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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고 싶은 아버지
1961년 2월 12일(일), 전 본부교회.
마태복음 7:21-29
<말 씀>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누군가를 모시고 싶어합니다. 몸은 마음을 위주로 하여 모시고 싶어하며, 몸과 마음은 부모나 스승 혹은 지도자, 혹은 국가의 주권자를 모시고 싶어 합니다. 즉 인간은 대상의 입장에서 주체자를 모시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것은 역사가 흐름에 따라 점점 더 확대되어 이제는 하나님을 모시고 싶어 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셔야 할 인간
인간이 이념의 세계를 찾아 절대자를 모시지 못하는 한, 슬픔은 연속됩니다. 이념의 세계에는 인간이 아닌 절대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 절대자를 모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몸은 마음 하나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고, 우리는 부모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으며, 국가의 주권자를 모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을 지으신 절대자마저 진정으로 받들어 모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형편없고 불쌍한 자들입니다.
본래 우리 인간은 귀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이러한 존재가 마음과 몸이 하나되지 못하고, 부모와 하나되지 못하고, 이념과 하나되지 못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무가치하게 된 것은 타락의 보응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몸과 하나되기를 바라는 것은 본래의 천성입니다.
이렇게 무가치한 인간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저버리지 아니하시고 수습하여 인연맺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절대자가 계신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무한한 가치로 끌어올리려고 하는 절대자가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회에 나가면 그 사회의 대표자를 모셔야 하듯 이념세계에서는 절대자를 모셔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세계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념을 거쳐 최후에는 절대자 하나님, 유일무이한 창조주 하나님을 모시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광정(匡正)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우리가 최후에 모셔야 할 분은 절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 절대자는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우리는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버지와 하나될 때까지 나아가야만 합니다.
우리 인간은 세상 것 가지고는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늘땅을 녹여 낼 수 있는 절대자를 모시는 곳에서만 최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고 최고의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인간들은 오늘도 내일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이 절대자와 내적으로 인연맺도록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면이 아니라 내적인 면으로 섭리해 나오는 것이 종교입니다. 외적인 면은 악이 지배하고 내적인 면은 선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선을 중심삼고 이념의 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선의 이념은 내적인 반영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내적인 면을 무한히 추구하여 이념의 세계를 찾고 최후에는 창조주를 찾아 영원히 그분을 모시고 그분과 더불어 즐기며 살고자 하는 것이 종교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은 섭리
지금 세계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상대적인 두 가지 형태로 갈라져 있습니다. 즉 외적인 면을 추구하는 공산주의와 내적인 면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로 갈라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 것이냐? 무궁무진한 내적인 면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민주주의를 표면적으로 인도하고 계시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뒤에서 밀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도 세계적인 이념을 중심삼고 나아가지 않으면 망하고 맙니다.
오늘날의 민주진영이 서로 단결하여 새로운 내적인 하나의 형태를 갖출 때까지는 하늘이 해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현시대의 사조에 잠겨 그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표면으로 나타난 문화적인 혜택이나 사회적인 행락의 발판을 통하여 즐거워하며 살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내적인 면, 즉 우리의 마음과 접할 수 있고 우리의 마음과 인연맺을 수 있는 종교를 연구하고 찾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앞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최후에는 이 땅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 세계를 품기 위하여 역사하는 절대자가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한 자들만이 새 시대의 왕자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표면상으로 나타난 종파나 교파의 교리가 이 시대에 있어서 전체를 대신할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과 인연되어 있는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면 그것과는 인연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반드시 하나의 목적, 하나의 이념을 달성하여 온 인류가 당신을 모실 수 있는 자리까지 이끄는 섭리를 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에 하나님의 섭리는 표면적으로 나타난 교파가 아니요, 표면적으로 나타난 현실의 어떠한 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면에서 새시대의 새로운 역사를 꾸며 나오는 숨은 섭리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추리로써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세계를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면 망해 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직접 지배하시는 것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어떤 것일 것이뇨? 여기에서 우리는 인류애를 제창해야 합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실감적으로 체험할 수 있고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하고 부르는 그 하나님은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증적인 존재입니다.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생활의 중심으로서의 하나님입니다. 그러한 절대자와 인연맺고 사는 무리가 이 끝날에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 이 세계는 그야말로 최후의 난국에 봉착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는 한 결코 이 세상을 망하게 그냥 내버려 두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더불어 하는 섭리의 형태가 어느곳에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먼저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하느냐? 하나님을 창조주, 즉 주인으로 모시는 것보다 하나님을 심정적으로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야 됩니다. 관념적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것이 몸과 마음에 사무치게 느껴져야 됩니다. 이러한 체험을 일으킬 수 있는 섭리적인 형태가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부자의 인연을 맺어 주시려는 하나님
