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집고] 서울 강남구의 한 재건축 아파트 욕실. /새턴바스
[땅집고] “화장실은 배설을, 욕실은 휴식과 세신(洗身)을 하는 곳이죠. 목적이 다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화장실은 ‘뒷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욕실다운 욕실’은 펜트하우스에 가야만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이제는 돈을 들여서라도 집집마다 펜트하우스 욕실을 만들어야 합니다.”(정인환 새턴바스 대표)
서울 강남구 도곡동 A아파트 전용 114㎡와 서울 강북구 미아동 B아파트 전용 84㎡는 주택 면적은 다르지만 메인 화장실은 가로 1.8m, 세로 3m로 똑같다. 최근 3.3 ㎡(1평)당 분양가로 1억원을 책정해 화제가 됐던 한강변 최고급 아파트 화장실도 예외가 아니다.
[땅집고] 정인환 새턴바스 대표는 "요즘 화장실은 사실상 뒷간일뿐 제대로 된 욕실은 없다"고 했다. /새턴바스
국내 1위 욕조 제조 기업인 새턴바스 정인환 대표는 “아파트 평면이 나날이 진화하고 있지만 수십년 째 제자리 걸음인 공간이 있는데, 바로 화장실”이라며 “40여년 간 전국에 지은 아파트 화장실 크기는 거의 똑같다”고 했다. 화장실은 혼자서 배설과 세신만 하는 공간이어서 여러 명이 이용하는 거실이나 주방처럼 굳이 넓을 필요가 없다고 본 것. 수십년간 이른바 ‘화장실 일원화’가 나타난 이유다.
최근 업계에선 30년 간 한결 같은 모습을 유지한 화장실에 변화를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 대표는 “30년 전 변소가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화장실 문화가 생겼듯, 앞으로는 새로운 욕실 문화가 나와야 한다”며 “달라지는 인구 구조로 인해 욕실 리모델링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정 대표를 만나 욕실 문화가 달라질 수 있을지 들어봤다.
[땅집고] 욕실 문 잠김 방지를 위해 슬라이딩도어(왼쪽)를 설치하고 휠체어 이동 동선을 확보한 욕실. /새턴바스
-화장실에 욕조를 두면 욕실아닌가.
“아니다. 욕실과 화장실은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 욕실이 휴식과 세신이라는 제 기능을 하려면 아파트 메인 화장실을 욕실로 개조해야 한다. 가로, 세로 길이를 각각 1m만 넓혀도 욕실다운 욕실을 만들 수 있다. 세면대를 파우더룸으로 옮기고, 기존 화장실에는 욕조를 배치하면 된다. 변기는 세면대와 가까운 게 좋다.
제대로 된 욕실은 50평대 아파트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펜트하우스라면 모를까. 욕실 면적을 1평만 더 늘리면 어디서든 펜트하우스급 욕실을 누린다는 말이다. 사소한 것으로 아파트 가치를 올릴 수 있다. 게다가 세면대를 파우더룸으로 옮기면 욕조 옆 공간이 넓어져 휠체어로도 접근 가능하다.”
[땅집고] 일반 아파트 안방 화장실 평면(왼쪽)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유니버셜 욕실 평면(오른쪽)으로 개조한 모습. /새턴바스
-집 안에 공간이 부족할 것 같다.
“당장은 그럴지도 모른다. 수년 내로는 가능하다고 본다. 대부분 아파트 평면은 부모와 자녀가 함께 거주하는 4인 가족에 맞춰 설계했다. 하지만 1~2인 가구가 급증해 앞으로는 방이 남을 것이다. 안 쓰는 방의 면적을 욕실 면적으로 활용하면 된다.
주방이 과거보다 넓어진 것처럼 문화가 달라지면 가능한 일이다. 부뚜막이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1차 혁명이 일어났고, 손님을 집으로 초대하는 문화가 확산하면서 커다란 식탁을 놓거나 인테리어에 신경쓰는 2차 혁명이 진행됐다. 집이 넓어져서 주방이 커진 게 아니다.”
[땅집고] 경남 남해군에 위치한 최고급 골프 리조트 '사우스케이프오너스클럽' 내 객실에 놓인 새턴바스 욕조. /새턴바스
-욕실 문화 달라질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하다. 언제부턴가 커다란 호텔 욕조에 몸을 담그고 휴식하는 ‘호캉스’(호텔+바캉스)가 생겨났다. 멋진 뷰를 보면서 몸을 담그는 경험을 집에서는 누릴 수 없으니 나타난 문화다. 사람들은 여전히 욕조 문화를 좋아한다. 고대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하다 말고 부력과 부피 측정 방법을 발견해 “유레카(알았다·Eureka)”를 외쳤지 않나. 욕조는 휴식 뿐 아니라 영감을 주는 공간이다.
욕실은 시니어 주거 트렌드 중 하나인 AIP(aging in place·집에서 나이들기)와도 부합한다. 노인 인구 1000만명을 모두 실버타운과 요양원, 요양병원에 모실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사회가 욕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글=김서경 땅집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