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 가슴아픈
현대사의 출발지점
① 이승만과 박용만
미국 하와이 교포사회의 초기 지도자는 박용만이라는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미국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군대를 양성해 일본 본토를 공격해 독립을 이룩하자’고 외쳐 교포 사회에 감동을
일으켰다. 하와이 교포들 역시 ‘망국의 한, 나라 없는 설음’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용만은 농장을 구입해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생도들에게 낮에는 일을, 저녁에는
군사훈련을 시켰다. 일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이 일본과 동맹국 간이 되어 한국인의 군사훈련을
묵과할 수가 없게 되었다.
미국 사회에는 이승만이라는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그는 백인 우월주의에 동화되고 기독교 문명을 철저히
숭배하는 미국 추종자였다. 미국과 일본의 비위에 맞추어, ‘한국이 일본에 합방된 뒤에 눈부시게
발전했다. 나는 독립운동을 획책한 적이 없다’고 인터뷰나 기고를 통해 말했다. ‘한국 독립은
국제연맹에 독립청원서를 내고 위임통치를 받은 다음에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하와이 교포들이 기부하는 독립운동자금에 눈독을 들이고 미국본토로부터 하와이로 건너왔다. 그리고
박용만의 군사양성을 맹렬하게 반대하며 반세력을 규합했다. 이 무렵 일본이 밀정(密偵)을 풀어
한국인의 동태를 살피다가 박용만의 군사훈련 사실을 알아냈다. 주미 일본영사관에서 미국의
국무장관에게 한국인의 군사훈련에 대해 항의했다. 미국 당국은 하와이 총독에게 박용만 일파가
불법으로 무기를 소지했는지 어떤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박용만이 무기 불법소지 문제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때 이승만이 증인으로 나와, “박용만이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사학교를 설립하고, 일본
군함이 하와이에 도착하면 파괴시킨다는 음모를 꾸미는 등 위험한 배일(排日) 행동을 획책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 사변을 일으켜 양국간 평화를 깨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박용만이
유죄판결을 받아 몰락하고 이승만이 하와이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승만은 찬란한 변신술과 능란한 처세술을 가진 사람이었다. 돈을 밝혀 독립운동자금을 거둔다며 교포들의
돈을 우려냈다. 우려낸 돈은 미국 정계에서 활동하는데 사용했다. 미국은 돈이 최고인 자본주의
국가이다. 이승만의 미국정치계, 교포사회에서의 위상이 나날이 올라갔다. 그는, 교포들로부터 돈만
밝히는 협잡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재미 교포사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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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미국 망명시절의
이승만
우남 이승만(1875∼1965)은 오늘의 한민족과 한반도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문제의
정치인이었다. 그의 민족노선에 힘입어 영화와 부귀를 누린 사람도 있었으나 그의 분단노선으로 이
민족은 백범(白凡)이 우려한 대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오늘날까지 분단은 그대로 지속되고
있으며 핵전쟁의 위협까지 받게 되어 남북 6천만 민족의 생존이 중대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그간
국시(國是)인 민주주의는 수난 속에 신음하며 고난의 길을 걷고 있고 평화로운 통일 조국의 건설은
한낱 꿈처럼 민족의 비원(悲願)이 되고 만 것이 오늘 우리의 민족적 현실이다.
이승만에 대한 시비(是非)는 오늘날도 구구하다. 아직도 그의 정치노선은 현실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의 노선을 비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나 벌서 한 세대가 지났고 미군정하의 기밀문서도
공개되는 시기가 되었으므로 그의 노선이 비판의 대상이 되어도 무관할 것이다.
이승만은 청년 시절부터 벼슬을 하고자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그때마다 낙방을 하고 그나마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과거제가 없어져 벼슬길이 사라지자 하는 수 없이 당시에 한창 밀어닥치던
개화바람을 타고 배재학당(培材學堂)에 들어가 영학(英學)을 배우게 되었다. 고집이 세고 완강한
그는 독립협회운동 때 벌써 상당한 비중으로 개혁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결과
그는 한때 옥고를 겪었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미국의 도움을 얻고자 태평양을 건너갔으며 이때부터
이승만은 독선과 고집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1911년부터 8·15를 맞는 1945년까지 35년간의 긴 세월을 주로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물론 그가 긴 망명기간 동안 일부 인사의 경우처럼 도중에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항일의
자세를 견지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될 수도 있으나 35년간의 망명생활에서 그가 보여준 몇가지 특징은
이미 한 민족의 지도자로서 앞으로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독립협회운동
당시 이승만의 동지로서 그와 함께 옥고를 치르고 후일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한 바 있는 박용만은 하와이 시절의 이승만에 대해, 이승만이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행동으로는 작당과 몽둥이질을 일삼아 자기의 조그마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정력을 소비하는 문제의
인물임을 경고한 바 있다. 이승만은 자기가 한인 운동단체의 '장'(長)이 안되면 못 참는
인물이었으며 또 누구의 충고나 여론 같은 것에 상관없이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는, 지나치게 독선적
인물로 알려졌으며 또한 그때부터 이미 반공주의자(反共主義者)로서 두드러졌다.