지금까지 우리는 관념적으로 하나님을 불러 왔습니다. 종교적인 주체로만 하나님을 불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체인 동시에 생활의 주체요, 생활의 주체인 동시에 이념의 주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이념의 주체가 넓고 크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그것이 생활 감정에서 분석되고 체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생활에서 체험되는 그 이념의 가치를 존재하고 있는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노라고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선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인연을 맺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이상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수습하여 최대의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하시나니, 그것은 이 인류를 대하여 친히 아들이라 하고 딸이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정을 품고 찾아오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체험해야 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체험해야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기필코 모셔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떠한 지도자를 모시고 있다 할진대 그 지도자는 여러분이 영원히 모실 자가 아닙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어떠한 이념을 주장하는 대표자가 있다 할진대 그 대표자도 영원히 모실 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히 모시고 영원히 같이 살아야 할 분은 누구냐? 바로 영원무궁토록 존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에서부터 천만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모시고 생활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어떠한 주권자의 아들딸인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떤 회사의 사장의 아들딸인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진짜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선의 이념을 통하여 천지 만물을 친히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대하여 여러분이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 창조주가 여러분을 대하여 아들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냐? 인간이 찾고 있는 최고의 것을 인간 앞에 약속하시고 인간을 인도해 나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말로만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실 그 내용은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 내용을 체득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늘에 계시는 참아버지, 만우주를 지으신 창조주를 아버지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를 진짜 아버지로 모셨느냐 하면 못 모셨다는 것입니다. 이름으로 만족하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실체의 중심으로서 부자의 인연을 그리워해 나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구원은 이름으로써 얻는 것이 아닙니다. 실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름으로 인연되는 것이 아니라 실체와 인연되어야 합니다. 창조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인연은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참아버지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절대자를 대하여 이름 아닌 실체로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 있습니까?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인류가 타락이라는 서러운 운명에 봉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두말할 것 없이 행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행복은 사람을 중심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를 위주로 한 것입니다. 반드시 창조주를 위주로 하여 행복을 주장하고 선의 이념을 주장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마음에도 몸에도 창조주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에도, 여러분의 일생의 노정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감각까지도 창조주와 더불어 인연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할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생활도, 생애노정도 그러하지 못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락한 이 땅 위에서 주장하는 어떤 주의나 국가적인 이념을 중심삼고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충성을 하고, 효도를 하는 사람은 많되 절대자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진정하고 참다운 효자 효녀는 이 땅 위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온 천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인 동시에 우리의 참아버지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참아버지는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어떠한 운명의 곡절에 처하더라도 그 곡절을 넘어 그 참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역사적인 소원과 자기 생애의 소원의 심정을 품고서 ‘나의 아버지여!’ 하고 최후의 한마디를 남길 때까지 인간은 가야 합니다. 죽음의 길이 가로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끝날 인류 가운데에서 그러한 길을 달려가서 창조주, 절대자, 즉 하나님을 대하여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무리들이 나오게 될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은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정의 주체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무한히 슬픈 감정을 갖고 계시며 무한히 기쁜 감정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라고 해서 기쁘고 좋은 감정만 갖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슬프다면 인간들이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은 슬픔의 심정을 갖고 계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선물로 안겨 드렸습니다. 고통을 선물로 안겨 드렸습니다. 핍박을 선물로 안겨 드렸습니다. 죽음을 선물로 안겨 드렸습니다.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모든 것들을 전부 하나님께 맡겨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간으로부터 선의 선물, 기쁨의 선물, 만족의 선물, 희락의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죄는 인간이 지었는데 그 죄를 사해 주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원통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그 죄를 지은 자가 사함받아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죄는 사람이 짓고 죄를 사해 주는 것은 하나님이 해야 되다니 이는 무슨 연고인가? 