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쿠도 미술관 정원(玉堂美術館 庭園)
교쿠도 미술관(玉堂美術館)은 도쿄도 외곽 오메시(青梅市)에 있는 미술관으로 일본화가인 가와이 교쿠도(川合玉堂, 1873-1957)의 개인미술관이다. 일반재단법인인 교쿠도카이(玉堂会)에서 운영하며, 약 300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가와이 교쿠도(川合玉堂)은 1873년 아이치현(愛知県) 하구리군(葉栗郡) 토와리다무라(外割田村), 현 이치노미야시(一宮市) 기소가와쵸(木曽川町)에서 태어나, 도쿄 미술학교(東京美術学校) 일본화과 교수 및 테이시츠기게이인(帝室技芸員) 등을 역임했다. 1940년에는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2차대전 중인 1944년 귀향하여, 1957년 죽을 때까지 오쿠타마(奥多摩)의 미타케 계곡(御岳渓谷)에서 살았다.
가와이 교쿠도(川合玉堂)는 본명은 카와이 요시사부로(川合芳三郎), 화호는 교쿠슈(玉舟), 나중에는 쿄쿠도(玉堂), 만년에는 살던 집 이름에서 따와 구안(偶庵)을 별호로 사용했다. 장남 신이치(真一)는 화학자로 도쿄교육대학 명예교수이다.
필묵지상(筆墨紙商)의 장남으로 태어나, 1881년 가족 모두 기후시(岐阜市)로 이사했다. 12세부터 그리기에 친숙했었다고 하며, 1886년 교토의 화가 아오키 이즈미바시(青木泉橋)가 기후(岐阜)로 이주하면서 부인도 스이핀(翠蘋)의 호를 쓰는 화가로, 소년 요시사부로(芳三郎)는 화가 부부의 교류를 통해 큰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1887년 아오키이즈미바시(青木泉橋)의 소개장을 가지고 교토로 상경, 시죠파(四条派) 모치즈키 교쿠센(望月玉泉, 1834-1913) 문하로 들어가, 교쿠슈(玉舟)의 호를 받았다. 1890년 되면서 마루야마파(円山派) 고노 바이레이(幸野楳嶺, 1844-1895)의 화숙(画塾) '다이세이기카이(大成義会)'에 들어갔다. 같은 해, '슌케군사루즈(春渓群猿図), '아키케군시카즈(秋渓群鹿図) 등 연작을 3회 내국근업박람회(内国勧業博覧会)에 출품하여 입선하자, 이를 계기로 교쿠도(玉堂)로 호를 바꾸었다.
1896년 23세 나이로 도쿄로 이주하여, 하시모토 가호(橋本雅邦, 1835-1908)를 사사했다. 오카쿠라 카쿠조(岡倉覚三, 1863-1913) 텐신(天心), 하시모토 가호(橋本雅邦, 1835-1908), 요코야마 다이칸(横山大観, 1868-1958) 등 이 주도하여 1898년 창립한 일본 미술원(日本美術院)에는 창립멤버였고, 1900년 경부터는 사숙(私塾) '쵸우류우가쥬쿠(長流画塾)을 주도하였다. 1907년 제 1회 문전(文展) 심사위원을 맡았고, 1915년 부터는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学校) 일본화과(日本画科) 교수, 1917년에는 테이시츠기게이인(帝室技芸員) 에 임명되어, 일본화단의 주류로 보상했다. 1931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상하였다. 1933년 독일 정부로부터 적십자 제1등 명예장(赤十字第一等名誉章)을 수상하였다. 1940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문화훈장(文化勲章)을 수상하였다.