이승만은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한국인 사회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불화·반목·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자기와 적대관계에 있는 한인을 용공분자(容共分者)로 몰아붙이는 사람으로 그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당시 미국무성의 일부에서 신임을 얻고 있던 한길수와 제휴할 것을 종용받자 이승만은
한길수와 합작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엉뚱한 주장을 하여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으로 하여금 루즈벨트에게 "한국인은 너무 분열도가 심해 효과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보고를 하게 한 바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으로 당시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임정을 연합국의 한나라로 인정받도록 이승만으로 하여금 미국무성에 교섭케 했으나 미국무성이 이승만을 전혀 상대조차 해주지 않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 창립준비가 연합국 사이에서 시작되자 이곳에 많은 한국인
지도자들이 독립문제를 협의코자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서는 벌써 장차 독립 한국정부를
공산주의자와 연립하여 세울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정부 요직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하여 독립도 하기 전에 벌써 자리다툼을 하는 듯한
인상을 샌프란시스코에 와 있는 외국지도자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참 정치적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8·15 직후 서울은 좌익의 장악 속에 있었고 미군 당국은 이들 좌익과 대항하기
위해서 반공으로 이름난 이승만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간 철저히 무시하고 상대조차 않던
이승만을 맥아더 장군의 지시에 따라 갑자기 한국 민족의 영웅으로 대접하게 되어 이승만은 거의 힘 안 들이고 민족의 지도자로서 민중 앞에 군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미극동정책의 필요에 따라 한국 민족의 영웅으로 환국하게 된 것이다. 36년간 식민통치하에
신음하는 국내 민중과 사실상 연락이나 유대가 없었고 따라서 일반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영웅으로 추대되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승만의 행운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유리한 여건 속에서 이승만의 환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③ 미 군정의 정치적
입장
1945년 9월 8일 한국에 진주한 미주둔군, 즉 미군정은 다음해인 1946년초까지 서로 모순된 두 가지
정책노선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공식적으로 이행한다는 방향이었고 또
하나의 방향은 남한에서의 모든 권익들을 기정사실화한다는 다분히 국가이익에 충실한 길을 일관성 있게
추구하고 있었다. 전자는 국제적인 가치고, 후자는 국가이익에 충실하려는 가치였다. 한편에서는
통일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미·소공위를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미군정의 기득권을 기정사실로서
만들고자 하였다. 1946년 조지 케넌의 대공봉쇄이론(對共封鎖理論)의 제창과 함께 미국의
대한정책은 미·소 공위 문제에 있어서도 서서히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쟁중
소련과 협조관계를 유지하려고 한 루즈벨트 정책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초 미국은 2차 대전중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문제를 제의한 바 있었다. 따라서
전후 한국문제의 처리를 논의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도 미국은 한반도를 신탁통치하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전시에 미국이 한반도를 신탁통치하자고 주장했을 때 소련은 오히려 한국에 지체 없이
독립을 부여하자는 의견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1945년 11우러 당시 주소 미국대사였던 해리만은
본국 정부에 보고하기를 소련은 한반도문제에 있어 신탁통치 실시여부 문제에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
있으나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차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 바 있다고 보고한 일이 있었다(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해리만은, 소련이 이와 같은 한반도 정책을 주장하는 까닭은
한반도에 소련에 우호적인 국가가 서야만 소련으로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 보다 강력한 발언과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한반도를 어떤 형태로든 국제 신탁관리하에 둔다면 소련으로서는 더욱 불리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
때문이라고 보았다. 해리만은 이같은 판단하에 미국이 한반도에 신탁통치 실시를 주장하는 것이
국가이익상 바람직스러울 것이라고 보고 했다. 왜냐하면 한반도를 국제적 신탁하에 둔다면 소련은
3개국이나 4개국 중의 한 나라로서 3분의 1이나 4분의 1의 발언권밖에 행사하지 못한다고 본
때문이다.
소련이 한반도에 대해 어떤 유리한 발언권을 행사하려면 한반도가 미국에 발언권이 있을 신탁통치하에서보다
한반도가 독립된 나라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에 양보한 것은 일종의 타협의 결과이거나 얄타 정신에
따른 것일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반도를 신탁관리하에 두는 대신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특수권익에
대해 미국의 양보를 얻어내자는 속셈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미국이 한반도에 대해 품고 있던
신탁통치안은 5년간으로 되어 있으나 필요하다면 다시 5년간을 더 연장할 수도 있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미국의 신탁통치정책 지지의 이유는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일방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저지하자는 데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미군정의 공식문서에 의하면 한국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노력의 기준은 많은 한국인들의 환심을 사거나 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기보다 질서 있고 효율적으로 운영되며 정치적으로 미국에 우호적인 나라를 세우는 것, 이것이
미국으로서는 더 필요했던 것이다.
또 다른 문서에 의하면, 미국이 한국을 점령한 것에는 표면상 내세운 것보다도 더 근본적인 목표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즉 더 중요한 근본 목표는 한반도의 안보를 군사적으로 점령함으로써 다른 어던
강대국도 한국에 있어서의 정세를 전단적으로 좌우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미국 정부는 전시인
1943년 이래 한반도 전체가 만약 고스란히 소련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미국의 안보가 부닥치게 될
위험을 강조해왔다. 물론 이러한 대한 기본전략은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정책과는 대치되는
노선이었다. 미국무성 안의 일부 국제주의자들은 점령군 당국의 위와 같은 정책을 반대해왔던 것이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이같이 극동에 있어서의 미국의 대소전략에 의해 결정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내에서도 이 정책을 적극 뒷받침해주는 세력이 있었다.
