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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1일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세계 병자의 날)
교회는 해마다 2월 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고 있다. 이는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발현에서 비롯되었다. 성모님께서는 1858년 2월 11일부터 루르드에 여러 차례 나타나셨는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부터 해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이 발현 첫날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도록 하였다. 이날 교회는 병자들의 빠른 쾌유를 위하여 기도한다. 또한 병자들을 돌보는 모든 의료인도 함께 기억하며 병자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책임감을 다지도록 기도한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0
1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2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3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4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5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7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8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9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10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31차 세계 병자의 날 담화
(2023년 2월 11일)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연민은 치유의 시노달리타스 실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질병은 우리의 인간적 상황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고립되고 버려진 채로 겪는다면, 돌봄과 연민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질병은 비인간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여정을 걸어갈 때에 누군가 아픔을 느끼고 누군가 피로 또는 그 길에서 일어나는 사고로 멈추어 서야 하는 것은 유별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순간들에서 어떻게 함께 걸어가고 있는지를 봅니다. 참으로 우리가 그 여정을 동행하고 있는지, 아니면 저마다 자기 이익만 좇고 다른 이들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그저 같은 길 위에 있는 개인인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온 교회가 시노달리타스의 길을 걸어가는 가운데 제31차 세계 병자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가 특히 취약함과 질병의 체험을 통하여 친밀함과 연민과 자애로, 곧 하느님의 방식으로 함께 걸어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성찰하도록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서를 통하여 하느님 계시의 정점 가운데 하나인 이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에제 34,15-16). 혼란과 질병과 쇠약함을 체험하는 것은 인간 여정의 일부입니다. 이는 우리를 하느님 백성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 관심의 한가운데로 데려갑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시며 이 여정에서 당신 자녀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기를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버리는 문화에 저항할 수 있는, 참으로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가 되는 법을 그분께 배웁시다.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새롭게 읽어 보도록 권고합니다. 우리가 닫힌 세상의 “그림자”에서 어떻게 빠져나와 “열린 세상을 상상하고 이룩할” 수 있는지 분명히 밝히고자 저는 이 비유를 선택하였습니다(「모든 형제들」, 56항 참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와 오늘날 형제애를 거부하는 여러 방식들은 깊이 맞물려 있습니다. 특히 두들겨 맞고 강도를 당한 한 남자가 길가에 버려져 있는 모습은 너무도 많은 우리 형제자매들이 가장 도움이 필요한 때에 버려져 있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생명과 존엄에 대한 침해가 자연적 원인에서 비롯되는지 불의와 폭력으로 빚어지는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불평등 수위의 상승과 소수 이익의 지배가 이제는 인간 환경 전반에 영향을 끼쳐 어떤 경험이라도 그저 ‘자연적’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기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모든 고통이 ‘문화’의 맥락과 여러 문화적 모순들 안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고독과 버려짐의 상황에 대한 인식이 특히 중요합니다. 이러한 형태의 참혹함은 다른 어떤 불의보다 더 쉽게 극복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말해 주듯이, 그러한 참혹함을 없애는 데에는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연민의 마음으로 움직이는 짧은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신실하고 종교적이라고 여겨지는 두 행인이 다친 사람을 보고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행인 곧 경멸받는 이방인인 한 사마리아인이 연민으로 마음이 움직여 길 위의 낯선 이를 형제로 여기고 돌보아 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의식하지 않았지만 변화를 일으키고 세상을 더욱 형제적인 곳으로 만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질병에 거의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이 듦을 인정조차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취약함에 겁먹고, 만연한 능률만능주의 문화는 취약함을 숨기라고 우리를 다그치며 인간의 약함이 설 자리를 남기지 않습니다. 이렇게 악이 불쑥 쳐들어와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는 초주검이 되어 땅에 쓰러져 버립니다. 게다가, 그러한 때에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서 버림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약해져 있는 순간에, 다른 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우리 스스로 다른 이들을 버려야 한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고독이 시작되고 우리는 하느님께도 버림받은 것처럼 쓰라린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타인과 맺는 관계 그리고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훼손된다면 우리가 주님과 이루는 평화 안에 머무르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온 교회가 참다운 ‘야전 병원’이 되려면, 질병 안에서도 착한 사마리아인의 복음적 모범을 잣대로 삼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특히 우리 시대의 역사적 상황 안에서 돌봄의 실천을 통하여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약하고 힘없는 이들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멈추어 서고 가까이 다가가며 치유하고 일으켜 주는 법을 아는 연민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아픈 이들의 고난은 마치 형제도 자매도 없다는 듯 자기 갈 길만 가는 사람들의 무관심을 깨고 들어가 그 발걸음을 늦추는 부르심입니다.
