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탁류에 얼러 좌르르 쏟아져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걷기 좋은 계절, 먼 도시의 골목으로 시간 여행을 떠났다. 때는 1930년대, 장소는 전북의 서북단, 채만식의 소설 '탁류'가 위처럼 설명한 군산이다. 부산에서 남한 땅을 대각선으로 질러 차로 4시간을 달려야 닿는 군산은 1899년, 부산보다 13년 뒤에 개항했다. 곡창의 쌀을 수탈해 일본으로 실어나르던 아픈 역사가 이야기를 품은 관광 자원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10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 장미동, 수탈의 기억을 잇다 군산의 근대 여행지는 군산항 주변에 모여 있다. 시작은 군산 내항이 있는 장미동에서 하자. 꽃 이름 '장미'(薔薇)가 아니라 '수탈한 쌀 곳간'이라는 의미의 '장미'(藏米)다. 군산시가 이곳에 있던 근대 건축물 5개 동을 고쳐 '근대산업유산 예술창작벨트'라는 이름으로 개관한 것이 지난 6월 28일.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이 각각 근대건축관과 근대미술관으로 탈바꿈했고, 1930년대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에서 수탈한 쌀을 보관하던 창고는 장미공연장으로, 광복 이후 위락시설로 사용됐던 적산가옥은 장미갤러리로, 일제 강점기 무역회사 건물이었던 미즈상사는 미즈카페로 단장됐다.
군산항 주변 일제 수탈의 현장
예술 옷 입고 관광자원 탈바꿈
월명·신흥·금광동 골목 걷다보면
가옥·사찰 등 일본식 건축물 즐비
8월의 크리스마스·타짜 등
흥행 영화 촬영장 만나는 재미도 이 5개 동은 근대 건축물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을 뿐아니라 하나 하나 수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를테면 조선은행과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은 쌀 반출 자금과 농지 수탈 대출 자금을 관리했다. 일본인들은 여기서 싼 이자로 대출을 받아 조선인을 대상으로 토지 담보 고리대금업을 벌이고 상환기일을 못 맞추면 논을 빼앗았다. 최근까지 나이트클럽, 노래방, 생활용품 판매점 등으로 쓰이다 흉물로 방치됐던 이곳에는 이제 군산의 역사 전시관과 근대 건축 모형, 지역 작가의 미술 작품들이 들어섰다.
군산 내항 앞 도로인 해망로를 따라 이 건물들과 나란히 서 있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군산 여행의 길잡이 역할을 해 준다. 특히 1930년 9월 5일 해질녘의 군산 건물 11채를 뚝 떼어다 재현해 놓은 근대생활관이 흥미롭다. 쌀을 선물 거래하던 투기장인 미두장, 인력거꾼들의 대기소인 인력거차방, 고무신 가게와 다다미방 극장, 술 도매상 등을 실감나게 꾸며놓았다. 직접 인력거도 타 보고, 술지게미 향도 맡아보는 체험 공간이다. 입장료 2천 원. 오전 9시~오후 6시(동절기 오후 5시). 매주 월요일 휴관.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옆 고풍스러운 빨간 벽돌 건물이
옛 군산세관이다. 1908년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 수입 벽돌로 지은 유럽 양식 건물로, 서울역사, 한국은행 건물과 함께 국내에 남아있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다. 목조로 된 내부는 호남관세전시관으로 이용 중이다. 내항을 따라 남아 있는 부잔교(뜬다리) 부두까지 가면 장미동이 끝난다. 부잔교는 물 높이에 따라 위 아래로 움직이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선착장 역할을 대신했던 부두로, 역시 수백 만 섬의 쌀을 내보내기 위해 일제가 만든 것이다.
■ 동네 한 바퀴, 시간 속을 걷다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근대건축관) 앞에 서 있는 채만식소설비는 이곳이 '탁류'에서 주인공 초봉과 결혼한 고태수가 근무하던 곳임을 일러준다. 이 비를 등 뒤로 하고 해망로와 직각으로 난 대학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면 오른쪽 블록인 월명동 일대에 일본식 건축물이 흩어져 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걸어서 20분 거리면 모두 둘러볼 수 있으니 바둑판식 골목을 느긋하게 걸어보자.