주한미군의 진주 후의 군정사를 살펴보면 이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를 발견할 것이다.
첫째 미국과 일제총독부 당국과의 의외로 빠른 접근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미8군이 1945년 인천에
상륙할 때 인천시민들이 미군 상륙을 환영하기 위해 해변가로 접근했으나 미군의 지시로 이들을
저지하는 일본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했다. 이것은 한국인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은 서울에서 하지 중장이 기자들에게 인천에서 일본인들이 질서를 유지하는
데 협력해준 것을 치하한 것이었다.
부두에서 우리를 환영하려 드는 한국사람들의 집단에 일본인들이 발포한 것을 포함해서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일부 충돌사건이 있었다. 나는 상륙작전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민간인들의 접근을 금하도록 명령한 바
있다. 묘하게도 많은 미국인들은 한국에 진주한 처음부터 한국인보다 일본인을 더 좋아했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협조적으로 질서를 잘 지키고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반면 "한국인들은 성급하고
제멋대로이고 다루기 힘들다"고 본 것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아무리 살기를 품고 싸움을 하다가도
일단 싸움에 졌다고 항복을 하면 그 순간부터 철저히 복종하고 아부·아첨까지 하는 것이 그들의
국민성이기 때문에, 전쟁에 일단 항복하자 그토록 증오하고 욕설을 퍼붓던 진주미군에 대해 하룻밤
사이에 아첨과 아부를 일삼고 그들의 환심을 사고자 일본인 특유의 기질을 발휘한 것이다. 따라서
미군정 당국은 일본인들을 해임하고서도 그들을 비공식 고문으로 불러들여 여러 가지 자문을 구했다.
일본인들은 진주 초기의 미군 당국의 가장 주요한 거의 유일한 정보 제공자였다. 일본인들은 8·15후
10월까지 3백50종에 달하는 각종 정보를 영문으로 작성하여 제출했다.
아무튼 하지 중장의 미군정은 서울에 진주한 지 불과 며칠 만에 한국 민주당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것은 그후 미군정이 다른 정당을 보는 관점에 결정적 영향을 주게 되었다. 한 기록에 의하면 9월
10일 한민당을 대표한 2명, 즉 '조' '윤'씨 등이 군정청 관리들을 만나 "소위 인민공화국은
일본에 협력한 일단의 친일분자들에 대하여 조직된 것이며 여운형은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분자로 잘
알려진 사람"이라고 말했고 그후 10여 일간 미군정 관리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인사들은 거의가
한민당계 사람들이었다.
일본인들도 8·15이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공이 공산주의자 집단이라고 말하였다. 한민당은 살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한 미국측 자료는 한민당을 평하여 "일반 대중의 지지도 없었고 인공과 같은 조직의 솜씨도
갖추지 못했던 그들은 이조시대 당파싸움의 전통적 수법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평했다.
이 문서는 "한민당에 일본의 전쟁노력에 협력하여 반미연설을 한 인사들이 많다"고 했다. 이들은
미국의 정책적 변수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읽고 재서 미군정 당국이 듣기를 원하고 믿기를 원하는
바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고 했다.
한민당이 간부들과 자주 접촉한 당시의 G. 2 책임자 세살니스트 대령은 한민당이 "저명하고 존경할 만한
사업가요, 지도자이며…… 자격이 있고 덕망이 있는 보수주의자의 대다수를 포함한 정당"이라고
평하였다. 당시 한민당이 미군정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당이었나를 이 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당시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인 H. 메럴 베닝호프가 워싱턴에 보낸
초기 보고서에는 한민당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정치정세 가운데에서 가장 고무적인 한 가지 요인은 나이 들고 교육수준이 높은 층에 속하는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서울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비록 일본인들과 함게 일한 사람들이지만 그같은
비난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이 보고서는 당시 대부분의 주한미군 고위간부들의 견해를 정확히 반영한 것이었다.
주한미군의 이같은 한민당 편향정책은 미국무성 안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공식기록에 의하면 1945년의
마지막 3개월 동안 미군정은 약 7만 5천 명의 한국인을 고용했는데 그 대부분은 일본치하의
옛관리들을 그대로 종전의 자리에 앉힌 것이었고, 고위직에 대한 인사는 거의 한민당이 제공하는
정보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한 예로 경찰 총책임자 조병옥의 임명은 한민당의 송진우가 추천한
것이며 조병옥 자신이 한민당원이었다. 수도청장 장택상도 한민당계였고 수도청장이라는 자리는
경찰에서는 조병옥 못지 않게 중요한 자리였다. 경찰간부들의 대부분은 과거 일본에 협력한, 그래서
친일파로 규탄받고 있는 사람있다. 그러나 미국측 경찰책임자 윌리암 매크린은 친일경찰관의 재임용에
비난이 높자 이렇게 응수했다. "만약 그들이 과거에 일제를 위해 일을 잘 했다면 그들은 우리 미국을 위해서도 일을 잘해줄 것이다."
미군정청 경무국 수사국장으로 있던 최능진은 1946년 11월 20일 군정당국에 제출한 한 보고서에서
"경찰이 일본인 밑에서 그들에 협조한 전직 경찰관과 민족반역자들의 피난처가 되고 있다"고 당시
경찰의 내막을 폭로 비난하고 있다. 최능진은 친일인사의 채용문제를 둘러싸고 조병옥과 사사건건
싸웠다. 그는 "군정청 경찰부는 썩어빠졌으며 민중의 적이다. 만약 사태가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인의
80%는 공산주의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와 같은 보고서를 제출한 후 그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1948년 이승만과 국회의원 경쟁후보로 나섰다가 이승만 정권의 미움을 사서 결국
1952년, 전쟁중에 처형되었다.
