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생활
2021년 11월 30일 월요일 비
올해는 겨울이 겨울 같지가 않다.
11월의 마지막 날인데도 아직
한 번도 된 추위가 없었다.
오늘은 철없는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봄에 피는 개나리도 철없이
피어나고 있다.
우리가 귀국한 지 올해로 27년 째다.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우리는 1994년8월12일을
여전히 최고의 명절로 기념하고 있다.
매년 8월12일이 오면
나는 어김없이 태극기를 게양한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꿈만 같을 때가 많다.
어느 날 SBS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작가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선생님, 저는 SBS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작가입니다.
선생님을 한번 취재하고 싶어서
이렇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 일로 선생님께 상처를 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여작가님이 너무 소심하게 접근해서
오히려 내가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작가에게 그렇게 구애받지 말고
하실 말씀 다 하라고 했다.
그리고 작가님의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다.
작가님은 너무나 기뻐하며
연거푸 감사하다고 했다.
나는 평생에 많은 실수를 하면서
살아왔다.
이번에도 내가 실수를 했다.
나는 사전에 식구들과 상의를 하고
결정했어야 했는데 그 과정을
무시하고 주관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내와 딸로부터 약간의
질타도 받았다.
그러나 내가 설득시켜 더 이상의
충돌은 없었다.
그리하여 SBS의 플랜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담당 PD께서는 스튜디오에서
취재를 원하신다고 손기자께서
전화가 왔다.
나는 우리 집에도 잠깐 들르면
안 되겠는가고 양해를 구했다.
나는 시청자들에게 우리가 사는
모습을 잠시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입국한 후
많은 분들이 우리 가정의 앞날을
걱정해 주시며 부디 대한민국에
잘 적응하며 살기를 바랬다.
나는 그분들의 기대를 마음속
깊이 새기며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그랬더니 우리같이 아무런 기반이
없는 사람도 내 집을 갖고 살게 되었다.
내가 자랑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는 우리의 사는 모습을 통해
대한민국이 절대로 헬조선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하고 싶었다.
아울러 대한민국이 천당은 아니지만
그래도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지
산 증인이 되고 싶었다.
11월 29일 날, SBS촬영팀이 취재차
우리 집을 방문했다.
나는 잠깐 들렀다 가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PD께서 의외로 관심을 많이
보이어서 촬영하는데 시간이 꽤나
많이 걸렸다.
촬영을 마치고 PD께서는 내 아내와
잠깐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좀 난처했다.
집에 손님이 왔는데 아내라는 사람이
커피라도 한잔 끓여 드려야 하는 것이
예의이지만 아내는 나 몰라라 안방에
들어가서 TV만 보고 있었다.
내가 안방에 들어가 아내를 설득했더니
아내가 의외로 쉽게 수긍했다.
그렇게 PD와 아내의 면담은
촬영 없이 진행되었다.
모든 작업이 순조롭게 끝났다.
우리 일행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민들레 사진관에 도착했다.
설치작업을 마친 후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인터뷰시간이 의외로 길어져서
저녁 8시에야 마칠 수 있었다.
나는 취재팀의 차를 타고 집까지 왔다.
PD가 나를 모셔다 드린다며 14층까지
올라왔다.
실은 PD의 속셈은 아내와 한번 더
대화를 시도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니 아내는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PD께서 아내에게 공손이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아내의 본성이 또 터졌다.
노인네를 데리고 이렇게 늦게까지
다니는가며 PD에게 야단을 쳤다.
아내의 무뢰한 행동에 PD는 말도
걸어보지 못하고 쫓기다시피
집을 나갔다.
내가 엘리베이터까지라도
바래다주고 싶었지만 아내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그러지는 못했다.
아마 PD는 내 아내로부터 평생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이에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마음이 심란하여 오후에 딸네
집에 갔다.
알고 보니 아내가 엊저녁에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을 이미 딸에게
하소연했던 것이다.
아내는 딸로부터 위로라도 받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딸이 엄마를 크게
나무랐다.
"엄마는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요.
아빠한테는 그렇다 치고 집에 온
손님을 그렇게 막 대하면 어떻게 돼요?
도대체 엄마는 왜 그러세요?
엄마의 그런 모습이 나를 너무
속상하게 만든다고요."
딸은 흥분하여 나에게 자기 엄마를
성토했다.
내가
"딸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라.
그래도 이전보다는 많이 좋아지지 않았니.
지금은 욕도 덜하고 집기도 내던지지 않고
테이블도 엎어 놓지 않지 않니.
어제 그 PD에게 욕이라도 했다면
우리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니?"
나는 이런 말로 딸을 진정시켰다.
나는 세상을 살면서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
그중에 아내가 한 번씩 저렇게 이성을 잃고
발작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이 때문에 어제도 무척 힘들었다.
