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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처전심(三處傳心) 》
※ 선종에서 말하는 석존께서 세곳에서 가섭에게 마음을 전한 것을 말한다.
1. 영산회상 거염화(靈山會上 擧拈花) :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듬에 가섭만이 홀로 미소를 지은 것.
2.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 分半坐) :
다자탑 앞에서 부처님께서 자리를 반 나누어 같이 앉게 한 것.
3. 니련하반시쌍부(尼蓮河畔示雙趺) :
쌍림(雙林)에서 열반하심에 가섭이 늦게 참석하여 슬피 울자,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민것.
이것을 선종에서는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이심전심(以心傳心)한 것이라 하여
삼처전심이라 한다.
삼처전심(三處傳心)
(1) 삼처전심(三處傳心)
참선에서 화두법의 역사는 초조 마하가섭존자의
삼처전심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삼처전심이란,
①영산회상의 염화미소,
② 다자탑전 반분좌,
③ 사라쌍수하 곽시쌍부 등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재미있게 삼처전심을 설명하겠습니다.
1)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염화미소(拈華微笑)
부처님 당시 영축산(靈鷲山) 혹은 취봉(鷲峯)이라 하는데,
그 산의 위치는 중인도 마가다의 수도 왕사성(王舍城) 동북쪽에 있었으며,
그 모양이 독수리처럼 생겼기 때문에 영축산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산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법문을 말씀하셔서
이러한 법회를 영산회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설법하시는데,
갑자기 대범천왕(大梵天王)께서 허공 중에서 꽃잎을 보내셨는데,
그 중 허공에서 떨어지는 한 송이 꽃을 집어서
설법을 들으려고 모인 대중에게 쳐들어 보이며,
‘이 도리를 아느냐?’ ‘허공에서 보내온 이 도리를 아느냐?‘
하시는 듯 하면서 묵언으로 미소를 지으면서
들여 보이셨기 때문에 이것을 염화(拈華)라고 합니다.
이때 구름같이 모여든 청법대중(請法大衆) 들은
왜 부처님께서 귀중하신 법문을 하시다말고 꽃 한 송이 붙잡으시고
묵언하시며 빙긋이 웃고 계시는가 다 들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 깊은 부처님의 뜻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였습니다. 그 순간 항상 깊은 삼매에 들고
선정력이 뛰어난 상수제자 마하가섭(摩訶迦葉) 존자 만이
그 뜻을 알고 파안(破顔) 미소(微笑)로서 화답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한 것을 알고
다음과 같은 법문을 대중에게 하셨습니다.
“여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의 열반묘심(涅槃妙心)이 있으니,
이를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고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 실려 있습니다.
이렇게 무언(無言)으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서로 통하여 깨닫는 것을 전심(傳心)이라고 합니다.
이 순간부터 선의 역사가 시작되며 최초로 화두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2) 다자탑전(多自塔前) 분반좌(分半座)
다자탑은 중인도 비사리 서북쪽에 여러 가지 전설을 갖고 있는 탑의 이름인데,
어느 때 부처님께서 이 탑 앞에 자리를 정하고,
많은 제자들과 대중들의 청법을 받고 법상에 올라 앉으셨습니다.
수많은 대중들이 몰려들어서 빈자리가 없는 가운데,
마하가섭 존자가 멀리 가서 뒤늦게 돌아 왔는데,
이때 가섭의 모습은 옷도 다 떨어지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더럽고 추하여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석가 세존께서 가섭을 알아보시고 “대가섭이여,
어서 오라, 여래 옆으로 와서 앉아라” 하면서
석존의 법좌를 나누어 대가섭에게 앉도록 하셨습니다.
대중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부처님 법상의 1/2을 앉으시라고 말씀을 하시니
모두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중 일부대중은 설마! 앉으라고 해도 안겠는가? 했는데,
가섭존자는 당연하다는 식으로 당당하게 옆자리에 앉으신 것입니다.
왜 앉으면 다 앉던지 반만 사이좋게 나누어서 앉으셨는가.
이것이 대중들에게 의정을 일으키게 하는 화두의 두 번째의 시작입니다.