국방경비대 창설에 있어서도 미군 당국은 일제 때 징역살이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자격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항일투사는 국군 장교가 될 수 없었다. 하여간 하지 중장과 그의 고문들은 좌익에 대한 반대투쟁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집단이나 인사고 그 배경을 가리지 않고 모두 포섭했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애로가 따랐다. 그것은 애국자들은 친일파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친일협력자들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조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친일협력자들은 미국인에
의해 어느새 '민주주의자'로 변신해 있었다.
④ 귀국 후 이승만의
태도
이승만이 귀국하기 전의 한국 정세는 대체로 이와 같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남한에서 좌익을 견제하는 데
이승만의 반공정신과 그의 권위가 하지 중장에게는 매우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이승만의 조속한
귀국을 한민당은 여러번 군정 당국에 요청하기도 했었다. 이리하여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맥아더가 주선한 비행기를 타고 동경을 경유해 서울에 도착했다. 하지 중장은 이승만이 동경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만나러 동경까지 가서 맥아더 장군과 3인 회담을 가졌다. 이승만은 미극동사령부를
위해 좌익과 대항하여 그들을 견제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1945년 10월 중순
이승만이 오랜만에 귀국했을 때 그가 가질 수 있었던 최대의 장점은 한국사람 중에서 그에 관해
다소라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는 나라가 일제에 망할 때부터 항일투쟁을 한 몇 안되는 독립운동의 대선배라고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가 얼마나 고집불통이고 자기중심적이고 그래서 그가
가는 곳마다 말썽이 일지 않는 곳이 없는 문제의 인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그는 미국에 머물고 있을 때부터 자기 생활을 위해 직장을 갖거나 다른 돈벌이 생활을 한 적이 없는
인물이다. 이승만의 생활비는 재미동포들이 마련해주는 돈으로 충당했다.
이승만은 귀국하자마자 공산당은 물론이고 여운형 등까지와도 대립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정치인, 정당들은
단결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좌익과는 대항적 자세를 가졌기 때문에 좌익에서는 그가 정치적
단결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친일파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술책이라는 비난을 하고 나왔다. 한민당에서는
자기네들에게 애국정당으로서의 정통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이승만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이승만이 귀국 후 국민에게 단결을 호소할 때 친일파를 숙청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었다. 이러한 여론에 대해 이승만은 먼저 단결을 한 다음 친일파를 숙청하는 것이 좋겠다는
주장이었다. "지금은 바쁜 때이니 그들을 처단할 수는 없지 않소"라고 말하였다.(『우남실록』).
이승만의 이 말에는 다소 모호한 점이 있었다. 즉 단결을 하는 데 있어 지금은 바쁜 때이니 친일파 애국자
가릴 것 없이 우선 단결한 다음 단결된 그 속에서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을 가려내 숙청하자는 것인지
단결을 하되 그 단결은 친일반역자를 제외하고 애국자만이 단결하고 반역자는 지금은 시기가 바쁘니까
후일에 숙청하지는 뜻인지 애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양심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이승만의 이러한 태도가
친일파를 감싸기 위한 술책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으나 이승만은 친일파를 끝내 숙청하지 않고
감싸돌았다. 이승만의 본심은 후일 반민특위 해산에서 여실히 드러났지만, 만약 이때 이승만이 여론의
방향을 존중하여 그의 주도하에 애국자 단결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더라면 이승만은 능히 민족의 유일한
지도자로서 추앙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승만이 친일파를 숙청하라는 빗발치는 여론 앞에서
그들을 감싸고 돈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한 하지 중장의 증언이 참고가 될 것이다
이승만은 한국에 돌아온 후 얼마 안 있어 일부 재산 많은 부유층의 영향을 받는 몸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일제 밑에서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에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하지 중장의 말은 이승만이 귀국 후 친일 기업가들한테서 적시 않은 정치자금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커밍스는 "이승만은 그들의 기부금을 받는 대가로 장차 민족주의 정권이나 공산정권이
들어설 경우 일제에 협력했다는 죄로 재산을 잃게 될지도 모를 그런 계층의 사람들을 보호해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유한 계층의 집단인 한민당과 그들의 산하에
있던 경찰까지도 자기 수중에 두게 되었다. 이승만이 한 일은 1927년 장개석이 상해의 은행가
집안과 정략결혼한 것과 비슷한 성질의 것이었다."고 했다.