세계 병자의 날은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친밀함과 기도로의 초대입니다. 아울러 함께 나아가는 새로운 길에 대한 하느님 백성, 보건의료 기관, 시민 사회 단체의 인식을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에제키엘 예언서는 다른 사람에게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두는 우선순위를 신랄하게 심판합니다.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에제 34, 3-4).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빛을 비추고 시기적절합니다. 이는 고발할 때뿐만 아니라 제안할 때도 그렇습니다. 사실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결론은 얼굴을 마주한 만남에서 시작한 형제애의 실천이 어떻게 조직적인 돌봄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제시합니다. 여관, 여관 주인, 비용 그리고 추후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약속(루카 10,34-35 참조) 등의 요인은 모두, 세상 모든 곳에서 날마다 악을 마주하는 선을 지키는 의료인, 사회복지사, 가족 구성원, 그리고 자원봉사자의 헌신을 가리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을 겪으면서 우리는 보건 의료와 관련 연구 분야에서 날마다 종사하는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영웅들을 기리는 것으로 이토록 거대한 집단적 비극에서 벗어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전문 지식과 연대의 수많은 연결망을 압박했고, 기존의 공공복지 시스템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감사는 기본적이며 적절한 의료 서비스에 대한 각 사람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모든 나라에서 전략과 자원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행위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여관 주인에게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루카 10,35) 하고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저마다에게도 같은 요청을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하고 이르십니다. 회칙 「모든 형제들」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비유는 다른 이들의 약함을 자기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어떤 계획을 통해서 한 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들은 배척의 사회가 건설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다가와서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고 회복시켜 공동선을 이루게 합니다”(「모든 형제들」, 67항).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만 달성되는 충만함을 위하여 빚어졌습니다. 고통 앞에서 무관심한 삶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닙니다”(「모든 형제들」, 68항).
2023년 2월 11일, 루르드 성지를 생각해봅시다. 루르드 성지는 이 시대를 위하여 교회에 맡겨진 예언적 가르침입니다. 기능을 잘하는 것과 생산적인 이들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하느님 백성의 중심에 병자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이가 소중하고 아무도 버려지거나 소외되지 않는 인류의 표징으로서 병자들과 함께 나아갑니다.
병자의 치유이신 성모 마리아께 전구를 청하며 병자 여러분 모두를 맡겨 드립니다. 또한 가정에서, 일, 연구 또는 자원봉사를 통하여 그들을 돌보는 여러분과 형제애의 개인적, 교회적, 시민적 유대를 맺기 위하여 헌신하는 이들인 여러분을 맡겨 드립니다. 모든 이에게 진심 어린 교황 강복을 보냅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3년 1월 10일
프란치스코
[내용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30038?gb=K1200 ]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흙을 일구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9-24
9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18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20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23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24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축일2월 11일 성 베네딕토 (Benedict)
신분 : 수도원장
활동 지역 : 아니아네(Aniane)
활동 연도 : 747-821년
같은 이름 : 베네데토, 베네딕도, 베네딕또, 베네딕뚜스, 베네딕투스, 베네딕트, 분도
프랑스 남부 마구엘론(Maguelone)의 백작이자 서고트족(Visigoth)의 귀족 아이굴프(Aigulf)의 아들로 태어난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또는 베네딕토)는 페피누스 3세(Pepinus III)의 궁정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에 주둔했던 샤를마뉴(Charlemagne)의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죽을 뻔한 경험을 한 774년경 수도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종으로서 일생을 봉사하며 살기로 결심하고 군대를 떠나 상센(Saint-Seine) 수도원에 입회했다. 동방의 수도생활을 동경했던 그는 780년경 아니아네로 이주해 동방의 수덕생활을 실천하는 수도원을 설립했다가, 782년경 베네딕투스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을 다시 설립했다.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수도생활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며 각 수도원이 사용하던 여러 규칙서를 베네딕투스의 수도 규칙서와 비교 연구하여 임의 해석이 아닌 수도 규칙서 본연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의 출발점임을 확신했다. 샤를마뉴는 그에게 프랑크 왕국 내 수도원 개혁을 위임하였다. 그의 사후 왕위를 계승한 경건왕 루도비쿠스(Ludovicus) 역시 그에게 재차 수도원 개혁을 위임하였다. 경건왕 루도비쿠스 시절 성 베네딕투스는 코르넬리뮌스터(Cornelimnster) 수도원을 설립하고 개혁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는 당시 사용되던 25개의 수도 규칙서를 모은 “수도 규칙서 전집”(Codex Regularum)과 그 규칙들을 베네딕투스 수도 규칙서와 병행하며 주석한 “규칙서들의 대조”(Concordia Regularum)를 저술했다. 결국 아니아네의 성 베네딕투스는 수도원 연합의 수석원장이 되어 모든 수도자가 같은 수도 규칙서를 따르며 세상을 포기하고 구원에 다다르기를 희망했다. 루도비쿠스 왕은 816년과 817년 아헨 교회회의에서 성 베네딕투스의 수도원 개혁 의지를 담아 수도자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규칙인 “수도회 참사규칙”(Capitulare Monachorum)’을 공표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서방 수도생활의 재건자로 추앙받으며, 제2의 베네딕투스라고 불린다. 그의 축일은 2월 12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오늘 축일을 맞은 베네딕토 (Benedict)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