부자의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연맺고자 하는 목표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인류의 조상을 세운 후 거기에 소망을 두셨습니다. 창조이념을 중심삼고 아담 해와를 바라보셨습니다. 소망의 실체로서 바라보셨습니다. 아담 해와가 성장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가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그들의 마음속에 찾아 들어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뿐만이 아니라 심정 깊은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심정을 인간의 심정 깊은 곳에 심는 것이었습니다. 그 심정이 심어지기를 바라고 나오셨지만 그것은 도상에서 꺾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을 대해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렇게 계시지는 못했습니다. 왜? 죄악된 이 땅이요, 죄악의 침범을 받고 있는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당시에 세워 놓았던 이념과 심정을 통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인간이 된 연고로 관념적으로는 모셔 왔을는지 모르나 생활적으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인간이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것을 청산하고 친히 인간들의 심정에 자리를 잡고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있는 한 날을 찾아오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신다 할진대 어느 정도까지 찾아오시느냐? 인간의 마음 깊은 곳까지 찾아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작은 부분까지도 남겨 놓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다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찾아오시고자 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의 몸을 찾아오십니다. 우리 몸의 세포 하나에까지 찾아오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생활을 찾아오십니다. 마음과 몸, 즉 여러분 개체를 찾아오시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우리의 생활의 지극히 세밀한 부분에까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을 중심삼고 인연맺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사람의 깊은 데까지 인연맺고자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한마디라도 자기와 반대되거나 하나라도 자기의 소원과 대치되는 것이 있으면 용납하지 않습니다. 안 그래요? 그러니만큼 하늘과 땅을 움직여낼 수 있는 근본적인 심정을 가진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게 될 때 우리 마음의 밑창까지도 티와 흠이 없는 선한 자리에서 인연맺고자 하시고, 우리의 몸과도 그러한 자리에서 인연맺고자 하시고, 우리의 생활과도 그러한 자리에서 인연맺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해결점은 하나님을 중심삼는 것
그러면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기필코 모셔야 할 우리 자신들은 과연 지금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가 갖고 있는 이것이 좋사온데 하나님도 이것이 좋습니까?’ 할 때에 ‘오냐!’ 하고 인정을 하시면 그것은 염려 없습니다. 인정받으면 그것을 소유할 수 있지만 인정받지 못할 때에는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타락의 후손이요, 타락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갖고 있는 양심을 어느 정도는 용납하시지만 전체적으로는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웠던 본연의 양심의 기준은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양심이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양심이 기준입니다. 또 몸도 여러분의 몸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이 기준입니다. 또 생활도 여러분의 생활이 기준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활이 기준입니다. 이 생활을 통한 환경이 있을 것이고, 환경을 통한 이념의 세계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한 그날부터 하늘과 인연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개인이 하늘과 절대적인 인연을 맺지 못하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이 하늘과 절대적인 인연을 맺지 못하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국가, 세계가 하늘과 절대적인 인연을 맺지 못하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그냥 붙안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고 그분과 인연맺을 수 없습니다. 왜? 하늘의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인연의 중심으로 삼을 것이뇨? 모든 문제를 해결지을 수 있고 처리할 수 있는 중심의 조건은 무엇일 것이뇨? 그것은 우리의 양심도 아니요, 이 땅 위에 있는 어떠한 이념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몸이 하나된 그 기준을 통하여 소원하시는 세계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절대자가 있다면 반드시 그것을 위주로 하여 이 세계를 수습해야 합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인류가 알아야 할 최후의 해결점은 무엇이뇨? 어떠한 주의가 아닙니다. 미국 같은 선진국가도 아닙니다. 어떠한 영웅도 아닙니다. 어떠한 성현도 아닙니다. 최후의 해결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주권, 문제는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통한 세계가 아닙니다.
복귀역사는 구원역사
이 땅 위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을 붙들고 하나님이 ‘너는 과연 내 마음이자 네 마음이요, 내 심정이자 네 심정이요, 내 몸이자 네 몸이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이자 네 마음이요, 내 심정이자 네 심정이요, 내 몸이자 네 몸이요, 내 이념이자 네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대표자를 이 인류 앞에 보내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게 아녜요? 그래야 하나님입니다. 그래야 인류를 대해서 구원섭리의 뜻을 두신 하나님이 되지, 그러한 대표자를 인류 앞에 보내 주지 않는 한 그 하나님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대표자로 보내셨던 분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구주입니다. 어떤 구주? 우리를 죽음의 자리에서 끌어내어 살려주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를 하나님 편에 올라가게 하는 구주, 다시 말해서 인류 전체의 소원을 달성시킬 수 있는 구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구주냐? 마음의 구주요, 몸의 구주요, 심정의 구주요, 생활의 구주요, 이념의 구주요, 천주의 구주입니다. 복귀역사는 구원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섭리해 나오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체(體)를 갖추지 못한 무형의 신으로 계시기 때문에 실체를 가진 우리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타락하여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인간들 앞에 실체적인 대표자로 보내신 분이 메시아입니다. 이리하여 메시아를 중심삼은 개인, 메시아를 중심삼은 가정, 메시아를 중심삼은 세계를 택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형태가 오늘날의 민주주의입니다.
