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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조춘숙
말 씀 고린도전서 16장 1-14절
제 목 그리스도를 위한 성도들의 화합[27]
오늘은 고린도전서 마지막 장인 16장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강해를 통해 사도바울이 성도들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27번에 걸쳐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바울이 하고자 했던 말은 성도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며, 각자 맡은 역할이 있는데 모두가 그 역할을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 천국을 보이는 천국으로 만들어야만 영혼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역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날마다 죽는 자로 살아가고 있으며, 마지막 날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 그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안에서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훗날 천사들이 수종을 드는 거룩한 성도들은 그 날을 기대하며 육신을 벗는 그 날까지 한 몸인 지체를 사랑하고 서로 도와주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 참 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는 성도들이 한 몸인 것처럼 교회와 교회 역시 한 몸입니다.
교회들이 건강해야만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 될 수 있기 때문에 교회들은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서로 기도해주면서,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들은 성도의 수를 늘이기 위해서 복음에 관심이 없고, 건물을 건축하기 위해서 영혼구원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내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욕심 때문에 교회들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한 영혼이라도 더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도해야 하고 교회가 부흥해야 하지만, 인간적인 이런 다툼은 세상을 밝히기는커녕 사탄의 도구가 되어 다른 교회가 들고 있는 등불마저 세상의 힘으로 꺼 버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은혜로 세상에서 구별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천국을 소망하는 백성들이 그리스도안에서 한 지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건물의 크기와 성도의 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부흥을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은 자기 생각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므로 복음을 듣고도 세상과 동일하게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더 힘있어 보이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보다 눈에 보이는 교회건물이 축복의 기준이 되고, 세상의 소유 정도가 믿음보다 앞서게 되므로 보이는 세상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가진 이런 세상의 관점들이 교회를 다른 교회보다 더 높게, 화려하게, 자랑거리로 만들기 위해서 복음과 상관없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은 그리스도와 영혼구원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충성심은 사라지고, 거짓된 열심이 믿음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대형교회가 모두 잘못되었고, 성도는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의 부유함을 쫓아 진리의 말씀을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 간절한 바램은 대형교회들이 오직 그리스도만 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대형교회들이 세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만 전한다면 그것보다 귀한 일은 없으며, 어쩌면 세상의 법을 따르지 않는 대형 교회들 때문에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들이 세상과 전혀 구별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굳이 교회들을 핍박할 이유가 없습니다.
도리어 수많은 교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님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서 보면 알겠지만 핍박과 환난이 없는 신앙은 거짓신앙입니다.
여러분이 성경말씀을 선포하면 듣는 사람들의 죄가 드러나기 때문에 반드시 공격을 당하게 되어 있고, 사탄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예수님을 핍박한 것처럼 사람들을 동원하여 핍박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세상의 법과 다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주관자인 사탄에게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고, 세상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성도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끝까지 지켜야 하고, 성도들은 진리의 말씀대로 목숨을 다할 때까지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볼 때 현대교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세상과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여러분이 볼 때 성도들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까 세상사람보다 더 잘 살아야 하고, 하나님이 지켜주시니까 절대로 병들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니까 내 자녀들이 다른 자녀들보다 더 성공해야 한다는 악한 생각에 매여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진리를 가르치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교회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진리와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며,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고, 성경을 모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님을 만났을 때 저는 지금까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살다 왔다고 고백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틀림없이 물으실 것이므로 지금부터 생각해 두셔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마지막 날 나팔소리가 났을 때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나고, 우리의 죽을 육신은 다시는 죽지 않을 신령한 몸을 입을 것이라고 확신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린도교회를 향해 이 사실을 믿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에게 이 사실을 믿고 있느냐고 물은 것은 그들이 거짓복음을 전하며 부활은 없다고 속이는 사람들의 말에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바쳐가며 세운 고린도교회가 진리를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탐심과 거짓으로 마음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분노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보시면 알겠지만 사탄은 절대로 쉬는 법이 없습니다.
그 결과 세상은 점점 타락하고 있고, 음지에서 숨어서 행하던 악한 행동들을 당당하게 세상에 드러내 놓고 죄를 짓고 있습니다.
