다. 이 문장은 예수께서 '혹시 그들이 길에서 지쳐 쓰러지지나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에 그들을 집으로 보내지 못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는 그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같은 것임을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 당시 민족적 축제로 인해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일 때는 그중에 상당한 사람들이 지쳐 기진하거나 심하면 객사(客死)했다고 한다.
무리들은 이미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심취해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사흘 동안이나 그 광야에 거할 수 있었는지 놀랍다.
먹을 것은 다 떨어지고 육신의 힘도 다 떨어졌을 것이다. 그냥 해산하면 길에서 기진할 자들이 있을 정도이었다. 이때 예수께서 그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는 단순히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을 위해 이 두 번째 떡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사흘이나 있었던 무리들을 위해 행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단지 사람의 영적 문제에 관해서만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고, 또한 육신적 문제, 즉 떡의 문제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지셨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 대해서도 그러하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의 섭리 가운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 그는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신도 돌보시고 기르시는 목자이시다.
마 15: 33. 어디서 배부를 만큼 -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
주의 제자들은 얼마 전에 경험한 떡 기적은 잊었던 것 같다.
그들은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면, 만일 그들이 첫 번째 떡 기적을 기억하였었다면, 그들은 주님께 어떤 해결책을 요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운 현실에서 믿음 없음을 드러낼 뿐이었다.
1] 제자들이 이르되,
제자들의 이 물음이 필요한 양의 떡을 공급하는 일은 자신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께 달린 것임을 말하고 있다.
'각 사람이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요 6: 7)라는 오천 명을 먹일 때와 같은 식의 계산도 하지 않고 오히려 군중들의 배부름을 예상하는 점에서 그들이 오천 명의 급식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고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간직하였다는 평가가 있다(R. C. H. Lenski).
반면 제자들의 이 물음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들이 여전히 무지하고 불신앙적이라고 하는 비판도 있다(D. A. Carson, William Handriksen). 그중 후자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듯하다.
2]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제자들은 얼마 전에 경험한 떡 기적은 잊었던 것 같다.
그들은 잠잠히 주의 능력을 의지하고 기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성적 계산에만 빨랐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면, 만일 그들이 첫 번째 떡 기적을 기억하였었다면, 그들은 주님께 어떤 해결책을 요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려운 현실에서 믿음 없음을 드러낼 뿐이다. 제자들은 고질(痼疾)적인 불신앙으로 예수의 무한하신 권능과 과거의 이적들을 외면하였다.
3] 예수님의 능력과 제자들의 불신앙
5천 명의 군중을 먹이신 기사는 4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었으나 4천 명을 먹이신 기사는 마태와 마가만 전하고 있다.
이 두 이적의 다른 점이라 한다면 첫번째 이적 때는 주님께서 수동적이었으나 여기서는 적극적이시다. 또한 군중이 3일간이나 예수님과 같이 지낸 것도 두번째 이적의 특색이다.
그리고 두 차례의 떡을 먹이신 이적의 동기는 다 같이 배고픈 군중에 대한 예수님의 동정이었다.
(1) 제자들을 불러 모으신 이유
예수님은 무리들의 굶주림을 보시고 제자들을 불러 같이 의논하셨는데 이는 제자들을 항상 의논의 대상인 친구로 여기신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나라에 같이 살게 하셨으며, 우리를 더 이상 종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업을 이을 후사로 삼으셨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소돔의 죄악을 벌하시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창 18: 17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2) 무리들의 형편
①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대한 애착을 볼 수 있다.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32절) 무리들이 평일에 주님을 청종하려고 자신들의 생업을 뒤로 미룬 것이나, 주님과 함께 있으려고 굶주림의 고통을 견딘 것은 그들의 열심과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음을 보여주는 본보기다.
그들은 일용할 양식보다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 좋은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또한 열심으로 사모해야 한다.
②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기꺼이 이적을 행하신다.
3일간 예수님과 함께 있던 그들에게는 더 이상 먹을 양식이 없었다. 주님은 굶주린 그들을 위해 이적을 행하셨으며, 예수께서 이루신 이적으로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가장 절박하고 폭넓은 욕구를 가진 자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자비와 은혜가 있다는 사실이다.
* 시 81: 10 -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굶주린 영혼도 채워주실 것이다.
* 사 55: 1-3 –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3) 무리에 대한 주님의 긍휼
① 주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아신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32절) 무리들은 자기들과 더불어 3 일동안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능력을 행하심으로 역시 지치시고 배고프셨던 주님에게 마땅히 측은한 마음을 가져야만 했다.
그러나 오히려 주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우리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고난을 염두에 두고 계시며, 또한 그들이 이로 인해 당하는 어려움을 기억하신다는 사실이다.
* 계 2: 2-3 –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이러한 성도의 수고와 고난은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②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주리지 아니할 것이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32절). 이것은 무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늘의 은총이다.
그것은 마치 다윗이 요나단의 절뚝발이 아들 므비보셋에게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삼하 9: 7)고 한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풍족케 하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신다.
(4) 제자들의 불신앙
주님은 백성을 먹일 자신의 계획에 대하여 전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이러한 계획의 가능성을 지적하셨으나 제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신앙의 자세를 보였다. '광야에 있어 어떻게 배부를 만큼 떡이 있으리이까?‘
① 이는 이전의 경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은 항상 이와 유사하게 무감각하고 난국을 당면하여 과거의 구원을 잊어버리기 쉬운 경향이 있다.
제자들은 앞서의 이적에 대한 증인이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행하였던 사역자들이었음을 생각할 때 그들의 신앙의 약함을 보여 준다.
② 이는 주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영적 무지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위급할 때에 그들의 주님께 의지할 생각이 즉시 떠오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모든 긴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기대하지 못하였다.
이는 그들의 영적 무지의 소치였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권능이 살아 역사하고 있다. 그는 창조주이시며 재림주이시며, 그리고 나라와 권세를 지닌 심판주이시다.
우리는 이러한 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다.
마 15: 34. 무엇이 있느냐?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는 많은 무리들을 위해 없는 것과 같은 음식이었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불신앙적 태도를 책망치 않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권능을 기대하도록 하시려는 의도에서 이 같은 질문을 던지셨다.
예수의 이 물음은 다음의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1) 참된 가치
너희가 가지고 있는 물질, 재능, 소질에 대한 참된 가치는 신앙의 힘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현상을 변혁을 위한 가능성으로 바라보셨다.
이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에서 생겨났다.
(2) 영적 의미
영적 의미에서, 인간 영혼의 떡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지금 어느 정도인가를 물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비록 겨자씨만한 것 혹은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정도로,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하기에는 절대 부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믿음을 기초로 하여 더 큰 믿음을 이루시겠다고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2]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일곱'이라는 숫자는 성경 문학적으로 하나님의 수, 승리의 완전수를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그러한 영적 측면에서보다는 당시 실재했던 물고기의 숫자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좋다.
작은 생선(*, 잎뒤디온)은 당시 주식으로 사용했던 건조한 조그만 물고기였을 것이다. 본문에서는 하찮은 것, 별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과소평가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