3) 사라쌍수하(沙羅雙樹下) 곽시쌍부(槨示雙趺)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성 밖에 사라수 여덟 그루가
둘씩 마주 서 있는 사이에 자리를 깔게 하고 열반에 드시니,
그 숲이 하얗게 변하여 학이 앉아 있는 듯 했다고 해서
그 곳을 “학의 숲”이라고 하기도 하고,
사라수가 둘씩 서 있었다고 해서 사라쌍수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 사라쌍수 밑에서 대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몸을 관에 모셔두고 다비(茶毘)를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불이 붙지 않았는데,
이때 뒤늦게 먼 곳에서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들은
마하가섭은 자기의 제자들과 함께 급히 달려와서,
다비를 하기 위해 소대 위에 놓은 부처님의 향으로
쌓은 관 앞에 이르러, 오른 쪽으로 세 번 돌고 난 뒤
부처님의 발 앞에 세 번 절하고 엎드려서,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어찌 이렇게 빨리 열반에 드셨나이까?”하고
슬피 울며 비통해 했습니다.
이때 관 밖으로 세존의 두 다리가 뻗어나오니,
무상한 육신은 세상을 떠났지만
법신은 상주불멸(常住不滅)하다는 증거를 보이신 것이다.
가섭존자가 이것을 깨닫고 불을 붙이니,
비로소 다비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 순간에도 부처님의 제자들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왜 가섭존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듯이 다비을 붙이려고 해도
붙지 않다가 가섭이 불을 붙이니까 붙고
두 다리가 관밖으로 나왔는데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왜 그랬을까. 이렇게 의심을 하니
이것이 세 번째의 화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부처님과 가섭만의
서로 통하는 세 장소에서 전한 마음을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상과 같이 삼처전심이 화두에 시작이거늘
일부에서는 화두란 부처님 당시에는 없었고,
달마대사 이후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에도 있고,
또는 육조스님 당시 남악 회향선사와 문답 가운데
'어디서 한 물건이 왔는고?'
이렇게 육조스님이 제자인 남악 회향선사에게 질문한 것이 시초가 되어
그 뒤 이 뭣고 화두는 육조스님 이전에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불교학자들도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화두란
근본 자기 마음 당처자리이기 때문에 있고 없는 것이 아니고
항상 여여부동한 근본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두법은 중국에서 조사들이 발명한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발명한 것도 아니며 마음자리는 마음자리일 뿐입니다.
우주가 있는 것처럼 우주를 알면
자기 마음을 아는 것이요 자기 마음을 알면
우주를 아는 것이요 마음을 알면 우주를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과 우주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근본 평등지에서 볼 때는 시공을 초월한 화두법의 역사를
언제부터 시작했느냐고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학자들이 시간적인 역사적으로
서론, 본론, 결론에 해당되는 똑 부러지는 삼단논법에
논리적인 학문적 차원에서 볼 때
부처님이 확철대오한 삼처전심을 보일 때
마하가섭이 빙그레 웃은 염화시중의 미소부터
다자탑전의 분반자 소식이나 열반할 때
곽식쌍부 도리를 기준으로 보면
시간적인 단위의 화두법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중국의 조사들 법담을 나눈 격외도리의
화두만을 봤을 때 일부 불교학자들이 참선에 깊은 종지를 알지 못하고
달마에서 육조 혜능까지는 화두가 없이
마음자리 하나로 이심전심 전법한 것을
육조 혜능 대사가 남악 회향선사에게
‘어디서 한 물건이 왔는고?’
이렇게 물은 것을 남악 회향 선사는
꽉 막혀서 칠 년 뒤 정진하고 ‘설령 한 물건이라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것을 기준으로 화두의 역사는
육조 혜능선사 당시부터 시작이 되었고
그 이전에는 없었다고 알고 있는 불교학자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도단이고
심행처멸의 격외선의 도리를 학문적 문헌의 근거만 가지고 봤을 때
그런 주장은 할 수 있지만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사상을 가진 최상승선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화두의 역사는 부처님의 삼처전심부터 시작되었다고
믿는 것이 정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뭣고’ 화두의 역사를 삼처전심보다
중국 선불교에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에서는
육조 혜능선사와 제자 남악회향스님과의 대담을
‘이뭣고’ 화두의 최초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 때의 문답상황을 자세하게 표현한 육조단경을 볼 것 같으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앞뒤가 콱 막혀 대답을 못 하고 돌아가
8년만에 크게 깨치고 다시 육조혜능 선사를 찾아왔다.