사탄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세상을 주관하는 자들이 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세상의 법을 하나씩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부흥과 성공을 위해서 이미 세상과 타협했기 때문에 진리를 모르는 성도들은 이 사실을 인지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은 지금까지 악이 선을 이겼고, 악인이 의인보다 세상의 힘을 훨씬 많이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악을 행하고, 죄를 지어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들이 하나가 되어 진리의 말씀을 지킨다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지금 교회들은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목회자들 조차 성경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으며, 관심도 없습니다.
오로지 교회 건축에 마음을 쏟고, 사람의 수를 늘려 자랑거리로 삼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부흥인 줄 알고 있고, 하나님의 일을 한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성경을 보셔서 알겠지만 예수님은 한번도 진리를 벗어난 사람을 칭찬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제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은 두려움을 가져야만 합니다.
언제 주님의 진노의 심판이 임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흰옷을 입고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말씀대로 살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1장 28-30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글라우디오때에 흉년이 들 것이라는 아가보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고, 예루살렘 사람들이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교회를 돕도록 격려하였고, 그들은 바울의 명령대로 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도왔습니다.
갈라디아교회들은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의 헌신적인 충성이 있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 최선을 다해 예루살렘교회를 도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16장에 내가 갈라디아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고린도교회에게 편지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에베소에서 오순절까지 머물다가 마게도냐를 지나 고린도교회로 향할 예정이었습니다.
헌데 계획대로 되지 못하고 에베소를 급하게 떠나야 할 일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된 데메드리오의 소동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으면서 먼저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보내고, 어떻게 하면 에베소에 복음을 더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복음의 문을 열어주셨고, 또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더 시간을 갖고 복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는 아데미신상 모형을 만들어서 큰 수입원으로 삼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데미를 믿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는 것과 살아서 역사하신 하나님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데메드리오가 아데미신상을 만드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서 바울이라는 사람이 우리가 만든 아데미신상이 신이 아니라고 전하는 것은 큰 여신 아데미 신전을 무시하는 동시에 우리의 풍족한 삶도 위협을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분노하며 우리의 신을 모독한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며 바울의 동역자인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극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큰 소요가 일어나자 바울이 극장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관리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서기장이 그 집회를 간신히 해산시켰습니다.
자기들의 수입이 줄어들 것을 염려했던 사람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급하게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향한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인 바울도 복음을 전할 때 사탄의 공격을 받는 것을 보면 성도들은 반드시 기도로 준비한 다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10절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자신들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 바울을 비방하고 대적하는 사람들과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그들을 대적하지 못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보면서 바울이 얼마나 힘든 사역을 감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에라스도와 함께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로 보냈습니다.
디모데가 받은 사명은 고린도교인들을 말씀으로 회개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이 당시 젊고 경험이 적은 목회자였기 때문에 바울은 그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본이 되라고 늘 가르쳤습니다.
디모데가 목회자이기는 하지만 경험이 적기 때문에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디모데를 어떻게 대할지 바울은 염려가 컸던 것입니다.
철학과 세상의 헛된 지혜가 팽배한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진리를 외곡시키고 있기 때문에 디모데의 사명은 막중했습니다.
디모데는 사도바울의 신앙을 본받아 진리만을 위해서 헌신했기 때문에 고린도교회에서 사역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물론 디모데가 지혜롭기 때문에 문제를 온전히 해결한 것이 아니라 진리로 다스렸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이 그들이 회개하도록 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상대가 누구이든 오직 진리만 전한다면 성령께서 구원을 위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염려할 것 없습니다.
14절 너희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교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온 성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품고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영화를 버리고 낮고 낮은 자리에 앉으신 사랑이며, 창조주를 배신하고 사탄의 말을 들은 죄인을 용서하는 사랑이며, 구세주를 몰라보고 십자가에서 죽인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품어야만 헌신할 수 있으며, 충성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품은 하늘의 사랑은 세상을 초월한 사랑이기 때문에 자기의 유익에 따라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품은 성도는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새 부대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베풀고, 희생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낸 스데바나는 아덴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고린도로 돌아와 온 가족을 전도했고, 자기의 소유물과 같은 노예들이 복음을 영접하도록 도왔습니다.