이 땅 위에 메시아로 오셨던 분이 예수님이라 할진대 그분은 최고의 중심 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인간에게 인연맺어 주어야 했는데 그것을 못하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 인류 앞에 약속하시기를 나는 신랑이니 너희는 신부가 되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자들은 주님만 만나면 다 되는 줄 알고 있지만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주님을 만났으면 어떻게 해야 되느뇨?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기에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간 뒤에는 주님도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자신 앞에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앞에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외적인 세계 형태는 갖추어졌으나 심정의 세계는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세계가 사정을 통할 수 있는 환경은 되어 있으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환경은 못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면 무엇을 갖고 찾아오실 것이뇨? 심정을 갖고 찾아오실 것입니다. 만일 이 세계를 대표할 수 있고 전세계 인류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이 있다 할진대 그 민족은 어떠한 민족일 것이뇨? 하나님의 심정을 전통으로 세워 나오는 민족일 것입니다. 또 앞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문화는 어떠한 문화일 것이뇨?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최후의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심정이 통하는 세계, 심정의 세계를 이룰 수 있는 최후의 목적의 세계를 찾기 전에는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짐을 풀고 영원한 안식의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정을 갖고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심정을 다하여 만나고 싶은 아버지, 정성을 다하여 만나고 싶은 아버지, 뜻을 다하여 만나고 싶은 아버지,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대하고, 그 아버지와 세계 이상의 가치를 즐길 수 있고, 그 아버지를 직접 대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아버지를 모시는 자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한번 반성해 봐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으며, 여러분의 몸은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으며, 여러분의 생활은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으며, 여러분의 이념은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으며, 여러분이 모시고자 하는 하나님은 지금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를 다시 한번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과 같이 있어야 되고, 여러분의 몸과 같이 있어야 되고, 여러분의 생활과 같이 있어야 되고, 여러분의 환경과 여러분들이 주장하고 있는 이념과 같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같이 있다 할진대 여러분의 말은 하나님의 말을 대신할 것이며, 여러분의 행동은 하나님의 행동을 대신할 것이며, 여러분이 사는 생활은 하나님의 생활을 대신할 것이로되, 그렇지 못하다 할진대 여러분의 마음과 몸과 생활은 하나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최고의 자리에 계십니다, 최고의 자리에.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감정이건 의식이건 전체가 아버지를 통하지 않고 아버지를 위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버지를 모시는 자는 어떠한 자냐? 아버지를 통하여서 살고, 아버지를 통하여서 죽고, 아버지를 통하여서 행동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를 통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셔야 할 끝날의 성도들은 아버지를 통해서 생활해야 합니다. 밥을 먹으나 자나 깨나 어떠한 행동을 하거나 그 모든 것들은 아버지를 통해서 해야 합니다. 이것은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체휼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
그러면 아버지의 소원은 무엇일 것이뇨? 내 개체가 아버지의 소원이 되어 있습니다. 내 한 개체가 소원인 동시에 나를 중심삼은 가정이 소원이요, 가정을 중심삼은 사회가 소원이요, 사회를 중심삼은 세계가 소원이요, 세계를 중심삼은 하늘땅이 소원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아버지 앞에 효자가 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세밀한 분야까지 아버지와 같이 의논하는 사람입니다. 어려울 때도,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아버지와 같이하는 사람이 효자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왜 불행했느냐? 지금까지 하나님이 왜 탄식했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고생할 때 같이 고생해 주는 아들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생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당신이 고생할 때 같이 고생해 주는 사랑하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 고생도 감사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입니다. 슬픔과 고통을 같이 할 수 있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들이 견디기 어렵고 넘어가기 어려운 슬픔과 고통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위로해 주시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사망이 부딪쳐 들어오는 고통의 자리에 동참하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 사망을 초월할 수 있는, 사망의 권위를 무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고통받을 때 같이 고통받고 하나님이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인류를 붙안고 나오시는 하나님은 혼자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혼자 억울함을 당하고, 혼자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고통당할 때 그 고통을 같이한 사람이 없었고, 하나님이 슬퍼할 때 그 슬픔을 같이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고통이 심했고, 슬픔이 심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이 끝날, 이 시대가 아무리 악하고, 아무리 사망의 물결이 휩쓸어 친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을 막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사람,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더불어 고통 가운데에서 뒤넘이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가치적인 존재가 될 것이요, 하나님의 참다운 효자 효녀가 될 것입니다. 그런 아들딸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자리에서 낙망하거나 슬퍼하시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품고 그런 자리에 처해 있는 아들딸을 권고하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진정으로 하나님을 모셔야 되겠습니다. 모시는 데는 어디서부터 모셔야 되느냐? 기쁨의 자리에서 모실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슬픔을 붙안고 그 마음을 알아주는 자리에서부터 모셔야 됩니다. 그런 참다운 아들딸을 찾지 못하여 수고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가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과 같이 슬퍼하고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나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비로소 소망의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기쁨을 부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하시는 고통스러운 자리에 동참하여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자는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이 땅 위에서 제일 슬픈 자리, 제일 고통스러운 자리,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자리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하나님과 더불어 고통 당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셔야 됩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아들이라는 인정을 받아야만, 영원한 이상세계가 이루어진 그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영원무궁토록 아들로서 하늘땅 앞에 자랑하고, 여러분 자신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한 여러분은 저나라에 가서도 한 면밖에 통할 수 없습니다. 