그 순간에도 8년전과 똑같이 육조혜능선사께서,
육조 :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남악 : “설사「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說似一物 卽不中〕
육조 : “닦아서 증득하는 것인가, 아닌가.” 〔還可修證否〕
남악 :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않으나 물들여 더럽혀짐은 없습니다.”
〔修證 卽不無 汚染 不可得〕
육조 : “더럽히고 물들이지 못 하는 이것이
모든 부처님이 호념하시는 바라,
네가 이미 이러하고 나도 이미 이러하다.”
이 스승과 제자의 문답이『이뭣고』화두가 생긴 유래가 될 수 있습니다.
*보통 알음알이를 가진 스님 같으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할 때 “물건이란 스님의 마음이요
, 또한 물건이란 저의 마음자리 아닙니까?
스님과 제가 둘이 아니고 스님의 불성자리나
저의 불성 자리나 같은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알 듯 모를 듯 지지 않으려고
선문답 하듯이 말대꾸를 했을 텐데 역시 대근기인
남악회향선사는 근본 우주가 생기기 이전에
근본 마음자리를 알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재치 문답하듯이
말대꾸만 한다는 것은 대 선지식인
조사스님 앞에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대답을 못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을 가섭존자에세 세 차례에 걸쳐 전했다는
삼처전심(三處傳心)은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영산회상염화미소(靈山會上拈花微笑)
쌍림열반곽시쌍부(雙林涅槃槨示雙趺)입니다.
첫째는 어째서 부처님께서는 자리가 없는 가섭존자를
자기 자리에 올라오라고 해서 자리를 같이한 후
가사로 몸을 둘러서 한 몸을 지었겠습니까?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섭 존자에서
최초로 선의 묘한 깊은 도리를 전해 준 소식입니다.
두 번째는 법화경을 설한 영산회상입니다.
대범천왕이 천우사화라는 꽃을 가지고 와서
부처님에게 공양 올리며
‘제가 부처님 법문을 하시는 자리에 몸을 굽어서
법상이 되어 드릴 테니 내 법상 위에 올라앉아
인천 대중을 위해 법문을 해 주십시오’했습니다.
그래서 대범천왕이 몸을 굽어서 법상을 지었는데,
법상에 오른 부처님이 대범천왕이 올린 꽃을 올려 보이셨습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와 1200아라한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지만 그 소식을 몰랐습니다.
이 때 가섭 존자가 부처님의 꽃 든 도리를 알고 빙긋이 웃자
부처님은 “바른 법, 열반의 묘한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천대중은
부처님 가사와 바리때는 분명히 눈에 보이지만
그 부촉한 법은 보이지 않아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두 번째로 선의 묘한 이치를 전해주신 경우입니다.
부처님께서 45년 설법을 다 하시고 사라쌍수 나무 아래서
열반에 드시자 모든 인천 대중이 슬퍼하고 있는데
가섭 존자만은 오시지 못하셨습니다.
7일 만에 도착한 가섭 존자는 부처님의 법구 주위를
세 번 돌고 부처님의 발아래 서자 부처님께서는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미셨습니다.
가섭존자께서 이에 예배 했습니다.
역시나 부처님 10대 제자를 비롯한 인천의 대중은
발을 내미신 부처님의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두 발을 내민 도리가
부처님이 세 번째로 보이신 선의 묘한 도리입니다.
선나와 사마타를 닦는 것이 선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삼처전심의 도리를 확연히 꿰뚫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미 경전에 진여, 해탈, 불성, 열반, 여래 등의 모든 법을
이미 설해 놨지만 아라한과를 얻은 대중도
부처님이 전한 묘한 도리는 알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경장을 암송했다는 아난존자도 삼처전심의 이치는 알 수 없었습니다
. 바로 그 삼처전심을 알아야 합니다.
선은 삼처의 정신을 근본으로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왜 세 번에 걸쳐 마음을 전했을까요?