1936년 테이코쿠비쥬츠인((帝国美術院) 개혁안이 발표되자, 반대의견을 내면서 요코야마 다이칸(横山大観) 등과 함께 비쥬츠인(美術院)을 사임하였다. 이후 1937년 그 후신인 테이코쿠게쥬츠인(帝国芸術院)이 설립되자, 회원이 되었다. 1944년에는 전쟁을 피해 예전 그림그리러 자주 들렀던 도쿄도 니시타마군(西多摩郡) 미타무라(三田村) 미타케(御岳)으로 쫓겨 들어가면서 집을 구안(偶庵), 화실을 즈이켄(随軒)으루 불렀다. 전쟁 후에도 주위의 자연을 사랑한 나머지 그대로 머물면서, 1957년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았다. 사후 정삼위(正三位) 쿤잇토우쿄쿠지츠다이쥬쇼(勲一等旭日大綬章)에 서훈되었다.
가나가와 현(神奈川県) 요코하마시(横浜市) 가나자와구(金沢区) 토미오카히가시(富岡東) 고쵸메(5丁目)에 1917년 경 지은 별저(別邸) 니쇼안(二松庵)이 있어 시 유형문화재로, 정원은 시 명승으로 지정 일반공개되고 있다.
일본의 사철 자연과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과 동물의 모습을 아름다운 필선과 채색으로 묘사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으며, 나가노 소후(長野草風, 1885-1949), 이케다 테루카타(池田輝方, 1883-1921), 이케다 쇼엔(池田蕉園, 1886-1917), 마츠모토 시스이(松本姿水, 1887-1972), 야마우치 다몬(山内多門, 1878-1932), 타카하시 교쿠엔(高橋玉淵, 1858-1938), 이마나카 소유(今中素友, 1886-1959), 다나카 신스이(田中針水, 1902-1979), 이시와타리 후코(石渡風古, 1891-1961) 등 그의 주위에는 많은 문인이 있었다.
사후 교쿠도(玉堂)의 개인미술관 건립논의가 활발해져서, 고쥰 왕후(香淳皇后)를 포함한 많은 단체, 지방유지, 쿄쿠도 애호가 등의 기부가 이어졌고, 15세 무렵의 사생작품부터 만년의 작품까지, 소장 작품의 대부분은 기증받은 것이다. 건물은 1961년 준공되어 사후 4년이 된 그 해 5월에 개관하였다.
대지 1,500 평방미터에는 고토미술관(五島美術館)을 설계한 바 있는 요시다 이소야(吉田五十八, 1894-1974)가 설계한 미술관 건물과 함께 나카지마 켄(中島健, 1914-2000)이 조성한 가레산스이 정원(枯山水庭園)이 유명하다. 요시다(吉田)는 스기야(数寄屋) 건축의 일인자로, 쿄쿠도(玉堂)와 친했다고 전해진다. 건물은 히다(飛騨)의 민가와 사원의 회랑 등을 모델로 설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카지마 켄(中島健)은 전후 수상을 지낸 바 있는 구 요시다 시게루 저택 정원(旧吉田茂邸庭園)을 설계한 바 있고, 요시다 이소야(吉田五十八)와의 협업은 이 미술관에서도 이어졌다.
가레산스이 정원(枯山水庭園)은 L 자형 주건물의 전면에 걸쳐 타마 강(多摩川)에서 가져온 9개의 정원석을 곳곳에 배치하여 자갈을 깔은 평지를 강조하고자 하였고, 전체 1/10 부분은 카리코미(刈込) 방식으로 촘촘하게 조경한 진달래 화단이 숨겨져 있다. 자갈밭을 가로지르는 노베단(延段)은 그 뒷쪽 담장으로 둘러쌓인 두 면과 그 너머 웃자란 단풍나무와 은행나무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시선 너머 먼쪽의 산과 협곡면을 차경으로 하여, 시선에는 보이지 않지만 타마 강의 급류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물소리와 함께 바쁜 일상으로부터의 완벽한 해방을 이끌어내고 있다. 미국의 일본정원전문지(日本庭園専門誌)인 'SUKIYA LIVING MAGAGINE'에서 2022년 일본정원 랭킹 7위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