천상에 가더라도 제일 어려운 자리에 갑니다.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의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소망 가운데에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아들딸 말고 슬픔과 고통이 물결치는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아들딸을…. 소망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아들딸은 많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아들딸은 심히 적습니다. 심히 적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모시는 자는 어떠한 자냐? 기쁨과 소망 가운데에서 모시는 자가 아니라 고통 가운데에서 모시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주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줌으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붙들고 ‘내 아들아, 내 딸아, 내가 있나니 참고 견디며 싸워라.’ 하고 위로해 주는 자입니다.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한 하나님을 영원한 내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환란 중 충절의 심정을 가진 참아들딸
하나님은 인류 앞에 끝날이 되면 7년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이 환란 시기는 6천년 역사노정에 있어서 하늘의 슬픈 곡절이 성도들에게 부딪치는 때입니다. 인간들의 인연이 다 깨져 나가고 믿을 수 없는 환경에 부딪치는 때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양심적으로 올바로 산다 해도 그 양심으로 자기의 생애를 주장할 수 없는 때입니다. 신앙이니 어떠한 주의니 하는 것으로도 자기의 생애를 주장할 수 없는 때입니다. 뜻을 품고 생각이 있는 자일수록 바라보는 곳곳마다 고통을 느끼는 때입니다. 그런 때가 끝날 7년 대환난의 때입니다. 그때는 소망이 흔들리는 때요,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중심이 흔들리는 때요, 믿고 따라 나가던 지도자가 흔들리는 때입니다. 주의는 물론 종교, 양심, 부모의 심정까지도 전부가 다 흔들리는 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런 세상을 만들어 놓으셔야 되느냐? 그것은 참다운 하나님, 역사적으로 수고한 하나님과 동참했다고 하는 가치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수많은 참상을 보아 왔고, 수많은 곡절을 당하셨기에 끝날에 있어서는 양심이니 주의니 신앙이니 하는 것을 가지고 중심을 세울 수 없는 환경에 부딪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런 어려운 자리에서도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참다운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교회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슬퍼하지 말고, 어떠한 주의가 동요되는 것을 보고 슬퍼하지 말고, 어떠한 주권자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슬퍼하지 말고, 자기의 부모가 변한다고 슬퍼하지 말고, 자기의 형제가 변해 떨어진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의지하고 믿고 있던 세상의 모든 것이 동요되더라도 여러분의 마음은 태연해야 됩니다. 세상의 어떠한 고통이 부딪쳐 오더라도 여러분의 마음은 태연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동요되지 않고 이 시간도 나를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당신의 귀한 한 날, 당신이 거쳐온 고통의 인연을 우리에게 맺어 주기 위한 크나큰 약속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늘을 붙안고 ‘같이 갑시다. 같이 싸웁시다. 같이 행동합시다.’라고 부르짖고 나서는 사람을 찾기 위하여 그런 세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 나아가는 길이 막혔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 세계가 아무리 뒤끓는다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모든 것이 동요되더라도 하늘 대한 일편단심만은 동요되지 마십시오. 하늘 대한 충절(忠節)의 심정만은 동요되지 마십시오. 하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소망의 마음만은 변하지 마십시오. 그 마음을 변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떠한 고통의 자리에 처넣는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떠한 자리에 떨어지더라도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정의 줄을 붙들고 올라가기를 애써야 합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을 느끼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와 함께 동참하는 자리에 서서 아버지의 고통을 내가 알아주고, 그 아버지는 나의 고통을 알아줄 것을 믿고, 그런 자리라도 가겠다는 책임과 의무를 느끼고 나간다 할진대 여러분들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그러한 신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아버지를 모시는 데 있어서 천상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 아버지를 모실 것이 아니라, 사망의 물결치는 가운데에서 참다운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수고하시는 그 아버지를 모셔야 합니다. 그 아버지를 내 아버지로 알고, 그 아버지의 사정을 내 사정으로 하고, 그 아버지의 심정을 내 심정으로 하고, 그 아버지의 소원을 내 소원으로 하여 찾아오시는 아버지 앞에 늠름하게 나아가 ‘당신의 아들을 찾는 것이 당신의 소망인 것을 알았고, 그 아들을 찾아 당신의 역사적인 곡절을 풀어놓는 것이 당신의 사정인 것을 알았고, 잃어버린 아들을 붙안고 사랑하고 싶은 것이 당신의 심정인 것을 알았습니다. 어떠한 도탄과 환란과 어려움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제가 당신의 소망의 실체요, 사정의 실체요, 심정의 실체이옵니다.’ 하고 자신 있게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라야만 아버지의 아들이요, 또 그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진정한 모심의 자세
오늘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찾아온 것은 영광 가운데 공중에 들려 올라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늘 보좌에서 수많은 천군천사를 거느리고 호령하는 그런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도탄 중에서 환란과 더불어 싸우고 고통과 더불어 지내시는 그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공평한 분이라면 누구를 축복할 것이뇨? 그러한 자를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에 아버지를 참으로 모시고 싶다 할진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여러분이 잘산다고 해서 잘사는 환경에서 모셔 주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백만장자와 같은 호화스러운 생활 가운데에서 모셔 주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모셔 주기를 바라시느냐? 제일 비참한 자리에서부터 모셔 주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기 직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셨지만, 죽음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만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의 자리를 넘어서 만나려고 하셨습니다. 왜? 사망 선까지 사탄이 침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망선상을 넘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아버지와 상봉하려면 인간들이 피해 가는 그런 고통 이상의 자리에서 하늘을 모셔야 됩니다. 그런 자리에서 내가 위로받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버지를 위로해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내 소원을 위해서 아버지를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시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여, 이렇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자리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자리에서 아버지를 대하더라도 ‘나는 당신 앞에 이렇게 되겠나이다.’ 하며, 아버지 앞에 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예수님도 운명 당시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는 이 말씀을 성경에 남겨 놓은 것이 원통하다는 것입니다. 천상에 가서 보니 최후에 아버지를 상봉하여 넘어가는 그 자리에서 한마디라도 ‘아버지여,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혹은 ‘아버지의 소망의 뜻을 이루니 감사하옵니다.’라고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말이 더 멋있지 않아요?