마음은 하나이지 셋이 아니요, 법도 하나이지 셋이 아니지 않습니까?
법과 마음이 하나임에도 세 번을 전한 이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공과 연기의 도리를 안다고 하는 수행인에게도
이 삼처전심을 들이대면 입이 딱 얼어붙습니다.
왜 두 발을 내밀었는가?
이 세 마디를 분명하게 투철해서 그 도리에 답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세 가지 도리를 모아서 한꺼번에 대답하는 도리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도인이 될 수 있고 대 선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수박 겉핥기식 공부에 그쳐 이게 이 소리이겠지,
이게 이런 도리이겠지
, 이것도 불교이겠지 하는 식의 뜬 구름 잡는
알음알이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좋은 일 하지 말라는 종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종교가 아니라도 부모가 자식을 키우면서도
시종일관 명을 다할 때까지 좋은 일 하고 착하게 살라고 하는 것이 기본인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다 종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 또한 그런 정도로 도를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도라는 것은 분명히 이와 같은 법칙과 진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도를 분명히 관찰하고 배워야 합니다.
깨달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삼처전심을 확연히 깨달아 알 때
자기 자신이 스스로 부처를 알 수 있습니다.
삼처전심의 도리를 지금 이 자리에서 전해도
여러분들은 물론 수행인들도 알아듣기 어려울 것입니다.
선법문을 계속 듣고 참구해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는 삼처전심의 초입만을 말해 보겟습니다.
부처님은 처음에 자리를 나누어서 한 자리를 지었고
두 번째로 주장자를 들어 보이듯이 꽃을 들어 보이셨고
세 번째는 두 발을 내밀었습니다.
어째서 부처님은
가섭존자와 자신의 몸이 다른데 하나로 짓게 했을까요?
그 자리는 본래 하나입니다. 분반자가 아니라 동자입니다.
그리고는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셨습니다.
선문에서는 꽃을 들어 보인 이것이 종지가 됩니다.
세 번째는 두 발을 내밀었는데, 손도 있고 머리도 있는데
왜 하필 두 발을 내밀었을까요?
이것을 확연히 알아야 합니다.
제가 주장자 들었다가 놓았지 않습니까?
주장자를 드는 것 보다 놓는 데 더 높은 도리가 담겨 있습니다.
주장자 들어 보이는 순간 소식을 알면
부처님 경지이지만 주장자를 놓는 순간 소식을 알면
불조의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부처가 되는 도리도 그만 두고,
부처의 스승이 되는 도리도 그만 두고,
더 한 단계 올라가서 특별한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부처가 되기도 싫고, 부처의 스승도 하지 아니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출격장부요 격외지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습니다.
어째서 부처님 보다 더 훌륭한 선지식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 어떻게 부처님 말씀보다 더 훌륭한 말이 있단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처님 법보다 훌륭한 법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부처님이 설하신 법 안에 모두 포함되는 말입니다.
삼처전심(三處傳心)
불교의 조사선(祖師禪)이 교외별전(敎外別傳)되었다는 근거가 되는 설(說).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이련하반곽시쌍부(泥連河畔槨示雙趺)를 말한다.
첫째 다자탑전분반좌는 《아함경》 《중본경》의
대가섭품(大迦葉品)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석가가 사위국 급고독원에서 대중을 위하여 설법할 때
마하가섭이 뒤늦게 당도하니
자신이 앉았던 자리 반을 나누어 앉으라 하며
널리 가섭의 덕을 찬양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영산회상거염화는 송(宋)나라 오명(悟明)이 편찬한
《전등회요(傳燈會要)》에 근거를 둔 것으로,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함을 말한다.
셋째 이련하반곽시쌍부는 《대열반경》 다비품(茶毘品)에 근거한 것으로,
석가가 열반에 들어 입관된 뒤 멀리서 온 가섭존자가
이를 슬퍼하며 울자 석가가 두발을 관 밖으로 내놓으며 광명을 놓았다는 것이다.
선종에서는 이들 삼처전심을 교외별전의 유일한 근거라 하여 매우 중요시하였다.