미군정이 자기들 나름대로 개혁을 추구하던 시기, 즉 1945년 말까지의 기간에 미군당국은 한민당계의
사람들이 군정청의 요직에 앉아 있는 한, 그들의 반대에 봉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한 이를테면 농지개혁에 대한 의욕같은 것은 차츰 미온적으로 되어버렸고 일련의
개혁안들은 아무런 결단 없이 미루어졌다. 한민당은 당초에 재산 있는 친일파들에 의해 구성되었을뿐
아니라 친일기업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당시 대표적 사업가 박모씨로부터는 2백만 원과 지주
김모씨로부터는 5백만 원의 정치자금을 받은 바 있다고 미정보기관의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⑤ 이승만의
통일노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발표된 직후 하지 중장은 송진우를 만나 모종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회담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하지 중장이 후일 말한바에 의하면 송진우는 동지들에게 자기는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좀더 슬기롭게 대처할 생각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것은 바로 다음날
새벽이었다. 12월 30일 하지중장은 백범이 발표한 반신탁성명의 내용을 등경의 맥아더 원수에게
전하고 이 반탁성명서를 다른 관계국에 전달해줄 것을 요구했다. 한편 좌익에서는 하지 중장이 우익의
반탁운동을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처음 한때는 신탁통치는 전적으로 소련의 주장에 의해 합의된 것이라는 설이 떠돌았다.
『한민당특보』(1946. 1. 10)는 일면 톱으로 "소련은 신탁을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고 발표했고 이승만측의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도 발표한 결의문에서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
번즈 국무장관, 맥아더 원수, 하지 중장은 모두 한국의 즉각 독립을 주장하고 신탁을 반대하고
있으나 국무성 안의 일부 용공분자들이 소련에 동조하여 신탁을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여간
우익진영에서는 이 반탁운동을 통해 전면적인 반공·반소운동을 벌였으며 이로써 우익진영에서는 처음으로
자기들의 정치목적을 위해 대중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지난날의 부일협력자들과 극우세력은 미·소 합의에 의한 통일 임시정부하에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본 것 같다고 커밍스는
분석하고 있다. 이승만측은 반탁운동을 통해서 미·소 관계를 크게 악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1946년 1월 하순,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한국문제 결정을 놓고 중대 위기에 빠졌다. 그것은 국내의
반탁운동만이 아니라 트루만 대통령 자신이 삼상회의 결정에 불만이었기 때문이었다. 트루만 대통령은
앞으로 한국에 강력한 중앙정부를 수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 중장과 그의 보좌관들도 한국문제에
있어 소련과 공동으로 신탁통치를 하거나 또는 다른 문제에 있어 협조가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도 진주 초기부터 일방적으로 남한을 친미기지로 굳히는 일을
서둘렀다.
하지 중장의 한국문제 해결책이란 이승만과 같이 분단정부를 세우는 일이었다. 하지 중장이 후일 시인한
것처럼 그는 모스크바 협정의 회담석상에서도 남북한의 영원한 분리를 위해 일할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자아내게 했다(같은 책). 이승만은 소련이 전한반도를 손안에 넣을 기회가 보이지 않는다면
결코 38선을 철폐할 의도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소련이 남한에 발을
붙이게 되면 그것은 결국 소련에 남한 전역을 넘겨주는 결과가 올 것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리고 만약 신탁을 받아들인다면 소련과 공산당이 전한국을 쉽게 지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승만은 소련과의 협상이나 좌익과의 연립정부가 결코 한국의 자주독립정부를 세우는 길이 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우남실록』). 그러므로 이승만은 우선 남한만이라도 굳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정읍에서 남한단정의 불가피성을 말한 이승만의 발언은 이러한 정치적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이미 미·소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있는 한반도의 상황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남한만이라도
우선 확보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통일정책을 구상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통일노선은 그것이 미·소의 협조가 아닌 대립을 전제로 한 것인 이상 통일은 실현 불가능할 뿐
아니라 결국 통일을 위한 일시적 분단이 아니라 분단을 영구화 하는 지극히 위험한 생각이었다. 그의
분단노선으로 해서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오히려 분단이 더욱 심화되고 있음은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다.
그리하여 한독당에서는 이승만의 단정담화가 발표되자 이를 즉각 반박하고 "요즘 항간에는 단독정부수립설이
유포되고 있으나 우리 당으로서는 이에 찬성할 수 없다. 38선의 장벽이 연장되는 한 경제적 파멸과
민족이 격리되어 역사적인 큰 비극을 자아내게 되고 민족통일에 큰 방해라 아니할 수 없다. 장래에도
이 사태가 그대로 계속되는 때에는 한민족 자체의 생존을 위하여 그대로 방관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미·소공위가 결렬되기 전부터 이승만이 단정을 꿈꾸고 있었음은 위에서도 이미
밝힌 바 있거니와 한민당은 한독당과는 달리 선전부장 함상훈을 통해 "이승만 박사의 민족통일기관
설치 운운의 연설을 일부에서는 무슨 역적질이나 한 것같이 선전하나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이승만의 단정노선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남한만이라도 우선 정부를 세운 다음 남북통일운동을
한다는 이승만 통일노선은 당초부터 공산당과는 연립정부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기본자세였으므로, 그의 지도 아래 통일을 하려면 소련과 북한공산당을 박멸한 후에나 가능한 일로서 이승만의 통일조선은
현실적으로는 영구분단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국내의 정세를 배경으로 그의 미국 방문은 이루어졌다. 1946년 12월 국민들이 거두어준
거금을 가지고 미국을 방문했으나 유엔 총회 의장 폴 알리 슈파크가 면담을 거절하는 등 실질적인
어떤 외교적 성과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때 그를 크게 환영하고 잦은 접촉을 가진 것은
미국의 대재벌들이었다. 이 무렵 이승만은 하지 중장과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승만은 하지가
공산당을 지원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비난하였다. 하지는 미·소공위의 성공을 한때 기대한 일이
있었고, 그래서 좌우합작을 위해 여운형·김규식을 중심으로 합작할 것을 지원한 일이 있었다.