여러분들은 수천년 동안을 하루같이 참아 나오신 그 아버지를 모셔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 일신의 고통을 고통스럽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스럽다는 생각조차 버려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절대로 자기를 중심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내게 이런 것은 피하게 해 주십시오.’ 이따위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당하는 이 고통이 당신의 뜻 앞에 합당한 고통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됩니다. 내가 이런 처지에 놓여지게 됨은 모두가 아버지의 뜻이 있어서요, 또 뜻의 성취를 위해서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근본 관념부터 빼 버려야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한 번이라도 위로해 드려 봤습니까? 무엇을 달라고만 했습니다. 이런 도둑놈 심보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기도해서는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해 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옵니까?’ 기도는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타락한 후손, 죄지은 무리들은 복을 달라고만 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몸을 통하여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한 몸이 환난을 겪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환난을 겪게 해 주시옵고, 내 몸이 찢김을 당하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찢기게 해 주시옵소서. 복과 영광은 당신이 받으시고 벌과 고통은 저에게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최대의 선물
통일교회 신도들은 영광스러운 자리에서만 아버지를 모셔서는 안 됩니다. 제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제일 슬픈 자리에서부터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모실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슬픈 마음을 품고 찾아오시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붙안고 그 마음의 대상자가 되어 아버지가 ‘너는 내 아들이요, 내 딸이다.’ 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지옥 밑창에서 축복을 해 주신다면 지옥의 밑창에라도 찾아가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마음을 갖고 신앙의 중심을 세워 나간다면 절대로 지옥에 안 갑니다. 영계에 가보면 천당 가겠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그 무엇을 자랑하던 사람들이 영계에 가서도 좋을 줄 알지만 영계는 그렇게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시고 싶은 아버지, 그 아버지를 우리는 모셔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그 아버지가 찾아와 주기를 고대했고, 만나기를 고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한 준비를 하고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까? 호화찬란한 좋은 자리를 준비하고 만나고자 합니까? 하늘은 그러한 자리에서 만나 주지 않습니다. 하늘이 찾고 있는 것은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하늘은 피 흘리고 눈물 흘리는 자리에서 만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만날 그 아버지는 웃음의 아버지가 아니라 상처를 입은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는 상처를 입었을망정 자식이 상처 입은 것을 보시고 온정의 얼굴로 위로하시며 그 자식을 맞기 위하여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거꿀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들딸은 최고의 자리에, 그렇지 못한 아들딸은 최하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은 아버지 앞에 드릴 선물이 많습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고, 지닌 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선물이 있나니,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즐겨하는 것들이 아니라 피 흘리고 눈물 흘리고 땀을 흘리면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는 그 한 모습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의 아버지, 슬픔의 아버지, 억울함의 아버지 앞에 최대의 선물입니다.
뜻을 따라 나오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금은보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같은 사정에 처한 자의 손에 손을 잡고, 몸에 몸을 붙들고 슬퍼하는 아들을 위로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라야만 천상천하 어디를 가든지 그를 대해서 항거하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혀도 ‘옳소이다!’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못한 자를 하나님 보좌에 앉히면 천군천사와 천천만 성도, 땅 위의 사탄까지도 참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기독교 신자가 가는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참된 신자가 가는 길은 고통의 길입니다. 참된 신자가 걸어간 그 길은 억울한 길이요, 참음의 길이요, 비참한 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비참한 자리에서 우리와 더불어 인연맺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하늘은 그러한 자리에서 우리를 박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대하여 인연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은 천상에 가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늠름히 설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눈물의 골짜기에서 아버지를 부를 때 응답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눈물짓는 자리에서 ‘아버지!’ 할 때 ‘오냐! 내가 여기 있으니 참아라.’, 피땀 흘리는 고통이 사무치는 자리에서 ‘아버지여!’ 할 때 ‘내가 참았으니 너도 참아라.’, 죽음이 닥쳐오는 그 순간에도 ‘내가 있으니 안심해라.’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얼마나 아버지를 모셨으며 얼마나 아버지와 더불어 의논했으며 얼마나 아버지와 더불어 살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영광의 자리에서는 아버지를 불렀댔자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아버지께서 영광의 날을 보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 미국과 같은 선진국가는 외적인 사명을 갖고서 세계를 주도해 왔지만 이제는 내려가야 됩니다. 돈 보따리를 짊어지고 불쌍한 민족을 찾아 내려가야 합니다. 돈 보따리만이 아니라 마음과 심정도 가지고 찾아 내려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민족이 그 사명을 인계 받습니다. 그러니 원조를 안 해 줄래야 안 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만 원조해 주면 될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세계의 모든 국가를 대표해서 기독교 이념을 중심한 국가로 세워진 이상, 미국은 그 이념의 핵심에다 마음과 심정을 플러스시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민족이 그 사명을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통일교인이 가야 할 길
역사적인 사조가 이렇게 흘러나왔거늘, 이런 뜻을 알고 나선 우리는 어디로 가야 될 것이냐? 영광스러운 자리로 갈 것이 아니라 비참한 자리로 가야 합니다. 아직까지 7년 대환난이 오지 아니하였거든 현실에서 7년 대환난과 같은 장소를 찾아가야 됩니다. 대환난이 찾아오는 곳은 어디일 것이뇨?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자리로부터 찾아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리가 아니라 제일 싫어하는 자리로부터 찾아오니 그러한 자리에서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된다면 문제없습니다.