그래도 괜찮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아내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해왔다.
아내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 교육을
받으며 중국에서 성장했다.
이쯤이면 중국인의
만만디 기질도 좀 닮을 법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아내는 한국인보다 더 급하고
더 빨리빨리다.
지금은 24시간이 모두 자기의 시간인데도
빨리빨리다.
혈통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장인어른을 빼닮았다.
1973년 3월에 내가 사촌 누나와 함께
아내가 사는 해림현 묘산(廟山)에 선을
보러 갔다.
아내 될 사람의 아버지는 신장염으로
병석에 누워서 일어나 앉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한 사람의 환자로 인하여
한 가정의 삶은 엉망진창이었다.
다섯 남매들은 밥도 제대로 얻어
먹지 못했다.
장인 될 분(이하는 장인이라 하겠음)께서는
내가 좀 도와주었으면 했지만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장인이 생각해 보니 돈도 없고
성분까지 나쁜 사람에게 자기 딸을
맡길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아내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나를 따르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장모 될 분이 자기 남편에게 딸이 자기가
좋은 대로 하게 놔두라고 했다.
이 말 한마디에 장인어른이 발칵했다.
장인은 곁에 놓인 사발과 접시를 집어서
장모에게 마구 날렸다.
그게 장모님의 이마에 명중되어
장모님이 피를 엄청 많이 흘리셨다.
이쯤이면 혼사는 누가 봐도 결딴난 것이다.
나와 누나는 집으로 돌아오려고
석하(石河) 공사(면)에 있는
버스역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한참을 걸었는데 뒤에서 아내가
오른손에 작으마한 보자기를 들고
헐떡이며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끝장난 줄 알았던 우리의 혼사는
그렇게 기적적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누나네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아내와 함께 목단강(牡丹江)
에 가서 빈수선 (濱綏線)을 타고
할빈(哈爾濱)역에서 내렸다.
거기서 빈주선(濱洲線)
으로 갈아타고 치치할(齊齊哈爾)에
와서 다시 환승하여 강교(江橋)에 있는
직장으로 돌아왔다.
나는 아내와 함께 인사차 중대(中隊)
책임자인 고(股) 간사를 찾아갔다.
내가 사무실에서 먼저 나오고 아내는
계속 남아서 고간사와 면담을 했다.
한참 후에 아내가 우리가 머무는
초대소로 돌아 왔다.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사연은 이랬다.
고간사가 아내에게 정치선전선동을
한 것이다.
"당신은 성분도 좋고 유공자의 딸인데
하필이면 성분이 나쁜 사람에게 시집을
오려고 하느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고간사는 우리의 혼사에
훼방을 놓은 것이다.
우리의 혼사가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런데 이튿날 , 바로 이튿날에
출장을 나갔던 왕중대장(王中隊長)이
돌아왔다.
왕중대장이 사람들로부터 우리의
얘기를 전해 듣고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의 혼사를
승낙하고 축하까지 해 주었다.
자칫 끝장날 뻔했던 우리의 혼사는
그렇게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그리고 왕중대장의 배려로 작은 방
하나를 배정받아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동료들이 우리를 위해 모금까지
해주어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살림살이도 마련하게 되었다.
별로 가진 것 없이 꾸린 신혼살림이라서
그런지 우리의 신혼생활은 남보다
더욱 행복했다.
아내가 나를 만나 제일 고마워하는
것은 신혼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굶주린 적 없이 살아왔다는 것이다.
1973년도 11월에 집단 이주가 있었다.
우리는 성길사한(成吉思汗)농장
5중대에 배치받았다.
살이 에는 날씨에 우리는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달리는 트럭에서 펼쳐지는 언덕은
나무 한 그루도 볼 수없이 황량했다.
아내가 트럭에 흔들리면서 멀미에다
입덧까지 하는 바람에 고생이 많았다.
어렵게 목적지에 도착하여 정부로부터
살림집을 배정받았다.
동네에는 30여 가구와 100여 명의
꽝군(독신)들이 살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우물은
언덕 아래에 있는 우물 한 개가
전부였다.
길이 얼고 미끄러워서 물을 길어다
먹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그곳에 정착한 지 한 달 여만에
이들이 태어났다.
나는 아들의 이름을 동남(東男)이라고
지어주었다.
나는 그 아들을 위하여 자장가도 지었다.
이국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 동남(東男)아
우리나라는요
저기 해 뜨는 나라
그곳은 우리의
어머니 조국
나는야 자랑스러운
조국의 남아로
어서어서 자라라
아...
무럭무럭 자라라
우리의 처한 현실이 그렇게도
열악했지만 나와 아내는
시간만 나면 이 자장가를 부르며
조국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