이 길의 처음 나오는 사거리에서 골목을 빙 돌아선 줄을 발견한다면, 그곳이 바로 군산의 최고 명물 빵집인 이성당이다. 1920년대 일본인이 운영하던 화과자점으로 시작해 해방 이후부터 지금의 간판으로 운영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으로 기록돼 있다. 가장 유명한 단팥빵과 야채빵은 100% 쌀가루 반죽과 반죽보다 더 많은 양의 소가 특징으로 진열될 새도 없이 바로 동이 난다. 주말이면 무려 1만 개가 팔린다는 단팥빵과 아삭아삭한 야채가 살아있는 야채빵을 한번 맛보고 나면 이 빵을 위해 주말 아침 서울에서 두 시간을 달려와 줄을 선다는 사람들이 이해가 된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옛 히로쓰 가옥)은 일제강점기 포목상 히로쓰가 살던 정통 일본식 저택이다. 붉은 황토빛 담장 뒤로 숨은 듯 있는 사무라이 가문용 전투식 대문으로 들어서면, ㄱ자 모양 2층 건물 두 채가 붙어있고, 그 사이에 일본식 정원이 있다. 원형이 잘 보존된 다다미방과 온돌식 방을 거닐다가 마루에 앉아 정원에 가둔 물과 볕을 바라보는 맛이 적당히 은밀하다. 영화 '타짜'에서 조승우가 찾아와 화투를 배우던 사부 백윤식의 집으로 등장했다. 일본식 가옥 체험 공간인 고우당에는 1인 1만 5천 원부터 시작하는 숙박동과 찻집, 주점, 중정형 공원이 소담하게 모여 있다.
이 골목에는 영화팬이라면 눈물나게 반가울 공간이 하나 더 있다. 1998년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가 운영하던
초원사진관이다. 제작진이 여름날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차고를 발견하고 주인을 설득해 사진관 세트를 만들던 곳으로, 촬영이 끝난 뒤 철거했다가 이후 군산시가 다시 사들여 복원했다. 한석규와 심은하가 증명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들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시간 여행의 마지막은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다. 일본 조동종 사찰 금강사로 지어졌다가 해방 뒤 조계종 사찰로 바뀐 곳으로 외관 장식이 없고 창문이 많은 대웅전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1992년 일본 조동종 종무총장의 이름으로 '일본의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이 건립한 참사문(참회와 사죄의 글) 비석이 있다. "일본의 억압으로 고통받은 아시아인들에게 사죄하고, 가해자 입장에서 포교했던 해외 전도의 과오를 사죄하겠다"는 내용이다. 아픈 역사를 관광지로 보존하는 것에 대한 대답 하나가 거기에 있었다. 글·사진=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TIP
■ 교통 ·자동차: 남해고속도로∼통영대전중부고속도로∼익산포항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전주IC∼반월교차로·조촌교차로·도도교차로∼새만금북로∼옥산교차로. 옥산교차로에서 시청 방향을 따라가면 군산 시내에 진입할 수 있다. 4시간 걸린다.
·대중교통: 부산동부시외버스터미널(1688-9969)에서 군산시외버스터미널(063-442-3747)까지 하루 9차례 운행한다. 3시간 50분 걸림. 2만 2천 원.
■ 연락처(지역번호 063)
군산시 관광진흥과 454-3337. 관광안내소 453-4986. 시티투어 근대문화코스(매주 수·일요일 운행) 465-2240. 구불길탐방센터 467-9879. 군산근대역사박물관 450-4541. 고우당 443-1042.
■ 맛(지역번호 063) 이성당(445-2772)의 단팥빵과 야채빵은 나오는 시각과 1인당 구매 수량(5~10개)이 정해져 있다. 각 1천200원, 1천400원. 빈해원(442-2429)은 대를 이은 화교 중국집으로 고풍스러운 2층 구조가 압도적이다. 바삭바삭한 돼지고기 살코기에 너무 강하지 않은, 맑은 소스를 얹은 탕수육(사진)이 일품이다. 1만 4천~1만 8천 원. 한일옥(446-5491)의 맑은 소고기무국도 맛있다. 6천500원.
최혜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