역사의 사조는 이러한 단계로 움직여 들어오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노동자, 농민, 불쌍한 자들을 붙들고 일을 해 나왔기 때문에 급속한 시일내에 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것입니다. 천정(天情)을 가지고 그런 자리에 서지 못하고 인정을 가지고 그런 자리에 섰다는 것입니다. 천정을 가지고 그 자리에 서지 못했으니 앞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면 천정을 가지고 그런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천지는 뒤엎어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통일교회 신도들이 찾아가야 할 길은 어떠한 길이뇨? 소위 인간들이 부르짖고 있는, 평화의 깃발이 휘날린다고 주장하는 그런 자리가 아니요,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자리, 인간들이 제일 피해 가는 자리를 찾아가야 됩니다. 찾아가는 데는 어떠한 모양으로? 6천년 동안 찾아오신 아버지의 모양을 대신하여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함께 눈물 흘리시면서 눈물 흘리는 우리를 위로하고자 하는 아버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눈물 흘리는 그 심정을 붙안고 여러분 자신들이 비록 눈물 흘리는 자리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눈물 흘리는 불쌍한 자를 붙들고 ‘울지 마라. 너의 앞 길에는 소망이 있나니 울지 마라.’고 위로하면서 그들에게 행복을, 그들에게 소망을, 그들에게 사정을, 그들에게 심정을 옮겨 줄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늘의 상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천지의 상속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땅과 하늘의 권세는 물론 지옥의 권세까지도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야 합니다. 역사적인 사조가 우리의 목전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 사실일진대 여러분은 가는 곳곳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가지고 가야 됩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이 다 가는 곳에는 어떠한 문제도 다 해결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단 말입니다. 그 외의 것은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버지 대신 가야 되겠거늘, 그러한 자리에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의 마음을 알고 여러분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다 할진대 여러분은 아버지 대신 그를 위로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딸이 될 수 있지, 그렇지 않을진대 여러분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가는 고통의 길은 돌아가는 길입니다. 잠깐 동안입니다. 소망을 두고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이 아닙니다. 소망의 저쪽에서 돌아가는 길입니다. 잠깐 동안입니다. 우리 통일신도들은 이 민족을 대신하여 이 민족이 못 가는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 민족을 움직여서 세계가 가지 못하는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가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가야 되느냐? 천정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가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르짖고 있는 이념과 여러분들이 처하여 있는 그 위치와 여러분들이 자랑하고 있는 그 가치가 크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천주적인 가치 이상의 가치와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인연은 어디에서부터 맺어지느냐? 지극히 비참한 자리에서부터, 지극히 어려운 자리에서부터, 지극히 슬픈 자리에서부터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와 인연맺어 슬픔을 무시할 수 있고, 슬픔을 소화할 수 있으며,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진실로 아버지를 모시는 자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갖고 나가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고통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절대로 망하지 않아요. 비록 일신은 고통에 부딪힐망정 그 자리를 넘어가면 무한한 자유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자리를 넘어서야 할 시대적인 전환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기필코 그 자리를 넘어가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아버지의 심정을 붙안고 아버지의 사정과 소원의 실체로서 고통의 개척자가 되고, 슬픔의 개척자가 되고, 어려움의 개척자가 되어서 그 길을 따라오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하늘의 아들딸들이 될 것이며, 온 세계를 대표할 것입니다. 또한 이 민족이 그런 민족이 되면 수많은 민족을 대표하여 하늘의 축복을 받는 민족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고,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어 주기를 부탁합니다.