이승만은 김규식에게 합작을 위해 노력할 것을 한편에서는 당부하면서 한편에서는 이 합작운동을 좌익에 동조하는 행위라고 비난하였고 이같은 합작을 지원한 하지까지도 비난하였다.
김규식은 이승만한테 합작을 위해 노력해보라고 권유받았을 때 이승만이 자기를 '합작'이라는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 떨어지게 하려는 속셈이라고 이승만의 검은 마음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을
위한 옳은 길임을 믿기 때문에 그 길을 걷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니나다를까 이승만은 미국을
방문하면서 미군정이 용공정책을 펴고 있다고 맹렬히 비나했다. 특히 이승만은 1947년 1월 25일
발표한 성명에서 "하지 중장이 좌익에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서 공산당 건설과 이에 대한 원조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고 미군정관 하지 중장을 신랄히 공격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소 공위의
재개를 앞두고 국내에서 다시 반탁운동의 불이 붙자 여러 차례에 걸쳐 국내에 전보를 쳐서 반탁운동이
너무 치열하면 미국의 비위를 거스를 우려가 있으므로 자중해주기 바란다는 지시를 했다(같은 책).
찰즈 알렌의 평대로 이승만은 미국인 이상으로 미국이 극동에 대해 품고 있는 여러 정치적 야만을
때로는 그들의 뜻을 어겨가면서까지 충실히 지켜온 철저한 친미정치인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머물러
있는 동안 주로 캘리포니아주 출신의 윌리엄 놀랜드, 오하이오주 출신의 로버트 타프트, 아더
반덴버그 등 극단적인 반공주의 의원들과 사귀었다.
그의 체미중 그가 미국의 대재벌들과 접촉이 많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승만을 초청한 재벌 속에는
록펠러, 모간, 그로버 월렌, 화이어스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같은 책). 미국의 재벌들은
무엇보다도 후진국인 한국이 장차 그들의 경제적 진출을 위한 '시장'이 되어주기를 원했고, 그런
점에서 한국이라는 시장을 미국이 지켜줄 것인가가 미국 재계에서는 큰 관심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이들 미국의 군부와 재계는 이승만의 철저한 반공주의에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은 서로의 이해관계의 일치 때문에 아주 쉽사리 접근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1947년 5월 21일 재개된 미·소 공위는 그것의 협의대상 문제로 다시 결렬되고 말았고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시키려 했다. 이 무렵 미국은 2차 대전 후 한때 조용하던 대소(對蘇) 강경정책으로
전환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1차 미·소 공위 때는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찬탁이냐 반탁이냐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1947년 중반부터는 '찬탁이냐 반탁이냐'가 아니라 '반탁을 통한 남한
단정이냐' '찬탁을 통한 남북통일이냐'의 문제로
변질되었다.
지금까지 반탁에 대해 가장 앞장서 반대한 것은 김구였다. 김구는 2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켜온
자주성이 강한 민족주의자였으므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국은 당연히 임시정부가 통치권을 그대로
인수해야 한다고 기대했었다. 임정 요인들이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올 때 미국은 임정을 승인하지
않고 임정 요인으로 입국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므로 김구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꼈으나 참고
귀국했다. 해방된 마당에 신탁통치란 명분으로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고 따라서 김구를 비롯한 임정계
민족진영이 신탁통치를 가장 앞장서 반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구는 이승만이 자기와 같이
반탁을 하고 있으나 반드시 자기와 생각이 같다고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김구는 이승만이 자기보다
나이가 몇 살 위이고 또 국제적 경험도 많은 선배로 대접하여 이승만을 언제나 '형님'으로 예우했다. 이승만이 독립정부 수립이나 반탁문제에 있어 자기와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될 수만 있으면
이승만과의 대립이 표면화되는 것을 피하고 언제나 공동보조를 취하는 양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구는
반탁은 민족 자주5정신의 발로이므로 미·소공위가 한국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반도문제의 해결, 즉
통일전부 수립문제는 당연히 민족자주정신에 따라 남북 민족대표가 만나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김구가 품고 있는 민족자주정신에 의하면 반탁이 남북지도자의 협상으로 발전하는 것이 민족자주정신의
당연한 논리적 발전이 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 방문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일주일 후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그의 환영대회에서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다. 이번 도미외교에 있어 우리가 성취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첫째로 세계 정세의 변화에 따라 트루만 대통령의
대(對) 국회연설을 계기로 미국정책이 전환된 까닭이며 둘째로 우리 동포가 이같이 한덩어리로 뭉친
까닭입니다.
이승만은 모든 국민이 자기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고 그래서 이같이 많은 시민이 자기의 도미외교의 성과를
환영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 연설에서 주목할 만한 말을 했다.
남한에 있어서 총선거가 지연되고 미군정이 실패한 까닭은 하지 중장이 공산파와의 합작을 고집한 때문입니다.