그 당시 자기의 소유물인 노예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세상보다 더 아름다운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고는 절대로 베풀 수 없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스데바나처럼 그리스도만 위해서 사는 성도와 또 복음을 위해서 사역하는 성도들에게 순종하고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18절에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한 이런 사람들을 알아줘야 한다고 강조한 것을 보면 앞서서 일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성도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본을 보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돕지 않는다면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성도들은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편지마다 자기와 함께 일한 동역자들의 이름을 기록했는데 그것은 자기 혼자 일한 것이 아니라 이런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일을 감당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여 충성한 성도들이 하나님께 축복을 받도록 하였고, 이름을 알리므로 각처에 있는 성도들이 동역자들을 돕도록 한 것입니다.
다윗 역시 도망 다니던 세월을 끝내고 성으로 돌아왔을 때 함께 했던 용사들을 요직에 앉혔고, 그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바울의 마음이 바로 다윗과 동일한 마음이었으며, 이런 바울의 행동은 모든 공을 동역자들에게 돌리는 겸손에서 나온 것입니다.
2절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바울은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헌금을 자기가 갔을 때 급하게 하지 말고, 미리미리 헌금해서 모아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한 지체로써 강퍅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예루살렘을 위해서 하나님께 충분히 기도하고 헌금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주로 안식일에 모임을 가졌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안식 후 첫날에 모임을 가졌습니다.
주일과 안식일 모임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4세기 초부터 기독교는 주일을 정규적인 교회의 모임으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매주 첫날에 헌금을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교회를 도와야 한다고 고린도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조하는 것은 영적인 도움을 받은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풍요로운 이방교회들이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한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육적인 나눔을 갖는 것은 한 지체로써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시험에 들 것을 염려하여 마게도냐 성도들의 충성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2-3절에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마게도냐 성도들은 복음을 영접한 후 유대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인들의 지배하에서 극심한 가난과 환난을 겪으면서도 도리어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핍박과 가난으로 인해 여유가 없었지만 영원한 생명을 전해준 예루살렘교회가 어렵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은 힘에 지나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충만한 마게도냐교회의 헌신을 고린도교회에 전해준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전에 바울이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모금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돕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다시 디도를 통해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신을 알렸고, 디모데를 통해 거짓복음과 신앙을 버리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인들은 마게도냐 성도들의 헌신을 듣고 회개하여 신앙을 회복했습니다.
신앙을 회복하자 그제야 믿음의 형제를 돕는 것은 자신의 소유가 줄어들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으로 보내기 위해서 모은 헌금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직접 와서 그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하는 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편지를 받고 돌이키는 기회로 삼았고, 지체로써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한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하겠다는 말은 내 것을 나누고 싶지 않은 거짓 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성도라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직접 보여주신 그 사랑을 알고만 있지 말고 마게도냐 교인들이 힘에 지나도록 도운 것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일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죄인들을 부요케 하신 것처럼 성도들의 헌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것이며, 사망에 떨어질 많은 영혼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바울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은 것만 기뻐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주위에 있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아니면 육적으로 힘들어 하는지 살펴서 돕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이 당연히 할 일입니다.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드리는 고백속에는 주님께서 가신 길을 걷겠다는 고백도 들어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고 있는 인생의 십자가위에 예수님의 십자가도 져야 한다고 말씀을 드린다면 여러분은 마음이 무거울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지면 인생의 십자가는 상대적으로 가벼워질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열심히 지는 성도는 그 십자가의 무게만큼 하나님께 상급을 받을 것이며, 인생의 무게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바울은 이 놀라운 비밀을 알기에 범사에 감사했고, 쉬지 않고 기도했으며,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간절하게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오실 것을 믿는 성도의 신앙이야말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반석의 신앙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의 믿음입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강해를 마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 모두 배우셨습니다.
복음은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성도의 목적입니다.
충성된 성도만이 사도바울처럼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으며, 주님과 함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성도로써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013,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