<기 도>
지금까지 저희들은 아버지를 영광 가운데 기쁨을 지니고 계신 분으로 알았사옵니다. 모든 복과 부귀영화를 자유자재로 우리에게 줄 수 있고 우리에게 해방의 기쁨과 목적을 달성해 주시는 분인 줄로 알았사옵니다. 그러나 하늘의 배후의 사정을 알고 보니 복을 주고 싶어도 복을 줄 수 없는 내적인 곡절이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한스러운 6천년의 슬픔의 역사를 탕감복귀해야 된다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이제는 알고 탄식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행치 못함을 탄식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은 이 민족을 찾아오고 계시는 아버지요, 세계 인류를 찾아오고 계시는 아버지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발걸음에는 아직까지 슬픔의 눈물이 젖어 있사옵고, 아직까지 고통의 장벽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늘 저희들은 그러한 아버지의 고통의 성벽이 되고 슬픔의 도성이 되어, 아버지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아버님의 억울함과 한을 붙안고 그 책임과 사명을 다하기 위해 원수와의 결전 도상에서 피와 눈물을 뿌리며 싸울 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귀한 것을 가졌사옵니까? 그것은 본래 저희 것이 아니옵니다. 자랑할 수 있는 무엇을 가졌다 할진대 그것도 저희 것이 아니옵니다. 그것은 하늘의 것이요, 민족의 것이요, 세계의 것이옵니다. 그렇게 돌리기 위해선 하늘과 심정적인 인연을 맺어야 된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저희들 천정에 사무쳐 인류애의 심정을 붙안고 허덕일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산천을 바라볼 때도 아버지의 심정을 붙안고 눈물로 바라볼 줄 알고, 백성을 바라볼 때도 역시 그러하고, 인류를 바라볼 때도 역시 그럴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동안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사옵니다. 저희들은 그것을 하늘의 영원한 유업으로 받았사오니, 이제 저희들이 선조가 되어 천추만대 후손 앞에 하늘이 남겨준 바 그 자체를 그냥 그대로 상속시켜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개체가 되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가정을 이루어 그 가정을 중심삼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이념적인 세계를 건설해야 되겠사옵니다. 건설할 범위가 크면 클수록 더 많은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개인을 찾기 위해서도, 가정을 찾기 위해서도, 민족을 찾기 위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오며, 더 나아가서는 피와 땀이 흐르는 것을 개의치 말아야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생명이 끝날 때까지 아버지를 모시는 데에 모든 것을 소모시키는 것을 자랑으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자리에서 눈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될 것을 이 시간 다시 한번 결심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삼천만 민중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민족을 찾아오시기에 수고하신 당신의 노고를 이 민족은 모르오나 저희들만이라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6천년 복귀역사노정의 억울함을 수많은 사람들은 모르오나 쫓김받고 몰림받는 저희들만이라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만은 진정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그 아버지는 우리를 대해 진정으로 아들딸이라 하며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그 자리를 그리워하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환난의 길을 겁내지 말고 선두를 다투어 나설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이 비극의 운명을 가로막아 사망의 물결을 막을 수 있는 방파제를 쌓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오니, 이 일을 위하여 결의하고, 이 일을 위하여 맹세하며, 있는 정성을 다 들여 이 일의 성취에 총 주력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눈물 어린 심정으로 하늘을 위하여 기도하는 무리가 있사올진대, 아버지, 품어 주시고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이 길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억울한 길이요, 분한 길이요,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당신이 걸어오신 길이기에 이것을 기쁨의 길, 감사의 길, 영광의 길로 바꾸어 가야 할 곡절의 노정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 반대의 길을 가야 할 운명에 처한 것을 당신은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당신과 더불어 끝까지 이 길을 달려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부터 실시되는 이 40일수련에 참석한 젊은 아들딸의 마음을, 아버지, 붙드시옵소서. 아버지를 진정으로 모시는 아들딸이 되기 위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어려운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준비를 하고 수련을 받는 이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그런 기준 밑에서 결의하고 나설 줄 아는 이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시간 위에도 아버지의 영광의 손길이 떠나지 마시옵고, 아버지께서 걸으신 발자취를 저희들이 직접 밟으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를 위로할 줄 아는 참다운 효자 효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 가운데에서 되어지고 승리의 한 날이 이 천지에 나타나기를 바라오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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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죄는 인간이 지었는데 그 죄를 사해 주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원통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그 죄를 지은 자가 사함받아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죄는 사람이 짓고 죄를 사해 주는 것은 하나님이 해야 되다니 이는 무슨 연고인가? 부자의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아주
우리는 심정을 다하여 만나고 싶은 아버지, 정성을 다하여 만나고 싶은 아버지, 뜻을 다하여 만나고 싶은 아버지,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대하고, 그 아버지와 세계 이상의 가치를 즐길 수 있고, 그 아버지를 직접 대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아버지를 모시는 자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아주!!!
아주
그러니 여러분들, 나아가는 길이 막혔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 세계가 아무리 뒤끓는다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모든 것이 동요되더라도 하늘 대한 일편단심만은 동요되지 마십시오. 하늘 대한 충절(忠節)의 심정만은 동요되지 마십시오. 하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소망의 마음만은 변하지 마십시오. 그 마음을 변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떠한 고통의 자리에 처넣는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떠한 자리에 떨어지더라도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정의 줄을 붙들고 올라가기를 애써야 합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을 느끼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와 함께 동참하는 자리에 서서 아버지의 고통을 내가 알아주고, 그 아버지는 나의 고통을 알아줄 것을 믿고, 그런 자리라도 가겠다는 책임과 의무를 느끼고 나간다 할진대 여러분들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