나는 좌우합작의 성공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미국정책이 공산주의와의 합작을
단념하였으므로 캄캄하던 우리의 길은 열리었습니다. 우리 동포는 한데 뭉치어 남북통일을 위한 남한
과도정부를 수립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유엔에 참가시킴으로써 자유로운 입장에서 소련과 절충하여
남북 통일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미국정책의 전환에 따라 우리가 미군정과 합작해서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대한 임시정부(김구가 주석으로 있는
망명임시정부)의 법통을 고집할 필요가 없으며 이 문제는 보류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평범한 연설 같으나 이승만은 매우 놀랍고 중대한 정책전환을 밝힌 것이다. 즉 그는 미국정책의 전환에 따라
단독정부 수립의 절차를 빨리 완수하는 일만이 남아 있다고 역설하였으며 노골적으로 자기는 처음부터
좌우 합작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고 공언하기 에 이르렀다. 그가 김규식에게 좌우합작을 위해 일해
달라고 재촉하면서 김규식에게 50만원의 돈까지 준 것이 얼마나 음흉한 술책이었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임정의 법통을 더 이상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임정을
강화하여 자율정부 수립을 서두르고 있던 김구의 활동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로 나왔다. 이승만과
거의 같은 무렵 역시 본국을 방문하여 한국문제를 협의하고 돌아온 하지중장도 도착성명에서 "만약
미국이 소련의 협조를 얻지 못한다면 미국은 단독적으로 책임을 수행할 것이다." 라고 단독정부 가능성을 비추며 소련 측에 공개 속개를 요구했다.
한때 성공될 듯이 보이던 제 2차 미·소 공의가 협상단체의 자격문제로 다시 결렬되게 되는 등 난항을
거듭했지만 2차 공위가 속개되었다. 그리고 공위가 성공될 듯한 분위기가 조성되자 이제까지 반탁에
열을 올리던 한민당이 공위 참가로 태도를 표변하여 그 후 우익진영에서 많은 정당·사회단체들이
한민당을 뒤따라 공위의 협의 대상이 남한에서 만 4백 25개 단체에 구성원 수가 5천 2백만 명에
달하는 기현상을 빚었다. 남북을 합쳐도 3천만이 겨우 넘는 당시의 인구로 보아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한편 한민당의 이같은 표변에 대해 이승만이나 김구는 크게 노했고 이승만이 후일 정부수립때
한민당을 배제한 이유도 바로 이같은 한민당이란 믿을 수 없는 집단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때문이라고
한다. 예상과는 달리 2차 공위도 협의 대상문제로 벽에 부닥치게 되어 마침내 결렬되고 미국은
한국문제를 그해 9월 17일 유엔에 상정했다. 그리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 실시 전에
미·소양군이 다같이 동시 철수하여 한국인이 자신의 정부를 수립토록 하자는 대안을 제출했으나 당시
유엔은 미국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으므로 미국안이 약간의 수정을 거친 후 43대 9, 기권 6으로
가결되었다.
이와 같은 사정하에서 미국결의안 소련의 동의를 얻으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김구는
한국문제 토의에 한국대표가 참석하지 못한 것에 유감의 뜻을 표시하고 유엔은 소련이 38선 입북을
거부한다고 그것은 남한단정의 구실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유엔에서
한국문제를 다루게 되었다는 것이 알려지자 유엔한국위원단 대표들이 도착하기 전에 선거를 하루빨리
실시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을 했다. 이승만은 유엔 한위위원들이 서울에 와서 만약 김구나 김규식
같은 인사들과 이야기하고 혹 그들의 영향을 받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즉
"유엔 위원들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승만의 염려하는 바였다. 이에 대해
백범은 "이박사가 도미하여 단정운동을 할 때에는 표면으로만 말 안 했을 뿐 동지들에 대해서는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고 밝히면서 "이승만박사가 돌아오면 친히 만나서 그것을 만류하겠다."고 하면서 자기는
"이박사와 충돌해서 그것이 표면화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김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호소했다.
무엇보다도 슬프고 딱한 것은 이박사가 다시 나오지 못할 함정으로만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박사를
포위하고 있는 세력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며 그 종국이 어떠한 것이 될것이가에 대해서는 이박사를
아끼고 국가의 전정을 염려하는 사람으로 이것을 모르는 이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하다가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유엔 위원단이 오기전에 이박사를 붙들고 그의 번의를 위하여 마지막 정성을
다하려고 합니다…….
이승만과 김구의 노선이 서로 어떻게 다르고 그들이 서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가가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
유엔 한국위원단은 1948년 1월 12일에 한국에 도착하여 활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좌우익의 지도급
인사들을 만나려고 했으나 좌익은 이미 거의 지하에 잠입해 만날 수 없었고 이승만·김구 등이 그들과
만나 각각 의견을 교환하고 위원단에 의견서도 제출했다. ……우리는 1년 전부터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과도정부를 수립해서 유엔을 통하여 세계 공의에 호소하기를 역설하였다.…… 미군정에서는 중간파를 후원해서 공산분자가 다시 활약할
기회를 얻게 되므로 전민족이 우려공포 중에 있는 터이므로 오직 바라는 바는 유엔 위원단이
과도선거를 허락하여 3,4 주일 내로 민선대표단을 성립하여 협의공결을 주장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루바삐 남한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3분의 2이상의 인구를 가진 남한에서 통일정부를 수립하여 그
정부를 원조해서 국권과 강토를 먼저 회복시켜 평화를 보장시켜야 한다.