조선시대의 청허(淸虛)는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세존이 삼처전심한 것이 선지(禪旨)가 되고 , 일대소설이 교문(敎門)이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또 《교외별전곡(敎外別傳曲)》에도 <세존의 염화에 가섭이 미소>
<삼처전심이 제1구>라는 표현이 있다.
☆교문(敎門) : 부처님께서 말씀으로써 가르친 것을 敎라 한다.
중생들이 각기 그 환경 . 취미 . 능력에 따라
누구나 진리의 法堂에 들어걸 수 있도록 법의 문(法門)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것을 '팔만사천 법문'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엮은 것이 大藏經, 이것이 곧 敎門이다.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
다자탑은 중인도 바이살리(毘舍離 Vaisali)
서북쪽에 있던 탑 이름.
이 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어떤 장자(부호)가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 이루었는데,
그 후 그 아들 딸 60명이 아버지가 공부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이 탑을 쌓았다고 한다. 부처님이 그 곳에서 설법하실 때에
가섭존자가 누더기를 걸치고 뒤늦게 참석하자
수행승들은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이때 부처님은 앉았던 자리를 나누어 그를 앉게 했다.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
영산은 耆 ?山( Gijjhakuta)이라 음역, 뜻으로 옮기면 靈鷲山 혹은 鷲峰일 된다.
그 산 모양이 독수리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산 위에 독수리가 많았던 연유에서라고도 한다.
이 산은 중인도 마가다의 서울 王舍城 동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부처님은 이 산에서 <법화경>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중요한 법문을 말씀하셨다.
어느날 이곳에서 설법을 하는데 大梵天王이 꽃비를 내리어 공양했다.
부처님은 한 송이 꽃을 들어 보인다.
한자리에 모인 많은 대중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는데,
가섭존자만이 홀로 빙그레 웃는다.
이에 부처님은 "바른 법 열반의 묘한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다"고 선언했다 한다.
☆이련하반곽시쌍부(泥連河畔槨示雙趺) :
부처님께서 북인도의 拘尸羅 서북쪽으로 흐르는 跋提河 물가,
사라수 사이에 자리를 깔게 하고 열반에 드니
그 숲이 하얗게 변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을 학의 숲(鶴林, 鶴樹)리라고 하게 되었다.
열반에 든 부처님의 몸을 관에 모셔 두었는데,
생각의 길에서 뒤늦게 돌아온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관을 세 번 돌고 세 번 절하자,
괸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셨다 한다.
염화미소(拈華微笑)
꽃을 손에 들고 미소를 짓는다(《無門關》 제6칙)
석존께서는 영산(靈山)에서 자주 설법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대중의 한 사람이 석존에게 한 송이의 꽃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석존께서는 그 꽃을들어 대중들 앞에 보여 주시고 아
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중이 영문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오직 마하가섭(摩訶迦葉) 존자(尊者)만이 혼자 빙그레 웃었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석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 있으니,
이를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하셨습니다.
여기 석존의 마음에서 가섭 존자의 마음에 인생의 진실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것이 "염화미소(拈華微笑)"의 뜻입니다.
"염화(拈華)"란 꽃을 손에 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이 꽃에 어떤 신비로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석존께서는 손에 꽃을 갖게 되어
그것을 대중들에게 보여 주었을 뿐입니다.
꽃이 아니라도 무방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진리를 깨친 가섭 존자의 깊은 마음입니다.
석존에게는 "십대제자(十大弟子)"라는 베스트 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득도한 석존의 마음을 지혜(知慧)가 뛰어난
사리불(舍利佛)이나 "해공(解空)"에 대한 1인자인 수보리(須菩提)나,
설법에 능한 부루나(富樓那)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신통력(神通力)을 지닌 목련(目蓮)도,
석존의 설법을 누구보다도 많이들은 아난(阿難)도 알지 못했습니다.
석존께서는 결코 진리를 몰래 가섭에게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산 꼭대기의 공개석상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째서 가섭만이 미소를 지었을까요?
가섭도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이며,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두타(頭陀)"란 산스크리트어의 "두우타"를 음사한 것으로서
, 의·식·주,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아(自我)에도 얽매이지 않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대범한 마음입니다.
이 무아(無我)의 마음이 그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석존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