이것은 대체로 이승만이 유엔 위원단에 제출한 의견서였다. 이에 대해 김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나는 남북을 통한 총선거로 통일완전자주정부의 수립만을 요구하며 현 미군정의 연장이나 또는 남한단정은 절대
반대한다. 남북한은 모든 정치범을 석방해야 하고 미·소군은 즉각 동시에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유엔이
한국의 치안을 담당하고 한인은 완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 그리고 남북한
지도자회의가 열려야 한다. 소련군뿐 아니라 미군까지도 철수해야 한다는 김구의 주장은 미국의
영향력에 힘입어 단정노선을 추구하고 있던 한민당 등으로부터 그것이 소련안과무엇이 다르냐고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한민당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한국 독립정부수립대책협회'는 김구를 소련의 대변자라
격렬히 비난하고 난 다음 "우리는 앞으로 김구 씨를 조선민족의 지도자로서 보지 못할 것이고 소련의
한 신자라고 규정지시지 않을 수 없다"고까지 공격하였다.
그러나 인도 대표 메논을 비롯해 프랑스·캐나다·시리아 등 5개국 대표는 오히려 김구의 통일노선에 관심을
보였다. 이에 당황한 이승만은 당시 이승만을 적극 따랐던 모윤숙을 불러 무슨 수를 쓰더라도 메논
대표의 마음을 사로잡으라고 엄명을 내려 이 여류시인은 밤에 메논을 찾아간 것을 시작으로 여러 번
그와 단둘이 접촉을 거듭한 끝에 메논을 완전히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표로 만들고 말았다. 후일
메논은 이때 자기가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다는 것을 한 회고록에서 고백했다(송남헌,『해방
3년사』).
⑥ 이승만의 통치와
과오
유엔에서 실시하는 총선거는 그것이 남북총선거가 아니라 처음부터 남한 단선이 된다는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리고 남한 단선에 있어 치안을 담당한 경찰은 한민당의 영향 아래 있는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한민당은 선거를 앞두고 인권유린을 막기 위해 유엔 위원단의 요청으로 성안된 개정 형사
소송법의 실시를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경찰을 보조하기 위한 '향보단'이 전국 촌락에 조직되어
단선의 반대는 물론 선거 보이코트도 할 수 없게 엄중 감시했으며 이승만은 자기 선거구인 동대문
갑구에서 출마한 최능진을 방해해서 출마를 못하게 하고 후일 최를 학살하였다.
선거는 96%의 투표일을 보였다고 발표되었고 이승만은 "모든 동포가 건국정신으로 이와 같이 애정을 나타낸
것은 깊이 감사하며 마지 않을 일이다"고 만족해하면서 마침내 미군정 3년간의 통치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았으나 정치·경제 ·사회·문화는 극도로 혼란되고 부패는 만연되고 있었다. 미군정 3년간,
1945년 8월 15일을 100으로 칠때 1948년 9월 군정이 끝날 무렵 통화발행고 지수는
506%로 팽창했고 물가지수는 같은 기간에 1,060%로 10배 이상 폭등했으며 정부는 262억
2천 4만 원의 부채를 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권을 이양받은 이승만은 성안중인
농지개혁법이 한민당에 의해 지연되어 명무실하게 된 것을 방치했고 농민에게 불리한 '양곡도입법'이 제정 공포되는가 하면 '반민처벌법'이 온갖 방해 속에 겨우 제정 공포되었으나 특위의 행동이 개시되자 특위 습격을
지시하여 '특경대'를 해산시키고 결국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김약수 부의장 이하 13명의 국회내의 반대파인 '소장파 의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했고(국회
푸락치사건), 단정을 반대한 김구를 암살하고 김구와 동조한 각 정당,
한국독립당·민족자주연맹·사회당 등은 정부 압력으로 사실상 활동이 끊어지고 말았다. 언론에 대해서는
공보처를 통해 7개항의 언론 단속지침을 발표하여 '국시위반' '정부모략' '허위사실 날조'
'국위손상' '자극적 기사로 민심에 악영향을 끼치는 기사' '국가기밀 누설' 등을 금지해 언론의
기능을 위축시켰다. 반대파에 대해 이같은 온갖 탄압을 가하면서도 1950년 5월 30일의 선거에서 이승만계는 여당인 대한국민당이 겨우 24석, 독립국민회 12석, 대한청년당 11석 등 모두 합쳐야 57석밖에 당선되지
않았고 반이승만계는 조소앙. 안재홍, 원세훈 등 거물이 다수 당선되었다.
6·25후 피난지에서 이승만 정권은 갖가지 추태를 연출했다.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사건' '중석불사건'
등, 연이은 의혹사건 속에서 이승만은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로는 대통령에 당선될 가망이 없다고 보자
야당의원 다수를 공산당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구속하고 대통령 국민직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회에서 강제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승만은 삼선금지 조항으로 계속 집권의 길이 막히자 1954년
10월 경쟁자인 신익희를 '뉴델리 회담설' 조작으로 실각시키려 한 한편 같은 해 12월에는 삼선의
실을 열어주는 개헌안이 부결되었는데도 사사오입으로 통과된 것으로 번복하는 전무후무한 횡포를
자행했다. 그 이후에도 김성주 살해,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양당 시국 강연장 테러습격, 진보당수
조봉암의 사형집행(간첩혐의), 보안법파동, 『경향신문』폐간, 3·15 부정선거 강행 등 12년간 집권기간 중 온갖 횡포를 부리다 마침내 국민의 궐기로 추방되어 하와이에서 쓸쓸히 여생을 보내다 1965년 7월 19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용 출처 : 민족문제 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